음. 늦은 낮에 오겠다고 했습니다. 저녁은 낮의 연장선이고, 밤은 저녁의 연장선이죠. 늦은 낮은 맞네요.


개소리고요, 죄송합니다.


일주일 만에 올라오는 거니까, 혹시 설정 같은거 기억 안나시는 분들은 123편 대충 훑어보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온몸의 근육이 저려왔다.


간신히 눈을 떠서 살펴보니, 덩쿨에 묶여서 펼쳐진 내 팔다리와 함교가 보였다.


에버는 함선 콘솔을 만지고 있었고, 나는 클 대자로 벽에 딱 붙어서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고통 때문에 집중은 잘 안됐지만, 내 뇌는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분명 혈청을 맞았는데 어떻게 나를 감전시킨거지?


혈청은 뇌혈관을 타고 퍼지기 때문에, 정신파를 억제하며 의식도 잠시 제거하는게 정상이었다.


기절한 척 하고 내가 무방비할때를 노린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대체 기절하지 않았던 이유가 뭐지?


그런 의문을 가지기가 무섭게 에버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가벼운 미소만을 띄고 있었다. 어딘가 약간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일어나셨네요. 이제 도망치지도 못하시겠죠?"


"너.. 어떻게.."



그녀가 내 말을 끊었다.



"네, 지금부터 전부 말씀드릴게요, 로건?"



명백히 신나하는 표정이었다.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그녀가 바짝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무방비하게 묶여있는 내 팔을 타고 올라와 얼굴에 닿았다.


아! 생각났다. 키득거리며 내 뺨을 쓰다듬는 그녀.


"일단 전, 멜루나에 영향 받은적 없었어요.그래서 혈청은 당연히 효과가 없었고, 의료 구역에서 기절한건 연기였죠.


그래서 당신을 묶어둘 수 있었답니다."


"그 개자식이 가져온 멜루나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다 했었나요?"


"사실 조금 부풀린 거에요, 그거. 돌아버린건 그 한놈 뿐이었어요."


"그럼 나머지 승ㄱㅡ웁"


"당신,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항상 설명하실때 저보고 말 끊지 말라고 해놓고선, 지금 와서 당신이 그러면 안되잖아요?"



뺨을 쓰다듬던 손이 입을 틀어막고, 턱 아래에 테이저건이 고개를 내민다.



"좋아요, 질문 시간은 설명 끝나면 드릴게요. 우리 공부할때도 그랬죠? 한 단락의 설명 끝까지 듣고 질문하기. 아직 기억하실까 모르겠네요."



전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의 눈꼬리가 싱긋 휘었다.



"그래서, 사실 걔가 전부 말아먹은 거에요. 반란때 받은 권한으로 엔진실에 가서 아광속 추진기를 꽂은게 바로 그놈이에요."


"뒤늦게 엔진실로 달려가서 추진기를 제거했을땐 이미 심우주로 튕겨난 후였어요."


"일단 잡아서 가둬두고 멜루나도 찾아서 버리고 나서, '심문' 을 좀 했어요."



웃고 있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음, 놈의 욕망은 아마 태양계에서 멀리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나봐요."


"그래서 엔진을 사보타주하고, 당신과 저를 죽이고 함장 권한을 강탈할 계획을 세웠다네요."



이제 그녀는 더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길, 이미 당신 동면관 전원을 끊어두었다고 했어요."


"저는 바로 당신 방으로 달려갔죠. 경보도 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교묘히 처리해 뒀더라고요."


"전원을 복구하고 당신을 깨우려 해봤는데, 해봤는데, 해봤는데, 당신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분명히, 분명히 숨은 쉬고 있었는데, 의료 구역에 가서 검사해 보니 식물...인간"


말하는 중간중간에 그녀는 숨을 거칠게 쉬며 강박적으로 엄지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뜯겨져 피가 철철 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와, 빠르게 아물기 시작하는 그녀의 피부.


무척이나 괴이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때 당신 곁에서 울다 지쳐 잠들었어요."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 그 갈아죽여도 시원찮을 개새끼를 묶어둔 곳으로 바로 달려갔죠."



지금까지 그녀에게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천박한 어휘가 거침없이 흘러 나왔다.


과연 그녀는 박쥐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






함장님.

당신.

로건.

로건 포스터.


식물인간이 되었다.


더 이상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도,

바보같은 농담을 할 수도,

멋진 시구를 읉을수도,

그리고,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함장님을 그렇게 만든 원인. '박쥐'가 내 앞에 묶여 있었다.



"큭, 키킥, 그렇게나 좋아하는 '함장님' 은 잘 계시던가아?"



이성을 잃어선 안된다.


주먹엔 힘이 들어가고 앙다문 입술에선 피 향이 올라온다.


메스를 그의 목에 찔러넣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호, 걸로 날 찌르려고? 손이 덜덜 떨리는데? 찌를수는 있겠어?"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최대한 냉정해지려고 숨을 들이마쉬며, 그의 팔을 살폈다.


메스를 들고, 왼손 엄지 아래쪽 손목살을 찢는다.



"끄으읍, 후욱, 후, 찌르는 꼬라지도 계집애같긴. 차마 사람을 죽이진 못하겠지? 그럴줄 알아ㅆㅡ"



찢어진 곳에 다시 메스를 박아 팔뚝까지 갈라낸다. 피가 얼굴에 튀었지만 별로 신경쓰이진 않는다.



"끄으으으윽, 끄읍, 하아, 후, 히, 히하하하하하! 마음에, 허억, 드는데 아가씨?


후욱, 그새끼가 니 처녀도 그렇게 뚫ㅇㅡ으으으아아아악! 씨바아아알, 끄윽, 아아아아악!"



놈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자른 곳에 손을 쑤셔넣었다.


상처가 벌어지고 찢겨나가는 광경이 꽤 보기 좋다. 그대로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혈관을 잡고, 뜯어낸다.



"씨바아아아알, 씨발! 미친년! 으으윽, 허어어억, 끄윽, 씨발, 아아아아아악!"



*



"그때 생리학을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왼쪽 팔 요골동맥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온갖 욕지거리를 하면서 난동을 피우더라고요."



*



그의 왼쪽 팔뚝에선 내 손이 들어가느라 찢어진 살점이 덜렁거리고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리 기분이 좋지는 못했다. 이정도로는 택도 없다.


함장님. 나의 함장님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놈.



"후우욱, 윽, 왜, 씨발, 한번 더 하려고? 하아아, 후우, 아주 팔을 지 아랫도리 쑤시는마냥..."


"닥쳐."



벌어진 칼자국 옆, 팔뚝 정 가운데에 꽂아넣는다.


아까보다 좀 더 깊게. 그가 숨을 들이킨다.


팔뚝을 지탱하는 두 뼈 사이, 메스의 감촉을 따라 가른다. 여기 하나.


메스를 뽑아내고 이번엔 몸쪽 방향 살에 박아넣는다.


요골동맥을 가를때와 비슷한 감각으로 찢는다. 하나 더.



"아아아아아아아악! 끄윽, 꺼어어억, 끄아아아악!"



흐음, 두 뼈 사이는 손이 들어가기엔 너무 좁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리트랙터가 보인다.


찢은 곳에 박아서 강제로 상처를 벌린다.


그대로 핀셋을 집어넣어서 동맥을 뜯어낸다.


놈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간다. 리트랙터를 빼고, 팔뚝 안쪽에 낸 칼집쪽은 그냥 손을 넣어서 뜯어낸다,


곧바로 이번엔 팔꿈치 안쪽에 메스를 댄다.


그러자 침을 줄줄 흘리는 주둥이를 마구 놀리기 시작했다.


멜루나의 영향을 고통이 압도했는지, 공포에 질려 떨리는 눈동자.



"씨발, 씨발,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발 살려줘.."



두갈래로 갈라지기 전의 동맥. 겉으로 도드라진 핏줄 쪽으로 메스를 살짝 올린다.



"씨발, 씨바알.. 태, 태양계로 가면 내가 숨겨둔 두캇이 좀 있어, 씨발, 그거, 다 줄게, 그러니까.."



액와동맥 전까지는 잘라내야 하니까, 처음엔 깊게 찌르는게 낫겠다.



"한번만, 한번마안, 후우, 하아아, 내, 내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씨이이발... 로건, 로건 그새끼 다시 살려줄게, 나 연구국에 아는 형ㅇㅡ"



이번엔 칼날을 조금 비틀어서 긋는다. 근육에 접근하려면 최대한 넓게 열어야 한다.



슬슬 혈액팩이 필요할 것 같다.





***





"그래서 전골간동맥이랑 척골동맥도 헤집어서 뜯어줬죠."



그녀가 내 팔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설명하듯이 말했다.



"여기 있는 상완동맥까지 파내려고 하니까 잘못했다며, 제발, 제발 살려달라고 하더군요.


슬슬 죽을 것 같아서 혈액팩을 수혈하고, 상완동맥은 뽑고, 상완이두근은 결대로 쭉 잡아뜯어서 척측피정맥까지 전부 통째로 분리해줬어요.


그쯤 하니까 거품을 물고 기절했죠, 뭐."



두려웠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쇼크나 감염으로 픽 죽어버리면 안되니까, 기절한 사이에 무균실로 옮긴 다음 왼쪽 팔을 아예 통째로 잘라내서 대충 지지고 봉합했어요."


"그 다음엔 뭐. 자른 팔에서 뼈랑 멀쩡한 혈관만 발라내서 영양공급기에 연결해 뒀죠."


"거기서 골수 세포를 분할시켜서 계속 증식시켰더니, 하루에 피가 30리터나 나오더라고요!"



대단하죠? 그녀가 마치 칭찬해달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그래서 과다출혈 걱정도 없어졌으니, 걱정 없이 '복수' 할수 있었답니다?"


"뽑고, 쑤시고, 찢고, 벌리고, 꿰매고..


몸에 더이상 주사를 박을만한 혈관이 안 남아서 뇌에다 각성제를 직빵으로 쏴줄 때 쯤에, 갑자기 모든게 허무하더라고요."



"이런다고 당신이 돌아오는게 아닌데."



"그래서 마지막으로, 척수랑 교감신경 말단만 등에서 뽑아내 전극에 꽂고 방을 나왔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쨌든 그놈 덕분에 함장님과 영원히 함께할수 있게 된거잖아요? 음, 이제 그만 죽여줘도 될 것 같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튼 무균실에서 나와, 당신 앞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대뇌 손상은 제가 어찌 할수 있는 영역이 아니어서, 실낱같은 자연치유 가능성만 믿고 당신을 동면시켰죠."



나는 지금 멀쩡히 깨어있다. 결국 자연치유 된것일까? 아니면...



"그리고 태양계로 돌아가는 동안 연구를 시작했어요. 함내 생물학 데이터베이스와 책들을 싸그리 모아서 하나하나 공부했죠."


"근데 아무래도 생리학은 제 적성에 안 맞는거 같아요. 공부하기도 꽤 어려웠고, 응용하기도 힘들었어요."


"이해하고, 전부 정리하는데만 몇십년. 게다가 혼자서 진행하는 연구였고, 필요한 장비도 없거나 있어도 이미 부서져 있었을 때도 많았죠"


"당신, 당신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몇십년을 더 연구했지만, 가면 갈수록 막막해졌어요.


결국 10년 동안 진전이 없자, 저는 포기하고 당신 방에 쳐박혔죠."


"행여나 당신이 다칠까, 후유증이 걱정되서 동면관에서 꺼내드리지도 못했어요."


"자연 치유만 믿고 하루종일 동면관 안에 있는 당신을 바라보기 시작했죠."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다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전에 보았던 그 불쾌한 어긋남이 다시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백년. 백년동안 당신 곁에 있었어요. 처음엔 제가 말을 걸어도 미동조차 않는 당신을 보며, 계속 당신과 함꼐했던 추억들을 곱씹었죠."


"당신이 가르쳐 준 것부터, 당신이 좋아하던 것, 당신의 일상... 쓸모 없는 것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추억을 새겨넣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표정이 점점 야릇해져 갔다. 어긋남도 커져만 갔다.



"그리고 욕망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고선 더욱 가까이 다가와, 내 귀에 속삭였다.



"분명 내 눈 앞에, 동면관의 케이싱만을 사이에 둔채 같은 공간에 있는데, 만질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기분을 아세요?"



덩쿨이 나를 옥죄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나를 껴안고 자신의 몸을 나에게 부비기 시작했다.


귀에 느껴지는 숨결에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더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당신이라고 상상하며 계속 스스로를 위로했어요."


당신이 저 강철 관 안에 조용히 누워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끊임없이, 내 몸을 어루만지고,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며, 그대로 꼭 끌어안고 같이 잠들어주는 당신을 상상하고 상상해 왔죠."



그녀의 손이 내 가슴을 지나 배로 내려갔다.


손을 내 아랫배에서 멈춘 그녀가 지긋이 나와 눈을 맞췄다.


도취된 표정 속 그녀의 금빛 눈동자는 이제 텅 비어있지 않았다.


이제 그 자리를, 이질적인 무언가가 대신 채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날. 얼굴을 만져보자 주름이 만져졌어요."


"거울을 보자, 추레한 여자가 한명 보였죠."


"함장님이 만약 깨어나더라도,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사랑해 주시긴 할까?"



그녀가 내 왼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게 했다. 여전히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피부였다.



"그래서, 장장 백년 만에 연구실로 돌아가, 제 병에 대해 연구했어요.


텔로미어의 역행을 낫게 하는게 아니라, 거꾸로 심화시키는 쪽으로.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제가 늙어 죽기 전에 결국 연구를 끝냈어요."


"이 병, 아니, '축복' 을 개량해서 당신에게도 이식했고, 당신의 뇌세포는 전부 첫 동면 직후의 상태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당신이 깨어났죠."


"저한테 적용시킨 결과는 예상대로, 상처가 나든, 손가락이 잘리든, 증후군이 생겼던 그때 몸 상태로 계속 돌아갔어요."


"저는 이제, 늙는 것보다 빨리 젊어져요. 영원히 이 모습으로 살 수 있어요."


"배의 수명 따윈 걱정 안하셔도 돼요. 우현에 남은 생산시설 정도면, 심우주 채광만으로 몇억년은 버틸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도 함께. 그녀가 말을 마치고 내 눈을 지긋이 쳐다봤다.


안돼, 미쳤어, 미쳤어...


그녀의 눈을 채우고 있는 그 이질적인 무언가는, 광기였다.


나를 잃고, 수백년 간 외로이 우주를 떠돌며 그녀의 정신은 아마 뒤틀렸을 것이다.


아니, 박쥐를 고문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 전부터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동면에 들었을때?

그녀를 전투에서 구해줬을때?

혹은, 그 전부터?

모르겠다. 생각이 똑바로 이어지질 않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내가, 그녀의 정신을 부숴버린 걸지도 몰랐다.


기묘한 죄책감과 공포심이 뒤섞였다.



일단,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수백년도 아니고 수천, 수억년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공허한 심우주에서 오직 나와 그녀. 단 둘만이 말이다.


그녀가 이제부터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박쥐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면, 자살하지 못하게 하려고 내 사지의 힘줄을 전부 끊어둔다던가 할 수도 있었다.


단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녀를 멈춰야 했다. 이대로 가면 우리 둘 다 불행해 질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말하셨잖아요. 우리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저는 의미들을 하나 둘 씩 지워나갔어요. 목적지, 부모, 반란, 폭동... 단 하나의 의미만 빼고요."


"당신. 로건 포스터."


"당신이 제 전부에요. 말 그대로, 제 안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제 당신 뿐이에요."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해 왔다. 숨결이 내 얼굴에 닿았다.


분홍색이 감도는 흰 피부, 등 뒤로 길게 이어진 은발. 오똑한 코와 조그만 입.


분명히 에버크롬비 버넷, 그녀였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모조리 부정해내는, 더이상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탁한 호박빛 눈동자.


그녀는 더이상 내가 알던 에버가 아니었다.


망설임은 이제 확신이 되어서, 내가 결정을 내리게 했다.



"이제 그러니까, 당신 안에도 영원히, 영원히 저만을 담아 주세요.


오직 저, 저, 저만이 당신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게 해 주세요."


"이 드넓은 우주에서, 서로만을 담고, 영원히 함께하는 거에요..?"


그녀의 입술이 나의 입술과 맞닿았다.


짧은 고민 후, 나는 입술을 벌려 그녀를 맞이했다.


서로를 부드럽게 훑어나갔다. 수줍게, 때로는 대담하게. 연인들의 첫 데이트처럼 달콤했다.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배덕감을 음미했다.


작별 키스니까.


헤아릴 수 없을만큼 길고도 짧은 순간이 느릿하게, 혹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고, 우리 사이를 반짝이는 은빛 실이 수놓았다.


"사랑해요, 로건."


"나도 사랑해. 에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배경으로, 그녀의 입꼬리가 참을수 없다는 듯이 올라갔다.




정말 사랑했다. 정말로, 사랑했었다. 에버.




"직권명령어."


"말씀하십시오, 함장님."


"이윽고 인간의 목소리들이 우리를 깨워, 우리는 익사한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반란 때 함장 권한 강화를 위해 코드 몇줄을 꼭꼭 숨겨뒀다.


그 코드에 적어둔, 내가 방금 말한 명령어는 자폭 시퀀스를 가동한다.


에버는 몰랐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알아챘더라도, 시스템적으로 숨겨진 코드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접근 코드는 좌현이 날아갈때 그 안에 있었고, 일일히 대입해서 풀려면 몇천년은 걸렸다.


이게 나의 속죄다.

함장님에 대한 속죄,

멜루나에 중독된 선원들에 대한 속죄,

에버의 부모님에 대한 속죄,

더이상 에버가 아닌, 그녀를 향한 속죄.


작별 키스는 했으니, 작별 인사의 시간이었다.



"안녕, 에버."



적막 속에서 최후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뭐지? 왜, 왜 작동하지 않은거지? 어떻게? 분명, 분명히 적어넣은 명령어 그대로였다. 오류 메세지도 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로건."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 눈을 뜨자 그대로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방금,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뭐?


다시 한번 빠르게 생각을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면 그녀는 이 명령어를 알고 있는것 같았다.


그녀가 코드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마 그녀가 거기에 뭔가 조치를 해두었을 거고, 그래서 자폭 시퀀스가 가동되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분명히, 분명히 접근 방법은 없었다. 취약점도 없을 단순한 구조의 코드였다. 대체 어떻게...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요. 당신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으으윽. 그녀가 내 목을 억세게 틀어잡았다.


숨이 막힌다. 생각이 흩어지고 생존 본능이 머리를 채운다.


온 힘을 다해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덩굴이 풀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폐는 공기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시야는 흐릿해졌다.


정신이 날아가려는 찰나.



"아. 아아. 아..."



갑자기 그녀가 내 목에서 손을 뗐다.


숨을 마구 몰아쉬었다. 호흡의 만족감이 몸에 다시 돌아왔다.


헉헉거리며 폐에 공기를 한껏 채우고 있자, 그녀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한발 두발 뒷걸음질쳤다.


그대로 그녀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아, 흐윽, 흐으으으윽, 훌쩍, 흐아아아악, 흑"



숨이 넘어갈듯이 오열하는 에버에게, 섣불리 말을 꺼낼 자신은 없었다.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로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침울한 표정. 하지만 여전히 어긋나 있었다.



"제 말을 전부 들으셨으니까 아실 것 같지만,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냥 당신이 깨어나자마자 다시 마취시킨 다음,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 제 마음대로 했어도 됐었다고요."


"제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이 저를 정말로 사랑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녀가 일어서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약물을 주입하고, 고문하고, 세뇌했다면 확실히 당신이 저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랬다면, 당신은 더이상 제가 사랑하던 그이가 아니었겠죠.


제가 사랑하던 그 남자의 정신은 깎여나가고 스러져서 결국 원래 그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었을 거에요."


"나와 5년동안 함께했던 당신. 내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던 '그 사람' 이 저를 사랑하는지, 알고싶었어요."



나에게 있어서, 지금의 에버는, 5년동안 함께했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내 가슴에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연기한거에요. 당신이 깨어난 걸 확인하고 소리를 지른다던가, 멜루나에 영향받은척 본심을 슬쩍 흘려서 당신 반응을 보거나...

그런 식으로 살짝씩 떠보려고 했죠."


"혈청을 맞고 기절한 척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조용히 절 업고 걸어갔을때."


"그때 당신이 절 사랑한다고 거의 확신했어요. 그럼에도 질문을 던진건, 확실히 확인하고 싶어서, 였어요."



그녀가 다시 내 몸에 밀착한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



"그때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고 했을때. 정말, 정말로 기뻤어요.


그때 말했던 '부탁' 까지 들어주셨을 때에는,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것만 같아서 숨까지 참았죠."


"함교에서 당신을 기절시키고, 신경 단말로 묶은 다음엔 다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감까지 들었어요."


"당신이 일어나고, 제가 겪었던 고통들을 얘기해 드린다면, 그때, 그때처럼 저를 안고, 위로하며 안심시켜 주실 거라고 굳게 믿었죠."



그녀가 손을 들고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우울은 더 깊어져 있었다.



"제 입술이 받아들여지고, 당신과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았을 때, 저는 완전히 안심했어요."


"이제 당신과 영원히 함께할 날만 남았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서, 울 뻔 했는데..."



"왜, 그러셨어요?"



다시 한번 냉랭히 가라앉은 목소리. 그녀의 우울은 이제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나를 겨누고 있었다.



"저를 사랑한다 한 것이, 지금까지 저한테 해주신 모든 일이, 거짓에서 비롯된 거였나요?"


"아니, 아니야, 정말로.."



"그럴 줄 알았어요."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바뀌었다. 다시 싱글벙글 웃고있는 그녀의 표정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당신이 그런 연기를 해왔을 리 없잖아요, 알고 있었답니다?"


"제 추측으로는, 이유는 정말로 모르겠지만, 함장님은 절 위해서 이 배를 부수려고 하셨던 거겠죠."


"그건, 잘못된 방식이에요. 이제 제가 당신에게 가르쳐 드릴 차례네요?"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을. 그녀가 악동 같은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제가 당신에게 해 드린게 없다는 말, 당신이 동면에 막 들어갔을 그 때에는 진심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죠."



온몸을 묶고 있던 덩쿨이 느슨해졌다. 덩굴을 그녀가 조종한건가..? 어떻게?



"음.. 연구가 생각하시는 것 보다 더 어려웠거든요."


"증후군을 심화시키는 건 복잡하고 정교한 환경과 정밀한 타이밍을 요구했고, 그 모든걸 이 몸으로는 통제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 한가지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죠."



그녀가 살짝 뒤로 물러서고, 덩쿨이 내 팔에서 전부 떨어져 나갔다.


팔에서 떨어져나가 재빠르게 벽에 달라붙는 덩쿨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정교히 움직였다. 발은 여전히 묶여있었다.


그녀가 저 덩쿨을 조종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저 덩쿨과 정신적으로 연결이라도 되어 있나? 만약 그렇더라도, 인간의 뇌는 저렇게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다룰 수 없었다.


나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실험 환경을 완벽히 조종하기 위해, '실험 환경' 그 자체가 되는 방법."



설마. 설마. 설마.




"저는, 제 의식을 함선 중앙 콘솔에 업로드 하기 시작했어요."




"함장 대리 권한 덕에 시스템 점거 자체는 수월했지만, 인간의 의식으로는 속도가 너무 느렸죠."


"그래서 대충 근섬유와 신경섬유를 조합하고 번식시켜서, 이 '신경' 들을 만들었어요."


그녀가 손바닥을 위로 손을 펼치자, 천장에 자라있던 덩굴 한 줄기가 그 위에 똬리를 틀었다.


그렇다면, 저 덩굴, 아니 '신경' 이 전부 그녀가 조종하던 거라는 거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관제실부터 시작해서, 생명 유지실에 통째로 연결시켰어요. 그리고 시스템에 물리적으로 접근시키기 시작했죠."



지나오면서 많이 보셨잖아요? 그녀가 다시 나에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발목은 묶여있었고, 뒤는 벽이었으며, 사방이 그녀의 '신경' 으로 덮여 있었다. 아직 테이저건도 가지고 있겠지.


도망치는건... 불가능했다.



"당신이 숨겨둔 코드들도 그때쯤 전부 발견해서 비활성화 해 뒀죠. 외부의 접근은 막아도, 내부의 접근은 막혀있지 않았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저는 이 배를 완전히 장악했어요. "


"이 배 자체가, 저라고 봐도 될 정도로요. 그러니까 당신은 제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그녀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처음 깨어났을때, 당신의 방에 잔뜩 깔아둔 신경들이 제 일을 톡톡히 해냈죠."


"그때 여기저기 살펴보던 당신, 신경을 만져보던 당신의 손, 그러며 당신이 내뱉은 숨결까지 똑똑히 제 머릿속에 전해주었거든요."



그녀가 왼손으로 머리를 톡톡 치더니, 그대로 그 손으로 턱을 괸다.



"그렇게 깨어나 숨쉬는 당신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없애왔었는지..."



잠깐. 뭐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고꾸라졌다.


신경이 발목을 잡은 채로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내 머리와 허리가 땅에 부딪히려는 찰나, 신경이 날아와 받쳐주었다.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졌다.


생명을 희생해?


잠깐.



"반란의 생존자 195명. 그 중 3명, 아니, 이젠 2명만이 남았네요."



아니, 아니, 안된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럴리가 없다. 그녀가 넘어진 내 위에 올라탔다.



"함선과 하나가 되서, 실험 진행은 순조로웠지만, 임상 실험이 문제였죠."



그녀가 엎드려서, 내 몸 위에 그녀의 몸을 포갰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동면관 해킹 정도는 간단했어요. 195번. 충분한 숫자였죠."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끔찍한 사실들이 자신의 배를 가르고, 구역질나는 냄새를 풍겼다.



"첫번째, 로저 데임슨. 실패였어요. 면역 거부 반응 때문에 쇼크사했죠."



로저. 요리를 잘하는 유쾌한 친구였다.


함내 자동 조리 시스템은 '존나 구리다'며, 그가 만들어준 디저트를 모두에게 나누어 주곤 했었다.



"열일곱번째, 모드레드 그웬. 좀 나아졌어요. 면역 거부 반응은 없었지만, 이식한 부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썩어들어갔죠."



모드레드. 무뚝뚝했지만 정이 많은 친구였고, 총질 하나는 죽여주게 잘했다.


사람들과 한잔 하면서 다트 내기를 하면, 언제나 그가 이겼다.



"쉰 두번째. 리베리 만. 너무 잘 작동해서 문제였죠. 이식한 부위가 재생되다 못해 종양화 되어서 몸의 몇배는 크게 부풀어 올랐어요."



리버. 똘똘한 아이였다. 최연소 엔지니어답게 예상치 못한 방법을 제시해서 놀란 적이 많았다.


나한테 연애 일로 상담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백 스물네번째. 알프레드 킴. 이때부터 거의 안정화 되었어요. 시험삼아 사지를 잘라 봤는데. 재생엔 문제가 없었지만 과다출혈이 문제였죠"



프레디. 지구서부터 늘상 같이 놀러다니던 불알친구. 리버한테 고백했단 말을 듣고 두들겨 팼던 적도 있었다.


래도 여러모로 괜찮은 놈이어서, 리버에겐 좋게 말해줬다.



"백 일흔번째. 엘렌 티에리. 성공. 뇌를 파내도, 허리를 반으로 잘라도, 영양 공급만 잘 되면 멀쩡히 재생했어요. 물론 정신은 뭐. 부서졌지만요."



엘렌.


어릴 적의 나를, 감정의 심연에서 빼내준 그녀. 내 가장 소중한 친구. 웃을때 살짝 보이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그녀는 에버에게 많이 관심을 가졌었다. 그녀와 꽤 친해지기도 했었다. 나와 엘렌과 에버. 셋이 같이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곤 했었다.



"나머지 스물 다섯명에게도 전부 실험을 해 보고, 마침내 당신에게 이식한 거에요."



그녀가 엎드린 채로 나를 꼭 껴안았다.



"한명씩 폐기 처분 할때마다. 그 사람의 의미를 지웠어요."


"당신을 살리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을 지워냈죠."



나는. 나는. 내 몸은. 내 의식은. 아, 아아.



"그러니까, 당신은 그들 전부를 목숨에 짊어지고 있는 거였답니다."


"그게, 당신이 잘못된 이유에요.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릴 만한 목숨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와 함께 한다면, 그 무게도 없어질 거에요."


"그냥 저처럼, 그들에게 주었던 의미를 회수하세요. 그리고 당신이 줄수 있는 의미를 전부 저에게 주세요."


"당신의 제자, 당신의 연인. 당신의 아내, 당신의 사랑. 당신이 모든 의미를 저에게 부여하신다면,"


"제가 당신의 모든 것이 되어드릴게요. 당신이 나에게 모든 것인 것처럼, 로건."



그녀가 천천히 내 가슴을 쓰다듬고, 슈트 지퍼를 천천히 내려갔다.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의 비탄에 찬 절규가 생생히 귀에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로저. 모드레드. 리베리. 알프레드. 그리고 엘렌. 나머지 승객들. 그들의 무게가 내 영혼을 짓눌렀다. 숨이 막혀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부모를 잃고 울고 있을때, 이렇게 위로해 주셨잖아요. 괜찮다고만 계속 말해주시던게, 얼마나 포근했는데요."



내 감정들이 해일에 쓸려나가는 해변처럼 비산하는 느낌이, 똑똑히 내 뇌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성,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끝없이 몰아닥치는 죄악감과 절망이 내 목을 졸라왔다. 그들의 원망이 들린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숨을, 숨을, 숨을 쉬고싶었다.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어느새 자신의 슈트를 벗은 에버가 나를 다시 꼭 껴안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내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전부 다 잊고, 오직 저만 생각해요. 저는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당신을 사랑해왔고, 사랑할 거에요. "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것만 같은 달콤한 향기.

머릿속에 직접 울려퍼지는, 죄악이 그들의 모습으로 말하는 원망. 비탄. 고통.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이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 그런데, 그런데, 나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 속 모든 짐을 내려놓고, 저만이 당신 안에 있게 해 주세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그녀의 향기를 함뿍 들이마셨다. 그들을 전부 내 머리속에서 지워낼 만큼 강렬히 그녀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침묵만이 남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로건, 저는 당신에게 원망 따윈 하지 않아요, 저는 오직 당신만을 담고 있어요."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청명히 울려 퍼진다. 그녀의 따스한 모닥불 같은 온기가 내 몸을, 내 마음을 뎁히고 있었다.


나를 위해주는 그녀의 얼굴이 문득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싱긋 미소지었다. 이제는, 어긋나지 않은 순수한 애정만이 보였다.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에 희열까지 들었다. 나는 그녀가 줄수 있는 모든 의미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 모든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나만을 바라봐 주는 존재. 나를 위해 수많은 역경을 헤쳐온 존재. 나를 감싸준 유일한 존재.


나는 그녀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마주앉았다. 진심으로 그녀를 음미하고 탐했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 풀어지며 격정적인 춤을 추었다. 끝없는 도취감이 경주마처럼 등을 내달렸다.


영원할 것만 같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까보다 더 고혹적인 은빛 유성이 그녀의 입에서 내 입까지 기다란 꼬리를 뻗고 있었다.



"좀더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면, 온 우주가 절대영도에 수렴할때까지도 버틸 수 있을 거에요."



낭만적인 순간 이후에 과학 이야기라니.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녀도 나와 함께 깔깔 웃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한참이나 더 웃어댔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 '영원' 이란건 결국 시간 위에 존재해요.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서 시간의 의미가 없어지면, 영원도 끝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영원히, 함께해요. 시간이 끝날 때까지, 같이."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들고 일어섰다. 발목에 걸려있던 그녀의 신경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나신이 눈 앞에 보였다. 참을 이유도, 참을 힘도 없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명예. 목적. 의무. 가족. 친구. 그들에게서 의미를 뺏었다.


무의미한 것들. 한때 그런 것들을 추구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직 그녀 뿐이었다. 나의 빛, 나의 영혼. 에버.



"기꺼이."



그 호박빛 눈동자는 여느때보다 찬란히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폭발하는 초신성보다도.


그대로 그녀를 감싸안고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추었다.


살을 맞대고, 영하 273도의 우주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언뜻 그녀 뒤로 보이는 함교 창문 너머의 광경.


심우주에서 별들이 흐드러지게 반짝였다.


행성들이 부서지고, 저 별들이 꺼지고 나서도.


모든 다른 것들이 왜성이나 블랙홀이 되고 나서도.


이 우주에서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셀수 없이 많은 시간이 지나, 세상의 모든 입자들이 붕괴해 사라지고, 나와 그녀만이 남을 때까지.



영원히,



우리는 별들의 바다에서, 서로를 사랑한다.






*****







네. 완전 순애물 아닙니까? 저는 순애 정말 좋아합니다. 둘이 행복하면 몇천억년, 몇조년도 괜찮은 거겠죠.

어, 이제부턴 잡설입니다. 안읽으셔도 되고요.


제가 중학교 1학년때 독후감 숙제를 내주시던 선생님이 두분이 계셨습니다.


한분은 몇줄 이상으로 써오라 했고, 한분은 몇줄 이하로 써오라 했습니다.


몇줄 이상으로 쓰는 것은 쉬웠죠. 그냥 생각나는대로 전부 써갈기면 됐으니까요.


근데 몇줄 이하로 쓰려면, 그 생각난대로 써갈긴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빛나는 문장만을 골라내 넣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줄 이하로 써야 하는 독후감이 더 어려웠던 것 같네요.



이번 소설도 그랬습니다. 적은 용량에 많은걸 쑤셔넣으려 하다 보니까 좀 문제가 많이 생겼어요.


독자분들의 흥미 유발 실패라던가, 필요 없는데선 장황하면서 중요한건 짧게 설명하고 휙 지나친다던가...


차라리 이런 회상 형식이 아니라, 반란때부터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장편으로 기획했다면 좀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애매하게 8만자 안되는 중편으로 잡고 쓴게 제일 큰 실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나중에 돌아보면 처음부터 다시 쓰고싶을만한 글이었네요.



그렇지만 글도 계속 써야 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얻은 교훈으로 다음 글은 좀더 맛있게 써오려 노력하겟습니다.


좀더 가볍고, 빠르고, 자극적인 내용이겠네요. 히로인 시점도 팍팍 넣고, 너무 심하게 풍기던 순수문학 냄새도 좀만 덜어내고 오겠습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보아 주신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뵙시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