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일단 이것부터 좀 놓고.." 



"..응." 



그녀는 무언가에 한껏 취한 듯한 풀린 눈으로, 긍정의 응답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결코 수용 따위의 순진한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시에 가까운 뜻을 담고있었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내 말을 듣고도 행동을 멈추기는커녕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광경에 나는 흠칫, 하고 놀라 하마터면 손을 뿌리칠 뻔했다. 위험했다. 구도가 구도인지라, 자칫하면 CCTV에 내 행동만 비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말로 타일러야 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내 단호한 말투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옆에서는 당황한 신입이 어버버 거리고 있었기에, 마침 시범도 보일 겸 그녀에게 싸늘한 눈빛을 덤으로 쏘아붙였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더욱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손님을 위한 서비스는 어디까지나 이득을 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희생의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손님은 다소 특이한 경우이긴 하지만, 여튼.


"손님.. 자꾸 이러시면, 저희도 가만히 안 있습니다. 지금 당장 호출 벨만 눌러도, 어떻게 되는지 아실 텐데요." 


다행히 그녀는 내 표정에 놀란 듯, 얌전히 손을 놓고는 과자봉지를 집어 든 채로 황급히 편의점의 출구로 향했다. 



"..좀 이따 봐." 


그렇게 출구를 나서는 와중에도 꼭 이상한 말을 남기며 떠나버린 그녀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괜히 아쉽고 씁쓸한 마음에 전화 몇 번, 문자 한번 남기는 정도의 미련이었다면, 납득이라도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행동은 어떤가. 몇 백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남기는가 하면, 이 시간에 굳이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 민폐를 끼치고는, 당연하다는 듯 만나자는 말까지 꺼낸 뒤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고로 헤어졌다면 어느 정도는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들로 인한 황당한 감정이 앞서버린 지금은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할지 가늠이 채 되지도 않는다.



나는 여러 감정을 뒤로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그녀에게 설명했다. 


"음.. 봤어요? 저런 미친 스토커한테는 공권력으로 협박하면 대개는 물러서니까, 안심하시면 돼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무엇보다 아르바이트생의 안전을 신경 쓰는 점장님답게, 편의점 내부에는 이미 경찰서와 협의 하에 연결된 호출 벨까지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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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넛 퇴근 시간에 이르렀다. 시재 점검을 마치고, 교대자에게 근무를 넘기고, 그녀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한 후에 편의점을 빠져나오자,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에도 비는 내렸다.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우산을 펴고,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움츠린 채로 거리를 걸었다.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게 횡단보도를 지나쳐, 육교를 건너니 골목길이 나타났다.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낡은 주택이 희미하게 눈에 번졌다. 안개 때문이었다. 


왜인지 자주 끼는 안개 덕분에 늘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동네는, 그만큼 월세도 낮았다. 물론, 나처럼 돈 없는 청년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조건이다. 허름한 반지하 방을 고른 것도 바로 그 장점 때문이었다.



그래, 반지하 방. 바꾸어 말하자면, 장점이라고는 오로지 싼 값 뿐이라는 것이다. 


몸에 배어버린 악취, 틈만 나면 출몰하는 바퀴벌레에, 수시로 역류하는 하수도, 노상방뇨에, 채광조차 들지 않는 곳. 게다가 지금처럼 비라도 오는날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조차 없었다. 조금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만 멈추어버렸다. 안개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인 것이다. 형체는 내가 가고자 했던 뱡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곳에 서 있었다.



"..왔어? 늦었네." 




쿠궁




번개로 인해 주변이 조금 밝아졌을 무렵,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였다. 그녀가, 우산을 쓰지도 않은 채 잔뜩 헝클어진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천둥소리가 들려오자, 안개가 그녀의 모습을 다시 가려버렸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면 되는데, 몸이 차마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였다. 순간,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가 불쑥 튀어나와 내 품에 안겼다. 인간의 온기, 긴 생머리의 여자, 아까 전의 그녀였다.



그녀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한동안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까 편의점에서 나온 뒤부터 계속, 여기서 기다렸어. 너 만나려고."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그만 말을 더듬어버렸다.



"..이, 이거 놔." 



그러나 이런 모습도 그녀에겐 사랑스러운 행동이었는지,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응. 알겠어. 근데, 나 여기서 기다리면서 계속 생각한 거 있는데, 여기서 말해도 돼?"


"그 여자는 누구야? 그새 바람이나 피우려는 생각이었어? 그리고 아까 네 표정, 여자친구 대하는 게 아니라 꼭 귀찮은 진상손님 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던데, 나 그때 정말 상처받은 거 알아?"


그녀가 아직 내 여자친구였던 시절, 아주 가끔 투정을 부리곤 하던 그 말투. 어쩌면, 그녀는 진심으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헤, 헤어졌으니까, 그렇게 대한거야.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애초에 너랑 사귀기에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서로에게 안 좋은 영향만 미칠 것 같아서 한 말이었어."


"..그러니까 너도 지금 관계를 잊고, 앞으로 더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을 것 같..." 



"아, 그리고 어제는 홧김에 뱉은 말이었지? 이해해. 그런데, 앞으로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줘. 나 그때, 장난인거 알고도 진짜 엄청 울었어..!"



그녀는 들리지 않는 듯, 동문서답으로 답했다. 대화가 허공에서 엇갈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홧김에, 뱉은, 말이었지?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그녀는 고장난 기계처럼,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녀의 눈에 안광이 지워져 있었다. 


이어, 그녀가 숨도 못 쉴 지경으로 나를 꼭 안았기에, 나는 순간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떼어냈다. 그녀는 내 쪽에서 살짝 주춤하듯 떨어지고는, 곧 일부러 넘어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나, 아파. 손 잡아줘." 



나는 그 행동을 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반지하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바닥에 물이 약간 차올라 있었다. 당장 퍼낼 생각은 없었다. 곧 그칠 소나기였다. 



그보다는, 당장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정리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에, 쉽사리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본 문자, 편의점에서의 그 표정,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습.


솔직히, 무서웠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만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왜? 도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했기에, 뭐에 그리 미련이 남았기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그리고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이별이었다면, 조금 더 순화적인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해도 괜찮았을텐데.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보니, 도저히 끝이 나지 않았다. 결국 잠은 물 건너갔고, 나는 그냥 곡이나 연습하기로 했다. 내일은 라이브클럽에서 밴드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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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더 뮤즈팝.' 이라는 네온사인의 글자가 걸린 건물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오늘 공연할 장소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하로 걸어 들어갔다.



"어이"



친구가 이쪽을 쳐다보며 내게 인사했다. 기타를 맡고 있는 친구였다. 그도 방금 온 듯했다. 



"준비됐어?"



그의 말에, 내가 답했다.



"..응."



이 얇은 천막을 걷고 앞으로 나아가면, 무대는 시작되는 것이다. 잠깐의 고민을 하던 나는, 이내 천막을 걷고 앞으로 나왔다. 


어두운 공연장에는 희미한 조명 몇 개만이 달려있었지만, 나는 밴드 부원들의 결의에 찬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숨을 고른 후, 곡을 시작했다. 자작곡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어?



잘 못 보았으리라 믿는다. 아닐 것이다. 긴 생머리, 눈에 띄게 아름다운 미모로, 귀에 찢어질듯한 미소를 띠며 앉아있는 그녀는 결코 헤어졌던 여자친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부터 호흡이 고르게 작동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관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야 느껴졌고, 사방에서 오는 부담감이 몸을 짓눌렀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손이 마이크에 닿자마자 자동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침착하고, 가사를 떠올려보자.


틀렸다. 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 소절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실수에 반응하듯, 몸이 달달 떨려왔다.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고, 심장은 터질듯이 뛰었다. 무대의 앞에는 나를 깔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보였고, 사방에서는 야유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연주는 중단되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공연이 끝나고 재빨리 공연장을 벗어났다. 멤버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앞을 막아섰다.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공연. 잘 봤어. 우리 이제 뭐 좀 먹으러 갈까?" 


마치, 예전 사이로 돌아온 듯한 태도로 말이다. 뒤에서는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여기서 공연을 하실 줄은 몰랐.."



"...잠깐, 어제 그.. 스토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