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2화 / 3화 / 4화




''저 관두겠습니다.''


''안 됩니다.''



 또 시작이네.


 그런 의중이 담긴 듯한 냉담한 어조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나와 그녀가 이러한 문답을 주고받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번 주는 3~4번 정도밖에 하지 않은 것 같으니, 평소보단 다소나마 나은 편에 속하려나.



''이번 주만 해도 벌써 20번째입니다. 사제님이 업무 포기를 선언하신 게요. 매번 사제님의 넋두리에 어울려 드려야만 하는 제 입장도 좀 생각해주세요.''



 ····이상하다.


 신실한 수녀님께서 신의 어전이나 다름없는 예배당 아래에서 거짓을 입에 담으실 리는 없을 텐데. 혹시 이 수도교엔 나와 같은 처지인 동성동명의 동지라도 있는 것일까. 확률이 희박한 가정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수녀님. 이번에야말로 깨달았습니다. 성녀님의 전속 수호사제라는 직함은 애초부터 제 몸에 맞지 않은 옷. 주신께서 제게 잠시 꿰어놓은 멍에일 뿐이라는 사실을요.''


''그러시겠죠.''


''무능한 인물이 중책을 꿰차고 있는 것만큼, 조직을 녹슬게 하는 악습은 없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라고 하는 낡은 톱니바퀴를 한시라도 빨리 갈아 끼워야만 합니다.''


''과연 그렇군요.''


''제 뜻을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녀님.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 뵙도록 하죠. 그럼 이만.''


''네. 살펴 가십시오. 레이지스 수호사제님. 내일 있을 성녀님의 아침 식사 시간까지 돌아오시는 건 잊지 마시고요.''



 언제나처럼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 내 간절한 탄원을 듣고서도 코앞에 서류 더미에 시선이 고정된 수녀님의 모습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보는 듯했지만, 여기서 뜻을 굽힐 순 없었다.


 마지막으로 체감해본 게 언제인지조차 가물가물한 평안의 한때를 손에 넣기 위해선, 내 가냘픈 육신을 짓누르는 이 무거운 직책만큼은 반드시 벗어 던져야 했으니까.


 툭.


 '사직서'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힌 봉투를 수녀님의 책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시원스레 내동댕이쳐볼까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행동을 아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하신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엔 상당히 진심이신가 보군요.''


''전 언제나 진심이었습니다.''



 언제나 성심성의를 다해, 전심전력으로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사무용 만년필로 책상 바닥을 톡톡 두들기며, 언짢은 심기를 은연중에 표출 중이신 수녀님께서 내게 물음을 구했다. 그 의문은 지당했다.


 모름지기 성녀의 수호사제라 하면, 신을 섬기는 이들에겐 왕에게 하사받는 작위보다도 영광스럽게 여겨지는 직책이자, 신의 오른쪽 자리라고도 일컬어지는 지고의 위치니까.


 모처럼 당첨된 로또 1등 복권을 찢어버리는 어리석은 인간이 과연 있을까?


 내 거동을 살피는 수녀님의 눈동자 속에서 그러한 의구심이 올올히 피어올랐다.



''크흠. 장손으로서 친가 쪽의 가업을 이어야 해서요.''


''그거 이상하군요. 사제님께선 고아원 출생의 천애고독한 태생이시지 않으셨나요?''


''사, 사실은 학생 시절 알고 지내던 교수님께 대학원생 제안을 받아····.''


''사제님 아카데미 중퇴하셨잖아요.''


''고향에···· 장래를 맹세한 약혼녀가····.''


''성인식 날, 급우분들에게 억지로 끌려간 창관에서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돌아오신 분이 퍽이나 그러시겠군요.''


''····손은 잡았어요.''


 

 급조해낸 궁여지책들이 차례차례 논파 당해버리자,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이 내게 위기를 경종했다.


 하기야, 성녀와 그 주변 인물에 관해선 몸의 새겨진 점의 개수까지도 암기하고 있는 수녀님에겐, 성녀의 전속 수호사제인 내 개인정보 같은 건 객관식 1점짜리 문제나 다름없을 터.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허나, 내게 닥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요근래 성녀님의 신체접촉이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더 이상 성직자로서의 자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기에 수호사제를 그만두고 싶다고. 


 그 말 같지도 않은 진실을 다른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망상에 사로잡힌 광인 취급 받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고, 어쩌면 성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죄목으로 종교 재판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바로 어제, 난데없이 성녀님에게 가호를 하사 받고서, 수 시간 정도 의식을 잃어버리며 생긴 기억의 공백이 앞서 말한 불안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대고 있었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의 직전까지 입술만큼은 안 된다며 능욕계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애원해봤으나, 성녀님의 지금까지의 행실로 봤을 땐 아마 저질러 버렸을 테지.


 의식을 되찾은 직후, 내 상의 안쪽에 몸을 욱여넣고서, 굴속의 토끼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성녀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성녀를 비호해야 할 수호사제가 고의가 아니라긴 하나, 그녀의 입술을 취하고 만 것이다.


 하루빨리 이 나라를 떠야 한다. 그 직후, 내 몸을 움직이는 사고회로는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유가 뭐가 중요한가요. 애초부터 저 같은 것에겐 과분한 자리잖습니까. 제 자신의 한계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대체할 만한 재목은 주변에 널리고 널렸고, 저보다 뛰어난 인재는 그 갑절은 있겠죠. 제 보잘것없는 능력으론 성녀님의 방패가 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수녀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실 리 없잖습니까.''


''하아····.''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한껏 구긴 미간에 손을 얹는 수녀님.


 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시종일관 자기 비하를 일삼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큼 기 빨리는 일은 없다는 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안 하면 이곳에 뼈를 묻게 생겼는데. 물론 물리적으로.

 


''알겠습니다. 사제님의 사직서. 수리해드리도록 하지요.''


''제 고국에는 독수리는 파리를 못 잡는단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각자 능력에 맞는 일은 따로 있다는···· 뭐라고요····?''


''사제님의 퇴직을 승인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저기···· 저, 정말요····?''


''네. 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 게 저희 교단의 교리이니까요. 사제님 같은 귀중한 인재를 잃는 건 저희에게 있어 크나큰 손실이 되겠지만, 사제님의 뜻이 그렇게까지 확고하다면 저로선 더 드릴 말이 없네요.''



 너무나도 시원스러운 수녀님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수십 분 정도 더 실랑이를 벌이다, 울며불며 애원하는 나를 다른 사제들을 호출해 물러나게 했을 수녀님이 이토록 간단히 내 청을 수락해줄 줄이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드디어 내 진심이 하늘에 닿은 게로구나.


 가슴 안쪽에서 용솟음치는 벅찬 감격을 호흡으로 다스리며, 이번 생 가장 큰 은혜를 보우하신 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가, 감사합니다! 수녀님!''


''별말씀을요. 아, 그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부탁 한 가지만 드려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다른 누구도 아닌 수녀님의 부탁인걸요! 제 능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라면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 서신을 제 대신 우체국에 전달해주세요. 그리폰 우편으로.''


''네! 알겠습니다! 그리폰 우편 말씀이시죠!''



 수녀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받아든 서신은 한 눈에도 봐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종이의 재질, 봉납, 향수, 그 모든 것들이 왕실과 관계된 인물에게 보낼 때나 사용하는 고급품들이었고, 더욱이 이 제도에서 가장 빠른 그리폰 우편으로 부쳐야 한다고 했으니, 상당히 급한 용무의 서신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귀중한 서신이니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주셔야 합니다. 혹여나 그 서신을 훼손하시기라도 한다면, 방금 말씀드린 전속 수호사제 사퇴 건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 그 정도로 중요한 서신이라니···· 이거 혹시, 왕실과 관계된····.''


''아뇨. 왕실과는 하등 관계없는, 지극히 제 개인적인 용건이 적힌 서신입니다.''

 

''예? 그게 무슨····.''



 지독한 겨울날의 한기처럼, 나와 수녀님 사이를 도연히 훑고 지나간 서늘한 정적이 아주 잠깐 사고를 정지시켰다. 


 이윽고, 호수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듯한,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내 자의식을 붙잡았다.



''갑자기 묘연해진 어느 사제의 행방을 오매불망 찾아 해메고 있는, 이 제도에서 모르는 이 없는 유명 모험가 파티에게 그 사제의 거주지를 기재해 보내는 지극히 개인적인····''


''오물은 소각이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손에 있던 편지를 가까운 화로를 향해 황급히 집어 던졌다.


 이글이글. 편지가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타버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새하얀 종이가 시꺼먼 잿더미가 되어가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내 호흡이 멈춰있었단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만큼 수녀님의 입에서 미끄러진 정보가 내게 있어 충격적인 것이었기에.



''어···· 어떻게!''


''서신을 불태워 버리셨으니 약조한 대로 수호사제 사퇴 건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사제님.''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걸····!''


''아니면 이렇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전 용사파티 출신. 레이지스 로우빌 사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