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리리리리.

침대 옆 탁자에 휴대폰이 울렸다.

이불 속의 인영이 순간 꿈틀거리다 잠잠해졌다.

그러나.

 

띠리리리리리.

 

“으…… 누구야? 휴가 첫 날부터…….”

 

하얀 솜 이불에서 손이 빠져나와 탁자를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잡았다.

그제서야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흑발의 젊은 여인이 여전히 반쯤 잠든 얼굴로 발신자를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진수연.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끊어.”

 

그러자 휴대폰에서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한 번 끊어 봐. 너 그 나이에 아직도 숫처녀인거 회사에 퍼트려 줄 테니깐. 

 

진수연이 픽 웃었다.

 

“……얼씨구. 남자랑 눈 맞아서 수능 때 배불뚝이로 본 게 누굴까?”

 

-이제 잠 좀 깼니? 

 

“어. 너 덕분에.”

 

진수연은 이불을 제끼고 몸을 일으켰다.

쇄골이 드러난 반쯤 벗겨진 흰색 블라우스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의를 어렴풋이 가렸다.

방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물을 틀었다.

진수연이 말했다.

 

“좀 이따 전화하자. 나 지금 씻을 건데.”

 

-스피커로 바꾸고 듣기만 해.

 

진수연은 음량을 키워 선반에 올렸다.

어푸우우.

차가운 한기가 얼굴 속에 스며든다.

 

-그저께 전화하면서 3년 만에 휴가라고 자랑 했었잖아. 기억 나?

 

그랬지.

진수연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부모님의 재력과 도움으로 작은 회사를 차린 그녀는 요 몇 년을 뜬 눈으로 밤을 보내다시피 했다.

그 결과 회사는 백 명이 넘는 직원과 몇 백억의 매출을 기록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쉼없이 달려온 자신에게 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어제 밤은 고급스러운 와인 한 잔으로 잠이 들었다.

기분 좋게 잠든 휴가 첫날의 숙면은 전화로 형편없이 깨졌지만.

 

-27살 사장님이 휴가 때 누구랑 놀지 걱정되는 거 있지? 이렇게 이쁘고 돈 많은 애를 이상한 놈이 채가는 게 아닐까 하고.

 

진수연은 칫솔에 치약을 발라 입 속에 넣었다.

왼손을 움직이며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입에 가까이 댔다.

 

“본론만 말해.”

 

-……애 좀 맡아줄 수 있어?

 

푸우우우웁.

세면대와 거울에 치약물이 뿜어져 나왔다.

 

“컥…컥…”

 

진수연은 세면대를 잡고 기침을 했다.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굴 뻔 했다.

 

-어제 밤에 갑자기 회사에서 발령을 낸 거야. 무려 한달이나. 신랑이 출장 중이래도 들은 척도 안 해. 이러면서 한국에서 애를 어케 키우라는 건지……. 

 

진수연은 입을 대충 물로 가글하고 뱉었다.

 

“……외가랑 친가는? 아직도 화해 안했어?”

 

-아직도 칠천지 원수지. 그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는데.

 

“너도 참 어련하다……. 미안하지만 난 안돼. 누가 휴가 기간에 남의 집 애를 보니?”

 

-남이라니…… 서운한 소리를 하네.

 

“……그럼 사람이나 시설에 맡겨. 돈이라면 내가 대줄 테니깐.”

 

스피커에서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흘려 나왔다.

 

-응응. 세민아 저기 B동 적혀 있는 거 보이지? 저기서 802호로 올라가면 말했던 대로 이쁜 언니가 문 열어 줄거야. 응응. 언니 말 잘 듣고.

 

“……야.”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자동차 배기음이 들렸다.

 

-요즘 뉴스도 안 보니?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뭘 믿고 시설에 맡겨?

 

“진짜 죽을래?”

 

-그래도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깐. 전화 한거야. 너 애 좋아 하는거 내가 모를 줄 알고? 후후.

 

“…….”

 

진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믿고 맡길 수 있다…….

애는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잠깐만. 회사에서 전화 왔다. 비행기 시간도 얼마 안 남아서 도착하고 다시 전화 할게. 신랑이 일주일이면 한국에 돌아오니깐 그때까지만 참아줘. 응?

 

“아니, 난 안된다니…….”

 

뚝.뚝.뚝.

전화가 끊켰다.

진수연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진수연은 거실로 걸어나와 발 디딜 틈이 없는 아동 패션 잡지들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트레스 해소에 잔뜩 신세진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골칫덩이가 됐다.

잡지를 하나씩 집으며 큰 서랍에 쑤셔 넣고 열쇠로 잠궜다.

성년이 덜 된 하얀 페르시안이 다가와 진수연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미야옹.

진수연이 고양이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봤다.

 

“너도 다 컸구나. 분양할 데를 알아 봐야겠네…….”

 

언제부터 였을까.

작고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된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해도 곱상한 외모와 똑똑한 머리 그리고 타고난 몸매에 남자들의 고백과 구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끌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이 주선한 재벌 2세와의 혼담도 늘 거절했다.

뼈가 자라고 골격이 커지면 그게 무엇이든 정이 떨어졌다.

품 속에 한가득 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뿌리부터 뼛속까지 오로지 자신의 색으로 채워넣을 수 있는게 아니면 안됐다.

그것만이 마음 속에 깊이 억제된 충동성을 만족 시킬 수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띵동.

 

“어?”

 

진수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옆에 비치된 전신 거울로 자신의 몰골을 바라봤다.

풀어진 롱 헤어와 옷을 걸치지 않는 하얀 살결이 매혹적으로 흘러내렸다.

이꼴로 나가면 안되겠지?

띵동.

 

“내 정신 좀 봐. 자,잠깐만 기다려!”

 

친구 애를 추운 문밖에 내비두는 건 말도 안됐다.

진수연은 거실에 널부러진 핫팬츠를 입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가슴까지 매었다.

출렁.

브래지어를 매지 않은 봉긋 솟아오른 가슴이 흔들거렸다.

빨리 나가야지. 애가 뭘 알겠어?

진수연은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햇빛이 그 사이로 파고 들어 눈이 부셨다.

그러나 그것은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 아래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하얀 도화지가 서있었다.

앙증맞은 볼 살과 한 손에 가득 안아보고 싶은 작은 몸집.

그리고 세상의 찌든 때가 묻어나지 않은 순수한 눈빛이 진수연의 가슴속을 순간 관통했다.

 

“어,어?어?”

 

가슴 속에서 뭔가가 끊어올랐다.

작고 귀여운 것을 보았을 때 느꼈던 만족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솟아오르는 욕망 덩어리였다.

그 낯선 용솟음에 진수연은 당황했다.

 

“저기…….”

 

귀여운 천사가 고개를 올려보자 진수연은 진정되지 않은 가슴속을 짓누르며 말했다.

 

“미,미안해 이,이름이 뭐더라?”

 

“김세민이라고 해요.”

 

“어,어……. 엄마랑 전혀 안 닮았네……. 자. 드,들어와.”

 

진수연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자 김세민의 앙증 맞은 손이 닿았다.

그 순간. 

진수연은 번개에 맞은 듯 어깨를 움찔해 놀라 손을 뗐다.

그 모습을 보며 김세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왜 그러세요?”

 

진수연은 머리를 잡았다.

내가 지금 왜 이러지?

 

“가,가스 불을 안 끄고 왔네. 이,일단 쇼파에 앉아 있을래?”

 

불이라도 난 듯 진수연 달려간 곳은 부엌이 아닌 화장실이었다.

문을 잠그고 세면대 물을 틀었다.

수돗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 차가운 물을 다 마신다해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애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한 다른 언니,친구의 애를 많이 봤었지만 진수연은 단 한 번도 통제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본인 스스로 마음을 다 잡는데 자신도 있었지만 자신의 심연 속에 잠든 무언가를 끄집어내기에는 한 없이 부족했다.

무언가가.

방금 전 김세민의 도화지 같은 순수한 눈망울이 떠올랐다. 

그 눈망울이 가슴속에 닿은 순간 마음 속 깊이 걸어잠군 수돗꼭지가 쉴 새없이 틀어진 것 같았다.

스스로 혐오스러워 미칠 것 같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정신차려라 진수연……. 친구가 믿고 맡겼는데 미쳤니?

 

“사진이라도 올리지 진짜…….”

 

친구는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사진은 물론 아들,남편 사진도 sns나 주변 사람들한테 찍어 올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통통한 체구와 친구를 닮은 우악스러운 눈빛을 가진 애를 상상했는데 한 방 맞았다.

그렇게 귀여운 애가 친구의 애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 순수한 눈망울을 떠올리자 진수연은 연거푸 세수를 했다.

몸과 마음을 차갑게 식히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고 냉수 한다발을 들이키자 정신이 겨우 든다.

오렌지 주스를 컵에 담아 거실에 있는 김세민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김세민이 컵을 홀짝이자 진수연은 약간 떨어진 쇼파에 앉았다.

눈을 흘깃 바라봤다.

 

“저,저기 세민아?”

 

“네.”

 

“이모 이름 혹시 아니?”

 

진수연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김세민이 말했다.

 

“누나요?”

 

“…….”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누나’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첫 번째 화살이 박혔다.

어떡하지?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는데…….

김세민이 탁자에 컵을 내려놓고 말했다.

 

“엄마가 늘 수연 누나 애기 많이 해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라면서요.”

 

“…….”

 

그 애기를 들은 진수연의 뜨거운 가슴속에 거대한 얼음이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을 열고 애를 맡길 시설을 검색했다.

항상 자신을 통제하는 데 자신이 있던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예방할 수 있는 사고는 예방해야 한다.

진수연은 휴대폰을 만지며 말했다.

 

“학교는 여기서 얼마나 걸리니? 가방은 들고 왔어? 아빠는 정확히 오신 댔어? 번호 좀 알려줄 수……”

 

“저기…….”

 

언제 다가왔는지 진수연의 코앞까지 김세민이 다가왔다.

그 움츠러든 어깨에는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진수연이 말을 더듬었다.

 

“왜,왜?”

 

김세민이 목을 숙이며 말했다.

 

“제가 싫으신가요? 엄마는 수연 누나가 절 반겨줄거라고 했는데…….”

 

그 반대다.

이성을 잃을 것 같아 차갑게 말한다는 게 순수한 아이에게는 상처가 된 것 같았다.

진수연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일단 누나가 집에 데리고 있을 수 없어. 대신에 좋은 곳으로 맡아둘 만한 곳을 찾아볼게.”

 

“…….”

 

김세민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 시무룩한 얼굴을 보자 면도날이 가슴을 찢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진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걸었다.

 

“네,네……. 8살 남자애예요. 오늘은 안된다고요? 아 잠깐만요.”

 

매몰차게 전화가 끊기자 진수연은 혀를 찼다.

가까이에 애를 돌봐주는 시설들은 자리가 꽉 찼다.

그 다음에는 주부를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대부분 남의 집 아이를 돌보는데 난색을 표했지만 마지막 전화는 달랐다.

 

“응응. 일주일만 보살펴주면 돼. 어. 정말? 고마워. 오늘은 안되고 내일부터지? 알겠어. 응응. 내일 봐.”

 

휴대폰을 내려놓고 진수연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시름 놨다.

 

“오늘은 누나 집에서 자고 내일부터는 누나 친구 집에서 자자? 등교랑 식사는 누나가 챙겨 줄 테니깐 걱정하지 말고.”

 

“네…….”

 

김세민이 시선을 피하자 아직도 오해를 풀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이 조그만 천사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진수연은 쪼그려앉아 말했다.

 

“누나는 세민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너무 좋은 걸? 내 눈 봐봐. 세민아.”

 

김세민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눈이 마주쳤다.

진수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누,누나가 세민이를 싫어하는 것 같아?”

 

“아뇨……. 너무 이뻐요.”

 

“뭐?!”

 

심장에 두 번째 화살이 꽂혔다.

세 번 째를 맞으면 이성을 잃는다.

진수연은 몸을 비틀거리며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비,빈 방은 많으니깐 방부터 알려 줄게.”

 

진수연이 움직이는 걸 막으려는 듯 김세민이 허리를 두 팔로 안겨 들었다.

아!!!

비명이 새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무,무슨 일 있어……?”

 

계속된 충동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는 한계다.

빨리 방에 들어가 비명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방……. 필요 없어요.”

 

김세민이 얼굴을 올려 봤다.

 

“저 혼자 못 자요……. 누나랑 같이 잘 래요.”

 

세 번째 화살이 가슴속을 꿰뚫었다.

진수연의 차가워진 눈에는 온통 김세민의 얼굴로 가득찼다.

깊은 숨을 머금고 입을 벌린 진수연은 손을 뻗어 하나하나를 탐닉했다.

머리카락,귀,눈썹,볼,코…….

아름다운 손으로 그 모든 것을 흝어내린 손길이 이제 입에 닿았다.

 

“누,누나…….”

 

입술이 열리자 그 속에 빨려들어간 듯 진수연이 머리를 숙여 점점 다가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피로가 녹아내린 듯 달뜬 호흡이 오르고내렸다.

이제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흑흑…….”

 

이성을 잃은 선이 다시 굳세어지며 선을 끊었다.

그 울음소리에 진수연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정신을 차렸다.

언제부터 얼굴을 만지작 거린 거지?

통제력을 상실했다.

아니, 이성을 놓아버렸다.

 

“……미안해.”

 

절친한 친구의 아이를 울리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의 추잡한 욕망에 의해.

베란다에 나가 떨어져 죽고 싶었다.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의 자신감이 한 순간에 박살이 난 것 같았다.

정말 한심한 꼴이다. 진수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잠깐 생각에 빠진 진수연은 이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누나가 무서웠지? 미안해……. 아무래도 같이 자긴 힘들겠네.”

 

자신의 집이지만 김세민을 재운 다음 자신은 밖에 나가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다.

잠만 재워서 친구에게 보내주면 지금 느끼는 이 번뇌와 고뇌도 끝이 날 것이다…….

진수연은 머리를 쓸어넘기면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나 김세민이 눈물을 닦으며 한 말은 뜻 밖의 말이었다.

 

“누나가 무서운 게 아니예요…….”

 

진수연이 자신의 허리까지 닿는 김세민을 바라봤다.

 

“누나가 너무 괴로워 보여서……. 그게 슬펐어요.”

 

하아.

이 아이는 너무 순수하다.

자신의 욕망을 알게 되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게 될지……

그것을 생각하자 진수연은 알 수 없는 쾌감에 등이 흔들렸다.

미움 받지 않았다는 안도의 마음과 추잡한 욕망이 마음속에 복잡하게 얽혔다.

그것을 무시하며 진수연은 김세민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민이는 참 착하구나. 하지만 누나는 그렇지 않아. 그래서 괴로운 거야…….”

 

“……제 눈에는 이쁘고 착하기만 한걸요.”

 

”첫 눈에 어떻게 알겠니?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네. 후후.“

 

진수연은 몸을 일으켜 빈 방을 안내하고 벽걸이 시계를 바라봤다.

11시 55분. 

슬슬 밥을 차려야 겠네.

어제 토요일에 사둔 게 뭐가 있었지?

냉장고를 여니 세워지거나 쓰러진 맥주만이 안을 뒹굴었다.

 

”음…….“

 

배달 음식은 먹이기 싫었다.

기왕이면 자신의 요리로 밥을 먹이고 싶었다.

차를 타면 금방인 큰 마켓이 생각났다.

화장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거울에는 군살 하나 없는 몸매가 보였다.

운동은 딱히 하지 않지만 맥주를 제외하면 잘 가려 먹는게 관리의 비결이었다.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리며 타월로 몸을 가렸다.

방에 들어가 몸을 닦고 사놓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명품 옷들을 꺼내 입어봤다.

조금 타이트했지만 그 만큼 각선미가 돋보여 만족스러웠다.

검은색 코트와 하늘색 스커트를 입고 그 아래에 검은 스타킹을 신었다.

가려지지 않은 스타킹 윗부분과 스커트 사이 부분이 간질러웠다.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화장을 하고 거울을 봤다.

거울 안에는 어떤 남자든 홀릴 것같은 청순한 여자가 섹시한 자태를 드러냈다.

 

”데이트를 가는 것도 아닌데…….“

 

진수연이 방을 나와 김세민의 방을 두드렸다.

 

”세민아……. 누나 마트 갈건데 같이 갈래?“

 

자신이 꾸민 차림새를 남자에게 뽐내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자 곧이어 문을 열렸다.

진수연을 본 김세민의 눈이 커졌다.

 

”누나……. 너무 예뻐요…….“

 

그 반응이 너무 흡족스러웠다.

몇 백만원짜리 명품 옷들이 방금 그 한마디로 값어치가 다했다.

진수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후후. 고마워. 그래서 갈 거니 안 갈거니?“

 

”가,갈게요…….“

 

김세민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그제서야 진수연은 자신의 어른으로서의 매력과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을 잡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진수연은 차키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가볼까?“

 

 

 

****

 

 

 

고급스러운 검정 세단차가 주차장에 정차했다.

작은 소년과 흑발의 여자가 문을 열고 내렸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낮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진수연은 결심한 듯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말했다.

 

”세,세민아 잃어 버리면 안되니깐 소,손 잡고 갈래?“

 

아까의 침착함은 어디가고 왜 다시 말을 더듬는 건지.

진수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김세민이 말없이 진수연의 손을 잡자 순간 당황해 어깨를 움찔거렸다.

따뜻하다. 조그맣다. 부드럽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도는 감각들을 겨우 물리치고 진수연은 간신히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마트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자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진수연에게 쏠렸다.

그 당연한 시선이 이제는 익숙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꾸미고 나온 터라 유달리 더 심하게 느껴졌다.

 

‘모델인가?’

‘왠만한 연예인보다 더 이쁘네.’

‘인스타 하나 물어볼까?’

 

진수연은 그런 수군거림을 무시하고 신경 쓰이는 단 하나의 시선인 김세민을 바라봤다.

 

”뭐 먹고 싶은거 있어?“

 

김세민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어요. 누나가 하는 거면 다 좋아요.“

 

멘트 하나하나가 심장이 흔들렸다.

요즘에는 학교에서 드라마로 공부하나?

그래도 다행이었다.

요리를 아예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 있는 분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응응. 맡겨만 줘. 세민아.“

 

정육 코너로 들어가서 한우를 부위별로 카트에 한 가득 담았다.

그 다음에는 생선,채소,과일 등을 넣고 우유와 군것질도 몇 개 사놓았다.

그러다 보니 카트가 벌써 반이 넘쳤다.

해주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들고 갈 것을 생각해야 했기에 이정도만 사고 계산을 했다.

봉투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저도 들게요. 누나.“

 

김세민은 영특하게 오른손에 든 봉투를 뺏어 한 가득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본 진수연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안녕하세요. 전화번호 좀 알수 있을까요?“

 

머리가 쭈볏쭈볏 나있는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진수연은 익숙한 듯 대답했다.

 

”남자 친구가 있어서요. 죄송해요.“

 

남자가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럼 주말에 데이트를 하지. 동생이랑 장을 봐요? 번호만 알려줘요.“

 

”관심 없으니깐 신경 꺼요.“

 

”남자친구 없는 거 맞네. 저 만나보면 재밌어요. 제가 들게요.“

 

남자가 손을 뻗어 봉투를 들려고 하자 진수연은 무서운 듯 몸을 움츠러들었다.

그 사이를 김세민이 끼어 들어 막았다.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누나가 싫어하잖아요. 그만 해요. 아저씨.“

 

”세,세민아……. 빨리 가자.“

 

진수연이 달아날 듯 김세민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남자가 뒤에서 다가가 손을 잡아챘다.

진수연은 소름돋는 감촉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꺄아아아아!!!“

 

그 소리에 마트 안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남자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직원과 경비병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씨발…….“

 

남자는 분을 삭히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전화번호만 주면 그냥 끝날 일을…….

입을 비틀고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가슴에 손을 얹어 자신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으며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애새끼가 있었다.

그 눈빛에 남자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악!“

 

남자가 발길질을 하자 김세민은 그 충격에 옆으로 고꾸라졌다.

장내가 더 소란스러워지고 경비병과 사람들이 급히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성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

진수연이었다.

진수연은 어깨에 맨 백으로 남자의 머리를 사정 없이 가격했다.

 

”개씨발 미친 새끼야! 애를 패!? 정신 나간 새끼가!“

 

남자는 당황해 발을 헛디뎌 몸이 쓰러지자 진수연이 그 위를 덮쳐 사정없이 내려 찍었다.

 

”악! 악! 그만,그만해 미친 년아.“

 

남자의 말처럼 진수연은 미친 사람처럼 남자를 두들겨 팼다.

경비병과 직원들이 남자를 제압하고 진수연을 떼어뜨리기 위해 양 팔을 잡았다.

어디서 괴력이 솟아나온 건지 진수연은 양 팔을 잡은 남자들을 뿌리치며 달려갔다.

김세민이 넘어진 곳으로.

그곳에는 이미 아이가 괜찮은지 살피러 온 장을 본 아주머니로 가득했다.

진수연은 김세민의 얼굴을 매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세민아?! 괜찮아?“

 

김세민 대신 느긋한 미소를 짓는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말도 잘하고 아픈 데도 없대.“

 

김세민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동생이 참 이뻐. 어린 것이 다 큰 누나를 보호할려 하고. 우리 애들도 그랬으면 참 좋겄는디.“

 

김세민이 작게 속삭였다.

 

”누나 울지 마요……. 이래도 누나가 안 착하다고요?“

 

그 말에 진수연은 억장이 무너졌다.

김세민을 품안에 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따뜻함이 마음속에서 흘러넘쳤다.

근처 파출소에서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이 매장 입구에 모여들었다. 

 

 

 

****

 

 

 

남자는 파출소에 구금됐고 진수연은 조사를 받고 나서야 저녁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장이 다 번진 얼굴을 깨끗하게 세안하고 쇼파에 앉아 있는 김세민을 바라봤다.

가슴 속이 더 이상 녹아날 것이 없었다.

 

”배고프지? 잠깐만 기다려.“

 

진수연은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간단하지만 빨리 할 수 있는 것들로 하나하나 상을 차렸다.

다 차린 식탁에 김세민을 부르고 진수연은 잠시 베란다로 나갔다.

차가운 한풍이 피부에 스며들었지만 다시금 솟구친 분노로 인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 너가 처리 좀 해줘. 민사,형사 가릴 것 없이 최대한 괴롭혀. 절대 합의해주지 말고. 더 괴롭힐 게 없으면 사람을 써.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휴대폰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수연은 한숨을 쉬고 베란다에 나왔다.

식탁에는 먹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김세민이 보였다.

거칠어진 마음이 다시 사르르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행복한 느낌을 마음 속에 품으며 식탁에 앉았다.

진수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밥 먹을까? 후후.”

 

“네.”

 

김세민은 많이 배고팠 던 듯 허겁지겁 손을 움직였다.

진수연은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반찬을 하나씩 밥그릇에 올려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몸을 씻자 어느 새 깜깜한 어둠이 찾아왔다.

이제 밤이 막 시작됐건만 짜릿한 전율이 흐르며 진수연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 혼자 못 자요……. 누나랑 같이 잘 래요.

 

방으로 돌아온 진수연은 고급스러운 흰색 블라우스와 짧은 돌핀 팬츠로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와 같은 옷인데 가슴 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오늘 하루종일 진정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그랬다.

이미 인근에 호텔에 예약은 해놓은 상태였다.

김세민을 침대에서 재우면 자신은 그 호텔에 가서 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 다음 아침에 집으로 돌아와 학교에 보내고 하교를 할 때 맡아주겠다는 친구에게 데려다 주면 된다.

그렇게 일주일만 학교와 식사를 챙겨준다면 더 이상 번뇌에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는 계산이 섰다.

진수연은 전등을 끄고 스탠드 조명을 켰다. 

아름다운 주홍빛이 그 주변을 밝혔다.

탁자 위에 올려둔 냉수를 컵에 담아 들이켰다.

꿀꺽…꿀꺽…

 

“하아…….”

 

달뜬 한숨이 뱉어나왔다.

그때 방문이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수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들어와.”

 

잠옷을 입은 김세민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어퍼컷을 한 대 맞은 듯 진수연은 머리가 멍해졌다.

김세민이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와 이불 속에 파고든다.

침대는 한 사람이 자기에 충분히 넓었지만 김세민이 들어오자 갑자기 좁아보였다.

김세민이 말했다.

 

“고마워요. 누나. 엄마랑 항상 같이 자서 걱정 했는데……. 누나 옆이 포근하고 참 좋아요.”

 

김세민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순수하게 웃자 진수연은 더욱 멍해졌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말하는데 말이 잘 안 나온다.

 

“어,어……. 자,잘 자렴…….”

 

김세민이 몸을 돌려 손을 잡더니 팔과 어깨로 손이 점점 움직여갔다.

개미가 지나다니는 것 같은 황홀한 감촉에 진수연의 몸이 소스라치게 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김세민의 손이 쇄골이 드러난 블라우스 속에 파고들며 튀어오른 가슴을 억제하는 브래지어를 움컥 잡아쥐었다.

 

“으흣…….”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이 용솟음쳤지만 세상이 떠날 것 같은 쾌감에 덮혀졌다.

김세민은 그 감촉이 안심이 된 듯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진수연은 친구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린 아이는 엄마의 배와 가슴을 만져야 안심하고 잔다는 메시지가.

김세민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을 즐기며 점차 코를 골았다.

그러는 사이 진수연의 몸은 움찔움찔거렸다.

쾌감의 진동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몸 어느 곳 하나 떨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몸 속에 일어난 격동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두근두근.두근두근.

 

“하아……하아……”

 

두근두근.두근두근.

 

“으흥…… 흐아……”

 

김세민을 깨우지 않기 위해 쾌락과 격렬한 싸움을 하던 진수연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쾌락이 휘몰아쳤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세,세민아…… 하아…….”

 

그 소리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김세민이 잠들면 호텔로 떠난다는 선택지는 더 이상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격렬한 감정이 이성을 덮으며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세민아…… 세민아…….”

 

그 흐느끼는 소리에 김세민이 잠깐 잠에서 깼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네……. 누나…… 왜요……?”

 

“미안해……. 미안해 진짜…….”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김세민이 눈을 뜨고 진수연을 바라봤다.

배게에 머리를 묻고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솟아오른 부드러운 피부를 문질렀다.

그러자 떨림이 더욱 심해지고 따뜻한 열이 김세민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김세민은 다시 눈을 감고 말했다.

잠이 올 것 같았다.

 

“뭐가…… 미안 해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 짧은 적막감과 가슴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열과 떨림, 그리고 옆에서 느껴지는 낯선 향긋한 향기에 김세민은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뒤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 으흣…….”

 

김세민이 상체를 일으켜 블라우스를 벗었다.

돌핀 팬츠와 검은색 브래지어가 조명 빛에 그림자를 그리며 출렁였다.

진수연이 손을 뻗어 김세민의 잠옷을 잡아 끌어 벗겼다.

그 난폭한 손짓에 김세민이 잠에서 깨어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이 마주친 진수연의 눈에는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다.

본능에 이성을 맡겨버린 진수연의 몸이 곡선을 그리며 지난 십년이 넘는 기간 동안 봉인했던 마음 속 욕망에 몸을 내맡겼다.

이지를 상실한 그 눈빛에는 오로지 하나의 인영만이 담겨 있었다.

진수연이 달뜬 호흡을 내뱉으며 웃었다.

 

“말했잖니. 누나는 착하지 않다고. 후후후후후후…….”

 

김세민의 고개가 움츠러들며 몸을 떨었다.


“누,누나? 그게 무슨…….”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조명에 비친 두 개의 그림자는 곧장 하나에 덮혀졌다.

진수연의 환락에 들뜬 신음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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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만 쓰고 올렸었는데 아쉬워서 지우고 한편 더 써봅니다.

그래도 적당히 마무리 지은 것 같아 만족스럽네요.

여인예속 후속편 기다린지 15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안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