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오빠 카짓이 또 풀 뜯어 먹고 있어"

 과제와 씨름 중이던 나는 의자를 돌려 뒤를 쳐다본다.
열에 들뜬 상태로 창문에 있는 화분을 으적대던 고양이,
내가 키우는 고양이 카짓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카짓의 꼬리뼈 부분을 어루만지는 저 아이는 얀순이, 원래는 옆집에 사는 나보다 약간 어린 아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내 부모님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는데 두 분 모두 종군기자로 최근 분쟁이 다시 시작된 지역으로 가셨다고 한다.
 직업 특성상 매우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기에 종종 그녀의 부모는
근처에 자취하는 내 집에 짧게는 몇 주, 길게는 2달 동안이나 얀순이를 내게 맡기고 가셨다. 직업을 바꿀 수는 없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물욕 앞에선 슬그머니 사라졌다.
 얀순이의 부모님이 나에게 얀순이를 맡길 때마다 꽤 큰 지원을 해주시기에 나는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를 맡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얀순이가 마냥 귀찮은 짐짝은 아니다.
공부도 잘하고 붙임성도 좋고 귀여운 구석도 있는, 엄밀히 따져 내가 늙은 건 아니지만 "요즘 얘 같지 않은" 아이다. 무엇보다 혼자나 고양이 한 마리랑 같이 사는 건 심심하기에 나로서는 환영이다.

"그런데 말이야 도로가 너무 가까운 거 아냐? 시끄러운 데다 카짓도 가끔 놀라서 아치 모양으로 나한테 날라온다구"

"최대한 돈을 아껴보겠다고 한 거지, 도로가 이 집보다 먼저 있었어
도로보다 늦게 들어온 집에서 그 집보다 늦게 들어온 내가 어떻게 항의를 하겠니"

"너도 외국 많이 가봤으면 알지 않아? 미국 같은 곳은 도로 양옆으로 집들이 있는 거"

"치이...부모님은 나한테 외국 얘기도 하나 안 해주시는데, 오빠까지 그러기야?"

"아 그러고 보니 거기 ㅈ....아 아니다. 나중에 네가 더 크게 되면 알려줄게"

"어? 왜?! 왜 말을 하다 말아!" 얀순이가 품에 고양이를 안고 퉁명스럽게 나에게 항의한다.

 어리다면 어린 여자애한테 전쟁터가 어떤지 얘기해주는 부모는 당연히 얼마 없을 것이다.
투정을 부리는 얀순이를 뒤로 하며 얀순이에게서 카짓을 받아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마저 과제를 작성한다. 고양이는 따뜻해서 좋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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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정도 적고 나서 피곤해진 머리를 올려 시계를 보자 어느새 새벽이다. 카짓은 내 발밑에서 배를 보이며 고릉거리고 있다. 입가에 아까 씹은 잎 조각들이 약간 붙어있고 얀순이는 책상 옆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다.
고양이와 얀순이 둘 다 외로움엔 강한 듯 싶다. 잠에도 역시 둘 다 약하고 말이다.

 아주 옅게 나오는 웃음을 삭이며 나는 계단을 올라 다락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청했다. 내일은 주말이니 늦게까지 자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침 6시 반이었다. 보통 전역하면 3일 만에 사회에 적응한다던데 난 몇 달이 지나도 그대로다. 게다가 아침엔 머릿속에 '이곳이 내 집이다~'라는 환청이 들린다.

 짜증을 내며 일어나 옆을 살피자 내 옆에서 자고 있던 카짓이 사라졌었다. 이상하다. 보통은 지금까지 자고 있을 시간인데....

 얀순이가 깨지 않게 주의하며 집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카짓은 온데간데없이 문자 그대로 증발한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을 느끼자마자 집 밖으로 나가 건물 근처를 돌아본다.
사실 카짓이 사라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새벽엔 날씨가 선선해 창문을 열어놨더니만
 가끔 까먹고 창문을 열어 놓고 자면 종종 있는 일이다.
옷을 껴입고 문을 열자 율렬한 바람이 내 귓속으로 들어가 달팽이 뒤의 속림프를 얼리는 듯하다.

 너털거리며 집 근처를 돌아봤지만, 집 근처엔 내 고양이는 없었다.
슬슬 날이 밝기 시작하는데....추워 죽겠는데 왜 나가가지고...
불평하자 나타난 것처럼 저쪽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언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틀림없다. 저건 내 고양이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자 카짓은
구토를 한 듯 입에 하얀 무언가를 묻힌 상태로 누워있었고 몸은 마치
언 생선토막같이 차가웠다. 틀림없이 죽었다.
며칠 전 집을 나설 때마다 집 근처에 고양이밥같은게 놓여 있긴 했는데 길고양이와 캣맘들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건물 근처에 고양이밥에 타이레놀을 섞어 뿌렸고 창문으로 나간 카짓이 타이레놀이 든 그 밥을 먹은 것 같다.

 카짓의 주검을 앞에 두고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침대에서 약올리듯이 뒹굴거리던 모습과 내 다리에 다가와 뺨을 비비던 모습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카짓을 좋아하던 얀순이에게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떠오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맞다 거기.."

 그러다가 머릿속에 처음 이사 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사한 옆집 여자의 노환으로 죽은 개를 뒷산 깊은 곳 어딘가에 묻어줄 때 같이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내 키만 한 대형견이라 혼자 옮기긴 힘들어서 쭈뼛거리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그때의 기억을 조립해본다. 뒷산 으슥한 길 무지개다리를 건넌 애완동물들을 묻는 일종의 공동묘지 같은 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난 카짓의 주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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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으으으음ㅁ....잘 잤다...어 오빠 주말인데 벌써 일어나 있었구나아..."

"어....? 그런데 카짓은? 새벽에 내 이불속에 들어와 있었는데..."

마치 올 것이 온 듯 빵을 자르면서 준비해놨던 말들을 한다.

 "얀순아 상처받지 말고 잘 들어, 카짓은 창틈으로 잠시 나간 것 같아"

"가출...? 카짓이 집을 나갔단 소리야?"

 "너도 알다시피 고양이들은 길들었다 해도 야생성이 매우 강한 동물이야, 특히 카짓은 호기심이 많잖아"

 "거짓말이지? 집 주변에 있는 거 아니야? 카짓이 뭐가 싫어서 집을 나가겠어?!!"

 흥분하여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가려는 얀순이를 끌어 붙잡았다.

 "얀순아, 찾아봤는데 집 밖에도 카짓은 없었어... 너무 걱정하진 마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곧 돌아올 거야"

 사실 거짓말이다. 가출한 고양이가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난 카짓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봤고 확실히 몸은 식어있었다.

 그저 얀순이가 최대한 빨리 기억 속에서 카짓을 잊어버리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우...으으...."
얀순이가 내 팔 속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저 나이에 애완동물과의 이별은 꽤 충격이 크지
그래서 카짓이 죽었다는 사실은 말하면 안 된다.
언젠가는 알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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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저러네
얀순이는 사라진 카짓의 밥그릇을 골똘히 보고있다. 붉어진 눈시울은 가라앉을 줄 모르고 한 곳에 집중돼있다.

"얀순아 그만하고 밥 먹어"

"밥 먹을 기분 아니야"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붓고 끈적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

"그래 같이 찾아보자"

그 말을 듣자마자 얀순이가 내게로 고개를 홱 돌린다. 그러곤 이내 두꺼운 옷을 걸치며 내 옆에 달라붙는다.

"빨리 가자!"

벌써 현관문을 연 얀순이를 위해 뭔가라도 보여줘야겠지

 내려가는 계단에서 얀순이는 진지하면서도 격양된 어조로
나에게 나름의 추론을 설명한다.

"내가 보기엔 분명 외곽 울타리 쪽이야! 거기에 어떤 아줌마가 들고양이들한테 맨날 밥을 주더라고!" 분명 카짓도 거기 갔을 거야!"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을 전개하는 얀순이를 보며 어딘지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든다.

집 밖에 나오니 여전히 서늘한 바람이 불고 껴입은 사람들이 종종 지나가는 게 보인다.

"나누어져 찾아보자, 난 외곽으로 가볼 테니 얀순이 넌 어디 가볼래?"

"난 아까 말했던 펜스 쪽으로 가볼게 찾으면 거기로 와 오빠!"

그 말을 남기고 얀순이는 펜스 쪽으로 달려갔다.

역시 있을 리가 없지

 한동안 건물 외곽을 서성이던 나는 이내 찾는 척 하는 걸 그만두고 슬슬 얀순이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언제나 이런 짓을 할 때는 마음이 아프다. 마치 LIS 환자같이
내 정신이 몸 안에 갇힌 기분이다. 그래도 얀순이를 위해서라면 쉬쉬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합리화하며 얀순이에게 돌아간다.

 그런데...뭔가 이상하다...펜스쪽에 쪼그려서 웃고 있는 저건 분명 얀순이다. 이상한 건 얀순이가 아니다. 이상한 건 얀순이를 보고 꼬리를 세우고 등을 굽히고 있는 저 고양이다. 그래...저건 분명 죽은 카짓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깄는 거지?

"아 오빠!! 여기야! 내가 카짓을 찾았어!! 어때! 내가 생각한 대로
이곳에 있었다고!"

멍하니 홀린 듯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카짓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왜 그래? 내가 먼저 찾아서 그래?"

"어...? 아...아니야..잘했어....찾았으면 돌아가자...."

 뭔지 모르겠다. 어떻게 카짓이 살아있는 거지? 어떻게? 다른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 아닐까 하고 온몸을 확인해봤지만 그건 카짓이 맞았다."

 그리고 지금은 내 의자 위에서 식빵을 굽고 있다. 그런 태평한 모습을 보니 내가 아는 카짓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뭐 기이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카짓은 돌아왔으니 결과만 좋으면 좋은 거 아니겠는가
군대에서도 기이한 경험은 많이 했는데

 행복하게 베이크드 빈을 올린 식빵을 물어먹는 얀순이를 보며
그런 건 아무렴 됐으니 얀순이만 충격을 안받았으면 괜찮다 생각하며
얀붕이는 자신의 빵을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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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따라 카짓이 좀 이상하다. 얀순이한테 안 하던 하악질을 하고 침대를 물어뜯고 무릎 위에 올라오면 절대 내려 가려 하지 않고 떼어놓으려 하면 날 물려고 한다.
물론 얀순이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얀순이한테 더 심하다.
무릎 위에 올라가려 하지도 않고 얀순이가 나와 붙어있으면 얀순이의 다리를 물거나 한다.

오늘 오전에는 얀순이가 손가락을 물렸다.
그런데도 평소에 고양이를 좋아하던 얀순이는 그런데도 좋다고 헤헤거렸지만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는듯한....  새벽까지 스크래쳐를 조사놓고 있는 카짓을 바라보며 불길한 생각이 잠겼다.

"으...오빠 이것 좀 봐 팔이 긁혔어."

선명하게 몇 줄로 팔에 불그스름한 적색선이 그어져 있었다.
카짓을 안고 자려다가 할퀸 것 같다.

"괜찮아? 빨리 약이라도 안 바르면 덧나거나 할 텐데... 소독부터 하고 연고를....아 새벽인데 지금 연고가 없네..."

"괜찮아! 아직 편의점은 문 열었을 테니 빨리 가서 사 올게"

얀순이는 서둘러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금 집 안에는 꼬리를 탁탁 치며 음산하게 날 응시하는 카짓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그렇게 순하던 고양이가 뒤바뀐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렇게 급변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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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기기기기기기긱!!!!!!!!!

생각에 잠긴 사이 밖에선 엄청난 마찰음이 들렸다.
평소엔 차가 지나갈 때 나는 바람 소리만이 들렸지만 이런 소리는 흔치 않았다.
'잠깐 설마...'
순간 불길함이 엄습하였고 머릿속엔 최악이 떠올랐다. 서둘러 창문밖을 보자 차 한 대가 질주하듯 도로를 빠져나갔고 도로 위엔 뭔가가 그려진 듯 놓여있었다.

"야...얀순아!"

순간 엄청난 속도로 아래로 내려갔고 얀순이의 근처에 주저앉았다. 바닥엔 피가....피웅덩이가 있었고 붉은 구슬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얀순이의 몸은 실이 끊어진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낮은 기온이 체온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어서 신고를 해야 될 거란 생각이 스쳤으나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곳엔 CCTV도 없고 얀순이를 치고 튄 놈이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얀순이는 의사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살아있진 않았다.
'...'

"얀순아...?얀순아...! 눈 좀 떠봐아!!!"

얀순이의 옷을 잡고 흔들다 이내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다가 얀순이 옆에서 얼굴을 움켜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건물의 불은 다 꺼져 있었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신고하는 것밖에 없었다. 경찰에 신고하면 범인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19를 불러도 연순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카짓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얀순이가 당했다.
아직도 카짓을 찾았다며 해맑게 웃고 다람쥐같이 토스트를 베어 물던 모습이 주검 위에 덧씌워져 보이는 것 같은데..
그리고

얀순이네 부모님께는 뭐라 설명해 드려야 하지?

잠깐...카짓? 내가 뭘하고 나서 카짓이 살아 돌아왔었지?
...그 묘지....

그 묘지에 카짓을 묻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왔지
생각해보면 옛날의 그 여자도 이사하기 전에 죽은 개와 똑같이 생긴 개와 산책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그때는 그냥 형제견이라 그렇다 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대형견을 2마리나 키울 크기의 집은 아닌데.. 더군다나 그 개도 뭔가 이상했다.. 걷는데 집중하지 않고 카짓같이 주인 다리 근처만을 맴돌고 있었다.

그때 그 여자의 당황하는 모습, 카짓과 비슷하게 이상한 상태의 개...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

얀순이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 방법 외엔 더 이상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난 얀순이를 안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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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청소할 때 더러워진 옷을 세탁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샤워를 하며 이 도박이 어떻게 끝날지 떠올렸다.

만약 아주 만약에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얀순이가 죽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법의학자들은 아주 간단하게 교통사고로 죽었고 한 번 매장된 적이 있음을 알아낼 것이다. 그러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나는 그저 얀순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얀순이만 카짓처럼 무사히 돌아오면 모든 게 괜찮아 질 거야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똑똑똑

새벽 4시쯤 됐을까
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식탁에 엎드려 밤을 지새우던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몸의 털이 쭈뼛 섰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귀신은 보통 새벽 3시에 찾아오고 사람은 보통 12시 넘어서는 찾아오지 않는다.
나는 문 앞에서 그저 얼어있을 뿐이었다. 보통은 이 시간에 자고 있을 테니 이러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오빠....열어줘...나야..."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통 죽은 사람은 얼굴과 목소리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내 기억 속에 희미해지던 음색이 약간 낮게 깔려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튕겨 나가듯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흙이 잔뜩 묻은 얀순이가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흰 머리는 더러워졌고 초점 없는 눈은 또렷이 나를 보고 있었다.

곧 나는 홀린 듯이 얀순이를 껴안고 무릎 꿇어 흐느꼈다.
"살아있었구나...? 다행이야 나는 얀순이가 진짜 죽은..줄"

"??무슨 소리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짧게 말하는 얀순이

"근데 샤워부터 하고 싶어 왠지 모르겠는데 좀 찝찝해"

얀순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나지막이 귀에 속삭인다.

그래도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은 것 같다.

이상한 점이라면 새벽에 문 앞에서 웬 남자가 여자 앞에서 무릎 꿇고
울고 있다는 점이겠지

나는 얀순이를 집으로 들인 후 얀순이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자 얀순이를 침대에 누워 자게 한다.

"오빠"

"왜?"

"같이 자면 안 돼?"

"다 큰 얘가 무슨 소리야, 이젠 카짓이 널 싫어하진 않는 거 같은데?"

오늘 얀순이가 돌아오자 카짓의 얀순이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공격은 하지 않았지만 좋아서 안기지는 않는 상태였다.

카짓이란 말을 들으니 얀순이의 눈에서 빛이 돌았다.

"카짓은 더이상 좋은 고양이가 아니야"

내뱉듯이 말하던 얀순이는 침대에 누워 내 쪽으로 오른팔을 뻗었다.

"이번만이야?"

나는 하는 수 없이 얀순이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처음 접했을 땐 황홀한 마음에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깨끗한 상태로 보니 얀순이의 몸이 무언가 변한 기분이다.
키가 커졌달까 전체적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



내 바깥쪽 옆구리를 무언가가 부드럽게 잡는다. 배에 압력이 들어가는 걸 보니 이건 얀순이의 팔이다.
그저 올려놓듯이 팔을 댄 것뿐이지만 그 팔에 흐르는 완력을 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 가녀린 팔에선 나올 수 없는 완력이 흐르고 있었다.
내 몸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껴안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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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짓때와는 달리 인간이니 더 위험할 수도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위험해진 건 아닌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뀌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마냥 어리고 천진난만했던 얀순이가 바뀌었다. 마치 파과증에 걸린 것 같이 옛날모습은 희미해졌다.

"오빠아 일어나~ 밥 다 차려놨어~"

일어나보니 식탁에는 본 지 얼마 안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고
얀순이는 내 옆에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일어나면 강제로 끌고 식탁까지 갈 거야?"

"알겠어...나갈게.."

맛은 매우 좋았다. 문제는 이게 매일 끼니마다 반복된다는 것이지

어제는 귀찮으니 저녁은 시켜 먹으려고 앱을 켰었다.
그러자 그걸 본 얀순이가 내 폰을 순식간에 낚아채더니
광채 없는 죽은 눈으로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해주는 밥이 맛없는 거야?"

"아..아니 얀순아 난 그냥 네가 오늘은 쉬었으면...ㅈ"

"거짓말...."

"응...?"

"내가 해주는 밥보다 이 사람들...아니....어쩌면 그년들이겠지....그년들이 해주는 밥이 내 밥보다 더 맛있다는 거잖아?

얀순이의 어투가 점점 더 모나게 바뀐다.

"다시 딴 년들이 만든 음식을 먹으면....그게 누구든지 찾아서
뼈를 뽑아 갈아내 빵으로 만들어 먹일 거야♡"

슬래셔 영화에 나올법한 소리를 하지만 그 죽은 눈은 진짜를 말하고 있었다.

"아...알겠어.."

알겠다고 대답하자마자 얀순이는 방긋 웃으며 폰을 침대로 던져버리고 식탁에 앉았다. 그러곤 손으로 톡톡 쳐서 어서 앉으라고 무언의 협박을 한다.

솔직히 살면서 가장 소름 돋는 때가 요즘이다. 얀순이가 바뀐 카짓처럼 몸을 해하거나 하진 않지만 분위기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무겁다. 오히려 나한텐 잘해주지만 내 주변을 훨씬 경계하기 시작했다. 마치 영역싸움 중인 고양이처럼...

그러던 중 얀순이가 돌아오고 1주가 되던 때 큰일이 있었다.

카짓....

카짓은 살아 돌아온 후 늘 내 곁에 붙어있으려 했다.
언제나 날 따라다니며 내 다리에 볼을 부비고 누워있으면 내 배 위에 올라와서 식빵을 굽고 유난히 나에게 더 집착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막교시라 6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얀순이는 아마 지금쯤 집에 와있을 텐데 이제 슬슬 얀순이가 차려주는 저녁에 익숙해져 문을 열면 뭐가 있을지 예상이 간다.

문을 열자 보인 건 역시 그랬다. 스토브엔 부글거리며 맑은국이 끓고 있었고 얀순이는 그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밥을 뜨고 있었다.

"오~마침 국물 땡겼는데"

"오빠 취향은 이미 다 알고 있지~"

숄더백을 내려놓고 샤워를 하고 나서 식탁 앞에 앉아 버섯과 고기가 가득한 국을 한 숟갈 떴다.

그런데 맛이 뭔가가 이상하다. 평소에 얀순이가 해주던 음식은 강제로 먹긴했어도 맛 자체는 돈 주고도 사 먹을 만큼 맛있었는데 맛이 뭔가 기묘하다.

기름기가 떠올라있고 누린내가 심한데 토끼나 양고기로 만든 건가?

"저..얀순아? 이거 뭐로 만든 거야?"

"암컷"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얀순이는 요리하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 미술용 흰색 토시를 끼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그 토시에는 크림색과 흰색의 털 같은 것들이 엉키듯 붙어있었다.

?설마?

"이거 설마.?."

"냥?♡"

얀순이는 내가 입을 열자 잠시 가만히 뜸을 들이더니 입고 있던 후드 앞주머니에 양손을 넣더니 뭔가를 집어 손을 자기 머리에 대고
고양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냥 손이었으면 마냥 귀여웠겠지만 얀순이의 손에 있던 건 시뻘건 단면의 하얀 고양이 귀 한 쌍이었고 하얀 머리칼에 하얀 고양이귀가 겹쳐 보인다.

'..!...:!!!.!.!!"

순간 나는 기겁해 의자 뒤로 넘어갔다.

"그 년이 자꾸 오빠 곁에 붙어있으려고 해서 말이야?
오빠 주위에 더러운 암컷이 늘 붙어서 볼을 부벼대는 꼴을 보니 차라리 그냥"

"처분했어♡"

순간 내 입에 들어간 고기의 정체를 알고 구역질을 했다.
쓰라린 액체가 목을 긁으면서 나왔다.

그걸보고 얀순이는 낄낄댔다.

"맛이 그렇게 좋아? 아니면 내가 대신 그 각다귀를 처리해준 게 그렇게 좋아?♡"

얀순이는 고양이의 귀를 식탁에 아무렇게나 던져놓더니
내게 다가와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괜찮아...난 오빠가 나만 사랑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해...그렇게만 해준다면 돈이든 뭐든..."

"시..끄러..."

내 등을 만지던 손이 이내 멈춘다.

"이 괴물년아!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자 얀순이는 다시 죽은 눈으로 변해 내게 말한다.

"괴물이라니? 경쟁자를 죽이는거말이야?"

경쟁자라니 경쟁자라니 한낱 고양이를 보고 사랑의 경쟁자라니
미친 게 틀림없다.

"혹시 관념권이라고 들어봤어?"

뜬금없어 보이는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든다.

"한낱 생각조차도 서로를 죽이는데 내가 왜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고양이를 죽이는걸 주저해야되는거야?"

'...'

궤변인지 해괴한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듣다가 얀순이 손에 힘이 들어감을 느낀다.

"하지만 괴물소리는 좀 심했는걸?"

...

허연 머리칼이 내 목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전해진다.

"오빠가 날 안좋아한다고 하면...."

"좋아하게 만들어줄 수밖에 없잖아?♡"

목에 차가운 물건이 닿는 감각이 전해진다.

"그리고 지금 말해주는 건데,

저거 사실 양고기야"

"카짓은 침대 안에서 자고 있고"

"이건 그냥 몰딩에다 빠진 고양이 털들을 붙인 거야, 잘 만들었지?"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진짜 카짓으로 나비탕을 만들었더라도

괴물소리는 좀 심했어."

덜덜 떨며 얀순이를 올려다보자 공허하던 눈과는 다른,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동안은 기억이 안 날 거야"

"잘 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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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산에서 규칙적이고 인공적인 소리가 울려 퍼지다 이내 멈췄다.










오랫동안 글을 안써서 어색하긴 한데
스티븐 킹 소설 보고 생각나서 만듬
묻으면 얀데레가 되는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