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8)

 

 

 

 

 

 

바보조차 되지 못한 네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

 

 

 

 

 

 

17.

 

“……뭐?”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은, 스타벡 왕자였다.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방금 들은 그 말대로, 결투 재판을 요청합니다. 이 재판은 잘못됐으니까요.”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는 거냐? 그레이스!!”


스타벡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 으하하하하……! 그래서 그 상대는 저입니까, 그레이시아 님?”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라비스 경이 말했다.


“당신이 왕자의 대리인으로서 저와 싸우는 겁니다.”


“그딴 제안을 내가 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내기엔 판돈이 필요한 법이죠. 당신이, 라비스 경이 저를 이기면- 모두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제 몸도, 마음도 내드리죠. 영원한 충성과 애정을 맹세하겠습니다.”

 

내 말에 스타벡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단, 제가 이길 경우 얀센의 죄를 묻지 마십시오.”


“저런 촌놈한테 그럴 가치가 있어, 그레이스?”

 

“맞습니다! 저는 그럴 가치도 없는 바보입니다, 아가씨!”


“너는 닥치고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비스 경의 앞까지 걸어갔다.

 

“설마 왕국 최강의 검사, 3검의 라비스 T 베킨이 결투에서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저도……당신이 얼마나 강할지 늘 궁금했답니다.”


그가 씩 웃자,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는 나를 죽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상기하면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왕자님은 손해 볼 게 없습니다.”


“뭐, 그렇지. 게다가 질 리가 없잖아……라비스는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으니까!”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스타벡 왕자가 말했고, 나는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럼 일이 이렇게 됐으니, 평소 말하고 싶었던 걸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뭐?”


“첫째, 나는 네가 싫어. 너랑 결혼해서 왕비가 될 바엔 차라리 돼지의 창부가 되겠어.

 

둘째, 다신 나를 그레이스라고 부르지 마.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오니까.”

 

“너, 너-”

 

“이번만큼은 인정할게. 얀센, 내가 틀렸어. 역시 저런 병신이랑 결혼하긴 싫네.”
 
“제가 잘한 겁니까?”


“잘했어.”


그 때, 상황을 지켜보던 재판관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간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결투 재판을 허가합니다. 앞서 규칙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양측은 결투에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거나

 

전투 불능, 혹은 항복을 받아내면 승리합니다. 둘째, 패배한 쪽은 무조건

 

미리 합의한 대로 이행해야 합니다. 셋째, 결투에선 아무도 간섭할 수 없으며

 

이것이 발각될 경우 즉각 실격패 처리합니다. 그 외엔 반칙도 규칙도 없습니다.

 

결투는 3시간 뒤, 마을의 광장에서 시행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듣고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 아버지가 옆을 지나가던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어쩔 셈이냐.”
 
“…….”


“네가 이기든 지든, 우린 이득 볼 게 없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게냐?”


“때늦은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해주시죠.”


아버지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평생을 당신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불만이더냐?”


“아뇨. 다만 이번만큼은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생각입니다. 언제까지고 당신의

 

실에 휘둘릴 수야 없겠죠. 저는 인형이 아니니까요.”

 

나는 손을 뿌리치고 재판장을 빠져나왔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18.

 

갑주를 챙겨 입고, 마지막으로 얀센과 대화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른다.

 

라비스 경은 강하다. 내가 이기더라도 팔이나 다리를 내줘야 할지도 몰랐다.

 

“얀센.”
 
“아가씨…….”


그는 여전히 철창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그러신 겁니까?”


“생각해보니 말이야, 널 만나기 전까지 나는 인형 같은 존재였어.”


모두가 영웅이니 아가씨니 떠받드는 예쁜 인형 말이야.

 

나의 말에 얀센의 표정이 굳었다.

 

“너를 거둬들인 게 처음으로 내가 내 의지로 한 일이었어. 왜냐하면, 내겐

 

모두 똑같았거든. 이름과 얼굴이 다를 뿐 본질적으론 모두 똑같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달랐지. 너만은 달랐어, 너만큼은……모두와 달라.”

 

그 어느 부류에도 들어가지 않는 인간.

 

바보조차 되지 못한 가엾은 인간.

 

“하나 맹세해. 얀센, 내게 맹세해. 이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맹세하는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이기면 말해줄게. 맹세하겠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맹세하겠습니다!”

 

그 때, 문이 열렸다. 때가 되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내가 질 것 같지만 말이야.”


“안 질 겁니다.”


얀센이 말했다.

 

“아가씨는 절대 안 집니다. 반드시 승리하실 거예요.”
 
“어떻게 장담하는데?”


“……믿고 있으니까요.”


나는 얀센을 뒤로하고 광장으로 나갔다.

 

미리 사람들을 대피시켰고, 주위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임시로 경기장처럼 만든 곳이었다.

 

그는 저 멀리서 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설마 당신과 싸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레이시아 님.”
 
“뭣하면 기권하셔도 됩니다만.”


“일생일대의 기회를 발로 찰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죽이진 마, 라비스! 특히 얼굴은 안 돼!”


스타벡 왕자가 외쳤다. 하여간 저 병신은 얀센보다도 눈치가 없었다.

 

“그 남자에게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저도 모르겠군요.”


“……많이 변하셨군요.”


결투 시작! 재판관이 외치자마자 라비스 경이 사라졌다.

 

“목숨을 빼앗으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저도 당신을 상대론 여유가 없거든요.”


‘뒤!’

 

나는 앞으로 굴러 그의 일격을 피했다.

 

이것이 그의 권능……순간이동.

 

반경 15M 이내라면 0.5초 안에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별 거 아닌 단순한 능력이지만 사용자가 그 라비스 경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5M 안에 들어가면……아무것도 못하고 죽겠지.”


요점은 어떻게 거리를 유지하느냐다.

 

순간이동은 5초에 한 번 꼴로 쓸 수 있다. 

 

쓰러트리려면 그가 순간이동을 쓴 직후뿐. 그 외엔 승산이-

 

“저랑 싸우는 도중에 딴 생각을 할 여유도 있으시군요.”


“큭!”


나는 얼음으로 방패를 만들어 그의 일격을 막았다.

 

어지간한 공격으론 흠집도 못 내건만, 얼음은 마치 유리처럼 깨졌다.

 

카앙! 까앙! 몇 번이고 얼음 방패를 만들어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빠르다. 순간이동 따윈 문제가 아니야- 

 

라비스 경에게 그건 어디까지나 거리를 좁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진짜 무서운 건 무시무시한 속도와 힘,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전투 경험이다!

 

“그거 아십니까? 당신은 사실,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검이 사라졌다.

 

어디 갔지? 그 순간, 그의 검이 ‘철퇴’로 변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과 싸운 적이 없기 때문이죠.”


변한 게 아니다. 바꿨다. 대체 무슨 수로?

 

콰아앙-! 

 

어마어마한 충격. 나는 저 멀리 날아갔다.

 

왼팔이 부러졌다. 갑주를 입고 있었건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라비스는? 없어졌다. 어디로 간 거지?

 

……위!

 

나는 몸을 굴려 피했지만- 그가 내 등을 걷어차 넘어트렸다.

 

“크윽!?”


“인간은 패배를 알기에 강해질 수 있습니다. 저의 무패 신화는 헛소문이죠.

 

저도 적잖이 패배하고 실패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강합니다.”

 

콰직! 콰드득! 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철퇴를 휘둘러 나를 압박했다.

 

나는 바닥을 구르며 그의 공격을 피할 뿐이었다. 

 

“으아아!”


내 주위로 얼음의 송곳을 날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태세를 가다듬었다.

 

“허억……으그윽……어, 어디로 간 거야……!?”


또 사라졌다. 매번 이런 식이다, 공격하려고 하면 사라진다.

 

이래서야 상처조차 입힐 수 없어. 기회는 한 번뿐이다, 한 방에 끝내야한다.

 

“찾을 수 없다면…….”


이렇게 무식한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찾을 필요조차 없어!”


내 주위를 모조리 얼린다.

 

어디로 튀어나오든 이거면-

 

“당신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라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능력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릅니다. 순간이동이 아니라, 위치를 바꾸는 겁니다.”


……!

 

언제 바꾼 거지? 나는 어느 건물에 있는 진흙구덩이에 처박혔다.

 

움직일 수 없어. 갑주가 진흙에 엉켜서, 아무리 힘을 줘도 걸렸다.

 

“이건!”


“거기선 얼음도 쓰지 못하겠지요. 주위를 얼리면 진흙도 같이 얼어붙을 테니까.”


라비스 경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잔꾀를……!”
 
“전투에선 비겁이니 정정당당함 따윈 필요 없습니다.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

 

매사에 공정함을 중요시 여기고 있지만……당신은 적당히 봐줄 수 없거든요.”

 

하지만 당신을 죽이고 싶진 않습니다. 라비스 경이 이어서 말했다.

 

“항복하십시오. 왕국의 3검인 당신을 죽이는 건 왕국 전체의 손실이며 나아가

 

인류의 손해입니다. 비록 그 쓰레……아니, 왕자님의 꼭두각시라도 무가치한

 

삶은 아닐 겁니다. 일단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의외로 말이 많네요, 라비스 경.”


나는 진흙에서 기어 나왔다. 

 

“그런 애송이의 개로 살면 입도 그리 가벼워지는 겁니까?”


“……그런 당신이야말로 생각보다 감정적이군요.”


“어떤 바보한테서 옮은 것 같네요.”


건물이 폭발했다.

 

그렇게 착각할 정도의 힘으로, 그가 철퇴를 휘둘러 나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크아……으으윽……!”


“당신의 의지를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니 저 또한 그에 맞는 예의를 보여야겠군요.”


철퇴가 다시 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가 검을 칼집에 넣었다.

 

“고통은 없을 겁니다.”


스걱-

 

정신을 차리니 베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커억……?!”


뭐지? 분명 15M 바깥인데, 나를 베었다. 무슨 수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거리를 조금 잘못 쟀군요.”


그 말이 옳았다. 만약 칼날이 더 깊숙이 들어왔으면 나는 방금 그걸로 죽었다.

 

“이번엔 확실히 목을 베어드리죠.”


카아앙-!


그 목소리와 동시에 얼음벽이 베였다.

 

임시방편으로 세운 거지만- 위력은 평범한 공격보다 약하다.

 

만약 아까처럼 휘두른 것이라면 그 일격으로 나를 얼음벽과 함께 베었을 터.

 

카앙! 쩌저억- 몇 번이나 공격이 날아왔고, 나는 겨우겨우 얼음벽으로 막았다.

 

출혈이 점점 심해졌다. 의식도 점점 흐려진다.

 

‘얼음으론……이길 수 없어.’

 

지금까진 지금의 나로도 이길 수 있었다.

 

얼음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나로선 이길 수 없어.

 

“알고 싶어.”


나의 육체는 나의 정신을 따라간다.

 

나의 힘은, 나의 마음에서 나온다.

 

알고 싶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고 싶다.’

 

그 순간 보였다. 보이기 시작했다, 미래의 궤적이 읽혔다.

 

마치 영혼이 내 몸을 빠져나간 것처럼 주위에 선명하게 보였다.

 

라비스 경이 보였다. 내가 보였다, 나를 감싼 세상이 보였다.

 

“이제 포기하신 겁니까?”


“아뇨. 하나 예언하죠, 당신은 방금 그 일격으로 절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


그가 공격했고- 나는 피했다.

 

다시 공격했고, 피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나 피했다.

 

“어떻게……!?”


“아무래도 당신이 옳았던 모양이군요. 네, 저는 저보다 강한 사람과 싸워본 적이 없기에……

 

오만하게도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다고 착각한 모양입니다.”

 

미래를 읽는다. 앞으로 그가 할 모든 행동을 예측한다.

 

몇 번을 공격해도 닿지 않는다. 

 

3초 뒤, 그가 위치를 바꿔 나의 뒤로 온다.

 

나는 그가 위치를 바꾼 순간- 뒤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커억……!”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저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군요.”


콰앙-! 콰드득! 우지끈!


라비스 경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이거……이거 아무래도……쿨럭……! 제가, 진 것 같군요.”


“그런 모양이네요.”


“……저도 감사드리죠. 당신에게 패배한 덕분에, 저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가 검을 바닥에 꽂았다.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겠죠. 그럼 그 때엔, 다시 싸울 기회가 오길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승자를 알리는 외침과 함께, 싸움은 거기서 끝났다.

 

그 직후 나는 기절하듯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아아.

 

……이런 만족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19.

 

눈을 뜨니 얀센의 얼굴이 보였다.

 

꼴사나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무심코 그의 머리를 때렸다.

 

“아파파파!”


“뭘 빤히 보고 있는 거야.”


“아니, 왜 간호해드리고 있는데 때리시는 겁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얀센이 여기 있다는 건……스타벡이 약속을 지켰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2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상처가 깊지 않아서 금세 치료했습니다!”


“……흉터 남으려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볼- 아파파파파! 왜 또 때리신 겁니까!?”


“이번에도 똑같은 이유야.”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라비스 경이었다. 그도 배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벌써 깨어나셨군요.”


“내장을 터뜨려죽일 기세로 쳤는데.”


“나이를 좀 먹긴 했지만 그 정도론 안 죽습니다.”


스타벡은?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너처럼 무능한 놈은 필요 없어! 라고 소리친 다음 혼자 멋대로 돌아갔습니다.”


“끝까지 애처럼 구는 군요.”


“몸만 큰 아이니까요……그런 점 때문에 부탁받아서 호위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겠죠. 누가 뭐래도 스타벡 왕자님 본인이 저를 해고했으니까요.”

 

“어머, 기뻐보이시는데요?”


“이크, 들켰습니까?”


라비스 경이 지친 듯 책상에 걸터앉았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약혼이 파기됐습니다만.”


“이제 됐어요. 그런 놈의 왕비가 되어봤자 그다지 행복할 것 같진 않더군요.

 

애당초 제가 없으니 스타벡도 왕이 될 순 없을 겁니다.”

 

“서로에게 손해뿐이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가 어깨를 으쓱한 뒤 돌아섰다.

 

“패자는 조용히 물러나는 게 올바른 도리겠지요. 신세졌습니다, 그레이시아 님.”


“배웅은 필요 없겠죠. 무탈하시길.”

 

라비스 경은 그렇게 떠났다. 어디로 갈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얀센?”


“네, 네에.”


“잠깐 걷자. 따라와.”


“아니, 상처가 깊으신-”


“명령이야.”


나는 침대에서 나온 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를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이윽고 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이란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우리, 싸우기 전에 맹세했지?”
 
“아, 네. 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가르쳐줄게. 얀센, 나는 오늘 너의 목숨을 구했어. 맞아?”


“마, 맞습니다! 제 목숨을……구해주셨죠.”


“그건 용서할게. 너는 날 위해서 그렇게 했고, 결과가 이렇게 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용서해줄게. 무능한 부하의 뒷수습을 하는 것도 상관의 일이니까.”

 

나는 얀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너를 고른 이유, 알고 있어?”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는 구멍이 있었어.”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은 한없이 크고 깊어서, 그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망가졌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고민해도.

 

그 구멍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인간도 세상도 내겐 무가치했어. 무엇을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조차 모른 채

 

나는 그저 살아왔어. 모두가 나를 영웅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영웅이었던 적이 없어. 그저 명령에 따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니까.”

 

“아가씨…….”


“그 구멍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는 알지 못했어.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어.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 그게 구멍의 정체였어.”

 

무릎을 꿇어. 나는 얀센에게 명령했고, 그는 그 말에 따랐다.

 

“네가 구해주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기대해버렸어. 어쩌면 네가 나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무 힘도 없는, 바보조차 되지 못한 무능한 네가……나를 구할 거라고.”

 

“…….”


“얀센,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만약 내가 구해달라고 말하면, 너는 날 구해줄 거야?”

 

“구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나를 구하도록 해. 맹세해, 너의 목숨은 오늘 이 순간부터 나의 것이야.

 

너는 오직 나만을 구하고, 나만을 지키고, 나만을 생각해. 너의 모든 것은 나로 인해

 

존재하고 나로 인해 허가돼. 나의 경비병으로서, 영웅으로서……이 구멍에서 나를 꺼내줘.”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흐느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토록 나약하고 어리석은 네가, 너만이 나를 이해해줬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기적인지- 너는 모르겠지.

 

“저, 얀센은……아가씨만의, 아가씨를 구하는……아가씨를 지키는 경비병이 되겠습니다.”

 

“그래. 나의, 나만의 영웅이 되어줘. 그럼 나도, 언제든 너를 구해줄 테니까.”


영웅이 되지 못한 너와.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

 

너는 그 날, 나만의 경비병이 되었다.

 

우린 서로의, 너만을 위한 영웅이 되겠노라고.

 

이 아름다운 노을 앞에서 맹세했다.

 

 

 

 

 

 

20.

 

“씨발, 씨발, 씨발……!”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거야?


다 그 새끼 때문이다. 망할 촌놈 새끼가 사고만 안 쳤더라면……!


쿠웅! 그 순간, 마차가 멈췄다. 뭐지? 벌써 도착했을 리는 없는데.


“스, 스, 스타벡, 왕자님…….”


“뭐하는 거야, 이 무능한 병신 새끼가……마차도 제대로 못 몰아!?”

 

“어머, 너무 그렇게 해. 아니, 말실수했네. 너무 그러지 마.”


여자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그 여자가 마차에 앉아있었다.

 

뭐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이 년은 대체 누구야?


“네 년, 네가 지금 누구 안전인지 알고 있느냐?!”
 
“모르겠는데. 아, 또 실수했네. 알고 있지.”


기이한 모습의 여인이 씩 웃으며……아니, 울며 말했다.

 

그나저나 왜 속옷을 옷 바깥에 입고 있는 거지? 아름다운 외모지만

 

남자처럼 보였고 또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뒤죽박죽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추했다. 우아하면서도 천박했다. 

 

“넌……누구냐?”


“아참, 소개가 빨랐네. 아니……소개가 늦었네. 나의 이름은 ‘반전의 마녀’

 

베그우즈. 스타벡 제 5왕자, 당신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온 암살자……야.”

 

“암살자라고? 네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고 있는 거냐? 날 죽이면

 

아버지가 네년들을 모조리 찾아서 죽여 버릴 거라고. 분명 그럴 거야!”

 

“상관있지. 아니, 상관없어.”


“무슨-”

 

퍼석-

 

그 순간, 모든 것이 ‘거꾸로 됐다.’

 

나는 죽었다. 몸 전체가, 내장과 피부가 ‘반대’가 되어 죽었다.

 

“흐음, 왕자라도 몸 안은 다르……아니, 똑같구나.”


마지막 순간, 나는 어둠 속에서 들었다.

 

“왕의 씨앗은 모조리 죽이겠어. 모든 건 어머니를 위하여.”

 

 

 

 

 

 

 

 

 

 

chapter 1. 영웅은 경비병을 만나버렸다 - 完

 


 

이하 안 읽어도 되는 후기.

 

우선 얀순이가 얀데레로 안 나와서 심히 좆같았을 사람들에게 먼저 사과함.

 

애초에 이 소설이 ‘얀순이가 얀데레가 되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거여서……솔직히 나도 쓰면서 이래도 되는 건가 고민을 많이 했음.

 

챕터 2는 스토리 좀 정리되면 쓰겠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모름.

 

아무튼 얀데레 소설인데 얀데레가 제대로 안 나와서 미안해 진짜로...

 

그래도 읽어주고 응원해줘서 고맙다. 열심히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