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이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마음속으로 엄청나게 혼란스러워하며— 방금 전 입학식처럼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 상황을 정리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 머릿속을 헤집으며 수많은 사고를 작동시키고 있었어.


『久し振りですね、柳さん。私を覚えていますか?』

“오랜만이네요, 야나기 씨. 저를 기억하시나요?”


얀붕이는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 국화 무늬가 새겨진 기모노를 입은 흑발의 소녀를 보고 소녀가 누구인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지.


「あの女の子はー其の時に、硝子玉をくれた人だ。」

‘저 여자아이는— 그 때, 유리 구슬을 주었던 사람이야.’


길고 찰랑거리는, 윤기가 넘치는 검은 흑발과 내지인 여성들보다 약간 큰 키. 희고도 투명한 피부와 살짝 마른 체형, 약간의 붉은빛을 띄는 큰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신에게 붉은 국화 무늬의 유리 구슬을 준 소녀의 모습을 얀붕이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지금 자신의 앞에 선 소녀는 그 때 본 모습과 완벽하게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 


「然し、どうして?どうして私に会いに来たの?」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나를 다시 만나러 온 거지?’


얀붕이는 소녀가 그 때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어. 자신의 앞에 선 이 소녀는 그 때의 소녀와 완벽히 동일한 외양을 하고 있었으니까. 조금 높으면서도 사람의 뇌리에 깊게 박히는, 맑은 목소리를 듣고선 얀붕이는 이 소녀가 그 때의 소녀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


하지만 아직 의문이 남았어. 소녀가 어째서 자신을 만나러 온 거지? 분명 첫 만남은 ‘하타노’ 라는 옛 집주인을 만나러 온 소녀와 우연히 만난 것이고, 소녀는 그저 더는 필요 없게 된 선물을 처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가? 분명 소녀의 목적은 나한테 필요없는 선물을 처분하기 위함이었고 이미 그 목적은 이루어졌을 텐데 어째서 다시 나를 찾아온 거야?—


「ー頭が痛い。」

‘—머리가 아파.’


얀붕이는 뇌의 모든 사고를 작동시켜도 소녀가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어. 어려운 수학 공식도, 난해한 의학 용어도 이 정도로 암기와 학습이 어렵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며,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찌릿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머릿속을 비웠지. 천천히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해답을 찾아내기 위해 얀붕이는 천천히 하나씩 사고를 다시 작동시켰어.


「取り合えず、どうして私を訪ねて来たのか訊いてみなければならない。話は中に入ってした方がいいと思うし。」

‘일단은, 왜 나를 찾아왔는지 물어 봐야겠어.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것이 얀붕이가 다시 사고를 작동시켜 내린 결론이었어. 머릿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으니 당사자인 소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 마침내 해답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낸 얀붕이는 해답으로 향하기 위해 -소녀를 안으로 들여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물어 보기 위해- 입을 열었어.


『貴方は、其の時に硝子玉を下さった方じゃ無いですか?こんな所で会うなんて本当に不思議ですね。』

“당신은, 그 때 유리 구슬을 주셨던 분이 아니신가요?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참 신기하네요.”


얀붕이는 소녀가 자신에게 말을 건 지 고작 5초도 되지 않을 법한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미소 지으며 말했어. 여전히 변함없이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었지. 하지만 말에는 숨길 수 없었던, 미처 숨기지 못했던 의심이 살짝 묻어져 나왔지. 물론 보통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はい。覚えているなんて有難う御座います。』

“네. 기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소녀는 기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어. 기억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하다는 그 말은 조금의 연기도 없는 완벽한 진심이었지. 자신이 짝사랑을 하고 있는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이어질 길이 열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이니까. 약간의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로 얀붕이를 응시하며, 소녀는 말을 이었어.


『自己紹介が遅くなりましたね。私の名前は円居愛子です。』

“자기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마토이 아이코랍니다.”


소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경박하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동시에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어. 자신의 이름을 야나기-얀붕이-에게 각인시키는 동시에 얀붕이의 이름을 알아낼 기회였지.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각인시키고, 동시에 상대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는 일석이조와도 같은 기회였으니까 기뻐하는 마음을 도저히 전부 감출 수가 없었어.


『私は柳景夏です。先ずは、中に入りましょうか。』

“저는 야나기 케이나츠입니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대체 뭐지? 얀붕이는 소녀에 대해 더욱 더 의문을 품게 되었어. 어딘가 기뻐 보이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를 들었을 때,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더욱 강한 의문이 들었지. 나 같은 걸 진심으로 좋아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얀붕이에게 소녀가 자신에게 반했다는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없었어.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얀붕이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はい。其れでは失礼しますー』

“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けいなつ?後ろの字は「夏」に間違い無いよ。何と名前さえ美しいのだろう。」

‘케이나츠? 뒷 글자는 ‘夏’가 확실할 거야. 어쩌면 저렇게 이름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소녀는 얀붕이 이름의 앞 글자가 무엇인지 지금껏 머리를 굴리며 상상하면서-이름의 한자가 무엇인지 정확히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도, 동시에 그 아름다운 울림을 가진 얀붕이의 이름과 얀붕이의 아름다운 모습-흰 피부, 큰 키, 큰 눈과 사람을 매료시키는 목소리-을 대조하며 점점 더 얀붕이에 대한 호감을 키워 나가고 있었으니까.


「本当に、何のために会いに来たのか気になるね。。」

‘정말로, 무엇 때문에 만나러 왔는지 궁금해지네...’


얀붕이는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른 채, 주머니에서 대문 열쇠를 꺼내 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어. 조금 큰 키와 흰 피부, 검푸른 색을 띄는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자신의 외모를 보고 사람들이 칭찬할 만할 정도라는 사실은 여전히 알지 못한 채로 얀붕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지.


「広い。こんな家に一人で住むのかな。。。」

‘넓어. 이런 집에 혼자서 사는 걸까...’


소녀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잔디가 흩날리는, 멀리 보이는 저 큰 집을 둘러싼 마당을 걸어가며 생각했어. 하타노가 살 때도 여러 번 찾아와 익숙했지만, 야속하게도 집주인이 바뀌기 전에는 나지 않던 생각이었어. 넓은 집에 혼자서 산다는 사실은 얀붕이가 찾아온 후에야 소녀가 생각하게 될 정도로 하타노는 소녀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지.


망토를 바람에 살짝 휘날리며 걸어 가던 얀붕이는 마침내 집 문을 열쇠로 열어, 안으로 들어온 소녀에게 조용히 말했어.


『此方へどうぞ。私はお茶を用意してきますので、少々お待ち下さい。』

“이쪽으로 들어와 주세요. 차를 준비해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はい、ゆっくり待ちます。』

“네, 천천히 기다릴게요.”


얀붕이는 마루가 깔린 복도를 지나, 연못이 보이는 방으로 소녀를 안내한 뒤 방을 나갔지. 이내 집 안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가득해진 채로,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어.


「後でお茶を持ってきた時に名前をどう書くのか聞いてみないと。前の「けい」はどんな字だろうかな。」

‘이따 차를 가져왔을 때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물어봐야지. 앞의 ‘케이’ 는 어떤 한자일까.’


소녀는 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게 깔끔히 청소된 다다미 위의 탁자 앞 방석에 앉은 채로 창 밖을 내다보았어. 아름다운 붉은빛을 한 벚나무가 만개한 하늘 밑으로, 고요한 연못이 그 풍경을 비추고 있었지.


「美しい。本当に此の家に似合う人だ。」

‘아름다워. 정말로 이 집에 어울리는 사람이야.’


소녀는 방 안을 시선으로 감상하기 시작했어. 깔끔한 필체로 써진 한자가 새겨진 족자와,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무늬를 한 도자기와 벽지들을 천천히 감상했지. 하타노와 만나던 때에는 그저 한 번 훑어 보고 마음에 두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얀붕이와 만난 뒤 이 집의 모든 것들은 전부 얀붕이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듯한 감각이 들었어. 하타노 따위는 더 이상 머릿속에 없는 소녀는 조용히 계속해서, 마음속의 생각으로 보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기 시작했지.


「礼儀正しく、差し出がましくないように、自然にー」

‘예의 바르게, 주제 넘지 않게, 자연스럽게—’


얀붕이는 소녀가 집 안의 인테리어를 보고 온갖 상상을 하는 동안, 망토와 가방을 자신의 방에 둔 뒤 가쿠란과 바지만 입은 채로 홍차를 흰 도자기 주전자와 컵에 담아, 쟁반 위에 올려 양 손으로 잡은 채 천천히 복도를 걸어 가고 있었어.


소녀에게 왜 찾아왔는지를 물어 보는 것은 중요했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나쁜 소문이 퍼져서— 확대와 과장을 거듭한 끝에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내용의 소문이 나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기에 소녀가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도록 행동할 필요가 있었지. 그 덕에 얀붕이는 주방에서 차를 끓이고 컵에 담을 때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되뇌이고 있었어.


「柳さんの声、聞き良い。言い方も礼儀正しくさ。。。」

‘야나기 씨 목소리, 듣기 좋아. 말하는 것도 예의 바르고...’


물론 소녀가 얀붕이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소녀는 얀붕이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얀붕이의 아름다운 목소리 - 소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은 쟁반에 옥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 - 를 다시금 되뇌이며 마음속으로 호감을 키우고 있었지.


『お茶を持って参りました。』

“차를 가져왔습니다.”


『紅茶ですね。では、遠慮なく頂きます。』

“홍차로군요. 그럼 사양 않고 잘 마시겠습니다.”


얀붕이는 홍차를 가져와 쟁반을 탁자 가운데에 올려둔 뒤, 소녀와 마주 앉은 채로 둘은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저 멀리 서양의 맛인지, 아니면 이 곳 동양의 맛인지 모를 맛을 음미한 채 둘은 한 모금을 마신 뒤 찻잔을 입에서 뗐지.


『それでは,  話を始めましょうか。』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소녀는 미소 지으며 조용히 말했어. 드디어 얀붕이에 대한 것을 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과 고양감에 온 몸이 가득 차 미소를 지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미소가 얼굴에 띄워졌지. 사랑을 처음으로 느끼게 한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 —


『はい。良いです。』

“네, 좋아요.”


얀붕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어. 대체 무엇 때문에 소녀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기회라는 기대와 불안 비슷한 것이 뒤섞였지만 얀붕이는 어떻게든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어. 자신을 처음으로 찾아 온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 —


벚꽃이 흩날리는 4월의 정원 위에서 둘의 시간이, 마침내 두 번째이자 처음으로 맞닿아 흘러가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