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들은 걸로 하지. 나는 네가 싫어.”


 “알아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망설임 없이 꽃집에서 나가는 그를 보며, 하나는 작게 한숨을 쉰다. 요즘 따라 더 기운이 없는 것 같다. 나에게 의지하면 성호 씨도 기운 차릴 수 있을 건데, 하나가 노력해 온 보람은 좀처럼 꽃망울을 틔우지 못했다. 


 ‘말은 저래도 다정한 사람이야.’


 성호 씨는 기억도 못 하겠지만, 하나는 줄곧 그를 지켜봐 왔다. 성호가 차가운 말을 뱉는다 한들,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도 나를, 나도 그를 사랑하니까. 물뿌리개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프레시아 꽃집]으로 한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아가씨, 카네이션 한 바구니 부탁해.”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 꽃집에 있어서는 최고의 대목이다. 실제로 이른 시간임에도 성호보다 먼저 들려 카네이션 한 아름 사간 사람들도 있다. 중년 남자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이 곤란한 미소를 짓는 하나. 


 “죄송합니다, 오늘 영업은 끝났어요.”


 “뭔 놈의 꽃집이 어버이날 문을 닫아? 저기, 카네이션도 충분하지 않아? 아가씨, 그러지 말고 한 바구니 줘 봐.”


 시장 논리에 따르면 비상식적인 운영이지만, [프레시아 꽃집]은 돈을 위해 운영하는 곳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하나의 ‘아지트’. 성호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건 원래 내키지 않는다. 평범한 걸 좋아하는 성호 씨에게 다가가기 위해 맞춘 장소일뿐이다. 


 “손님, 팔 수 없어요. 다 임자가 있는 카네이션이에요.”


 “미치겠네, 여기 있는 것만 믿고 어머니에게 보일 성의를 아직 준비 못 했어. 퇴근 때는 사갈 시간이 없다고. 아가씨, 딱딱하게 굴지 말어.”


 중년 남성은 순순히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인다. 다른 꽃집에 가면 될 텐데, 하나는 어쩔 때는 일반 사람의 심리가 잘 이해가 안 간다. 이 사람이 굳이 여기서 구매를 고집하겠다면, 다른 해결책이 있다.


 “성의라…. 어머님께 꽃을 살 돈을 드리세요.”


 “무슨 소리야?”


 중년 남자는 당황한다. 꽃이 아니라, 돈으로 주라고 하다니. 꽃집 주인이 할 소리가 정말 맞을까? 하나의 윤기 있는 연갈색 머리가 조명에 비춰 반짝인다. 얌전하게 그녀의 지론을 남자에게 일깨워준다. 


 “꽃다발, 꽃 바구니, 다 허례허식일 뿐이에요. 받는 사람도 그 순간에는 기쁠 지 몰라도 나중에 처리도 힘들죠. 차라리 현금으로 드리는 게 어머님 입장에선 더 도움이 될 거랍니다.”


 불편한 진실. 꽃 선물은 허례허식, 사실 좋아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웃는 낯으로 숨기지만, ‘꽃 살 돈이면 그냥 나 주지.’ 속으로 생각하는 인간도 많다.

 이 생각이 양지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면, 전국 꽃집들이 시든 장미처럼 망하겠지만, 다행히도 사람은 가식의 동물이다. 꽃집이 망할 리는 없다. 


 “아가씨, 그딴 마인드로 꽃 장사를 해? 상도가 없어, 상도가. 어디 화류계에서 굴러먹던 여자야? 그렇게 살지 마.”


 중년 남자는 지극히 꼰대스러운 어조로 따져 묻는다. 꽃은 못 사가도,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야 시원하겠다는 짧은 생각에서 나온 실언이다. 하나는 이 상황에서 생긋 눈웃음을 지으면서 되 묻는다.


 “화류계? 손님, 제가 아는 의미로 말씀하신 건가요?”


 화류계, 바나 카바레, 윤락 업소에 종사하는 여자를 좋게 포장해준 말. 얼굴은 미소가 가득이지만, 하나 입장에선 불쾌한 말이다. 저 남자, 말은 그렇게 해도 계속 하나의 가슴을 쳐다보고 있다. 천박한 본성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술집에서 꽃 파는 여자도 아가씨가 장사하는 것처럼 하면 망해. 그 년들은 손님이 오면 온갖 아양이라도 떤다고!”


 하나는 성호 씨를 위해 노란 프리지어의 꽃말을 지켜 왔다. 카네이션을 안 팔았다는 이유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나? 저 중년은 그녀 입장에서 ‘선’을 넘었다. 하나는 바뀌지 않은 해맑은 얼굴로 제안한다. 


 “그러고보니, 남은 카네이션이 있어요. 기다리세요.”


 “허어, 됐어. 똑바로 살아.” 


 “리인카네이션(reincarnation).”


 꽃집 아가씨가 들고 있던 붉은 카네이션 한 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꽃에서 보라색 꼬마 불꽃이 튀어나와 남자의 시야를 어지럽게 맴돈다. 이 세상에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마술의 한 종류.


 “어, 어?”


 소리 지를 새도 없이 깊은 잠에 든 남자. 저절로 내려가는 가게의 셔터, 밖에서는 가게 안의 상황을 알 수 없다. 손님들은 헛걸음했다가 돌아가겠지. 하나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쓰러진 남자를 쏘아본다. 상대를 잘 못 골랐다. 


 “성호 씨는 차가워도 손님처럼 바보는 아닌데.”


 하나는 ‘꽃의 마녀’, 아직 미숙한 부분도 있지만, 꽃을 매개로 흔히 ‘마법’이라고 불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룰 수 있다. 어느 새, 하나의 곁으로 희고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 온다. 


 “딸아, 신선한 제물의 냄새가 나는 구나.”


 우스꽝스러운 망토를 그 작은 몸에 걸친 말티즈. 놀랍게도 인간의 말을 한다! 하나가 딸, 즉 아버지라고 자칭했음에도 하나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강아지의 말을 듣는다. 신난 듯이 쉰 목소리로 짖어 대는 강아지. 


“불숨, 위대한 레이버모스의 동면자께서도, 새로운 제물에 만족하시며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계시겠지.”


 레이버모스의 동면자, 말하는 강아지만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강아지가 기대에 차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절호조에 다 달은 말티즈와는 달리 하나는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빠, 씨앗이나 주지 않을래요? 빨리 끝내고 싶네요.”


 “문제없지!”


 하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아지는 한참을 캑캑거리다가 작은 씨앗을 토해 낸다. 나팔꽃 씨앗을 연상시키는 푸른 씨앗. 하나는 매끄러운 흰 손으로 잠든 남자의 혀 끝에 작은 씨앗을 가져다 댄다. 알약이 녹 듯이 씨앗은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진다. 


 하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카네이션을 마법 지팡이처럼 휘두른다. 한 바구니에 붉은 카네이션이 차곡차곡 모여 형태를 갖춰지는 중. 그럴 듯한 꽃 바구니의 형태가 만들어졌을 때, 하나는 손님을 흔들어 깨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올라가는 가게 셔터. 약 10분 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손님?”


 하나의 따뜻한 말에 백일몽에서 깨어나는 중년 남자. 어떤 일이 있었는 지는 깨끗이 잊은 상태. 카네이션을 사러 왔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으응?”


 남자는 입 사이로 흐르던 침을 닦고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잔 걸까? 하나의 웃는 얼굴을 보고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멍을 때린 걸수도?


 “붉은 카네이션은 다 팔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건 그냥 드릴 게요!”


 “아가씨, 그냥 준다고? 이 정도 양을?”


 어째서인지 방금 전 바구니의 담긴 붉은 색 카네이션의 색이 완벽히 변했다.


 흰 색과 노란 카네이션이 빼곡히 담긴 꽃 바구니, 아름답지만 어딘가 악의가 담겨 있는 듯하다. 받기를 주저하는 중년의 남성. 하나가 가져가라는 듯이 손으로 권유한다. 


 “아하하, 원래는 세상에서 제일 고맙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남겨 놓은 꽃이거든요. 손님이 급하면 어쩔 수 없지요.”


모르던 사이에 넘겨받기에 부담스러운 말이지만 염치없게 늙은 불혹의 나이에는 사양을 하는 게 줄어드는 법이다. 천박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어, 나야 고마운데….”


 “괜찮아요.”


 손님은 이미 대가를 지불했으니까요, 이 말은 마음속에 담아둔다. 그저 공짜 꽃 바구니에 눈이 멀어, 들고 사라지는 남자. 어머니에게 줄 성의가 ‘공짜’인 건 괜찮은 걸까? 역시 이해가 안 된다. 

 하나의 마음도 모르고, 다시 그녀의 곁으로 다시 다가오는 흰 개. 자신감이 넘친다. 


 “하나야, 아까 나를 말하는 거니? 고맙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쑥쓰럽구나! 이 에프라임, 아비 노릇 잘 못 했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이야.”


 에프라임, 강아지는 본인이 에프라임이라고 자칭한다. 하나의 아버지, 인간의 육체는 노쇠해서 명을 다 했지만, 개의 몸에 빙의하여 살아간다. 손가락으로 X자를 만들면서 부정하는 하나. 


 “아뇨, 아빠. 성호 씨요. 아빠에게 별로 고맙진 않아요.”


 “그 애송이를 그렇게 괴롭히면서 이해가 안 되는 군. 그 몸으로 유혹하면 되지 않나? 남자란 그런 생물이지. 이 아버지 같은 네 엄마 일편단심은 별로 없단다!”


 에프라임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답안일 지도 모른다. 꽃집 간판 아가씨로만 남기엔 아까운 얼굴과 몸이다. 성호가 아무리 숙맥이라고 한들 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슴에 손을 대곤 눈을 감은 채로 거절한다. 행복한 기억을 떠오르는 중. 


“제 몸은 성호 씨에게 닿기엔 부족하고 빈약하답니다."


“내 딸이지만 나이스 바디구만 겸손은! 몸이 싫다면 주술은 어떠냐? 내가 한역(韓譯)한 [에이본의 서]을 읽으려무나. 매혹 주술, 유혹 주술, 환혹 주술. 뭐든 있거든. 그 놈이 어린 애를 좋아하는 변태여도 문제가 없지.”


“성호 씨의 진정한 마음을 얻지 못하면 의미가 없죠.”


하나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이 에프라임은 항의한다. 차라리 매혹 마법 쪽이 나을 정도다. 


“마음을 얻자고 사람의 마음을 부수는 건 좋지 않아. 사교도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녀석들의 방식이다. 애송이도 이미 반쯤 은 미쳤을 지도 모르지.”


 거의 1년 반 정신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직장에선 이미 고립됐다, 모든 상황을 의심한다. ‘애송이’는 친절하고 의욕 넘치던 신임 교사에서 죽지 못 해서 사는 폐인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응, 알아요. 성호 씨에겐 제가 심하죠. 기껏 이상형의 모습의 나타났는데, 평범하게 다가가도 되었겠죠. 미움 받지 않고 사랑만 받을 수도 있었어요."


 “알면 왜 그러는 거냐?”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에프라임. 그도 마법사지만 그의 딸 안에 잠들어 있는 깊은 심연은 아직 헤아리지 못했다. 바라보는 순간 그 심연에 잡아 먹힐 것 같다. 


 “이게 운명이니까요. 제가 저인 걸 아직도 눈치 못 챘어요.”


 운명, 그렇구나. 금지옥엽 키운 딸이 그런다면 그런 거겠지. 에프라임은 더 이상 캐 묻는 걸 멈추고 빙빙 돌면서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구먼. 더 이상 캐묻지 않으마. 이 아비에게 시저 통조림 불고기 맛을 한 캔만 더 따주지 않겠니?”


 “살찌니까 하루에 한 캔이에요, 아빠. 오늘은 끝났어요.”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행복이 넘쳐야 할 어버이날 아침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랑비였다. 


 마치 성호에게 있을 곤란한, 그러나 그에게 있어선 한 순간만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도 된 마냥….


 흰 색과 노랑 카네이션엔 악의가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