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주님에게는 비밀이 있다.



"거기! 대열 똑바로 맞춰라. 곧 전투가 벌어질 거야."



다른 분들 앞에서는 깐깐하고 철두철미한 FM 군인이시지만,



"기사~ 거기 있느냐?"



어릴 때부터 영주님을 모셔온 기사인 나의 앞에서는,



"에잉~ 피곤하구나! 시원한 냉수 좀 떠다줄 충직한 기사 어디 없는 거냐?"



어리광쟁이가 된다는 점이다.



"거참, 갑자기 부르시길래 암습이라도 당했나 해서 달려왔더니만. 고작 물 떠달라고 부르신 겁니까?"



" '고작 물'이 아니다! 시원한 냉수로 부탁하는 거다~"



내가 물을 떠다줄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시원한 냉수를 강조하시는 영주님.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물 정도는 혼자 떠마실 수 있잖아.."

구시렁대면서도 부엌으로 가 물이 담긴 항아리를 찾는 나.



솔직히 귀찮고 피곤하고 부조리하지만 어쩔 수 없다. 까라면 까야지.



나는 영주님의 휘하에 소속된 가신 기사이기 때문에, 영주님과 나는 철저한 갑을관계에 있다.



아버지 대부터 영주님의 가문을 섬겼기 때문인지, 그녀를 만난 것은 꽤 어린 나이였다.



아버님에게 들은 바로는 나와 영주님이 차음 만난 계기가 영주님의 가족과 전에 친분이 있던 우리 가족이 시장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였나.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사로, 나를 종자로 삼으셨다고 한다.



물론 영주님은 여성이라 영주님의 아버지는 어린 딸의 치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지만, 영주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영주님은 진짜 기사가 되기로 했다.



댜른 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 때문에 그런 것으로 판단하고 적당히 맞춰 주었지만, 훈련과 수련에 정진하신 영주님은,



보아라. 결국에는 이리도 훌륭하시고 위엄있고 아름다우신 기사가 되지 않으셨는가.



물론 나의 앞에서는 한없이 털털한 본성이 드러나는 영주님이 조금 걱정이긴 하다.



이제 혼기도 차셨는데, 영주님 같은 귀족이 결혼 생활에서 망신을 당하면 좀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영주님의 방문 앞에 항아리를 들고 서 있었다.



"물 드리겠습니다. 영주님."



그분은 물을 꼴깍꼴깍 마시더니,



"뭐야! 시원한 냉수가 아니라 미지근한 물이잖아."라며 투덜대신다.



"그냥 드세요.. 이제 결혼할 때도 되셨는데, 언제까지 저한테 어리광부리실 거에요."



"나 너랑 결혼할 건데?"



컥!



항아리에 남은 물을 마시던 나는 그만 뿜어버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그냥, 우리 둘이 어릴 때부터 쭉 붙어있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결혼도 해서 쭉 함께하는 거 아니야?"



가끔씩 이런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영주님.



"저희는 신분 차 때문에 결혼하면 남들한테 욕먹을걸요."



애초에 가신 기사인 나와 영주님의 신분 차이로 결혼하면 세상 사람들한테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뿐더러, 공식적으로도 여러 가지 불이익이 생길 것이다.



"난 딱히 상관없는걸? 내가 어디 중앙 정계에 나가기라도 할 것 같아?"



'그럴 것 같은데요.'



다스리는 땅의 크기만 해도 웬만한 거물 귀족에 꿇리지 않을 뿐더러, 다른 영주들과 달리 재산을 강제로 빼앗거나 하지도 않아 민심도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중앙으로 올라갈 예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 영주님이 여자로 안 보입니다. 어릴 때부터 영주님의 기행이나 치부를 다 보고 자랐는데, 이성적인 호감이 생길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 남매나 다름없이 자라온 영주님에게 이상한 감정 따위를 품을 리가 없지 않는가. 후세 사람들은 이걸 베스터마르크 효과?라고 칭한다던데..



...근데 방금 말은 뭔가 잘못한 것 같다. 비록 털털한 성격이셔도, 남이 '자신의 매력은 0'이라고 외치면 분명히 기분나쁘겠지.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기사는 나랑 결혼하기 싫어?"



생기 없는 공허한 눈으로, 지긋이 나의 눈을 바라보고 계시는 영주님. 대답을 잘못하면 큰일날 분위기다.



"아니에요! 영주님은 정말 매력적이시고 아름다우시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등어리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한다. 예전에 아버지도 어머니와 대화할 때 이런 분위기를 풍기시던데, 아버지도 이러셨을까.



"흠, 그럼."



다행이다. 아무래도 정답을 고른 것 같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방을 나왔다.



근데 나도 진짜 결혼해야 하는데. 아무리 영주님을 모시는 기사라고 해도, 언제까지고 독신으로 살 수는 없다.



믿을 만한 중매쟁이에게 부탁을 해봐야겠다. 우리 영지에 있는 평민 여성 정도면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가신 기사라 다른 영지로 갈 수도 없는 참이니.



그리고 이것은 내 최악의 선택이었다.




/




다른 날, 이제는 자기 방도 아니라 내 집무실에서 장난치고 계신다. 업무 시간에 귀찮지만 어쩌겠는가. 상관인데.



그렇게 장난에 어울리며 업무를 다 처리했을 때쯤 질문해오는 영주님.



"이 봉투는 뭐야? 열어봐도 돼?"



일하는 도중엔 확인할 틈이 없기도 하고, 영주님이 딱히 큰 사고를 치지도 않을 것이기에 흔쾌히 수락해버렸고,



"이게.. 뭐야?"

"기사가 부탁한 결혼 적령기의 평민 여성들?"



그 봉투는 내가 중매쟁이에게 부탁한 목록이었다.



.

.

.




충격이다.



기사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다니.



정말로 내가 매력이 없는 것일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안 돼.



이미 나의 삶의 절반, 그 이상인 기사를 놓칠 수는 없어.



계획을 세우자.



그가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그러면, 나는 당신과 계속 함께할 수 있겠지.




/




영주님께서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사실 매일 말하지 않아도 방으로 찾아가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똑똑.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고,



"저 왔습니다, 영주님."



"왔어? 어서 들어와."



영주님은 고급지고 독한 술병을 들고 계셨다.



평소에는 영주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며 잘 마시지 않고 마시더라도 한 잔 정도만 마시던 분이셨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 건지 독한 술병을 다 마시려고 하신다.



"술 혼자 마시면 재미없으니까, 같이 마시자."



영주님께서 마시는 고급진 술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네, 그러시죠."



그렇게 술을 마시며, 나는 영주님에 대한 자그마한 불만과 본심을 털어놓았다.



자칫하면 심기가 거슬릴 수 있는 대목인데도 잠자코 듣고 계신다. 아니, 듣고 계신다기보다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쯤,



"기사아아~ 이불 덮어 줘~"



"이젠 이불도 혼자 못 덮으시는 걸까." 라며 침대로 다가가는 순간,



내 팔을 잡은 영주님의 손이, 날 침대에 쓰러뜨렸다. 

무슨 팔힘이 이렇게 세?



영주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에게 입을 맞추셨고, 무언가 이상해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몸이, 특히 하반신이 뜨거워진다.



눈앞에 누워 있는 여자가, 너무나도 예쁘다.



안고 싶어. 키스하고 싶어. 당신의 혀를 탐하고 싶어.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어.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기억하는 것은, 깨어난 뒤 본 침대가 피로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

.

.




미안, 기사. 나도 이런 강경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어.



"둘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어서도 서로를 사랑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너의 책상에서 그 봉투를 보았을 때는 참을 수 없었어.



나의 이 훌륭하고도 충성스러운 기사가, 내가 아닌 다른 이와 결혼한다고?



"네."

"네."



분노와 질투,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가 섞인 끈적하고 부정한 감정.



그 감정이 원동력이 되어버렸나 봐.



"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다시는 그런 감정에 휩싸이지 않게 될 거라는 것.



그러니까, 이제 나만을 바라봐 줘.



"네."

"네."



영원토록 사랑해, 나의 기사.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조언을 보고 이름을 넣으려고 했었는데, 아직은 딱히 끌리는 게 없어서 그냥 영주와 기사로 썼음


단순히 영주가 아니라 작위를 붙얐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아직 잘 몰라서


맞춤법 틀렸으면 댓글로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