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 퍼펑! 콰직!


포성이 울려퍼지는 전장 속, 20여명의 인형들이 일자로 파인 참호속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젠장. 대체 몇시간째 퍼붓는 거냐고. 탄약이 남아도나?"


분홍색 머리에 볼트액션 소총을 든, 딸기카노라는 별명을 가진 인형이 욕설을 내뱉었다. 

평소엔 의젓한 태도와 친절한 말투로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주던 그녀지만, 며칠간 계속된 패배의 연속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지난달부터 철혈의 전투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예전엔 숫자는 많아도 각 개체 간의 연계가 떨어져 격파에 문제가 없었는데, 이건 마치 한 생물처럼 움직이는 듯한...."

"누가 그걸 모르냔 말이야! 중요한 건 어떻게 상황을 타개할 수 있냐는 거지!"


눈치 없는 부하의 분석에 카르카노는 소리질렀다. 

그녀와 1년 넘게 같은 소대에 소속되어 있던 마카로프는 성실하고 긍정적인 면이 장점이던 인형이었으나, 이번엔 그것이 카르카노의 화를 돋궜다.


"진정해. 화내봐야 의미는 없어."

"칫, 나도 알고 있다고......미안해, 마카로프."

"괜찮습니다."


같은 지휘부의 소대장 중 하나인 벡터의 지적에 카르카노는 자신이 예민해져 부당한 훈계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사과했다.

흙먼지와 진흙에 더러워진 머리를 긁적이며 저 앞의 전장을 향해 고개를 내민다.

혹시나 싶어 옆에 있던 기관단총에게 방탄복을 빌려 머리를 반쯤 가린 상태였다. 현재 참호 속에 있는 인형들을 인솔하는 총책임자로서 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피잉!

---콰직!

"하....정말이지, 짜증날 정도로 철저하기 그지없네."


고개를 든지도 채 3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방탄복에는 철갑탄 수발이 박혀 있었다. 방탄 기능을 제공하는 플레이트가 깨져 더 이상 방호효과가 없을 듯 했다. 철혈이 자신들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망가진 방탄복을 제 주인에게 돌려준 카르카노는 이를 갈았다.


"지휘부에서 보내준다던 원군은 아직도 소식이 없고...."


그 순간, 하늘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최근 며칠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포탄의 비행음이 아닌,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카르카노! 헬기가 왔어!"

"좋았어! 믿고 있었다고 젠장!"

"....너, 소대원들에게 탈룰라 잘한다는 소리 듣지 않아?"


벡터의 지적을 무시한채 카르카노는 환호했다.

총 6대의 헬기가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포격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헬기들은 탑재되어 있는 도어건이나 로켓탄등을 발사해 철혈들을 혼란시켰다.


정확한 사격은 아니지만 폭발로 면적단위로 철혈의 개체들을 제압하는 로켓탄과 헬기에 탄 지원부대가 쏟아내는 수십대의 경기관총의 화력은 철혈들이 제대로 된 포격을 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투투투투....쿠웅!

"빨리 탑승해! 서두르지 않으면 또다시 포격이 올거야!"


카르카노의 지시에 따라 인형들은 신속히 이동했다.

드디어 지휘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난 인형들은 망가진 장구들을 벗어던지고 헬기에 올라탔고, 전원의 탑승을 확인하자마자 헬기들은 급격히 고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좋았어!"

"이제 맛없는 군대식량 안먹어도 된다!"


환호하는 부하들의,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르카노는 좌석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옆에 앉은 벡터는 지쳤는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뭐, 이젠 별일 없겠지.'


부대는 성공적으로 후퇴하고 있고, 귀환할 때까지 전투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카르카노는 누워 잠을 청했다. 

실제로 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피로 때문에라도 쉴 필요가 있었다.


규칙적으로 천장에서 들려오는 엔진의 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스무명의 패잔병과 십여명의 지원부대는 비행을 계속했다.

시속 300km 이상으로 움직이는게 가능한 고속헬기는 앞으로 1시간 정도면 지휘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헬기를 향해 붉은 궤적이 날아왔다.


"뭐지...?"


지원부대로 온지라 지치지 않아 계속 깨어있던 인형 중 하나가 불꽃을 발견하고 의문을 표했다.

창문으로 다가가 바라보니 불꽃은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 젠장, 당장 회피를--"


인형은 그것이 휴대형 지대공미사일의 탄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장 헬기로 긴급 회피기동을 실시하려 했다. 허나 늦었다.

이 정도로 불꽃이 크게 보일 정도로 다가온 시점에서, 속도는 빠르지만 기동력이 부족한 수송헬기가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콰앙!! 퍼펑!


폭죽이 터지듯 여섯대의 헬기는 차례대로 공중에서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꼬리날개가, 메인로터가, 조종실이. 제각각 다른 부위가 작살난 헬기들이 급속히 기세를 잃고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운좋게 살아남은 인형들이 낙하산을 타고 낙하하지만, 그 수는 출발할 때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켓탄 발사기를 든 사이드업 포니테일의 소녀, 아키텍트가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명도 남기지 말고 포획하도록 해! 귀중한 실험재료니까!"


지친데다 탄약까지 바닥난 상태에서 불의의 습격을 당한 인형들은 더는 저항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수의 철혈 인형들에게 포위된 인형들은 강철 케이블로 특수제작된 줄에 묶여 철혈의 수송차량에 태워졌고, 차량들은 아키텍트의 연구소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치밀하네. 이걸 전부 에상한 거야?"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던 백발에 안대를 낀 장발의 여성, 알케미스트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한때 저 멀리서 연행되어 가는 부대와 같은 진영에 속했던 남자는, 철혈로 전향해 이들의 부족한 전술적 능력을 보충해주고 있었다.


"그리폰의 후퇴 프로토콜은 언제나 단순하기 그지없어. 부대가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면 후퇴용 헬기만 보내고 탈출은 알아서 하게 하지.  헬기도 자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돌아갈 때도 경로를 속이기 위한 우회기동이나 회피기동 따윈 하지 않지. 그렇기에 부대가 어느 곳에서만 왔는지 안다면, 도망치는 꼴을 보고만 있는게 아니라 이렇게 예상경로에 숨어있다가 섬멸하는 것도 가능해."


친절히 자신이 사용한 전술을 설명해 주는 남자의 왼팔은, 알케미스트의 품안에 있었다.

소중한 보물을 껴안듯이, 알케미스트는 남자의, 한 때 S09 지역의 지휘관이었던 자의 왼팔을 안고 그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그녀가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사디스틱한 모습을 아는 인형들이라면 기겁할 수준의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역시 당신을 스카웃 하길 잘했어. 아키텍트 녀석이 골치아파하던 지휘부의 주력을 이리 간단히 섬멸시키다니."

"스카웃이라니, 그럼 난 단순히 실력만 보고 고용된 건가?"

"그럴리가 없잖아? 처음엔 분명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당신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기도 하니까."


어떻게 이 둘이 죽고 못사는 관계가 되었는지를 알려면, 살짝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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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휘관이 폐인처럼 매일을 자책과 자해로 보낼 때, 알케미스트는 기지의 인형들 몰래 내부에 잠입해 있었다.


그리폰의 기지들은 도시 외곽에 위치하기에 위치를 알고 있어도 잠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알케미스트는 위험을 무릅썼다.

다행히 지휘관에 대한 혐오로 엉망이 된 기지의 경계는 평소보다 허술해져 있었고, 사전에 CCTV들을 모조리 해킹해 둔 덕에 잠입에 한번 성공했다면 쓰지 않는 방에 숨어 있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 다음의 일은 간단했다.

지휘관의 방이 어딘지를 알게 된 알케미스트는 매일 밤마다 지쳐 잠든 지휘관을 찾아가 자신의 세뇌와 조교기술을 마음껏 발휘했다.


"철혈은 나쁘지 않다."

"넌 이렇게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그리폰의 상층부가 뛰어난 능력을 가진 너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것이다."

"인형들은 더 이상 네 부하가 아니다. 그리폰에 남아있어 봐야 계속 고통받다 허무하게 죽을 뿐이다."

"여태까지 그리폰과 철혈은 적대해왔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것만큼 철혈은 악하지 않다. 그저 인형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싸우는 것일 뿐이다."


수많은 거짓들을 매일같이 지휘관의 뇌에 주입했다.

정신력이 강인했던 본래의 지휘관이라면 먹히지 않았겠지만, 폐인이 된 그의 정신적 방벽은 턱없이 약했다.


한달에 걸쳐 이뤄진 세뇌의 결과, 알케미스트는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 개념을 지휘관에게 주입하는데 성공했다.


---철혈은 선하고, 그리폰은 악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자신이 인형들에게 심어두었던 나노로봇이 들키고 인형들이 자신들의 실수에 절망하는 것을 바라본 알케미스트는 때가 왔다고 판단, 지휘관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


"너는!"

"워워, 진정해. 싸우려고 온게 아니니까."


아직은 과거에 철혈을 적대했다는 인식이 있던 지휘관은 그녀를 공격하려 했지만, 약화된 근력으로 휘두른 주먹은 가볍게 막혔다. 

힘없이 저항하려던 지휘관을 붙잡고, 알케미스트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신을 이꼴로 만든 여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냐고. 

자신을 버린 그리폰에게 되갚아 주고 싶지 않냐고.

철혈은 지휘관을 인정해주고 있으며, 넘어오면 높은 대우를 보장해주겠다고.


약해진 마음은 달콤한 악마의 과실에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버렸다.


"나를 배신하거나 하는 일은, 없는 거겠지?"

"물론이지. 철혈은 너의 능력을 높게 사고 있어. 내가 보증하지. 넌 에이전트와 함께 엘리사님 직속의 전술가로서, 철혈의 병력을 지휘하게 될거야 ."


그 길로 지휘관은 철혈의 편에 섰고, 철혈은 알케미스트의 말대로 지휘관을 엘리사의 직속 전술가로 삼았다.


오랜 기간의 자해로 인해 망가진 몸의 여러 신체부위들은 철혈의 인형기술을 응용, 고성능의 인공 근육과 신체들로 대체되었다.


철혈이 진심으로 자신을 구원해주었다고 생각한 지휘관은 몸이 회복되자마자 엘리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스카웃 한 알케미스트와 함께 활동하게 되었고, 그 누구보다 그리폰이 사용하던 전술을 아는 사람답게 철저하게 허점을 파고들어 지휘부들을 하나하나 무너트려갔다.


비록 진영을 바꾸었지만, 원래 그의 본성이었던 따뜻함은 왜곡된 형태로나마 남아져 있었다.

한때 결혼의 서약을 맺었던 한명의 인형에게만 향해지던 애정은,  이제 그 대상을 바꾸어 철혈의 간부급 인형들에게 향했다.

다소 기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엘리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함과 친절함은 그를 의심하고 거부하던 간부들의 마음을 녹였고, 그를 철혈의 인원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동료를 향한 따뜻한 마음은 그에게 연정을 품는 간부들을 만들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지휘관을 향한 연심이 컸던 것은 그를 데려온 장본인, 알케미스트였다.

처음엔 단물만 빨아벅고 토사구팽할 생각이었지만, 예상보다 뛰어난 그의 능력과 따뜻한 마음씨는 알케미스트에게 평생동안 알지 못했던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거짓된 웃음은 점차 진실로 변했고, 기계적이었던 그를 향한 신뢰의 말들은 어느새 진심을 담았다.

처음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부정했지만, 전장에서 만났던 어느 그리폰 인형의 말을 계기로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알케미스트는 고민 끝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저기....지휘관?"

"뭐지?"

"당신이 좋아.  동료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고백이었지만, 한때 사랑했던 상대의 배신으로 공허해져 있던 지휘관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진심을 서로에게 밝힌 둘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이내 다른 간부들 앞에서도 그 관게를 숨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엔 엘리사가 싫어할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재밌어 보인다면서 알아서 하라는 우회적인 허가의 말을 계기로 둘은 철혈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다.


"언제나 고마워, 알케미스트."

"나야말로, 지휘관."


산 중턱의 바위에 걸터앉아 서로에게 사랑의 말을 건네는 지휘관과 알케미스트에게 아쉬운 것은,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단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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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세요, 지휘관 님. 반드시 그 암캐에게서 지휘관님을 구해내서, 다시는 제 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드릴테니까."

---철컥!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 못해도 이틀 전에는 써왔어야 되는데 좀 늦게 됐음. 

일본 유학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서리....그래도 내일 여유 있으니까 내일까지 이거 완결시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