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듯 하다.

줄곧 푸르리라 생각했던

그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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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꺄! 3교시 끝났어. 일어나."


단잠을 깨우는 맑은 음성. 청아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털털한 말투.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우는 것은 옆자리의 양아치. '미친개' 얀순이이다. 문득 친구들이 우리 쪽을 쳐다보며 쑥덕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뭐 으레 있는 일이니, 그려러니 한다. 얀순이도 눈치챈 것일까. 코웃음을 친다. 그건 좋지 않은 전조인데...


"니들 우리한테 뭐 꼬운거 있냐? 할 말이 있으면 뒤에서 하지 말고 사람 얼굴에 대고 말해. 사람 뒤에서 씹으니까 재밌냐?"


정말 좋지 않았다.  이럴수록 더욱 평판은 나빠지기만 한다는 걸 얀순이는 모르는 것일까? 아님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나를 감싸 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얀순이의 평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미안하기만 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얀순이는 꽤나 이쁜 얼굴과 모델같은 체형을 가지고 있다. 인기가 많을 것이 당연한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얀순이는 모두로부터 피해지고 있다. 머리는 빨갛고, 교복은 입고 온 적이 없으며, 아무리 말려도 주변의 양아치들과 싸움을 많이 해 선생님들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니 얀순이는 '미친개'라고 불리며 친구들도 피해 다니는 신세이다. 모두가 등을 돌린다면 얀순이는 정말 외로울 것이다. 그 고독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나는 얀순이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나는 얀순이에게 말했다.


"얀순아... 이따 시간 있어?"


"어?...어!...시간 당연히 있지! 언제가 좋은데?"


"길게 말할 얘긴 아니야. 이따가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보자."


 "어?...알았어! 이따 보자!"


그녀는 왜인지 당황한 기색이다. 마치 이런 상황은 예상 못했다는 듯이. 한편으론 입꼬리가 엷게 웃음을 띠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무언가 안좋은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댕---댕---하며 4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4교시는 분반수업이다. 얀순이와 나는 각자의 수업을 들으러 헤어졌다. 얀순이가 설득을 잘 이해해주면 좋을텐데... 고민을 품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얀붕아 안녕? 주말 잘 보냈어?"


자리에 앉자 마자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 친구는 반장, 얀챈이다. 이런 나에게도 말을 걸어주는 몇 안되는 고마운 친구들 중 한 명이다. 유치원 때 부터 오래된 인연이지만, 그녀는 나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빛나는 사람이다. 성적은 항상 전교 1등, 품행은 항상 단정, 외모도 준수, 교우관계도 원만. 그녀는 마치 태양처럼 있는 자체로 빛나는 존재였다. 마치 꽃처럼, 그녀의 주변엔 항상 그녀만큼이나 빛나는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가끔 인사라도 해 주고 아는 척이라도 해 주기 때문에 그나마 괴롭힘이 덜한 것이다. 거기다가...


"얀붕아...?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거야? 열 좀 재볼까?"


"아...아니야! 괜찮아... 너무 신경쓰지 마."


거기다가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내 취향이다. 그녀는 사려 깊고 나를 항상 걱정해 준다. 내가 몸살로 학교에 며칠 못 나왔을 때에도 그녀가 집에 직접 와서 프린트와 전달사항도 가져다 주었다. 얼굴도 내 취향이다. 항상 빛나는 사람을 동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더욱 특별한 존재이다. 유난히 그녀는 나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데, 하루에도 수십번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지 가슴을 졸이곤 한다. 뭐, 이런 덜떨어진 상상이나 하는 나를 좋아해줄 이유가 없지만.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나에게 왜 그렇게 잘해주는 걸까? 궁금증이 들었지만 이런 걸 물어봤다간 괜히 김칫국 마신 덜떨어진 애로 낙인찍힐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벌써 4교시가 끝난건가..."


"얀붕이 너 되게 곤히 자더라... 그래서 안 깨웠어 !"


"고마워... 난 약속이 있어서 좀 가볼께."


"아... 알았어! 얼른 가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얀챈이를 뒤로 하고 서둘러 옥상으로 향한다. 오늘 만나는 여자들은 죄다 이상한 표정을 짓네.  뭐, 이상한 표정을 받아본 게 한두번도 아니고, 나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인건가. 그나저나 이젠 선생님들도 깨우지 않는구나...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얀순이가 먼저 와서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하자 얀순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이제 왔네. 사람을 불러놓고 니가 더 늦게 오면 어떡하냐?"


"미안, 잠깐 말해야 될 사람이 있었어서. 그건 그렇고 빠르게 본론만 얘기하-"


"그건 그렇고 밥부터 먹자.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야지."


확실히 일리있는 말이다. 내가 불러내 놓고 늦게 와버리기까지 했으니 이정도 요구는 들어줘야 수지에 맞다. 나는 얘기가 끝나고 먹을 예정이었던 매점 소보루빵을 꺼냈다. 비닐 포장을 살포시 뜯어내고 소보루빵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너, 얀챈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


갑작스레 들려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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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짧네 

1일 1편 

노력해보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