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는 그날 밤 얀진이를 죽였다. 그리고 얀붕이는 얀진이가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다. 그는 목 매어 울 만큼 슬펐지만 얀순이를 신고한다거나 나무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얀진이가 쓰던 책상 위에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처량하게 내려보던 갈색 단발의 여자는 곧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늘지고 와락 일그러졌지만 그녀의 외모는 그럼에도 기죽긴커녕 더욱 빛났다. 그런 모습에 흔들린 남자들은 애석하게도 얀진이의 죽음을 공감하는 것보다 얀순이를 두 눈에 담기 바빴다. 여자 몇몇이 얀순이를 감싸 위로해주었다.


"얀순아, 괜찮아?"

"...."

"그런 말이 있잖아, 좋은 사람일 수록 하늘에서 일찍 데려간다고. 얀진이는 지금쯤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뚝 그쳐, 응?"

"... 얀진이는 어릴 때부터 내가 힘들 때마다 항상 곁에서 위로해주는 애였어, 자기는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으면서, 주변에 힘든 사람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곤 했어. 정말 착했는데, 나는, 보답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얀순이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였다. 곁에 있던 여자애들이 안타까운 소리를 내뱉고는 공감하듯 그늘진 얼굴로 조용히 얀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얀붕이는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는 그녀들과 똑같이 얀진이의 죽음에 애도했다. 그는 평소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는 싫었다. 무지한 사람들, 슬퍼할 자격도 없는 사람, 그 무엇에도 끼지 못한 얀붕이는 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의식을 억지로 밀어냈다.

하교 시간이 되고, 얀붕이의 친구들은 그에게 얀순이와 같이 하교하며 위로해주라고 등을 떠밀었다. 셋이 소꿉친구였던만큼 지금 얀순이를 위로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그렇게 둘은 같이 하교를 하게 되었다. 아마 처음일 것이다. 항상 얀진이와 같이 셋이서 등하교했고, 그녀가 죽은 후로는 따로 다녔으니. 입이 줄어든 만큼 과연 옛날의 시끌벅적했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귄지 얼마 안 된 풋풋한 연인으로 보였을 만큼 둘은 청순해 보였다.

둘의 집은 매우 가까웠다. 얀붕이가 1305호라면, 얀순이는 1306호였다. 얀순이는 번호를 치는 시늉을 하다가 얀붕이가 집으로 들어가자 닫히는 문을 잡고 거칠게 열었다.


"뭐, 뭐야?"


얀붕이가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두려움에 떨리는 그의 두 눈에는 빙긋 웃으며 문을 닫는 얀순이가 비쳤다. 잠금이 닫히는 소리가 비상 알람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 얀붕아, 요즘 왜 날 피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얀순이의 얼굴은 학교에서 보였던 표정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슬퍼 보였다.


"요즘 너 이상해, 항상 같이 학교 다녔으면서, 요즘은 날 피하잖아."

"... 그건."

"설마, 내가 그년을 죽여서 그런 거야?"


얀진이를 입에 담는 순간 얀순이의 눈빛이 증오로 물들었다. 그녀는 숨이 턱 막혀 아무런 말도 못하는 얀붕이를 조용히 눕혀 그 위에 올라탔다. 위에서 누군가를 내려다 보는 행위, 그때도 이러했다. 얀진이를 죽인 그날 밤도, 얀순이는 얀진이를 이렇게 깔고 내려보고 있었다.


그날 밤 얀진이는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야간에 얀붕이와 통화하고 있었다. 매일 수십 분, 많게는 한 시간을 넘겨서까지.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하는 것만큼 그녀의 마음 속을 채워주는 건 없었다. 그날에는 부모님이 친정 집에 들렀을 때라 집에 아무도 없었고, 따라서 얀붕이는 그녀를 겁주었으며 얀진이는 이러한 얀붕이의 장난에 덜덜 떨면서도 전화기를 내려 놓지 않았다.

그때 벨이 울렸다. 마침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던 터라 화들짝 놀란 얀진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얀붕이에게 물었다.


"일단 누군지 얼굴만 확인해 봐, 수상한 사람인 것 같으면 곧바로 집에 꽁꽁 숨어, 경찰에 내가 신고할 테니까 숨소리도 내지 마."


얀진이는 그의 말대로 화면에 비춰진 얼굴을 조심스레 확인했다. 그러자 바짝 쫄아들었던 간이 다시 제 모습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뭐야, 너였어? 깜짝 놀랐잖아."


문밖에는 옷을 꽁꽁 싸입은 얀순이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아, 이렇게 된 거 같이 밤 샐까? 마침 얀붕이랑 통화 중이었거든."


통화라는 말에 자연스레 얀순이의 고개가 들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품속에서 칼을 숨긴 얀순이의 손에 힘이 실렸다. 어느새 둘은 이렇게까지 관계가 발전된 것이다. 매일 등하교를 할 때마다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 든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둘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던 건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 얀진이는 그녀가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줬던 소중한 사람이다. 따라서 웬만한 것들은 포기하고 그녀에게 줄 생각이 있었고, 여유가 있다면 오히려 발 벗고 그녀가 행복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화 속의 토끼가 소중한 간을 숨겨두듯, 그녀 또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었다.


'얀붕이는 내가 먼저 좋아했어, 누구에게도 못 줘, 설령 친한 친구라도....'


하지만 눈치챈 순간 이미 얀붕이와 얀진이는 이미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어떻게든 그 틈을 만들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고 종국에 얀순이는 얀진이를 깔고 앉았다. 질투심에, 간절함에 눈이 멀어 칼을 휘두르고 휘두른 끝에 얀진이는 더 이상 저항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스스로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은 그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증거를 없애야만 했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눈에 스마트폰의 화면이 들어왔다. 얀붕이는 아직까지도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작게 스마트폰 쪽에서부터 울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일반 사람이었으면 범행 현장이 완전히 드러났다며 두려움에 떨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얀순이는 황홀한 듯 미소지었다.

얀붕이는 절대 이러한 사실을 누구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착하고 겁이 많은 그는 이제는 유일해진 소꿉친구의 범행을 공공연연하게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둘만의 비밀이 생겼다. 그것에 더불어 얀순이는 이제 그가 자신의 손에 완전히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얀순이는 얀진이를 죽였다. 얀붕이는 얀진이가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들켰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가 누구에게 발설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