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って来ました。』

“화장실 다녀왔어요.”


얀붕이가 그 뒤로 정신을 겨우 차린 것은 사이온지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뒤 한 말을 듣고 난 후 - 소녀가 카페를 떠난 지 1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 였어.


『あ、はい。』

“아, 네.”


얀붕이는 아직까지도 그 말의 여운을 마음 속에 품은 채로, 혹시라도 자신이 멍하게 오랜 시간 동안 앉아만 있던 것은 아닐까 싶어 금색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어. 물론 시간은 1분도 지나지 않은 채였지만.


『注文した物はーあ、来てますね。』

“주문한 건— 아, 저기 오네요.”


사이온지는 얀붕이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자신이 착각했다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채 오로지 주문했던 커피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어. 혹시라도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얀붕이는 가슴을 쓸어내렸지.


『御注文のブラックコーヒー、ミルクコーヒーです。』

“주문하신 블랙 커피, 밀크 커피 나왔습니다.”


직원은 흰 도자기 찻잔에 담긴 블랙 커피 하나와 밀크 커피 하나를 은빛 쟁반 위에 올린 채 테이블로 걸어오더니, 이내 그 말과 함께 조심스럽게 얀붕이와 사이온지의 앞에 각각 밀크 커피와 블랙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어. 커피 가루의 씁쓸한 향과 풍미가 찻잔으로부터 연기와 함께 천천히 얀붕이의 코를 자극했지.


『頂ます。』

“잘 마시겠습니다.”


얀붕이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 책에서 배운 티 타임의 예법대로 - 한쪽 손으로는 찻접시를, 다른 한 쪽 손으로는 찻잔을 잡고 입에 가져다 대 밀크 커피를 한 모금 마셨어. 


「苦くし、甘い。」

‘쓰면서도 달아.’


밀크 커피 한 모금만큼의 분량이 얀붕이의 입 안에 닿고 미각을 느끼며, 천천히 얀붕이가 생각한 밀크 커피의 향은 그것이었어. 저 멀리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채취해 일본에 도달한 원두의 쓴맛과 우유의 부드러운 달콤함이 한 데 섞여 신비롭고 오묘한 맛을 만들어 냈지. 달콤하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것은 홍차의 느낌과 같았지만 얀붕이가 마신 커피는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내고 있었어.


『いかがでしょうか?』

“어떠신가요?”


마침내 얀붕이가 찻잔에서 입을 떼자 사이온지는 조심스럽게 물었어. 혹시라도 이 카페의 커피가 얀붕이의 취향에 맞지 않는가 싶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목소리와 표정에서 미묘하게 느껴져, 얀붕이는 그것을 해소시키려 밝은 목소리로 답했지.


『本当に良いです。』

“정말 좋아요.”


정말로 좋다 - 조선어로 5음절, 일본어로 8음절 - 고 말한 얀붕이는, 딱히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라 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어. 커피의 맛은 나쁘지 않았고, 설령 커피의 맛이 실망스러웠다고 해도 친히 초대를 받는 처지의 자신이 무엇이라 할 수는 없었으니까. 여전히 귀에 울린 소녀의 말과 커피의 향의 여운을 간직한 채로 얀붕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어.


『お気に召して良かったです。』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사이온지는 그렇게 대답하고 블랙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미소 지었지. 자신과 친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에게 약간의 호감을 쌓았다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면 되니까. 그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되새김으로서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일종의 마음가짐 같은 것이었지.


‘Gone With the Wind - Margaret mitchel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마거릿 미첼’


그 모습을 보고 얀붕이는 천천히 가방에서 영어로 된 소설 책 한 권을 꺼냈어. 일본어로도, 조선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영어 원서였지. 2년쯤 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던 그 소설은 얀붕이가 조선에 있었을 때 사 왔던 것이었어. 영어를 일본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잘 구사하고, 읽고, 쓸 줄 알았던 얀붕이가 그 소설을 읽는데 무리는 전혀 없었으니까.


『英語小説ですね。イギリスの小説ですか、アメリカの小説ですか?』

“영어로 된 소설이네요. 영국 소설인가요, 미국 소설인가요?”


얀붕이가 소설을 꺼내는 것을 본 사이온지는, 표지에 적힌 영어를 보고 단숨에 그것이 영어로 된 소설이라는 것을 알아챘지. 그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 그렇지 않으면 도쿄제국고등학교에 입학하지도 못했을 테니 - 사람이었기에 얀붕이처럼 영어를 능숙하게 읽을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었을 테니까.


『アメリカの小説です。題目はー「風と共に去りぬ」。』

“미국 소설이예요.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얀붕이는 천천히 사이온지의 물음에 대답을 하며, 소설의 제목인 ‘Gone With the Wind’ 의 ‘Gone’ 을 ‘사라지다’ - 혹은 ‘떠나다’ - 라고 해석한 번역을 내놓았어. 어쩌면 일본에서 이 소설은 본래의 제목이 아닌, 전혀 다른 뜻의 제목으로 바뀌어 출판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얀붕이는 소설을 천천히 읽어 나갔어.


미국의 남북전쟁이 벌이진 시기인 18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미국 조지아 주의 거대한 농장을 소유한 농장주의 딸인 스칼렛 오하라의 시점으로 진행되었어. 자신이 남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아름다운 옷을 입고 파티로 향하는 스칼렛 오하라와, 뛰어난 미모와 높은 사교력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모습과, 이내 전쟁이 벌어진 후에는 재산도, 집안도, 모든 것을 잃어벼렸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그녀에게 얀붕이는 언어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몰입할 수 있었지.


이미 한 번 읽었던 내용이었지만, 어느 때나, 몇 번을 읽어도 이 소설은 이상하게 전혀 질리지 않았어. 의미 없는 제국의 찬양 일색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던 야나기 에이카 - 얀붕이의 모친 - 의 문학적 가치가 전혀 없던 글보다는 몇백 배는 더 나은 것도 있었지만 그 글에는 무언가를 사람에게 계속해서 각인시켜 잊을 수 없게 만드는 능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치 -


「夕方に会いましょう。」

‘저녁에 만나요.’


얀붕이는 자신이 어느새 소녀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며, 책을 내려놓고 방금 전의 묘한 감각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자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밀크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어. 부드러움이 혼란을 없애고, 쓴 맛이 이성을 다시 되찾게 해 주자 얀붕이는 마음 속의 혼잣말을 이어 나갔어.


「どうして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のか。」

‘어째서 잊지를 못하는 걸까.’


얀붕이는 마음속으로 그 소녀의 존재를 잊으려 하고 있었어. 지극히 무의식적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 평소의 얀붕이처럼 - 마음 한 구석에 묻어 버리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잘 되지 않았지. 


「あの人と付き合うなんて、出来るはずがない。」

‘그 사람과 사귄다니, 가능할 리가 없어.’


사실 얀붕이는 사이온지처럼 어느 정도 소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소녀와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은 꺼림칙했어. 자신은 조선인이면서도 내지인인 척을 하며 사이온지에 이어 소녀까지 속이기에는 너무나도 큰 죄책감이 들었으니까. 어떻게든 남들처럼 할 뿐이라고 합리화를 해 봐도 죄를 짓고 있다는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


「私が朝鮮人だということを知っても、」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어. 분명 소녀도 자신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나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앞으로 계속해서 그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이미 내지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어렸을 적부터 뼈저리게 느껴 온 얀붕이에게는 낮은 확률의 기적을 기대하며 도박을 하는 것보다, 높은 확률의 안전을 보장받고 이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마음 속으로 포기해 버리고 있었지.


『私を好きになってくれるかな?』

“나를 좋아해 주려나?”


어느새 얀붕이는 우에노 히로코지 역 아사쿠사 행 승강장에 서 있었어. 시간이 늦어 사이온지와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를 하고, 니혼바시 역으로 향하고, 표를 구매하고, 열차에 타는 동안에도 얀붕이는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소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지. 어째서 잊으려고 하여도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는 것일까. 얀붕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계단을 걸어 올라왔어.


『円居さん。』

“마토이 양.”


역무원에게 표를 건네고 대합실을 거쳐 계단을 올라와 역 앞으로 나오자, 가로수 쪽 벤치 옆의 가로등 아래에 선, 검은 세일러복 차림의 소녀가 보였지. 어째서 물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찰랑일 뿐인 자신과는 다르게, 소녀는 활발한 잉어처럼 오늘도 빛이 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얀붕이는 그런 의미심장한 감정을 느끼며 소녀에게 말을 걸었어.


『柳さん、来たんですか?』

“야나기 씨, 오셨나요?”


소녀는 니혼바시의 카페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얀붕이의 푸른 눈을 자신의 붉은 눈에 담으며 미소 지었어. 그 때와 다른 것이라면, 지금은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석양이 얀붕이의 눈에 비쳐 소녀와 비슷한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따는 것이었지. 그 모습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소녀는 천천히 얀붕이와 함께 석양이 비치는 길거리를 걸어 갔어.


『柳さんは、海外に行って見たことがありますか?』

“야나기 씨는, 해외로 나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느새 도쿄 제국 대학 근처 담장을 걷게 되자, 소녀는 나지막이 말을 건넸어. 해외- 즉 외국을 뜻하는 곳에 가 본 적이 있냐고 얀붕이에게 묻는 것이었지. 지금까지 조선 밖으로 나가 본 것은 일본이 유일했던 얀붕이는 천천히 대답했어.


『いいえ、行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英語や、フランス語と、スペイン語は習っておいたけど。』

“아니요, 가 본 적 없답니다. 영어나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배워 두었지만요.”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어 얀붕이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어투로 말했지. 영국이나 프랑스와 스페인 같은 유럽에도 가 본 적이 없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도 가 본 적 없이 얀붕이는 평생을 이 제국에서만 살아 왔으니까.


『そうですね。私も行った事はありません。もし行くことが出来るならー』

“그런가요. 저도 가 본 적이 없답니다. 만약 갈 수 있다면— ”


소녀는 그 말을 하고 1초, 1분, 1시간, 반나절, 어쩌면 영원으로도 느껴지는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의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어.


『朝鮮や台湾に行きたいんですね。』

조선이나 대만에 가 보고 싶네요.”


조선. 그 말을 듣자마자 얀붕이는 일시적으로 사고가 정지하는 느낌이 들었어. 설마 소녀가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알아챈 건가? 그 생각이 튀어나오며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직전에 겨우 이성이 작동해 얀붕이를 안심시켰지. 조선이나 대만은 일본 내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고, 해외라는 말이 무조건 국외를 뜻한다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저 소녀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라고 자신을 안심시키며, 얀붕이는 계속해서 길을 걸었어.


『理由を聞いても良いですか?』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그런데도 어째서 조선이나 대만으로 가고 싶다고 물어보는 것일까. 얀붕이는 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어. 소녀를 만난 이후로 자신에게는 무언가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왔고, 그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얀붕이는 알지 못한 채로 나날을 보낼 뿐이었지. 단지 추측을 해 보자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김으로서 자신이 잘 하고 있다는 안심을 받기 위해서였을지도 몰라.


『理由なら。。そんなに大した事ではありません。』

“이유라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요.”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었어. 벚꽃이 우거진 4월의 나무 밑으로 석양을 받으며 얀붕이와 소녀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지. 다시 어느 틈이었을까, 바람이 불고 벚꽃잎이 휘날리며 소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릴 때에, 얀붕이가 바라던 - 어쩌면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 대답이 돌아왔어.


『最も欲しいものは、思ったより遠くないですから。』

“가장 바라던 것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으니까요.”


마치 소설의 한 구절에 나올 법한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대사를 말하며, 소녀는 미소 짓는 동시에 가방 안 서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인식했어. 그 서류는 자신이 가장 바라던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종이였지.


성별과 이름은 물론이고, 다니는 학교와 졸업한 학교, 제 1학과와 부학과, 호적에 등록된 출신지와 그것을 바꾸기 전의 출신지마저도 전부 상세하고 세세하게 적혀 있는 기밀 문서와도 같은 것이었어. 어쩌면 소녀는 이것을 받는 것을 처음에는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몰랐지만—


『そうじゃないですか?』

“그렇지 않나요?”


이제 소녀에게 그런 것은 관심 없었어. 그 종이에 적힌 것이 무엇이었든 그것이 소녀의 사랑을 흔들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으니까. 원하지 않았던 것이 역으로 자신에게 가장 강력한 패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는, 그 종이에 적힌 가장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 얀붕이가 호적을 바꾸기 전의 출생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겼어.


「大日本帝国、朝鮮、京城」

‘대일본제국 조선 경성’


또 다시 바람이 불며, 꽃잎이 흩날리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어.


가장 바라던 것이었지만, 어쩌면 바라지 않던 일이 일어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