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1) https://arca.live/b/yandere/19195399

(2) https://arca.live/b/yandere/19250159

(3) https://arca.live/b/yandere/19277921

(4) https://arca.live/b/yandere/19314649

 

 

0.

 

“은하야, 거기 있는 빵 좀 집어줄래?”

“네, 언니.”

 

식사가 이어진다.

납치에서 시작된 게임은 벌써 3일째가 되었다.

 

테이블에서는 이런저런 대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분명 계속 만나 식사를 하는 나날은 서로를 친밀하게 만들어야 할 텐데도

어째서인지 오히려 처음보다도 더욱 멀어진 감이 있었다.

 

아마 저기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그녀의 탓이 아닐까.

백이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요? 먹여드릴까요?”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쪽을 보고 있다가 빵을 조금 찢어 입에 우물거리던 성란과 눈이 마주쳤다.

능청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무심코 시선을 돌리며 말을 어물거렸다.

 

그녀는 두려운 것 하나 없다는 듯 차분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성란은 어제 저녁부터 마음을 다잡은 것인지 이러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본인이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그게 주위의 시선까지 침착해지게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일이면 탈락자 투표가 시작된다.

그리고 아마 첫 탈락자는 그녀가 될 터였다.

 

물론 백이란은 여전히 이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게임을 어떻게 끝낼지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누가 먼저 탈락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성란이 사고를 친 덕에

그 미정이었던 탈락자 1순위 자리에 들어갔을 뿐이고.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눈치 빠른 몇몇은 상황을 읽어내었다.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언제 찌르느냐만 고심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다고.

 

머리를 굴리는 일부의 분위기가 나머지 플레이어들을 휘감고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그들을 이 분위기에 물들게 한다.

 

휴식의 시간이었어야 했을 식사 테이블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1.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에 몸을 씻어내린다.

따뜻함을 넘어 뜨거움에 가까운 열기에 백이란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커다란 욕조가 있긴 했지만 느긋하게 몸을 담글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아서

평소 집에서 하는 것처럼 샤워나 하기로 했던 그였다.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온도를 조절하다보니

이런 비싸보이는 시설도 샤워기 온도를 적절히 맞추는 건 어렵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적어도 여긴 다른 사람이 물을 쓰느라

도중에 온도가 제멋대로 바뀌는 일은 없지 싶으니 조금은 더 나은가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고 있으니 여러 상념이 떠올랐다.

 

“…….”

 

그러다가 문득 이전에 성란에게 덮쳐졌던 일이 떠올라 무심코 침을 삼켰다.

 

떠올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생생하게 그때의 감각이 뇌를 휘감았다.

 

사타구니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몰려오는 죄악감에 억지로 거기서 의식을 떼어놓고서 몸을 계속 씻어나갔다.

 

…결국 백이란이 스스로의 욕구를 참아내지 못하고 그것을 문지르기까지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예전부터 나름 체력은 나쁘지 않았던 몸이었다.


거기에다 그가 부여받은 능력이 생식활동을 강제적으로 촉진시켰으며

일반적인 정력으로는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쾌락마저 맛보고 말았다.

 

몸이 달아올라서 이른바 ‘쌓여있는’ 상태가 되는 데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윽…….”

 

그리고 그만큼 끝에 도달하는 것 역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곳에 납치되기 전보다도 훨씬 민감해진 기분이었다.

 

연인에 대한 사죄를 마음속에 품으며 정액을 흩뿌리고 마는 그였다.

 

“…어?”

 

그리고 이내 백이란은 당황했다.

 

정액이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에 매달려있던 탓이다.

아니, 공중에 달라붙어 있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렸다.

 

뒤이어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저기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해했다.

 

만약 갖고 싶은 초능력이 뭐냐고 물었을 때

투명인간이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시설에 있는 건 그 스스로를 제외하면 여성뿐이었다.

이성에게 자위를 보였다는 수치와 배덕감에 백이란은 얼굴을 붉혔다.

 

얼른 샤워기를 끄고 나가려 뒤로 손을 더듬더듬 뻗는다.

 

그러나 그것보다 ‘누군가’가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손끝으로 닦아내는 것인지 정액이 한군데로 모여간다.

명백히 평균을 상회할 만한 양이었던 백탁액은 이내 흘러들어가듯 한데 고였다.

 

백이란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혀가 정액을 이리저리 굴리며 오물거렸다.

 

그는 이 비상식적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샤워기 물소리에 뒤섞여 끈적이는 소리에 안 그래도 능력 때문에

조금만 지나도 사정 이전으로 복구되는 그의 페니스는 순식간에 강직을 되찾았다.

 

백이란의 앞에서 앉은 자세로 있던 ‘누군가’는

그 모습을 부고서 기쁜 듯이 코웃음 소리를 흘렸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비상식을 거듭한 끝에 백이란은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자신의 연인을 겹쳤다.

 

다른 여자의 몸에 흥분한다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방어기제로서의 의미도 있었을 테고,

어쩌면 억누르고 있던 그녀를 향한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페니스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정액을 음란하게,

아니, 게걸스럽게 탐하는 강문희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문희야, 미안…!”

 

흥분에 손은 점점 더 빨라져만 갔고, 금세 다음 정액을 토해내고 만다.

그러나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사정 직후에도 계속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겨우 진정한 것은 그 이후로 세 번을 더 사정한 이후였다.

 

그동안 눈앞의 ‘누군가’는 정액을 계속 입가에 머금은 채

놀리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는 듯 그를 계속 자극했다.

 

정액 범벅이 된 혀를 쭈욱 내밀어도 보고

물소리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쩍쩍 씹는 소리를 내었다.

 

끈적한 정액을 입밖으로 한 번 흘렸다가 순식간에 주르륵 빨아마시거나

입 안 가득 모은 정액을 가글이라도 하듯 부글부글 거품을 내기도 했다.

 

몇 번의 사정 끝에 겨우 제정신을 차릴 정도가 되었음에도

그녀의 온갖 희롱 탓인지 백이란의 물건은 그 강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내 그녀는 입에 모아둔 정액을 삼키기 시작했다.

허공에 잔뜩 고여있던 정액이 아래로 조금씩 흘러내리다 곧 사라진다.

과장스럽게 꿀꺽꿀꺽 목을 넘기는 소리를 내온 것은 아마 일부러였을 것이다.

 

그 모습에 다시 흥분이 들끓어오른 백이란이었지만 어떻게든 참아내었다.

 

솔직히 조금만 더 자극해도 또 사정할 것만 같았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끝이 없었다.

능력 탓에 신체적 한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백이란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녀 역시 만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직접 물을 맞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튀어있던 물방울의 움직임이 그의 눈에 보였다.

 

이내 욕실의 문이 열렸다가 금세 닫혔다.

 

“……!”

 

그러나 백이란은 보고 말았다.

여기저기 맺힌 물방울 탓에 보인 그녀의 체구는 그와 비슷했다.

 

어떻게든 합리화했던 조금 전의 상대가 결코 그의 연인이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에 때려박혀진다.

 

뒤늦게 찾아드는 것은 몇 번이고 다른 여자에게 정액을 흩뿌리고 삼키게 했다는 죄악감과 배덕감.

그 흥분감에 사정 직전까지 몰려있던 자지가 결국 정액을 토해낸다.

 

그것은 ‘누군가’가 사라진 이제는 그저 바닥에 후드득 떨어질 뿐이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그 기묘한 기분은 모두가 모인 식사 장소에서도 가시질 않았다.

 

그가 홀의 테이블로 갔을 무렵에는 절반 이상이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러 여성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 전의 광경이 생각나 가슴이 뛰었다.

 

여기 있는 누군가는, 조금 전까지 자신의 정액을 오물거리던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박루미와 성란이 도착해 테이블이 전부 채워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성란은 언제나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갔고

박루미 역시 평소와 같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테이블을 빙 돌며 나아갔다.

 

“히히… 잘 먹었습니다아.”

 

그리고 그 순간, 박루미는 그의 곁을 지나가며 속삭였다.

그 음침한 목소리에는 끈적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섬칫한 감각에 백이란은 어깨를 흠칫 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박루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스스로의 입을 열어보였다.

 

쩌억 벌어지는 입.

아직 제대로 입을 행구지 않은 것인지 희끗한 액체가 진득하게 들러붙어

마치 입 안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뒤이어 혀로 그것을 휘감듯 모아선 오물오물 씹었다.

 

무성한 앞머리 너머로 연푸른빛의 한쪽 눈동자가 고개를 내민다.

시선은 그의 사타구니로 향해 있었다.

 

옷 때문에 팽팽하게 부푼 그의 아랫도리가 제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보았던 그녀의 성격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마치 맹수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마지막으로 그녀는 스스로의 입술을 핥았다.

 

이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의 자리로 향한 그녀를,

백이란은 식사 내내 슬쩍슬쩍 곁눈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2.

 

어둑한 방. 문은 잠겨 열리지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이 찾아온다.

 

시간에 대한 자각은 그다지 없다.

창문도 없이 그저 여기저기 놓인 시계만을 보고 짐작할 뿐.

 

어쩌면 이곳은 지하에 파묻힌 시설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백은하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였다.

 

오빠와 엇비슷한 키라고 하면 꽤 크게 느껴지지만

비교대상이 다른 의미로 평균을 아득히 벗어난지라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래서 규칙은 방금 말한 대로 넣는다?]

 

책상 스크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박선정의 것.

 

순서를 생각해본다면 오빠의 소꿉친구인 그녀가 이번 규칙 제안자일 터였다.

 

뒤이어 스크린에 떠오른 문자에는

‘12시부터 13시까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함께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며칠만 더 버티면 되겠지만 스트레스 관리는 중요하니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규칙은

하루에 적어도 한 끼는 모두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자는 취지였다.

 

“거짓말쟁이.”

 

백은하는 통화에 걸리지 않을만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문희와 박선정. 그 두 소녀는 어릴 적부터 오빠의 친구인 동시에 자신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식사를 하며 보았던 박선정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백이란도 강문희도 눈치가 없는 편이니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그녀의 그 표정은 분명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드러나는 그것이었다.

 

분명 그녀는 오빠를 포기했을 텐데 어째서일까.

 

합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아마 누군가의 배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고 확신할 수가 있는가?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서 다시금 욕심이 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더라도 성란이 그를 덮친 걸 보고 심경에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닐까?

 

의심암귀가 피어오른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구잡이로 늘어난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아, 이번 투표할 때는 세 장까지만 써야 하는 거 알지?]

 

그리고 이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가 다니는 학교의 미술교사라고 하지만 만난 건 이 시설에서가 처음이었다.

 

[탈락자 투표를 하면 그날 규칙 제정은 없다곤 하지만,

투표를 확정적으로 개시하려면 모두 한 표씩은 들고 있어야 하니까.]

 

확률은 낮은 편이지만 성란의 마지막 발악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자기가 가진 투표권 5장을 모두 탈락자 투표 개시 반대에 던지는 것이다.

 

해봐야 하루의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막을 수 있는 사고는 미연에 막아두는 게 좋았다.

 

모두가 한 표씩을 던진다면 여섯 표가 되어 성란이 가진 투표권보다 많아진다.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투표권을 본 탈락자 투표에 써야 할 수도 있고.]

 

그것을 감안하여 각자 두 장씩의 여유를.

 

덧붙여 이런 식으로 대놓고 작전회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란이 이번에도 통화방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게 그다지 의미 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백은하만큼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드르륵. 서랍을 열어본다.

 

그 자리에는 10장의 투표권이 들어있었다.

 

다섯 장은 본래 그녀의 것. 그리고 나머지 다섯 장은 성란의 것이었다.

 

성란은 조금 전 백은하에게 찾아와 투표권을 넘겨주었다.

이미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선 추하게 발악할 의사가 없음을 전한 것이다.

 

하필 백이란이나 강문희에게 넘겨주지 않은 이유는 그녀 최후의 자존심이 아닐까 싶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것은 백은하를 그 두 사람 다음으로 ‘안전한 사람’으로 판단했다는 것.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지만, 원래 백은하는 백이란에게 마음을 갖고 있었다.

호감을 넘어서 연심의 단계에 들어섰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혈연이라는 벽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백은하는 고작 한 걸음도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내 박선정이 오빠에게 품은 마음을 알아차렸다.

또 얼마가 지나 오빠를 위해 스스로의 마음을 잘라내었음도 알아챘다.

 

그녀가 몰래 우는 모습을 보며,

백은하 자신도 어찌 단정지을 수 없는 응어리를 느꼈다.

 

그리고 하나의 족쇄가 더 채워졌다.

 

박선정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그 결단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백이란과 맺어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음을 차마 스스로 꺾지 못하고 타인의 것을 빌렸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백은하라는 소녀의 결정이었다.

 

[찬성] 18

[반대] 0

 

어둠 속에서 시간은 여전히 흘러갔다.

 

 

3.

 

“좋은 아침입니다, 플레이어 여러분,”

 

아침에 문의 잠금이 풀려 밖으로 나온 백이란이 본 것은

며칠 전에 마주했던 호박 괴인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중앙에 놓인 새하얀 정육면체를 기다란 지팡이로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자, 드디어 이 날이 찾아왔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홀로 나온 것을 확인하더니 괴인은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매일 탈락자 투표를 개시할지 말지를 투표로 결정하게 됩니다.

바로 이걸 사용해서 말이죠.

투표 시스템은 규칙을 제정할 때와 거의 동일합니다.”

 

즉 흰색이 찬성, 검은색이 반대이며 중복투표가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세히 보니 정육면체 한쪽 면에 카드 투입구가 있었다.

 

“투표 시각은 아침 8시부터 아침 11시까지입니다.

만약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다면 투표실을 개방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그녀는 지팡이로 저편의 문을 척 가리켰다.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투표실이라고 적혀있던 그 방이리라.

 

“저 안에서 여러분은 10분 안에 자신을 제외한 한 사람을 투표하면 됩니다.

투표실에는 한 번에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점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서 호박은 스스로의 설명이 만족스러웠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동점이 나오면?”

 

거기에 물음을 던진 것은 박선정이었다.

 

“그 경우에는 우승 상품인 백이란 씨의 선택을 우선시하게 됩니다.

백이란 씨가 선택하지 않은 플레이어끼리 받은 표가 같다면 재투표에 들어가고요.

…그럼, 다들 열심히 고민하여 투표해주시길.”

 

호박 괴인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또 그때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

 

홀에 침묵이 감돌았다.

 

“뭘 그리 침울해하고 있어요. 밥 안 먹을 거예요? 먹고 투표해야죠.”

 

그 침묵을 깬 것은 성란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좌중을 둘러본다.

 

사실상 이번 투표로 탈락 확정인데도 투표를 재촉한다.

아니, 애초에 완전히 체념했으니 다른 무언가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걸지도 모른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난 뒤에는

하나둘 각자의 방에서 카드를 한 장씩 가져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입했다.

 

성란은 그저 테이블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투표함은 몹시 무거웠지만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 정오가 되자 투표함에서 마치 홀로그램처럼 문자가 떠오른다.

 

[찬성] 6

[반대] 0

 

이미 다들 예측하고 있던 결과였다.

 

잠시 그렇게 떠올라 있던 홀로그램은 금세 새로운 문장을 띄웠다.

 

‘강문희 씨는 투표실로 들어와주십시오.’

 

그녀가 떠나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이름이 바뀐다.

돌아오는 강문희와 교대하듯 박루미가 이동했다.

 

그리고 이내 백이란의 차례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걷자 투표실 문이 보였다.

 

첫 번째 날과 다르게 스르르 문이 열렸다.

 

안쪽은 허전하다 못해 황폐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콘크리트 방이었다.

 

그 중심에 카지노 테이블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고 그 옆으로 기다란 관이 여섯 개 달려있었다.

 

불투명한 관에서는 여섯 색깔의 구슬이 하나씩 나와 있었으며

파이프 위쪽에 여성진 이름이 적힌 종이가 보였다.

 

성란의 이름이 적힌 관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어본다.

안쪽에 있던 구슬이 굴러나와 그 자리를 채웠다.

 

옆에 있던 이시연의 구슬도 집어본다.

 

그 순간 철컹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있던 구멍이 닫혔다.

여기서만큼은 중복투표가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시연의 파이프에서 새로 나온 구슬을 안쪽으로 밀었다.

그리 어렵잖게 밀리는 걸 보면 구슬이 그리 많이 들어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방금 꺼낸 구슬을 제자리에 돌려놓자 테이블의 구멍이 다시 열렸다.

 

대충 이 정도인가 싶어 백이란은 성란의 구슬을 구멍에 집어넣은 뒤 투표실을 나왔다.

 

테이블로 돌아온 그는 나머지 인원의 투표가 끝나길 기다렸다.

 

“첫 탈락자 투표,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투표한 이시연까지 자리로 돌아오자

테이블 앞에서 또다시 호박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탈락자 투표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장난기 가득 어린 목소리였다.

 

“성란 씨 4표, 이시연 씨 2표, 박선정 씨 1표.”

 

의외로 옆으로 새어나간 표를 보며 백이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투표할 수 없는 성란을 제외해도 두 표나 새어나갔다.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는 그의 마음도 모른 채 괴인은 말을 이었다.

 

“이번 탈락자는 성란 씨입니다. 이 시각부로 플레이어 신분을 박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호박은 언제나 그랬듯 모습을 감추었다.

 

또 넓은 홀에 침묵이 찾아든다.

 

“……끝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그의 여동생 백은하였다.

 

그리고 아마 모두가 같은 감정을 품고 있을 터였다.

 

이윽고 온갖 시선이 성란에게로 향한다.

다들 탈락자는 이 시설 바깥으로 내보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성란의 입에서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추방당하는 거 아니었던 건가요…?

그냥 이제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말만 하고 사라지다니…”

 

그리고 그 순간 성란은 말을 멈추었다.

 

“…플레이어가 아니다?”

 

뒤이어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입으로는 방금 했던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러더니 성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쭉 뻗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은 이시연이 앉아있는 바로 앞.

 

그리고 그녀는 팔을 들어올리더니──.

 

“서, 선생님?!”

"이런 미친…! 갑자기 뭐하는 거야?!"

 

이시연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뺨을 치는 소리가 조용하던 홀에 울려퍼진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이시연은 뺨에 손을 올리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성란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그것은 통증에 대한 당혹이 아니었다.

 

“하, 하하하…….”

 

성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폭력 금지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아마 다른 규칙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성란은 호박이 이야기했던 시스템을 다시 떠올렸다.

 

게임이 끝나기 위해선 다섯 명의 탈락자가 발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녀 자신만이 무법자였다.

 

만약 평생 추가 탈락자가 발생하지 않게 막을 수만 있다면?

 

체념하고 있던 욕망이 급속히 들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천천히 돌아간다.

 

그 시선의 끝은 백이란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는 그에게로.

 

으슥한 조명에 성란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무의식적으로 지은 웃음은 송곳니까지 드러내어 섬뜩함이 느껴졌다.

 

──게임의 룰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4.


『게임 4일차』

 

[규칙]

 

1.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2. 백이란과의 성행위를 금한다.

3. 12시부터 13시까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함께할 것.



[탈락자]

- 성란

 

 

[백이란]

- 소지금: 130,000

- 투표권: 1




사실상 지금부터 본 게임 스타트.


그나저나 빌드업이 늘어져서 중도하차하는 게 아니라

1화부터 조회수가 애매하던데 제목이 너무 읽기 싫게 생긴 건가.

사실 처음 쓴 글이 너무 조회수 잘 나와서 눈이 높아진 걸지도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