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술에 꼴은 다음날에는 이렇게 마시지 말자고 맹세한다물론 그 맹세는 어제를 포함한 수십 번은 깨졌고 앞으로도 깨질 테지만.

숙취로 비몽사몽하게 주방으로 가니 방금 막 끓인 듯한 콩나물국과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과음시킨 거 같아 죄송해요. 결국, 아저씨 생일 축하도 못 했네요. 저는 아침 운동 좀 나갔다 올 테니 좀 쉬세요.‘

어제는 얀순이한테 좀 신세를 졌지. 다 큰 어른이 옷 벗는 거까지 도움받고. 근데 어제 사진을 찍는 거 같았는데. 기분 탓이겠지

일단 얀순이는 국에서 김이 나는 것을 보니 방금 나간 거 같은데... 지금이 기회인가?

아침부터 민망하지만솔직히 나흘 동안 쌓이다 보니 한계인 참이었다마침 좋은 영상도 얀톡에다 저장해둔 터라 나는 화장실에서 휴지를 뽑아 들고 내 방으로 향했다

 

거사를 치르고 나갈 준비를 마친 뒤 문을 나서니 방금 막 돌아온 얀순이와 마주쳤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갑자기........일이....생각나서...”

매우 급하게 돌아온 듯이 숨이 찬 그녀

그래나는 약속 때문에 나가니까 밥 대충 챙겨 먹어라.”

다녀...오세요...”

대답하는 둥 마는 등을 보니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보다.

 

그렇게 약속 장소로 향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지갑은 챙겼지만카드를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아마 어제 내가 따로 빼놓고는 다시 안 넣어놓은 거 같다이놈의 정신머리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빨리 집에 갔다 와야겠다

 

문이 안 잠겨져 있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분명 불이 꺼져 있어야 하는데 켜져 있는 내 방이 눈에 띄었다얀순이 신발이 있는 걸 봐서는 얘가 내 방에 있는 거 같은데설마 이번에 건프라 살 내 비상금이라도 훔치나저번에 몰래 사려고 10만 원 숨겨놨었는데 그대로 사라진 적이 있었다범인은 확실했지만도둑놈이 제 발 저리는 꼴이라 말을 제대로 못 했었지.

 

이번에는 현장 검거라는 생각을 하며 도둑처럼 문 앞으로 살살 걸어갔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애석하게도 돈은 침대에 없단다.

 

“FBI! open up!” 

옛날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밈을 생각하며 문을 걷어차고 들어간 나는 시간이 그대로 멈췄다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라로 내 속옷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얀순이였다입 주위에는 하얀 액체가 잔뜩 묻어있고 그녀의 손은 무언가 묻은 휴지를 들고 그 곳을 만지고 있었다그녀의 나신을 보는 것도 민망해 주위를 둘러보니 침대 옆 탁자에 있는 그녀의 에이패드에는 오늘 아침에 거사를 치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매우 놀란 눈치였기에 서로의 눈이 마주친 채로 영겁의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을 받은 뒤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그녀였다그대로 나를 지나쳐 자기 방으로 갈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그 자식의 자위현장을 봤을 때 당사자보다 민망한 부모의 마음인가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그것보다 그 입에 묻어있던 거랑 그 휴지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아닐 거라는 절박한 믿음으로 쓰레기통을 뒤졌으나 오늘 아침에 사용했던 휴지가 없었다

맙소사 머리가 너무 아프다담배... 담배로 일단 머리를 식히자.

복잡한 심경으로 담배를 피우고 다시 집에 돌아오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거실에 앉아있는 얀순이가 보였다그래 내가 꿈을 꾼 거야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아저씨약속 있다더니 벌써 온 거야?”

평온을 가장하지만그녀 또한 심히 당황했었는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

넘어가면 우리 모두 행복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얀순아.“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올 것이 왔다는 듯 입을 다물고 움츠러드는 얀순이

네가 왜 내 방 영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안 물을게그것보다 너 그 휴지로 그런 짓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랬니?“ 

아저씨의 아기를 가지려고요성인 남성을 여고생이 덮치기는 힘들잖아요?”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한 미소와 함께 메이저리그급 돌직구로 돌아온 대답턱을 세게 얻어맞은 듯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가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5년 전 전혀 모르는 소방관 아저씨가 절 구해줬을 때저는 유산을 노리고 그러는 버러지인 줄 알았어요근데 아니더라고요아저씨는 그때 화재에서 내 몸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같이 구해줬어요저도 알아요내가 이렇게 사랑해봤자 이루어지기 힘들다고그래서 포기하려고도 했는데 이 눈치도 없는 사람이 계속 내 마음을 흔들잖아요그래서 알면서도 성인이 되면 나를 한번은 제대로 봐주겠지라는 희망을 품었어요근데 사람 일이란 게 참 야속한 게 내 마음을 표시하자 아저씨는 홀라당 다른 여자한테 넘어가 버리더라고요근데 더 화나는 건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잘났다는 거예요그래서 그 여자가 가지지 못한 아저씨 아기를 가지려고 했어요그러면 저를 돌아봐 주겠죠.”

...얀순아.” 

그녀의 폭탄 발언에 어떻게든 말을 끊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끊길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를 경멸하겠죠그딴 짓을 했으니까더는 아저씨한테 그런 눈으로 보일 생각을 하면 저는 이제 살아갈 수 없어요.” 말을 마치자 주머니에서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내 라이터를 주섬주섬 꺼냈다. “너 뭐 하려는설마“ 그제야 나는 바닥에 깔린 매캐한 도시가스 냄새를 눈치챘다일단 그녀를 말려야 한다

얀순아사실 내가 얀진이한테 여친 행세 좀 해달라고 했었어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내가 거절하면 상처받을 너를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미안해 그러니까 그거 좀 내려놓고 차분히 대화해보자.”

헛소리하지 마요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런 키스를 해요그리고 어제 그 여자가 보낸 사진들은 뭔데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둘이 어떤 연락을 취했던 걸까어떤 사진인지는 몰라도 얀진이가 그녀를 자극한 것은 틀림없는 거 같았다.

정말 미안하다얀순아비록 네가 원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이건 네가 어떤 짓을 한다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 마음에 상처를 준 점진심으로 미안해.”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오지 마세요불 켜버릴 거에요켜버릴 거라고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천천히 다가가자 허둥지둥하던 그녀는 결국

저는...저는...! 죄송해요아저씨 죄송해요...” 

라이터를 집어 던지고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내가 다른 여자에게로 가버리면 버려질까 봐 불안해하는 거겠지그저 그녀의 마음이 부담스러워서 경솔하게 행동한 나한테 너무 화가 났다내가 멋대로 구해버린 인생 계속 책임져야겠지일단 그녀의 안정화를 위해 얀진이와 거짓 연애는 끝내야겠다

잘했다잘했어앞으로 너를 더 신경써줄게.” 그녀를 토닥이던 중 갑자기 진동이 울리는 내 휴대폰아 나 원래 친구 만나기로 했지나는 연락하기 위해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휴대폰을 꺼냈다그러나 나는 휴대폰을 보는 터라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얀순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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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는데 뭐야나 기대해도 되는 거지히히.”

얀붕아갑자기 손에서 왜 반지를 빼는 거야?”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지금까지 여친 역할 해줘서 염치없었지만 고마웠고 얀순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거 같으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

"너 병신이야?"

어떻게 기회를 줘도 이렇게 날려버릴 수 있니? 만화처럼 가짜 연인이 진짜 연인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몰랐다니 너 만나려고 그 관심도 없는 남자들이랑 어울렸다는 거 자체가 역겨웠어 나는.“

갑자기 무섭게 왜 그러냐니 일단 이 휴대폰 좀 볼래?“

뭐냐니 이 사진들은. 그것보다 소방관이 꾸준히 관계를 맺어온 여친을 두고 입양 청소년이랑 잤다는 얘기는 세상의 뒤집힐만큼 충격적이겠지?

너무 당황하지 마. 너 아직 동정이야. 아직은.”

사실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해맞아 지금 협박하고 있는 거그러니까

그 반지 다시 끼고 우리 관계를 재정립해보는 건 어때? 얀붕아?“


후일담은 킹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