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칼에서 총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바뀌어도,

사냥한 동물에서 천연자원으로 원인이 바뀌어도,

부족단위에서 국가단위의 전면전으로 양상이 바뀌어도


본질은 똑같다.


이긴 자가 달콤한 승리의 과실을 챙기는 경우는 적다.


승리한 자든, 패배한 자든

극심한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을 겪고

배고픔에 허덕인다.


소리나 지를 줄 알지, 총 한번을 들지 않는 노인네들이나 전쟁의 영광을 누린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전쟁에서,

현실감 없는 높으신 분들이

핵분열에너지를 주 위력으로 삼는 대륙간탄도병기의 발사기를 만지작거린단 소문이 있다.


상호확증파괴를 막기 위해, 

오늘도 전선의 젊은이들은 총을 들고, 무인지대 위를 달려 나간다.


당연히, 고폭탄과 총탄에 팔다리가 짓이겨져 나간다.

적진에 도착하는 인원은 극소수고, 그마저도 야삽과 총검에 두개골이 함몰된다.


이제는 발발한 이유마저도 잊어버린 채,

뚱뚱하고 멍청한 노인네가 핵병기의 발사버튼을 누르는 대신에 지루한 소모전을 계속한다.


탱크나 하다못해 트럭같은 기갑장비는 대부분 소진된지 오래다.

자주포마저도 부족해서 박물관의 오래된 견인포를 꺼낸다.


건장한 성인 남성은 모두 징집되고, 소모중이다.

전선에 보낼 사람이 필요하다.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 여성도 징집중이고, 그마저도 부족하다.


이제는 나이가 있는 중장년층과 학도병들이 징집된다.

총알같은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에선 허리가 휜 노년층들과,

이미 태어났을 때 부터 전쟁중이라 평화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프레스기를 조작한다.

그리고 전선에 보낼 총알을 조립한다.


상이군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팔이 없으면 의수를 달고

다리가 없으면 의족을 달아 전선에 투입시킨다.

정신이 나간 사람에겐 윽박을 지르고 채찍질을 가한다.


몸이 망가지든, 정신이 망가지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된 병신이 되어서야

입을 줄이기 위해서 하급 장교들이 처형이라는 자비를 내린다.


죽음만이, 이 전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다.


“어디가?”

이미 총알이 한 번 관통한 철모를 눌러쓴 동료가

남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화장실”

남자는 작게 대답한다.

허리를 펴지 않는다.

종종걸음으로 폭이 좁은 참호를 헤쳐나간다.


“언다, 동상 조심해라”

극심한 추위,

음식물이 기름에 절여저 나오는 통조림도 얼어서 먹을 수 없는 추위가 전선을 휘감는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수분을 극도로 제거한 돌덩이같은 비스킷과 소금에 절여진 육포들,

그리고 지천에 널린 눈을 씹어먹는다.

수통과 그 안에서 얼어버린 물은, 그저 엉덩이에 날아오는 총탄을 막아주는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자칫 눈을 많이 먹으면 설사병에 걸린다.

그렇다고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극심한 추위속에서 탈수증상이 일어난다.


단순히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것도, 생존을 위해선 머리를 써가며 행동해야한다.


남자는 매서운 바람에 떨어지지 않도록 총기의 어깨끈을 좀 더 단단히 맨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화장실이 있을리 만무하다.

남자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새하얀 눈밖에 보이지 않는 곳 까지 이동한다.

그리고, 야삽을 꺼내서 땅을 파낸다.

바람을 막고 몸을 가려줄 정도로 땅을 파낸 뒤에

그 안에 소피를 본다.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휴지로 사타구니의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삽으로 분뇨구멍을 다시 메운다.

  

“지긋지긋 하구만”

일을 한번 보기 위해서도 많은 수고를 들여야한다.

행동 하나하나가 체력과 정신력을 갉아먹는다.

담배도 하나 피우고 싶지만, 불을 붙였다간 순식간에 견인포의 고폭탄이 자신에게 향할지 모른다.


잠깐 내려놓은 사이 파묻혀버린 개인화기를 꺼내들고

다시 머나먼 전선을 향해 눈을 헤치며 걷는다.


바람이 매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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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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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걸어도 진지와 참호가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올때보다 더 많은 시간과 걸음을 소비했다.


시야가 눈폭풍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보아도 방위를 알아내기 힘들다.


눈 속을 헤쳐오느라 체력을 소진했다.

이 이상 움직이면, 조난 당하는것도 시간문제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까지 흘린 땀 때문에 몸이 얼어붙어 저체온증으로 죽는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남자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란걸 알고 있음에도 발걸음을 움직인다.


저 멀리, 명확히 보이지 않는 검은 점에 아군이 있기를 바라며….


—----


눈더미를 파헤치며 걸은지 2시간이 지났다.

발가락 끝의 감각은 없어진지 오래다.


조금만 중심을 잘못 잡는다면, 눈더미 속으로 넘어질 것이다.

지금 체력에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신중하게, 한걸음 한걸음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어쩌다 이곳으로 오게 된걸까?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남자도 평벙한 학생이였다.


시험공부가 죽어도 하기 싫고

주말에 TV를 보고 게임이나 하고싶었다.


연일 뉴스에선 양국의 외교관계가 악화되고

국지적인 도발이 일어났지만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허구헌날 거리에선 시위와 행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여 자국이나 타국의 국기를 태우고 찢기 바빴다.

멍청한 사람들이 할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하는 투표가 있던 날에, 친구들과 놀러나갔다.

연일 떠들어대는 시위소리와  행진소리가 시끄럽기만 했다.

욕설과 자극적인 이야기를 유튜브에 송출하는 정치인들이 인기를 끌었다.

남자에겐 그런 것 보단, 거리에서 여자를 헌팅하는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


누군가 당선이 되었고

그 누군가가 연일 일장 연설을 하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전혀 상관없는 국가의 대사관에 불을 지르고

여행이 금지되고


이윽고, 사이렌이 울리면서

징집을 알리는 방송이 TV에 나올때야 

남자는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틀어질 때 까지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후회를 할 수도 없었다.


훈련소에서 개같이 구르며 총 쏘는법을 배웠다.

평생 먹어본 욕보다 조교에게 들은 것이 더 많았다.

선생은 물론, 부모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쉴 새 없이 구타를 당한다.


4주 뒤에 전선으로 차출되었다.

얼굴을 아는 친구 몇 명이서 같은 부대로 배치되었다.


전선에 투입된지 첫 날부터 그들이 죽어나갔다.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고폭탄이 단 몇 cm만 가까이 떨어졌어도

고깃덩이가 되어버리는건 오랜 불알친구가 아니라 자신이였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전선에 남아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얼굴만 아는 친구가 지뢰에 다리를 잃었다.

찢겨나간 다리에서 혈액이 질질 샌다.

친구가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남자는 그 친구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게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들어온 신병은 여자였다.

여성에 대한 징집도 시작된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버러지같은 부대원 몆 명이 아군 여성 병사를 폭행하고, 강간했다.

지금은 대위까지 진급한 그 당시 소위가, 

버러지들을 권총으로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다음날, 그 여성 징집병은 자신이 가진 소총을 머리에 대고 당겼다.


이후로 남자가 있는 전선에선 군법을 어기는 자들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의 감정이 매말라갔다.


이등병으로 입대한 남자가 상병으로 진급했을 즈음엔

총이라곤 훈련소에서도 못만져본 학도병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조금이나마, 인간성이 남아있는 선임병들이 학도병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했다.

자신들이 저 나이땐 핸드폰이나 하루종일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학도병들은 보급계원이 나누어주는 수류탄을 쥐어드는게 미안했다.


“절대, 용감하게 행동하지 마라”

“소리도 지르지 말고, 총도 함부로 쏘지 마라”

“상관의 지시라도, 성실히 이행하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너흰 살아남을 수 있다.”

“적을 무찌르는 건, 살아남고 난 다음이다.”


어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일어난 전쟁을

아이들에게 까지 책임을 전가하기 싫었다. 

아니. 그러면 안된다.


하지만, 다음 날 

상부에서 내려온 정치장교 하나가 학도병들을 전열시키고 윽박을 질렀다.

15살이나 채 넘었을법한 아이들을 굴리고 때리고 걷어차고 나서

한명 한명에게 직접 총을 쥐어주었다.

부모님의 은혜나 국가에 대한 충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명령했다.

“돌겨어어어어억!!!!”


학도병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로 총알을 흩뿌리며 적진을 향해 용감히 뛰어갔다.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뒤로 신병들에게 선임병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신병들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한 뒤에야, 이름을 물어보았다.


얼굴밖에 모르는 전우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정치장교는 한 달 뒤,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정치장교는 앞서 스러져간 학도병들 처럼 전사처리되었고

그나마 시신이라도 가족 품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에겐, 과분한 호사였다.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검은 점 같던 목적지가 명확히 보인다.


통나무와 판자로 이루어진 오두막,

전쟁 전에 농막으로 쓰였거나

어쩌면 중산층의 별장지였을수도 있다.


아무튼 눈보라를 피할 수 있는 장소인게 중요하다.


한걸음 한걸음, 살아남기 위해서 나아간다.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된다.

남자도 살아남다 보니 하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동료의 구멍뚫린 철모도, 다른 동료가 쓰고 있던 것이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건 힘겨운 일이기에, 

그 철모를 쓰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은 묻지 않았다.


죽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줄 사람따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십니까?”

이런 눈보라속 오도카니 떨어져 있는 오두막에 누군가 살 것 같지는 않지만

확인차 목소리를 낸다.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린다.


‘끼이이익’

오래된 나무문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우...움직이면 쏜다.”

그리고, 오두막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에게 권총을 겨눈다.

군복을 입고 있지만, 아쉽게도 모양이 남자의 것과 다르다.


둘은 서로 적군이었다.


남자가 쏜살같이 문 옆으로 몸을 숨긴다.

열려진 문을 옆에 두고, 남녀가 같은 벽 한칸을 등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인다.

남자가 어깨끈을 풀고 총을 바로 쥔다.


노리쇠를 당길 필요조차 없다.

전장에선, 언제나 총이 장전된 상태다.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려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가빠진다.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도 땀이 흐른다.


남자가 숨을 멈추고 열린 문으로 몸을 내민다.

총을 앞으로 겨누자,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여자가 쥐고 있는 권총이 남자의 머리를 향하고 있다.

남자가 쥐고 있는 소총도 여자의 머리를 향하고 있다.


여자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남자에게도 들린다.

분명, 여자도 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들릴 것이다.


“허억...허억…”

“허억…허억…”


“딸깍”

“딸깍”


너나 할거 없이, 거의 동시에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누구의 총에서도 총알이 격발되지 않는다.


남자가 소총의 노리쇠를 다시 잡아 당긴다.

여자도 권총의 슬라이드를 다시 잡아 당긴다.


“허억…허억...”

“허억…허억…”


“딸깍”

“딸깍”


그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겨보지만, 총이 격발되지 않는다.

남자가 총을 옆으로 뉘어 노리쇠 뭉치를 쳐다보자, 눈과 얼음이 뒤덮여 있다.

여자가 들고 있는 권총의 멈치부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보아도, 공이가 총알을 때리지 못한다.


여자가 권총을 바닥에 버려두고 오두막 끝에 들어와 앉는다.

남자도 권총 옆에 소총을 내려두고, 여자의 옆에 앉는다.


“이름이 뭡니까?”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이름을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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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통성명을 한다.


아무런 의견교환도 하지 않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두 남녀는 각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간다.


오두막의 뒤편에 울창한 숲이 있다.

여자가 나뭇가지나 매마른 잎사귀들을 모아온다.

남자가 야삽의 날 부분으로 작은 나무들을 찍어넘기고 부러뜨린다.


오두막 한 가운데에 돌무더기를 만들고, 

잎사귀, 나뭇가지, 두꺼운 나무 순으로 쌓아올린다.

찬 바람이 몰아치지만,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연다.


여자가 가지고있는 총알을 하나 꺼내서, 탄자와 탄피 틈 사이를 못으로 찌른다.

조금씩, 탄피가 벌어지고, 탄자가 분리된다.

화약을 나뭇가지 위에 붓는다.


남자가 성냥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불을 붙인다.

화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불길이 생각보다 높게 오르지만, 터지지 않는다.


화약에서 나뭇잎으로, 나뭇가지로 불길이 번진다.


여자가 가지고 있는 비스킷 하나를 반으로 쪼개,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도 가지고 있는 육포를 반으로 찢어서, 여자에게 건넨다.


보급된 육포 하나는 비스킷 10개의 값어치를 지니지만,

남자는 그런걸 신경쓰지 않는다.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문에서 바람이 불자, 여자가 몸을 떤다.

남자는 좀 더 여자에게 가까이 붙어 앉는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장작을 두어번 더 집어넣고 나서

두 남녀는 서로 기댄 채 잠에 든다.


이름을 묻고 대답하는 것 외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에게 어깨 한 켠을 빌려주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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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해가 뜨고 눈보라가 잠잠해졌다.

주변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다.

안전한 오두막을 벗어나 이동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두 남녀는 대신, 오두막 주변을 조사한다.

오두막 외벽의 눈더미 사이로,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한다.

야삽으로 눈을 퍼내고, 지하실의 문을 연다.

저장고 안쪽엔, 피클이나 고기통조림같은 물자가 있다.

둘이서 나눠 먹는다면, 3일정도 버틸 수 있다.

모두 꺼내서, 오두막 안으로 가져다 놓는다.


얇은 모포 하나도 지하실에서 꺼내 털어낸다.

남자의 군장에서 침낭을 빼낸다.


저녁에 태울 나뭇가지를 모은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낮이 짧은 겨울엔 금방 해가 진다. 


어젯밤 타고 남은 숯을 이용해서 불을 지핀다.

어젯밤처럼 두 남녀는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불 앞에 앉는다.

통조림 바닥이, 장작불에 데워지며 새까맣게 그을린다.



“어디서 왔어요?”

여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말하면 알기나 합니까?"

남자는 괜한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지만


"알지요. 남자가 되어가지고 소갈머리가 솔방울만해서 쓰겠어요?"

한마디 튕겨보다가, 말로 돌려받는다.


"... 남쪽의 B시에서 왔습니다"

짧게, 자신의 고향을 이야기한다.


"바닷가 쪽이네요. 바다라... 어떤가요?”

여자는 계속해서 질문한다.


“해안도로를 따라서 매일같이 등교했습니다.”


“전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고향이 어디십니까?”

이번엔 남자가 여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북쪽의 S시에서 태어났어요.”


“접경지역과 맞닿은 그곳 입니까?”


“잘 아시네요.”


“학교에서 우리나라 지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나라라… 하긴 우리도 ‘우리나라’라고 배웠죠”

전쟁을 하는 두 나라는

언어도, 문화도 비슷하다.


머나먼 과거엔 한 국가였던것 같지만

사상이 달라서, 경제체제가 달라서, 지역이 달라서

여러가지 이유로 갈라서고, 싸웠다.

서로가 상대방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채, 물어뜯는다.


“...”

“...”

도대체 자신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는걸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두 남녀는 정수리에 총구를 들이밀며 싸울 일 따위 없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전장의 버려진 오두막이 아니라

분위기 좋은 까페나 시끄러운 술집에서 어깨를 맞대고 이야기하는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밥이나 먹읍시다”

남자가 침묵을 깬다.


밥이나 먹자고 하지만, 쌀을 이야기 하는게 아니다.

외국인이라면 알아듣지 못할 문화적 표현을 여자는 잘 알아듣는다.

 

남자가, 나뭇가지를 이용해 불타는 장작더미에서 통조림을 빼낸다.

프레스햄을 나이프로 잘라서 여자와 나누어 먹는다.


비워버린 통조림 캔을 오두막 구석에 던져두고

장작을 두어개 불씨 위에 올려놓는다.

눈을 녹인 물을 마시고, 가볍게 양치를 한다.


남자는 지하실에서 찾은 모포 하나와 자신의 침낭 하나를 두고 고심한다.

어젯밤엔 엉겁결에 앉아서 서로의 체온에 기댄채 잠이 들었지만

오늘도 그렇게 잠들기는 남사스럽다.

하지만 침구류가 부족하다
침낭은 괜찮지만, 모포 하나로 이 겨울밤을 나기엔 위험하다.


“추운데 뭐해요!”

밍기적 대는 남자를 여자가 뒤에서 타박한다.


여자는 남자의 앞에 있던 모포를 바닥에 깐다.

냉기를 막기 위해선, 덮는 것 보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걸 막아야한다.

그리고 그 위에 침낭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체구가 큰 남자를 먼저 침낭 안으로 밀어넣는다.


“ㄷ..당신은 어쩌려고 합니까?  이 밤중엔 얼어죽습니다”

남자가 침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가만히 좀 있어봐요. 나도 들어가야 하니까”

여자는 남자에게 끌어안기듯, 침낭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애초에 1인용으로 설계된 침낭이 터질 듯 하다.

그나마 여자의 체구가 좀 작아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두꺼운 겉옷은 벗어놓아서

겨우겨우 여자가 침낭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불편해도 좀 참아요. 얼어죽는것 보단 나으니까”

남자의 가슴팍에 대고, 여자가 변명하듯 이야기한다.


“...”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비좁은 공간 안에서 최적의 효율을 내다보니.

연인처럼 끌어안듯이

남자가 여자에게 팔베게를 해주듯이

여자가 남자의 품에 얼굴을 파묻듯이 눕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웠지만

지금은 바로 눈 앞에 여자의 정수리가 있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지근거리에서 보는 여성의 머리

하지만 떠오른 생각은 야릇한 상상이 아니다.

예전에 보았던, 자신의 소총을 본인 머리에 당겨

정수리가 터져 죽은 아군 여성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머리가 터지면 새빨간 피만 흩뿌려지지 않는다.

사람의 뇌는, 달리 본다면 거대한 지방덩어리다.

끈적한 액체와 기름이 온 사방으로 튄다.


내려다보이는 여자의 정수리는 분명 말짱한데

자꾸만 그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정수리에서 희여멀건한 액체들이 터져나올 것 같다.


덜덜덜,

남자의 턱이 떨린다.

자신은 소위가 즉결처형해버린 그 버러지들이 아니다.


불알친구 하나가 좋은게 있다며,

이미 윤간당하고 있는 아군 여성 병사를 보여주었을 때.

남자는 그 자리에서 여자를 보호하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소대장에게 달려가 그 참상을 보고했다.

그게 저항의지를 잃어버린,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미쳐버린 친구를 구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위는 그자리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불알친구는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참호 구석에 버려졌다.

다음날 여자가 머리에 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여자도 참호 구석에 버려졌다.


내가 그 친구를 죽인게 아니다. 

나는 여자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덜덜덜

남자의 손이 떨린다.

무인지대의 육편들과 자신이 다른점은, 살아있는 것 만이 아니다.

인간성이 삶의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장교의 등 뒤에 총알을 하나 박아주었다.

인간을 포기한 자들은, 육편이 돼야한다.

나는 학도병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가 상관을 죽인게 아니다.


참호에서 마추친 적군의 눈가로 총검을 찔러넣은 적이 있다.

살려달라 소리치는 병사에게 방아쇠를 당긴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살기위해 행동했다.

그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르다.


덜덜덜

이제는 남자의 온몸이 떨린다.


그저께, 노리쇠를 좀 더 힘차게 당겼다면, 총기에 쌓인 눈뭉치가 떨어져 나갔더라면,

이 오두막에서 시체와 함께 지내야 했을까?

어쩌면 나도, 이미 버러지 쓰레기 인건가?

실은, 죽어야 했던건 자신일까?


“왜 이리 떨어요. 많이 추워요?”

여자가 남자에게 좀 더 달라붙는다.

팔에 힘을 주어서, 꼬옥 안아준다.


크흠, 여자가 헛기침을 한다. 

남자에게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해서 피부가 닿는 면적을 늘리는 것이다.


“아닙니다.”

떨림이 멈춘다. 남자가 곧 진정을 되찾는다.

전장에서 맡아보는 화약냄새, 사람고기 익는 냄새, 구정물 냄새가 아니다.

사람의 살내음, 살아숨쉬는 인간의 향기가 남자의 코끝을 자극한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건

여자가 토닥토닥, 자신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였다.


—-------


“..나요”

“..어나요”

“일어나라니까요 이제!!”

남자의 턱을, 여자가 정수리로 들이박는다


“으헉”

별안간 가해지는 충격에 남자가 혀를 씹는다


“어후 답답해, 언제까지 퍼질러 잘라 그래요”


“...”

남자가 턱을 한번 매만진다.

남자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여자가

꼬물꼬물, 침낭에서 기어나온다.

물컹하고 부드러운것이 남자의 얼굴을 스친다.

남자는 쭈그려 앉아서 한참동안 침구류 정리를 해야 했다.


아침을 준비하기 전에

남자와 여자는 남아있는 물건을 모두 꺼낸다.

물자를 정리하고, 생존을 위한 계획을 짜야한다.


남자의 소총 한정과 30발들이 탄창 4개

여자의 9mm 권총 한정과 16발들이 탄창 2개

이리저리 긁어모은 하루치 식량

오두막의 모포 하나

남자의 침낭 하나
여자의 주머니 칼 하나

여자의 지도 하나

남자의 성냥 반갑

남자의 야삽 하나

오두막에 남아있는 가재도구 조금...


당장의 식량이 부족하다.


“그래도 탄약이 많아서 다행이네요”


“먹을 게 부족합니다.”

총을 지겹도록 쏴본 남자이지만, 총알로 먹을 걸 구할 수는 없다.


“겨울이라도 토끼나 여우가 돌아다니는 게 있을거에요. 총 좀 빌려줘봐요”

여자가 말하기 무섭게 남자의 소총을 채간다.

노리쇠를 몆 번 잡아당겨보고

탄창을 분리한 채 방아쇠를 딸깍거린다.


“어…그…”

남자가 순식간에 빼앗긴 자신의 총기를 바라본다.

적에게 총기를 탈취당하다니, 장교가 본다면 처벌감이다.


“빌 려 간 다 구 요. 나참… 할거 없으면 나무라도 캐와요.”

여자는 순식간에 오늘의 할 일을 나누고선

오두막 뒤편의 숲으로 향한다.

적재적소에 인원을 배치하고, 필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정한다.

엘리트 장교 출신다운 상황판단이다.


“숲에 들어오지 마요. 총맞기 싫으면”


“...”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여자의 말이 살벌하다.

남자는 어제처럼 야삽으로 나무들을 찍어내고, 쓰러뜨리길 반복한다.


1시간정도 지나자


“타앙”


숲에서 격발음이 울려퍼진다.


혹여나 총소리를 듣고 누군가 다가오면 어떡하나 생각이 들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고 이 오두막에서 버틸 수 없다.

적이든 아군이든 찾아온다면 

한명은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고, 다른 한명은 포로로 잡힐 것이다.

어쨌든,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다.


땀이 나면 한겹씩 두꺼운 옷들을 벗어던진다.

먹을게 얼마 없는 마당에 칼로리를 소비하는건 위험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믿어보기로 한다.


나뭇가지를 모아서, 오두막으로 옮긴다.


“타앙, 타앙”

두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완연한 오후가 되고

남자의 굶주림도 슬슬 참기 힘들어질 때


저 멀리서, 여자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내려온다.

남자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본다.

뭐야 저여자… 뭘 잡은거야?


“봤으면 후딱 달려와요!. 무거워 죽겠구만!!!”

여자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적군이라도 장교는 장교인 것일까?

일개 사병부터 시작한 남자는 전속력으로 뛰어간다.


어디서 발견했는지

여자는 자기가 말 한대로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단 3발만으로, 토끼 두 마리의 목을 관통시켰다.


오두막 처마까지 사냥감들을 가져온다.

산토끼는, 애완토끼와 다르게 거대하다.


여자는 자신의 주머니칼을 꺼낸다.

목을 끊고 가죽을 벗겨나간다.


피도 먹으면 좋겠지만 감염의 위험이 더 크다.

배를 갈라서, 내장도 간과 심장만 건져내고 나머진 버린다.


사냥한 동물을 처음 본 남자는 여자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다.

벗겨낸 가죽을 바닥에 펼치고

먹을 수 있는 부위들을 여자가 건네줄때마다 가죽 위에 쌓는다.


가끔, 여자가 힘이 부칠 때 갈비뼈를 벌리고, 꺾는다.

다리의 관절도 야삽으로 찍어서 끊어낸다.


한시간여가 걸려서 겨우 도축을 마친다.

그리 커다란 놈들을 잡았는데도 

내장이나 피를 제외하고선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남자가 준비한 장작들에 불을 지핀다.

야삽을 불에 달군다.

그 위에 금방 상하는 간이나 심장부터 굽는다.


남은 고기들은 가죽위에 잘 펼쳐서 바깥에 둔다.

추운 겨울에 고기가 금방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삼일치 식량은 되어 보인다.


익은 내장을 먹으며 남자가 질문을 한다.


“전쟁 전에... 뭘 하셨습니까?”

여자의 생활, 아니 생존능력이 가히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생존왕과 비견될만 하다


“전쟁 전에도 군인이었지요.”


“특수부대라도 됩니까?”


“먹고 살려니까, 잡다한 것도 배우게 되네요”

여자는 씁쓸하게 웃는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군에서 나오는 배식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몇몇 군인들은 군수물자를 빼돌려 식료품과 바꿔먹는것이 일상이었다.


산골출신이던 여자는 군수물자를 빼돌려 팔기보단, 총을 들고 산으로 향했다.

여우나 잡으면 다행이고

작은 새를 잡아서 연명한 적도 많다.


그나마 잡아와도, 고기가 귀했기 때문에

대부분 상급 장교에게 입막음료로 뺏기고

냄새나는 내장이나 찌끄러미를 손질해서 먹어야했다.


“...”

여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남자는 가끔 말문이 막힌다.


“그쪽은 전쟁 전에 뭐했어요?”


“대학생이었습니다”


“어머, 보기하곤 다르게 샌님이셨구만?”


“...”

곱상하진 않아도, 막노동 하다 왔냐는 소릴 들을만한 외모는 아니였는데...
전쟁의 풍파가 남자의 얼굴과 인상에도 영향을 주는 듯 하다.


두 남녀는 오두막에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허구헌날 뉴스에선 사상이 다른 적국에 대해 괴물처럼 묘사했는데

지금 옆에 있는 이 여자는, 평범한 사람이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숲속에서 토끼를 잡아와 도축을 하지는 않지만.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오랜만에, 남자가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여자에게 이야기한다.


“끝난다면요?”

남자가 맺지 못한 말을 되묻는 여자


“B시에 한번 놀러오시겠습니까?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네??”

여기까지 와서는 식사대접 이야기나 하다니.

첫 만남이 총부리로 시작된지라 인상이 좋을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샌님이라 그런지, 남쪽의 남정네는 여자를 꼬시는 기술이 영 좋지 못하다.


“크흠.. 제가 식사 대접을 한번 하겠습니다. 맛있는 순대국밥집도 있고, 역가에 프랜차이즈 도너츠 집도 유명합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B시의 풀코스, 

여자에게 데이트코스로 권유하기엔 사뭇 이상하지만.

이 남자에겐 그게 최선이다.


보잘것 없어보이는 고향의 국밥과 도나스가, 

남자에겐 가장 먹고싶은 것이고, 최고의 사치다.

그리고 그것을, 나란히 옆에 앉아있는 여자와 함께 해보고 싶다.


“푸하, 바닷가인데 순대가 유명해요? 제 고향도 찹쌀순대가 알아주는데”

여자는 속는 척, 한번 넘어가 주기로 한다.

이렇게 보란듯이, 자신을 꼬셔보려는 사람은 이 남자가 처음이다.


모두가 하루하루 먹고 살아남기 급급했기 때문에,

사랑이나 연애는 사치였다. 

결혼과 출산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생존의 연장상에 있었다.


남측의 불법영상물에서 나오던 로맨틱한 대사와 많이 다르지만

여자에겐, 그정도면 충분하다.


그날 밤도

두 남녀는 모포를 바닥에 깔고, 한 침낭 속에 눕는다.


좁은 공간에 둘이 눕기 위해서

외투를 벗고

피부를 최대한 밀착시킨다.

저녁에 먹었던 내장 굽는 냄새와

모닥불의 탄내가 몸을 감싸지만,

남자는 사이사이에서 여자의 살내음을 느낀다.


여자의 정수리에서 어제처럼 환각이 보인다.

떨기 전에, 여자가 남자를 꼬옥 안아준다.


남자가 고개를 내려 여자를 바라본다.

기척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본다.


두 남녀는 입술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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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에서 조난당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매일같이 사냥에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눈보라가 치며 날씨가 추운 것도 아니다.


가시거리만 확보된다면, 지도를 통해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여자는 누군가 구하러 와주길 기다리기보단, 

이곳을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두 남녀는 보존식량과 물을 챙겨 오두막을 나온다.

그리고, 각자의 부대를 향해 돌아간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건

이름과 사는 지역뿐이지만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포옹을 한다.


남자는 이 오두막으로 올 때 보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이 더 힘들다고 생각한다.


살아서 복귀하자, 지휘관이 입으로는 화를 낸다.

탈영이나 이탈이나 같다나 뭐래나


하지만, 살아돌아온 남자의 어깨를 두드린다.

허울좋은 징계거리를 만들어서 처벌한다.

다시 지긋지긋한 참호로 돌아온다.


구멍이 뚫린 철모를 쓴 동료가 다시한번 남자를 맞이한다.

“똥을 무슨 한무데기를 싸고 왔소?”


남자는 이내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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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을 버티다 못해 휴전협정에 들어간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핵단추를 누르는 머저리가 나오지 않았음에

양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전쟁을 통해 무언가 얻어내기는 힘들다.

전쟁이 끝난 뒤 남아있는 것은

폐허와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과

배고픔과

가난이다.


증오와 반감이 살아남은 사람들 가슴속 깊이 새겨진다.

하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덮어두고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힘쓴다.


남을 미워하고 힐난해서 벌어진 전쟁의 결과를 알았기에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번이나 해보았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하지 않고자 한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대부분 제대를 한다.

남자도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규모가 있던 도시였는데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린이들도 그 수가 적다.

그 어린이를 돌보던 노인들만 종종 보인다.


노동이 가능한 인구가 말 그대로 갈려나갔다.

그중에서도 ‘지식인’이라고 칭할 사람들은 더욱 적다.


남자는 그저 남들 따라서 대학에 들어갔을 뿐인데

전쟁이 끝나자, 얼마 없는 지식인 계층이 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교대는 무슨, 학창시절 본인의 학점관리도 잘 못했지만

남자는 교사가 되었다.


국군장병우대라나 뭐라나

징집될 때만 해도 졸업까지 2학기는 넘게 남았는데

교사로 지원하고 싶다 말하자,

교육청 공무원이 그자리에서 대학교 졸업장을 만들어준다.


3월도 아니고

날씨가 더운 7월에 초등학교가 열린다.

남자는 1학년 한 반을 맡게 된다.


처음에 놀란 점은

한 반의 인원수가 5명이란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나이가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아이는 아직 7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떤 아이는 10살이 다 되어간다.


나이가 적은 아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이가 많은 아이도, 초등학교를 처음 온다고 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의자에 앉는다.

조심스레, 학교에 안오고 무엇을 했는지 물어본다.


어떤 아이 하나가 손을들고 이야기한다.

공장에서 총알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이가 있는 아이 몇 명이 웃으면서

총알을 어떻게 만드는지

프레스기를 어떻게 돌리고

화약에선 무슨 맛과 냄새가 나고

중간중간 기계에 40이라고 쓰인 기름을 뿌려주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남자는 눈물을 흘린다.


“선생님 왜 울어?”

“울지마 울지마”


아이 하나가 앉아있는 선생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른 아이가 선생님을 안아준다.

다른 아이가 괜히 선생님을 따라 운다.

남자는, 아이 모두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남자는 공부하는데 소질이 있지 않다.

당연하지만, 공부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좋은 선생은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을 붙잡아놓고 영어문법을 가르치거나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교양을 가르치기는 어렵다.


아이들에게 한글과 산수, ABC와 같은 최소한의 교육을 하고선

매일같이 밖으로 돌아다닌다.


어떤 날은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강변 공터에서, 바닷가에서 물구경을 하고

어떤 날은 산으로 들어가 체험학습이란 명목으로 캠핑을 한다.


산에서 야영을 하는건 전쟁동안 수 십번을 반복해봤기 때문에

남자에겐 크게 어렵지 않다.


이 다섯명 중에선, 다른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았다면

장차 판검사, 의사가 될 아이가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남자는 몇년동안 노동을 하다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다시 교실에 갇혀서 공부만 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설령 자신의 선택이 아이들의 미래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라 해도

자신의 욕심을 관철시키고 싶다.


이 5명의 아이들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초등학교 1학년을 보내게 해주리라!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간다.

매일같이 체험학습 계획을 짜고

학교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현장답사를 나가고

학교로 돌아오면 땀에 절어서, 숙직실을 빌려 샤워를 하고

주중엔 학교에서 잠을 잔다.


겨울방학이 찾아왔지만, 남자가 학교 문을 직접 연다.

아이들의 부모는 한 명만 있거나, 그나마도 없다.

편부 편모가정이든, 조부모만 있는 가정이든, 보육원에서 등교를 하는 아이든

가정에선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


만약 학교를 나오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들이 집을 혼자 지키기만 해도 다행이고

다시 공장으로 나가 조립하는게 총알에서 공산품으로 바뀔 수 있다.


교육청 직원에게 윽박을 지르고,

교장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활동비를 받아낸다.


급식을 가져오는 영양사와, 이동급식업체 사장에게 그 돈을 모두 건넨다.

방학에도 아이들을 위한 식사가 매일매일 배달된다.


겨울에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을 나갈 순 없다.

대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


남자가 아는 것은 한정적 이지만, 마침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기 좋은 것이 있다.

군대에서 배웠던 무술과 격투기를 

아이들에게 심신수양이란 명목으로 가르쳤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아이들의 밀린 공부를 그제서야 봐준다.


그 다음년도에 아이들은 2학년으로 진급한다.

새로운 1학년 학생들이 들어온다.


작년의 5명보단 조금 많은, 7명의 학생들이 들어온다.

그래도 나이가 모두 제각각이다.


총탄을 조립하는 공장에 있던 아이도 있고

방독면에 필터를 조립하던 아이도 있다.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다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도 있다.

그 아이들을 모두 한번씩 꼬옥 안아준다.


그 해에도,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아이들과 산으로, 물가로 놀러나간다.

축구공 하나로 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한다.

여름방학이면 남아도는 군용 텐트를 얻어서 캠핑을 간다.

가을엔 농활이란 명목으로, 농사를 짓는 아이의 집에 품앗이를 한다.

아이들이 망그러뜨리는 벼도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아이를 혼내지 않는다.


다시 겨울방학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고

다음 학년으로 진학시킬 준비를 한다.


뉴스에선 정전협정이나 배상에 대해서 연일 떠들어댄다.

전쟁통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하고

전후 참전병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패널들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구구단을 좀 더 잘 외울 수 있을까….


“어휴, 쌤. 이번 겨울에도 학교 나오시는 거에요?”

영양사 한명이, 급식대차를 끌고 교실 앞으로 온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남자가 머리를 긁적인다.


“공무원이 일 더한다고 돈이 더 나오는게 아닌데, 저도 좀 쉬어야죠. 선생님 때문에 이게 뭐야?”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이 영양사도 한정된 예산 내에서 아이들을 최대한 먹일 수 있도록 힘써왔다. 

방학때도, 10명이 안되는 아이들을 위해 푼돈을 받고선 혼자 음식을 조리한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트럭에 싣고 학교까지 달려온다.


“하하, 미안합니다. 이번 방학도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능청스레, 영양사의 항변을 넘겨본다.


“흐음. 미안하면, 주말에 시간좀 내봐요”


“예?”


“나도 언제까지 천날만날 밥이나 하고 있어요. 가끔은 남이 사주는 밥도 먹어봐야지”

영양사는 자연스럽게, 혹은 억척스럽게 남자를 꼬드겨본다.


영양사나 남자의 나이대의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죽거나

죽느니만 못하게 살아남았다.

영양사의 목부터 어깻죽지까지, 백린연막에 의한 화상 흉터가 있지만.

사지가 멀쩡하고 정신이 멀쩡하게 살아남은건 오히려 행운이다.


대학물도 먹었고, 학교 선생님을 하는데다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모습이 자상하다.

어디 아픈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도 저정도면…. 크흠.

영양사도 한명의 여자로서, 연애가 하고 싶다.



“음…. 이거 영양사님께 뭘 사드려야 하나. 순대국밥 먹고나서 역가의 도너츠 집이라도..”

남자는 으례 이야기 하는 B시의 명물 풀코스 대접을 이야기하다가, 

말문이 막힌다.


분명, 약속을 잡아놓은게 있었다.

놀러오면, 식사를 대접해 주기로 했었다

항상 기억하자고 다짐했으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에이. 여자한테 그게 뭐에요. 제가 아는 돈까스집이 있는데 맛이...”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습니다. 주말에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뭐라구요? 아니 그런게 어디있어요”

갑자기 남자가 태도를 바꾸어 퇴짜를 놓는다.

영양사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 항변한다.


“저..그게…선약이”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남자는 고민한다.

약속 상대와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정한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영양사가 자신에게 호의를 내비치는게 싫지는 않지만.

이제는, 기억하는 인상도 흐릿한 여자와의 입맞춤이

좁은 침낭에서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던 손길의 느낌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게 누군데요? 나 말고, 다른 여자라도 있어요?”

영양사도 물러서지 않는다. 자기 나이또래의 젊은 남자는 씨가 마르듯 한다.

목덜미의 흉터도 결혼시장에선 감점요인이다.

기회는 어쩌면, 지금뿐이다.


영양사의 거센 저항이 난처하다.

앞에 있는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놀기 바쁘다.


문득, 한 아이가 교실 창문 바깥으로 말을 건넨다.


“누구세요?”

“누구야, 누가 왔어?”

“뭐야뭐야”

일제히 아이들의 관심이, 창문 바깥의 외지인에게 쏠린다.



“저..그… 여기 선생님이….”

외지인이 남자를 찾는다.

창문 바깥엔, 추레한 몰골의 여성이 보인다.


크기가 맞지 않고, 군용 견장이나 약장이 달리지 않은 색이 바랜 단색 동계 야상과, 찢어져서 솜이 삐져나온 솜바지를 입었다.

일반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남은 남자는 한눈에 알아본다.

북측 군인의 동계 군복이다.


머리도 산발이고, 전체적인 모습이 거렁뱅이마냥 단정치 않다.


“선생님! 누가 선생님 찾아요”

한 명의 아이가 선생님을 부른다.


“선생님 쩌기 있어요”

다른 한명의 아이가 손가락으로 영양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인 남자를 가리킨다.


남자와 여자가 눈이 마주친다.

전쟁이 끝난지 2년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그 겨울의 오두막을 떠나온지 3년이 지났다.


흐릿한 인상과 추억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실물을 보니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저…저기… 혹시”

이제는 남자가 방금 여자처럼 말을 잇지 못한다.

여자는 영양사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본다.


“아닙니다. 잘못 찾아왔네요”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학교 밖을 향한다.


“잠깐만요!!”

남자가 불러보지만, 여자의 뛰는 소리만 복도에 울려퍼진다.


“뭐...뭐에요 저 여자는”

영양사가 남자의 팔뚝을 잡아당기며 물어본다.


“저분하고, 주말에 식사약속이 있습니다. 아이들좀 잠깐 부탁할게요!!!”

남자가, 영양사의 손을 쳐내고 여자를 쫒아 뛰어간다.


교실 안에선, 아이들과 영양사만 덩그러니 남았다.


“......하아…. 보기좋게 차였네”

영양사가, 창문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배고파요”

남자아이 하나가 영양사를 조른다.


“나하고 사귀면 생각해볼게”

괜시리 아이에게 심술을 부려본다.


“싫어요. 난 예슬이가 좋아요”

남자아이는, 옆에 있던 여자아이의 팔짱을 낀다.


“하아.. 하루에 두번씩이나 차이네. 됐다, 밥이나 먹자”


“와아아아아”

아이들이 급식차 앞으로 줄지어 선다.

영양사는 한숨을 푹 쉬고, 아이들에게 배식을 해준다.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는데도, 남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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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잠깐만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지만 저 앞에 뛰어가는 여자는 들은 척도 안한다.


군대에 있을 땐 행군따윈 지겹도록 했다.

지금은, 초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같이 체험학습을 다닌다.

어디가서 체력이나 속도로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는데,

도저히 앞서 뛰어가는 저 여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


여자가 삽시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나선다.

남자가 방향을 조금 비틀어, 학교의 담벼락을 넘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여자의 속도가 줄지도, 멈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여자가 편의점이 있는 사거리에서 방향을 꺾는다.


“그런거... 그런거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서 변명을 한다.

억울하다면 억울하다.

단 30분이라도

아니 5분이라도 시간이 엇갈렸으면

남자는 지금쯤 여자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다리가 안맞으려면 이리도 안맞는다.


서로가 전쟁통에 살아남아서 이렇게 다시 만난게 행운인건가?

아니면 그나마도 다시 엇갈려서 쫒고 쫒기는 추격전을 벌이는게 불행인건가?


한발자국을 더 내딛는데도 이제 고통이 따른다.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서 소리친다.


“한번도 잊은 적 없다구요!!!”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지만.

남자는 필사의 외침을 내고선 주저앉는다.


여자도, 그제서야 멈춰선다.

남자를 향해, 뒤돌아 찬찬히 걸어온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바닥을 바라보며 한겨울에 땀을 비오듯 흘린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말을 건넨다.


“나도…단 한시도 잊지 못했어요”


남자가 온 힘을 쥐어 짜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의 눈을 바라보며 숨을 헐떡인다.


“뭐...뭐에요 남사시럽게 사람을 뻔히 쳐다보…”

여자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을 맞춘다.



“염병을 하네”

지나가던 노인네 하나가, 혀를 끌끌 차며 두 남녀를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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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돌아와

숙직실에서 번갈아 가며 사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교실로 돌아오자 영양사가 그제서야 급식차를 끌고 남자를 지나쳐간다.

얼굴이 빨개진 여자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남자의 옷을 입고 있는 여자를 영양사가 흘겨보듯 지나친다.


아이들이 여자를 보고선 처음보는 사람에게 연신 질문을 한다.


“누구세요?”

“선생님 알아요?”

“나 어제 선생님한테 태권도 배웠다요”

“나도 배웠거든”


남자는 여자를 무어라 소개해야할지 막막한데

아이들은 여자를 붙잡고 품새를 해 보이거나

자신이 접은 종이학이나 종이비행기를 자랑하기 바쁘다.


여자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작게 박수를 쳐준다.


아이들이 하교를 하고

남자는 여자를 이끌고 중앙 시장으로 향한다.


3년전 약속한 대로

순대와 돼지 머릿고기가 들어간 국밥을 2그릇 시킨다.


참으로 여자와 처음 오는 데이트에 국밥집을 고른 남자를 보며

여자는 키득키득 웃는다.


남자는 

“약속은 약속입니다.”


라며 완고하다.


뚝배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이 나온다.

여자가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입 먹는다.

순대도 한개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음”

작은 감탄사와 함께 동공이 작아진다.

그리고, 남자가 막 국물에 넣기 위해 집어든 깍두기 그릇을 뺏는다.

깍두기와 국물을 자신의 뚝배기로 들이붓는다.


“이모! 여기 깍두기 좀 더 주세요”

여자가 빈그릇을 직원에게 흔들어 보인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휘 저어서

밥과 머릿고기와 빨개진 국물을 입으로 집어넣는다.


“먹을 줄 아시네”

남자가 여자를 보며 웃는다.


남자도 여자처럼, 직원이 건네준 깍두기를 뚝배기에 붓는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

시장에서 나와

번화가 지하철역 옆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도너츠 집으로 향한다.


대기업이던 프랜차이즈 본사는 전쟁중에 망했지만

체인점주가 전쟁 후에도 간판을 바꾸지 않은 채 영업을 계속한다.


설탕코팅된 도너츠와 커피를 마신다.

여자는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살아서 부대로 돌아갔지만

지휘관이 사라졌던 부대는 와해되어 없어졌다.

아무도 없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어봤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이리저리 보직도 없이 팔려다니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여태까지 다른 일 이라곤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는 군대에 남아있길 원했다.


하지만 국가는

보직도 변변치 않고

전과도 보잘것 없는 여자를 제대시켰다.


평화의 시대엔 군축이 필요했고

최소한의 방위인력만 남기고선, 행정력을 전후 복구에 몰아야했다.


제대날

국가는 여자에게 퇴직금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위로금이나 연금을 지급하겠단 약속을 했다.

그리고 국가를 위해 싸워주어서 고맙다며 훈장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그 뒤로, 일을 구하려 해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사람이 시야 바깥쪽에서 여자를 건든다면, 멱살을 잡거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돌려버렸다.

차량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탱크라도 지나가는 것 마냥 주변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긴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머리속이 새하얘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중엔 사람들이 치는 박수소리에도 얼어붙었다가, 정신을 차리면 눈물을 흘렸다.


단순한 공장일도 하지 못하고

트랙터를 쓰는 농사일도 하지 못한다.

사람을 응대하는 일도 못하는건 매한가지다.


퇴직금과 처음에 몆번인가 지급된 연금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했다.

그리고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지만

더이상의 독재정권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쟁에서 이긴 것도 아니고

마땅한 실적이 있던 것도 아니였던 독재자가

마지막 지지기반이던 군부의 외면을 당하고선 축출되었다.


박격포에 맞았다는지, 총살을 당했다든지 최후가 어찌되었는지 뜬소문은 많다.

어쨋든 독재자가 죽었다는건 변함이 없다.

독재자를 찬양하거나, 빌붙어서 이득을 보던 몆몆 인물들도 같이 사라졌다.


혼란통 북새통에 지급되던 연금이 똑 끊겨버렸다.

보위부에 찾아가 항변을 해보았다.


공무원은 남아있는 자료가 없고 확인할 수 없으니 연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가슴에 달고 있던 훈장을 내밀어보아도, 소용이 없다.

보위부 직원은 그런걸 어떻게 믿냐며 모르쇠다.


새로 들어온 민주정권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기존의 독재정권과 다르게 남측의 정권과 대립하지 않았다. 

배급체계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체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적색계층으로 분류되던 경제학자들이 대두되고, 자본층이 생겨난다.


경제가 활성화되고

밥을 굶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모든게 잘 풀려나갔다.


그래도 여자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여자에게 들어오는 소득은 없고
배급만으로 먹고 사는건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남은 돈을 들고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생각했다.


그게 남자를 만나는 일이다.

정전이 되고, 국가간 왕래가 가능해지자 여자는 집을 나왔다.

아니지, 설령 국경이 막혀있었어도 월담을 하고, 밀항이라도 할 생각이였지만

때마침 국경이 풀렸을 뿐이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걷고, 차를 얻어타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북쪽 접경지대에서 남쪽의 바닷가 도시까지 하염없이 내려왔다.
기차역에서 자고, 버스정류장에서 자고, 산속의 바위 밑에서 잠들었다.

배고프면 동냥을 해서 밥을 얻어먹고, 그 집의 허드렛일을 해주었다.


같은 동냥을 해서 살아남더라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거렁뱅이나 하는 것이다.

여자는 엘리트 장교로서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쓸모도 없는 훈장은 이미 팔아넘긴지 오래다.

이제, 국가를 위해 자신이 복무했다는걸 기억해줄 사람은

어쩌면 남자밖에 남지 않았다.


B시에 어렵사리 도착해도 문제다. 앞길이 막막했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이름밖에 모르고 얼굴도 가물가물한 남자를 찾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른다.


남자가 해주었던 고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되짚어서 탐문을 한다.

지하보도에서 쪽잠을 자고, 편의점에서 폐기김밥을 얻어먹고는 물건을 날랐다.


기억을 더듬어서, 물어물어 남자의 흔적을 좇았다.

그렇게 남자의 학교까지 찾아오게 된건 행운이였을까? 여자의 집념이였을까?


고생고생을 하며 겨우 남자를 찾아왔더니

외간여자와 팔짱을 끼고 있다.


처음엔 3년전의 그날 밤은 그저 불장난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3년전의 하룻 밤의 일을, 그저 지나가는 말로 했을지도 모르는 약속을

철썩같이 믿은건 여자 혼자였을까?


몇 백킬로미터를 달려와 남자를 찾는 자신의 모습이 병신같았다.

그래서 남자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없이 뛰어나갔다.


남자가 쫓아가지 않았다면

평생 한번도 보지못한 바다를 보고선

그대로 빠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띵동”

가게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는 알림이 울린다.

여자가 큰 소음에 일순간 몸이 굳고, 동공이 작아진다.


“괜찮아요?”

남자가 여자의 손을 붙잡고 흔든다.


3초 뒤에

“괘...괜찮아요. 커피 맛있게 잘 먹었어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 가시려고 하십니까?”

남자가 갑자기 떠나려는 여자를 붙잡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죠. 당신 얼굴 봤으면, 그걸로 됐어요”


“어떻게 가시려구요. 차편도 없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여기까지 튼튼한 두다리로 알아서 왔는데요 뭘. 돌아가는건 훨씬 쉬울거에요”


여자가 싱긋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가게를 나선다.

남자가 황급히 커피잔을 반납하고 여자를 따라 나선다.


“그러지 말고, 여기 좀 머물다 가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앞길을 막아선다.


“도움같은거 필요없어요. 아. 옷은…. 어쩔수 없네요”

여자가 쌈지에서 꼬깃꼬깃, 북측의 지폐를 꺼내서 남자에게 건넨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남자는 여자가 내미는 지폐를 밀어낸다.


“제가 안괜찮아요. 부족할진 모르지만, 지금 가진게 이거밖에 없네요. 

 정말 한번 보고싶어서 온 것 뿐이에요.

 잘 살아는 있나, 궁금했을 뿐이에요.

 얼굴 봤으면 이제 충분해요.

 이제 돌아가 볼께요.”


여자는 횡설수설 막무가내다.


“도대체 갑자기 왜그러시는 겁니까!”

남자가 답답해서 여자에게 소리친다.


여자가 큰 소리에 다시 한 번, 움직임을 멈추고 동공이 작아진다.

3초 뒤에, 정신을 차린 듯 움직인다.


“....괜찮아진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래요”


“저기…그…미안합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이 잘못한거 아니니까요”


“…”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나아진건데, 사지만 말짱한 병신인건 변함이 없네요.

 여기서 돌아가지 않는다면, 당신이 날 먹여살릴건가요?

 

 그건 제가 용납못해요.

 아무도 날 기억해주지 않아도

 난 한 군대를 지휘하던 지휘관이라구요.

 나라를 위해, 조국을 위해서 평생을 바쳐왔단 말야!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해요.


 비켜. 내 앞에서.”


여자가 명령조로 남자에게 호령한다.

사병출신인 남자가 여자의 패기에 움츠려든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다 정신을 차린다.


발걸음을 다시 되돌리지 않고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제대하자마자 선생일을 시작한건, 학도병들의 기억도 있었지만

당장에 먹고 살 돈이 필요해서였다.


남자도 군에서 위로금과 보훈지원금을 받았지만

여자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이 물건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언제나 주머니 한켠에 넣어두고 다녔다.

여자가 약속을 지키러 B시로 찾아오리라 믿었으니까.


남자는 주머니의 반지를 꺼내서, 여자에게 건넨다.

“항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랑 결혼해주세요”


여자가 양 손으로 입을 막는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흘러내린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아까와는 달리, 큰 소리에도 여자가 얼어붙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왼손을 남자에게 내민다.

남자를 제대로 쳐다보고 싶은데, 눈물이 자꾸 흐른다. 

오른손으로 눈물을 훔치느라 바쁘다.


여자의 약지에 남자가 반짝이는 금반지를 끼운다.

주변 행인들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두 남녀를 축하해준다.


여자가 떨며 움츠리기 전에

남자가 여자를 꼭 껴안아준다.

3년전 침낭 속에서 여자가 해주었던 것 처럼

여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남자가 아직도 초등학교 1학년의 담임을 한다.

이제는 제법 숫자가 많아져서 20명 남짓한 신입생들이 배정된다.

다행히도, 이제는 언제나 7~8살의 아이들이 입학한다.


예전처럼 남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을 하지 않는다.

요즘같은 시대에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놀러 다녔다간

학부모들에게 무슨 민원을 당할지 모른다.


대신에 방학때면 학교를 열고, 맞벌이를 하는 부모의 아이들을 돌본다.

촌지를 받으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부모들이 몰래몰래, 선물이라며 다과나 음료수를 건네준다.


요즘엔 한 아이의 학부모가 소주나 위스키같은 주류를 건네주는데

적적한 야밤에 외로움을 달래기에 딱 좋다.

여자는, B시에 없다.


술을 한잔 넘기며 남자는 회상에 잠긴다.


프로포즈를 한 뒤로도 난리였다.

여자의 무비자 입국기간이 예전에 지났기 때문에

혹여나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가 수갑을 차거나 강제 북송이 되는건 아닌가 남자는 고심했다.


오히려 여자가 막무가내로 구청에 남자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자기도 엘리트 장교 출신에, 당원생활도 해봤으니 이런쪽으로는 자알 안단다.


비치된 혼인신고서를 찾는다. 

남자에게 인적사항을 기록하라고 명령한다.

남자가 여자의 명령에 따라 글자를 써내려간다.


다음으로 여자가 자신의 인적사항을 적는다.

주소지도 북측의 것을 당당히 쓰고

주민번호도 북측에서 쓰던 식별번호를 적는다.


남자의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바르고 종이에 내려찍는다.

자신의 엄지손가락도 인주를 바르고, 내려찍는다.


구청 직원에게 신고서를 제출하고선

처리가 될 때까지 반지를 바라보며 웃는다.


민원인 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와 달리

옆에 서있는 남자가 오히려 안절부절이다.


“저기... 주소가 이게 맞나요?”

혼인신고서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공무원이

어렵게, 여자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맞아요. 저 북에서 왔어요.”


“그… 인적사항이 조회가 안되서, 여권좀 주시겠어요?”


“없습니다.”


“그럼 신분증이라도…”


“없습니다.”


“외교공관을 먼저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

여자가 공무원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그리고 우는 시늉을 하며 혼신의 연기를 한다.


“내가..  이남자만 바라보고 힘들게 이까지 내려왓는데.

공관에 갔다간, 남자는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될낀데

내가 어떻게 이까지 왔는데….”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하며 어깨를 들썩인다.

남자가 보기엔 뻔한 연기인게 눈에 보이지만


공무원들이 여자를 보면서 어쩔줄을 몰라한다.

민원인들의 이목이 여자에게 집중된다.


여자가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울면서 뜨문뜨문 이야기한다.

전쟁터에서 남자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약속을 잡았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내려왔는지

남자가 프로포즈를 어떻게 했는지

기껏 남자를 만나러 왔더니 남자가 다른여자랑 팔짱을 끼고 있었다던지

말하는 사연들이 구구절절하고

몆몆 할머님들이 ‘다른여자와 팔짱’ 대목에선 남자를 타박한다.


여자를 앞에두고 공무원이 쩔쩔맨다.


“저기..선생님”

그리고 여자는, 공무원의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구청장 나오라 그래!”

“..네?”


“구청장 나오라 그래!!”

여자가, 구청에서 가장 권력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

민원인의 응대를 위해서 민원처리과 과장이 나오고, 부장도 나와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여자는, 애초부터 이걸 노리고 ‘구청’에 왔다.


동사무소의 사무소장은 일개 공무원이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출로 뽑히는 구청장부턴 이야기가 다르다.


북이든 남이든, ‘당’에 있는 사람이 힘이 있는 법이고, 

‘이야기’가 될 법한 일을 좋아한다.


다행히도, 여자의 출신과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는 충분한 이야기가 된다.


구청장실에서 여자는 담판을 짓는다.

남자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자신이 원하는건 국적을 바꾸는 주민등록이 아니라 그저 혼인신고일 뿐이라고.

왕래가 가능한 마당에 여기에 눌러서 살지, 아니면 남자와 북으로 넘어갈지는 그 다음문제라고.


종전과 평화가 당대의 과제가 된 마당에

어디한번 이 이야깃거리를 ‘당’에다가 잘 풀어보라고.

남북의 헤묵은 원한관계를 풀고 사랑의 오작교를 놓는건

그 누구도 아니라 일개 ‘구청장’일 수도 있다고.


구청장의 권력욕을 자극하고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를 

보기좋게 여자가 꾸며낸다.


구청장은 손을 괴고선 고심을 한다.

구청장실의 수화기를 들어, 여러군데 전화를 돌린다.

시끄럽게 떠들고, 소리를 지르고, 여자의 눈치를 본다.

이내, 여자가 작성한 혼인신고서를 손에 들고선

황급히 차를 타고 이동한다.


여자는 그제서야 손을 탁탁 턴다.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남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예비시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고

어안이 벙벙한 남자의 부모님이 손님을 받는다.


식사를 하고, 예비시어머니 옆에서 설거지를 한다.

예비시아버지와 TV를 보며 깔깔 웃는다.

남자와 한 이불을 덮고서 꼭 끌어안은채 잠에 든다.


다음 날,

기자들이 남자의 집을 들이닥친다.

연신 마이크를 남자에게 내밀며 질문을 건넨다.


여자가 머리를 한번 빗고, 세수를 한다.

남자를 제치고, 자신이 카메라 앞에 선다.

기자들에 질문에 답변을 한다.


이제는 여자의 입에서 알맞게 각색이 된

장황하고 구슬픈 ‘사랑찾아 일만리’ 이야기가

뉴스를 타고 생중계 된다.


구청장이 속한 당에서 기자회견을 연다.

구청장이 받아든 혼인신고서를 들고 기자들 앞에서 흔들어보인다.


그리고 그길로, 구청장이 직접 북측의 비공식 외교공관으로 향한다. 

급작스럽게 벌어진 여당과 구청장의 쇼맨십에

북측 외교공관 직원이 권한이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 모습을 기자들이 놓치지 않고 연신 셔터를 누른다.


‘권력에 갈라진 사랑’이란 대목을 달고 신문에 실린다.

두 남녀는 하루만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포장된다.


외교부 직원의 남자집의 문을 두드리고

연신 기자들이 들이닥치지만

여자는 그때부터 남자를 방안에 가둬두고선 아무도 못만나게 한다.


남자의 집 앞에서

빨갱이는 꺼지라던가 외치며 국기를 뒤흔들고 찢고 태우는 무리가 나타난다.

기자들이 그들에게도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사진을 찍는다.

며칠 뒤에 태극기를 흔들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며칠 뒤,

일약 슈퍼스타가 된 구청장이 직접 혼인신고서를 들고 북으로 향한다.


“구민의 행복이 구청장의 행복입니다.”

국경선을 앞에 두고선 쇼맨십이 절정에 달한 문구를 이야기한다.


여자가 사는 S시의 시청으로 향한다.

남측의 혼인신고서를 북측에 전달한다.


그새 물밑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었는지

새로 들어선 민주정권의 S시장이 구청장을 맞이한다.


S시장은 서류를 한번 읽는 척 한다.

‘수리되었습니다’ 한마디를 한다.

둘이서 악수를 나누고, 기자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다음날, 외교부 직원이 다시 문을 두드렸을때

여자는 남자와 함께 외교부 직원을 맞이한다.


외교부 직원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남자에게 건넨다.


배우자의 명의로, 여자가 기재되어있고

여자의 국적과 주소지는 북측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지금 여자는 포수를 한다.

논란이 되어봤자 일순간 뿐이고

세월이 지나가면서 여자와 남자는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

쇼맨십의 구청장은  대선후보가 되는데엔 실패했지만, 

나름 만족하며 정계에서 은퇴를 했다.


여자는 남자가 방학을 맞이하는 여름이나 겨울철에

엽총을 등에 매고 전 국토를 돌아다닌다.

농작물을 헤치는 고라니나 멧돼지를 사냥하고 도축한다.


이제는 팀으로 다니면서, 능력을 살려 사람들을 이끄는 포술장을 한다.

여자가 고향인 S시 근교 산에서 고라니를 잡았다며 남자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직도 예쁘기만 하다.


남자는 여자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식탁 위에 놓인 비행기 티켓 두 장을 만지작 거린다.


조금 늦었지만, 신혼여행을 다녀올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