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 그룹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글자가 아름이의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현실, 그러나 이번에도 볼을 꼬집어 보지만 볼만 아프지, 무엇 하나 바뀌는 게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말 그대로 언블리버블한 상황에 바보, 멍청이처럼 MH 그룹의 입구를 바라본 체 멀뚱멀뚱 서 있다.

불과 몇 분 전에 그는 웬 이상한 여자에게 칼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을 텐데….

단순히 꿈이나 백일몽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전까지의 기억들이 너무 생생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배를 비집고 들어간 은빛 칼날의 차가운 촉감이라든지, 시뻘건 피가 도심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마치 수묵화처럼 점점이 핏방울이 떨어지는 풍경.

머리가 멍해지고, 사지에 힘이 풀리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그 순간들 하나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근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슨 상황이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살짝 걷어 올려 칼날이 꿰뚫고 간 자리를 확인해보지만, 마치 그때 그 순간의 일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런 상처도 없다.

그때 번개같이 무언가 번뜩 생각이 난 아름이,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보니 시간은 9월 9일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찜질방에 잠을 잔 뒤, 일어나면서 시간을 확인 했을 때 분명 시간은 9월 10일이었다.


날짜를 착각했을 리가 없다. 분명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는 날이 9월 10일이었고, 그전까지 정말 먹고살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바로 저녁에 일당 치기로 상·하차를 나갔으니까.

자기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분명 휴대전화의 메시지 내용에는 9월 8일 저녁에 유식역 7번 출구 앞에 있는 빨간 버스를 타라는 택배 회사의 메시지가 아름이의 전화번호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면 9월 8일 저녁에 나는 일을 나가서 9월 9일 아침에 일을 마치고 집이 있는곳으로 갔지만 집이 사라져서 어쩔 수 없이 

9월 10일 저녁까지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바깥으로 나오니 웬 이상한 여자에게 배에 칼을 맞고 죽었다는 게 되는데….


하지만 믿을 수 없게 휴대전화의 디스플레이는 9월 9일이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다.


....나 회귀한 건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병신같은 상상이지만 아무리 추론해봐도 그것 외에는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혹시…….


"상태창"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상태창!"


크게 불러보지만 변함없는 시야.


"상태창 오픈! 상태창 보여줘! 나와라 상태창! 스테이터스 오픈! 인벤토리 오픈!!!"


"엄마, 저 오빠, 이상해"


"세연아, 그런 말 하면 못 써, 저 오빠는 이상한 게 아니라, 조금 다른 것 뿐이야, 이리와 세연아, 가까이하면 안되요"


딸에게 못 볼 거라도 보여줬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아저씨, 아름이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자신의 딸을 뒤로 숨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어색한 듯 멋쩍게 웃는 아저씨, 아름이는 그런 아저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보았지만, 오히려 질겁을 하며 딸의 손을 잡은 체 어디론가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광경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는 아름이,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동정과 연민, 그리고 경계의 눈빛이 서려 있었다.


무슨 장막이라도 처져있는 것처럼 자신을 주위로 반경 2M에는 사람이 오질 않았다.


"우르르, 왈왈!!!"


심지어 목줄에 매인 누렁이도 아름이를 보면서 붉은 잇몸을 드러낸 체 잔뜩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겠다.


주위의 이목이 쏠리자 자연스럽게 열이 뻗치기 시작하는 아름이의 얼굴, 홍당무처럼 벌겋게 변한 얼굴을 뒤로하고 황급히 MH 그룹 앞에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무작정 사람들의 인파 속을 헤치고 그가 도착한 곳은 어제, 아니 오늘 갔었던 24시 황토 사우나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조용한 사우나 앞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아름이의 머리를 한번 스치고 지나갔다. 이마까지 올라온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 하지만 그걸로 만족하기는 너무 부족했다.

그러잖아도 9월 8일, 그러니까 날짜상으로 어제에 해당한 시기의 자신은 밤새도록 일을 하고 왔기 때문에 땀과 먼지 범벅이었다.


게다가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회귀했어도, 신체적인 조건도 같이 돌아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한 것이 9월 9일의 아름이는 밤새도록 일을 하고 온 터라 머리가 지끈 지끈거렸기 때문에 찜질방에서 일단 휴식하기 위해서 하룻밤 자고 왔지 않은가?


일단 조금 쉬고 싶은데. 천근만근같이 무거운 몸뚱어리, 아름이는 다시 한 번 사우나에 들어가 쉬기 위해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또 만나면 어떻게 하지?


구불구불한 내장이 바닥에 쏟고지고, 피가 분수처럼 튀는 그 모습이 다시 한 번 떠오르자 절로 헛구역질이 나오는 그였다.

다행히 이 시기에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오는 건 없었지만.


생각을 해보자.


다시 한 번 어제 일을 떠올려보는 아름이, 그녀의 첫인상은 아름이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아름이에게 호의적이었다. 적어도 만나자마자 칼로 사람을 찌를 만큼 그녀는 막 나가지는 않았다.

그다음이 문제였지. 일단은 뭐……. 휴대전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하고 싶어도 그는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삼성이나 LG 대신에 MH 그룹이나 DJ 전자는 또 뭐고, 내일 만날 그녀와 자신의 사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일단 여기는 내가 지금까지 살고 있던 세계랑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주머니에 든 휴대전화로 네이버, 아니 자베르라고 적혀져 있는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본다. 


.... 나 데이터가 없구나.


진성 흙 수저 한 아름, 그는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없었다.

알뜰 요금제를 사용하고 있던 아름은 인터넷에 접속하려야 접속할 수 없다는걸 알게 되자, 목욕탕의 로비로 발걸음을 옮긴다.


찜질방 같은 데서는 공용와이파이가 터지겠지?

딱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지갑을 꺼내서 찜질방+사우나 이용권을 하나 구매하려던 아름이, 문득 지금의 일이 데자뷔처럼 느껴진다.


분명 어제 여기에 있었다가, 그 여자와 만났지?

어차피 만나기는 내일 만날 텐데 오늘은 여기서 죽치고 있을까? 아니 기왕 떠오른 김에 다른 곳으로 도망치자.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아름이, 돈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일단 이 근처에서 잠을 자는 건 너무 위험한 선택지였다.

유식역 입구로 발걸음을 돌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아름이, 출근 시간이랑 시간대가 겹쳤기 때문일까 봐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해치고, 1층 지하철 매표구 앞에 있는 노선도를 한번 바라보았다.

삼성이 MH 그룹이 되고 LG가 DJ 그룹이 된 것처럼 지하철의 역 이름도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예를 들면 홍대 입구는 청대 입구로, 강남역이 있어야 할 곳에는 초서역 등등, 자신이 알고 있던 역 이름과는 다른 노선표를 보자 머리가 살짝 멍해진 아름이었다.


이래서는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 국회의사당이나 경복궁 쪽, 그리고 한강 둔치 쪽은 아름이의 기억과 똑같았다.

그러면 일단 한강 둔치 쪽으로 가볼까?


최대한 가까운 곳을 목적지로 정한 아름이, 어디로 갈지 정해졌으면 다음에는 그곳으로 갈 일만 남았다.

출근 시간이랑 겹쳤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저것 곤란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아으…. 좀만 늦게 갈 걸…. 아니면 빨리 움직이든가….


마치 쪄 죽을 것 같다.

콩나물의 그것처럼 빽빽한 지하철 내부, 거의 구석에 찌그러지듯 밀려난 아름이.


지금 시각은 8시 40분, 딱 출근 시간의 막바지 시간대였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체 이리저리 바다에 떠돈 부표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름이는 최대한 밀리지 않도록 손잡이를 잡아보지만, 마음을 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 지금 치한당하고 있는거야?


지하철이 혼잡한 틈을 타 누군가가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다는걸 눈치챈 아름이, 

처음에는 사람이 워낙 많은 탓에 미처 손잡이를 잡지 못한 누군가가 멈추고 출발하는 그 과정에서 몸이 여기저기 떠밀리느라


실수로 다른 사람의 몸을 잘못 터치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지하철이 아무런 흔들림 없이 지나가는 그 순간에도 계속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호모, 게이 뭐 그런 건가?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아름이, 집이 한순간에 없어지고, 자신이 알고 있던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은 하루아침에 MH니 DJ 같은 그룹으로 바뀐 것도 모자라

어떤 여자에게 칼을 맞은 일, 그리고 그 칼에 맞은 후 바로 9월 9일 아침으로 시간대가 회귀한 것 등등…. 

도저히 아름이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여러 일이 한 번에 일어난 덕에 안 그래도 스트레스라는 스트레스는 엄청나게 받고 있는 상황, 

이번에는 지하철에서 치한을 당하고 있었다.


아아…. 싫다. 남자에게 성추행이라니.


눈이 제대로 달린 건가?


아하- 어이가 없어서….


아름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손으로 아름이의 허벅지를 툭툭 치듯 만지기 시작하는 치한의 손길.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살짝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아름이, 너무 혐오스럽다.


게다가 다분히 고의성이 넘치는 그 손길은 점점 아름이의 사타구니 쪽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을 건드린 그 손을 붙잡는 아름이, 어느 정도 완력에 자신이 있었다.


마치 으스러트릴 것처럼 자신의 몸을 건든 치한의 손목을 잡아 비틀기 시작한다.


"아-아"


"이번 역은 역사- 역사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안내방송에 묻혀서 제대로 들리지 않은 고통에 찬 신음, 


이어폰을 꽂고 있거나 주위에 대해 그렇게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소리였지만

당사자인 아름이는 그 소리를 제대로 놓치지 않았다. 서둘러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뒤로 얼굴을 돌리는 아름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남자일 줄 알았던 치한의 정체는 여자였다.


그것도 갓 30대를 넘긴 젊은 여자.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나? 그건 아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여자는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무언가가 찔렸을 때, 나오는 그런 표정. 


이 여자가 범인이다.


아름이의 동물적인 본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한데 왜…? 나를?


여자가 남자를 추행한다고? 


무슨 에로 만화 같은 그런 전개가 다 있느냐?

아름이는 여자가 남자를 추행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 밖에 없을 거라고 지금까지 믿고 있었다.


늙은 여자거나, 아니면 못생긴 여자.

요컨대 자신이 손목을 잡은 저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자가 남자를 성추행한다? 그런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충분히 주위의 남자들이 떠받으러 줄 텐데,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사람을 성추행하는지….


아름이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지금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대체 왜…? 그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성희롱하고 있는 치한의 손목을 꽉 붙잡은 체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아름이, 그때 지하철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적인 도시 여성, 모르긴 몰라도 주위에서 꽤 도도해 보인다, 까칠해 보인다. 등등 그런 소리를 많이 들을법한 전형적인 고양 이상 여자.

그녀가 아름이와 눈을 마주치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미친 듯이 떨려오는 눈동자, 그리고 잡은 손목에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맥박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신체적인 반응들은 아름이가 그녀가 빼도 박도 못하는 성희롱범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녀를 데리고 지하철을 빠져나오는 아름이, 그리고 한눈에 봐도 우스워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아름이의 손에 딸려 나오기 시작하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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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참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