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새하얀 공간에 점점 균열이 생기며- 저 멀리

치솟아오르고 있던 빛의 기둥이 사그라들었다.

 

문이 닫히고 있다. 무저갱의 문은 이대로 닫혀,

외신들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

 

“...미안, 하지만 이 방법뿐이었어.”


나는 키오의 머리를 무릎에 눕혔다.


...이 아이가 겪어야 했을 고통을, 내가 감히...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세상을 파멸시킬 운명을 타고 태어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운명을 짊어져야만 했지.’

 

그 부분에 있어선 나랑 똑같았다.

원하지 않았던 운명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고...그로 인해 고통받았다.

 

“세르케, 아직 듣고 있죠?”


「이제 더는 바칠 게 없지 않느냐.」

 

“왜 없어요, 여기 이 몸뚱이가 있는데.”

 

나는 키오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삶의 기적...이걸로...키오를 되살린다.

 

“다시 남은 수명의 절반을...”


「이미 네게 남은 수명은 길지 않단다. 만약...

지금 다시 수명을 바치게 되면, 넌 고작 몇 년

안에 죽고 말 게야. 고작 몇 년 뒤에...」

 

그렇겠지. 나도 안다. 길어봤자 3, 4년 정도려나.

 

「그리고 그것만으론...」

 

“부족하죠. 나머진 부분은...”


인간의 내장 중에, 몇 가지 정도는 없더라도

생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신장...그리고 하나 더...자궁.

자궁이 없어도 살 수는 있다. 물론 앞으로 영영

아이를 가질 순 없게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살릴 생각이느냐.」

 

“그렇게까지 하더라도 살리고 싶어요. 저 있죠...

제가 살리지 못한 목숨이 너무 많아요.”

 

스승님, 라브만 씨, 게바라, 샤누아...

그들 모두 구하지 못했다. 내가 바로 옆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엔 달라요. 이번만큼은 구할 수 있어요.”


「어째서?」

 

“솔직히 제게 이럴 의무는 없어요. 그렇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이번만큼은.”

 

살면서 충분히 많이 후회했다.

그러니 이번엔, 아무것도 후회하고 싶지 않다.

 

“...이걸로 작별이지만...조만간 다시 만나겠죠.”

 

「그때까진 작별이구나, 아이야.」

 

“그럼, 안녕히.”


세르케의 몸이 사라져간다.

나는 그걸 보다가, 온 신성을 손에 집중했다.

 

“자, 남은 일을 끝내야겠지.”


파아아- 밝은 섬광이 번뜩였다.

이윽고 가슴에 난 상처가 깔끔하게 아물었고,

키오의 호흡이 돌아왔다.

 

“...쿨럭, 끄응...느낌 진짜...이상하네.”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배 안에 있던 내장이...사라졌다.

 

‘거기에 수명까지...정말...남은 게 없구나.’

 

나는 키오를 품에 안고선 거길 빠져나갔다.

돌아가야 한다. 반즈가 있는 그곳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그 기분 나쁜 공간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결계의

경계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있었던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반즈...제발...살아만 있어줘요.”


어마어마한 전투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사방에 멀쩡하게 남은 게 전혀 없었다.

땅에는 균열과 구덩이가 수없이 펼쳐지있었고,

주위에 있던 유적이나 바위는 산산이 조각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갔을 때, 나는 마침내 땅에

쓰러져있던 두 사람을 발견했다.

 

“반즈!”


나는 키오를 바닥에 눕힌 뒤,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가 맥박을 쟀다.

 

“씨발, 다행이다...진짜...진짜 다행이야...”


살아있다. 맥이 좀 약해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붕대와

지혈제를 꺼내 일단 응급처치를 해뒀다.

 

‘이렇게 큰 상처가 날 정도로...격했던 건가.’

 

어깨엔 큰 구멍이 뚫렸고, 크고 작은 상처가

수없이 많았다. 분명 어마어마한 전투였겠지...

 

“그보다, 카리오는...?”


벌떡! 그 순간, 카리오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커허억...”


-죽어가고 있다. 나는 확신했다.

카리오의 몸이 점점 붕괴하기 시작했다...이미

몇 번이나 본 적 있는 현상이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불태운 거겠지.’

 

수명을,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를 바쳤고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키오...키오, 미안...하다...난...나는...”


...

나는 키오를 데리고 카리오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미 두 눈이 먼 것인지, 내가 바로 앞에

왔는데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카리오,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에르테...? 여기 돌아왔다는 것은, 설마...?”


“문은 닫혔어요. 혼돈의 패배에요.”


카리오가 말문이 턱 막힌 듯 입만 벌렸다.

설마 혼돈이 패했을 줄은 몰랐겠지.

 

“운명을...거슬렀다는 것인가.”


“정확히는 뒤로 미룬 거죠. 죽음처럼요. 우리

모두 언젠간 끝나겠지만...당장은 아니에요.”

 

“그렇군. 그런가...”


나는 그의 손을 잡아, 키오를 만지게 해줬다.

 

“키오...?”


“살아있어요. 이제 이 아이는 혼돈의 딸도 뭣도

아닌 평범한 여자애가 됐어요.”

 

“어째서...이 아이를 구해준 것이냐...?”


“착각하진 마시죠, 당신을 위해 그런 건 아니니.”


어떻게 보면 이건 자기만족일 뿐이다.

아무도 구해주지 못한 내가, 이번에야말로 다른

누군가를 구해줬다는...그런 하찮은 일일뿐이다.

 

“키오, 미안하구나...이제, 더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시죠. 당신은

이제...더는 이 아이와 함께 할 수 없으니까.”

 

“그래, 그렇겠지.”


카리오가 키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듣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나의 진심이다.

키오, 나는 널 원망했다. 네가 내게서 소중한 걸,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했으니까.”

 

후두둑, 그의 손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너에겐 아무 죄도 없다. 그래, 너에게는

그 어떤 죄도 없어. 잔혹한 운명이 우리를 옭아

매어 고통을 줬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아...

너는 자유다. 이제야말로 자유야.”

 

툭- 그의 다리가 부서지며 먼지가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건만, 이제 시간이 없구나.

미안하다, 너를 구해주지 못한 나를 용서하기를.

그리고 고맙구나, 이런 날...아빠라고 불러줘서.”

 

“아빠...”


그때, 잠든 키오가 눈물을 흘렸다.

 

“...가지 마, 아빠...”


“...이런 내 인생에 남기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후회도, 슬픔도 아닌...너라는 행복뿐이다.”

 

그가 키오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몸이 거의 다 무너져 내렸다.

 

“뻔뻔하다는 건 알지만, 부디...”


“걱정마시죠. 이 아이는...행복해 질 거예요.

우리처럼 고통받지 않고, 반드시...”

 

“...감사합니다. 성녀님.”


“이젠 아니에요, 더는...우리 모두...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갈 테니까.”

 

마지막 순간, 카리오의 몸이 먼지가 되는 순간-

 

“사랑한다, 나의 딸아.”


나는 분명히,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두워.

여긴...어디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잡음이 섞여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료...서둘러...송...해야...”


“...기선...할 수 있...의 없...”


누구의 목소리더라, 꽤 낯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저, 몸이 무겁고 아플 뿐이다.

 

“돌, 아가, 지 않, 는 거냐.”


누구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저 멀리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기껏, 전, 부, 되찾은, 거, 아니더냐.”


“...모르겠어. 내가 돌아가도 될지...”


“나, 약한, 것. 넌, 늘 그랬, 지.”


누군지는 몰라도 나를 꽤 싫어하는 모양이다.

아니,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이 목소리는...

 

“네가, 선택, 한 것, 아니더냐. 운명을, 거슬러,

붙잡은 삶, 아니, 던가. 이러려고, 날, 죽이면서,

쟁취, 한 것이냐. 들리지, 않느냐. 이 목소리가.”

 

목소리...?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의...목소리였다.

 

“반즈, 벌써 보름이나 지났어요. 그런데 왜...

왜 아직도 깨어나질 못하는 건가요...”

 

누구의 목소리였지? 아아, 기억나질 않는다.

모든 게 흐릿하다. 너무나도 그립고, 그리운

목소리인데...대답을...해줘야 하는데...

 

“하지만, 정, 말, 돌아가, 도 된, 다고 생각하나.”


어둠 속 남자가 말했다.

 

“네, 가 저지른, 죄악을, 헤아려라. 너, 는 나와

똑, 같다. 수없이 많, 은 목숨을 해친, 넌, 나와

다르, 지 않다. 그런데도, 행복해, 지길 바라며,

살아가기로, 한 것이냐?”

 

“...”

 

어렴풋이,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기억나진 않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는지를.

 

“내가 저지른 짓이...이걸로 덮인다고 생각하진

않아.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가야겠지.”

 

“용서받을, 수 있, 다고 생각하나?”


“그딴 건 나도 몰라.”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그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아.”


“...그런, 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과 달라졌다.

더는...망설이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가겠어.”


-

 

두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보이는 건 울먹거리는

얼굴이었다. 안대를 낀 여자가 나를 내려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반즈...?”


이걸로 좋은 건지, 나는 모른다.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


“...!”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나하하, 뭐야, 이걸 속네?”


“다, 당신...!”


“기억하고 있어, 에르테.”


그 순간, 그녀가 내 뺨을 꼬집어 잡아당겼다.

아팠다. 정말로, 정말로 아팠다.


"씨발 진짜! 당신 진짜 싫어요, 그거 알아요!?

전 진짜...진짜 당신이...!"


"미안, 그래도..."


나는 에르테를 가볍게 껴안았다.


"다녀왔어, 에르테."


"...너무 늦었다고요, 이 거짓말쟁이."


-너만큼은, 아직 잊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드디어 마지막화까지 다 썼다...뭔가 기분이 싱숭생숭 미묘하네 거

다음편 에필로그로 끝인데, 아마 이번 주에 바빠서 시간이 좀 걸릴듯

참 멀고도 험한 길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끝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