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게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찌른다그녀의 말대로 우리의 재회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던 터라그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이 살짝 어색하기도 했다.

 

이는 곧 그녀와의 만남이 썩 반갑지 않다는 사실까지 이어졌다내 시선이 아래로 깔려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했다.

 

……똑바로 봐.”

 

그리고 그녀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낯설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나를 휘감는다실제로 약간 서늘하기도 했다이는 단순히 날씨가 추워서가 아니라그녀가 내뿜는 기운을 암시했다.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지금 이 상황은 내가 그려낸 일이기도 했으니까멋쩍게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를 마주했다.

 

오랜만이네크론슈타트.”

 

내가 알던 그녀가 있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던가그녀의 눈은 죽어있었다깊이 모를 바다처럼 푸르고 밝던 그녀의 눈은 죽어있었다깊고 어두운 심해와 같았다.

 

……왜 그런 거야.”

 

오랜만에 만났는데굳이 옛날 일을 꺼내야 해좀 더 생산적인 이야기는 어때?”

 

그럼 뭐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자고?”

 

그건 좀말하지 않아도 대강 짐작 가거든.”

 

특히나 지금의 너를 보면 더더욱.’ 한 마디 덧붙이지 않고 삼켰다사족에 불과했으니까.

 

그래……다시 생각해 보니 반드시 말해야겠어. 당신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았으면 좋겠거든.”

 

……정중히 거절할게.”

 

……지금 놀리는 거야?”

 

일말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성질을 긁을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그녀에게는 그렇지 못했나 보다.

 

주소는 알려준 적 없는데대체 어떻게 찾아온 거야거긴 또 왜 누워있는 거고힘들게 구한 건데.”

 

말 돌리지 마.”

 

조금 더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아무래도 그녀는 시답잖은 근황 이야기보다는 과거의 일을 들먹이려 했다웃음으로 무마하고 싶었지만그렇지 못할 상황이라는 건 다름 아닌 내가 가장 통감하고 있었다.

 

저 얼음보다 차가운 눈동자를 자꾸만 마주하는 일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까닭일까흐흐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눈빛은 원래 저렇지 않았는데저렇게나 차갑고 무겁지 않았는데.

 

적어도 내가 도망치기 전까지는 그랬는데.

 

아무런 통보 없이 그저 일방적으로모든 진형을 하나로 묶어두던 구심점이 사라진 순간 붕괴는 확정된 수순이었어모두가 당신을……찾아 헤맸지.”

 

아련한 목소리가 그려내는 풍경은 안 그래도 어색했던 내 표정을 더 구겨버렸다찔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또 죄책감을 나타내기도 했다관점을 달리하면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철두철미했어흔적은 조금도 없었고모두는 지쳐 말라가기 시작했지.”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크론슈타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키는 내가 더 큰 탓에 올려다보고 있었지만눌리고 있는 건 명백히 나였다.

 

어쩌면 잡아먹히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고.

 

결국 남은 자들은 세 가지로 나뉘었지떠나간 사람의 빈자리를 마냥 그리워하거나그 원인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하거나혹은 끝까지 미련을 놓지 않고 그림자를 쫓아다니거나.”

 

차례로 가슴그리고 뺨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검은 장갑은 색깔대로 차가웠다그녀의 마음과 같았다.

 

애석하게도 너는 3번에 속했구나.”

 

애석한 게 아니라 현명했던 거지결국엔 이렇게 됐으니까.”

 

아니애석한 게 맞아이렇게까지 해서 날 찾아냈지만내 뜻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물론 그것과 별개로 내 뜻은 변하지 않았다나는 이제 지휘관이 아니고내 심정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범인에 불과했으니까.

 

하늘을 바라본다막혀있는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딱 지금의 내 속내와 같았다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만하고 싶었어무거운 왕관을 쓰는 건 생각 이상으로 피로했고자꾸만 쏟아지는 기대와 존경의 눈빛은 피로하다 못해 구역질이 나왔어.”

 

온몸이 짓눌리는 이질적인 감각에 결국 토해내고 말았다구차하지만 입을 열어 그날의 진실을 꺼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인류의 희망이니 뭐니 떠들어봤자나는 결국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그냥 조용한 하루를 보낸 게 언제인지 모를 지경이거든.”

 

한 번 열린 입은 뚫린 댐과 같아멈출 수 없었다술술 튀어나오는 변명과 핑계는 끝이 없었다.

 

그냥그냥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정말 미안하지만네게는 해선 안 될 말 인걸 알지만난 지금이 좋아아무도 날 찾지 않는 지금이 더 행복…….”

 

모두가 당신을 찾고 있는데 귀를 막아버린 건 아니고?”

 

정곡을 찌르다 못해 꿰뚫어 버리는 말에 궤변은 잘려버렸다나는 그대로 벙어리가 되었고이제는 그녀의 차례였다.

 

그래서지금 말한 것들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이유야?”

 

……그런 셈이지.”

 

하하입으로는 웃었고눈은 그렇지 못했다천천히 가라앉은 시선은 그대로 바닥을 향해 끝없이 내려갔다.

 

그게 전부였다더는 없었다핑계도궤변도변명도전부 끝이었다.

 

그녀를 마주한다오늘 처음내 스스로의 의지로 그녀를 바라본다담담히 고한다.

 

미안해하지만 이게 전부야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그러니까 너도 그만…….”

 

무슨 소리야나는 당신을 지휘관으로 복직시키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닌데.”

 

그게 무슨…….”

 

잘 생각해 봐나는 오늘 단 한 번도당신을 지휘관 동지라 말한 적 없어.”

 

허나 그 이상으로 들려오는 충격적인 발언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눈을 마주해도 흔들림 없었다거짓을 고하는 자의 눈동자는 절대 아니었다.

 

이어 툭하고가벼운 손짓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닿고난 힘없이 주저앉는다이젠 물리적으로도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그거 알아지금 이 장소네가 숨어있는 장소를 아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걸.”

 

당황할 새도 없이그녀가 무릎을 굽힌다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빨려 들어갈 듯 어두운 동공을 강제로 마주한다.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건 나 하나뿐이라고.”

 

……아그래그런 거구나.”


그래그런 셈이지.”

 

나는 이해했고그녀는 눈으로 웃었다행동으로도 웃고 있었다

 

크론슈타트는 조용히 품에서 수갑을 꺼내 내 손목에 걸었다당연하게도이어지는 것은 그녀의 손목이었다.

 

마치 범죄자를 체포하듯 말이다.

 

됐어이걸로 된 거야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

 

정정한다내가 알던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종종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며 함께 웃던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존재하는 것은 그저.

 

절대로.”

 

현명한 사람일 뿐.

 



*



비록 무형의 존재라 한들당신과 내 유대는 나름 깊다고 생각했어적어도 아무 말 없이 잠적해 버리진 않을 만큼.”

 

무미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느즈막히 울려 퍼진다이 공간에또 그의 마음속에.

 

눈꺼풀을 깜빡인다고 한들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크론슈타트는 어느새 그의 위에 올라탔고손목은 풀리지 않았다그게 전부였다다른 건 없었다.

 

그런데……이거 봐지금 우리 둘을 이어주고 있는 건 유대가 아니라고작 이거야.”

 

손목에 달린 은색 수갑을 가리키며 하크론슈타트가 정확히 세 번에 걸쳐 웃었다사내는 웃지 못했다.

 

이내 손을 뻗어 은색 수갑으로 연결된 손을 맞잡는다손가락 하나하나놓치지 않고 끈적하게 휘감는다마치 흙에 뿌리를 내리듯그를 붙잡았다.

 

당신이 생각해도 웃기지 않아그렇게 단단하리라 믿었던 신뢰유대는고작 금속 쪼가리 하나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마치 연인이나 할 법한 다정한 행위였지만지금의 둘에게 다정함은 존재하지 않았다그 누가 보아도 그리 말했을 것이다.

 

이어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과 같이크론슈타트가 얼굴을 들이민다바닥에 누워있는 그를그녀가 내려다본다.

 

그에 맞춰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리고마치 커튼처럼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간다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그는 크론슈타트의 눈을 마주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무언가 결여되었다이 말 이외에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별빛 서리처럼 빛나던흡사 맑은 호수와 같던 눈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할 말없어?”

 

무릇 침묵은 금웅변은 은이라 하지만적어도 작금의 상황에 통용되는 말은 아니었다사내도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가 입을 열지 못한 까닭은그 어떠한 말을 꺼내도 지금의 상황을 탈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했다.

 

…….”

 

때문에 침묵은 이어졌다째깍째깍천천히 움직이는 초침만이 울려 퍼지고한 바퀴두 바퀴사정없이 돌아간다.

 

크론슈타트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온몸의 감각을 그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사내가 입을 열기로 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미안해.”

 

…….”

 

그 정체는 사과의 한 마디짧디짧았지만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은 절대 아니었다.

 

허나 이미 얼어붙어 깨져버린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늦어 있었다.

 

……당신이 사라진 3년간내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통감한 사실이 있어.”

 

말하며크론슈타트의 오른손이 그의 가슴으로 옮겨갔다물론 왼손은 여전히 그의 손을 맞잡은 그대로였다.

 

긴장과 불안그리고 죄책감 등이 섞여 눈에 띄게 요동치는 심장이 그녀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그녀의 입꼬리가 쓰게 올라갔다.

 

바로 무형의 존재는 일체의 가치도 없다는 거야.”

 

크론슈타트가 크게 웃는다그는 웃지 못한다그런 모습을 보며 여인은 더 크게 웃어 보이고사내는 더 크게 표정을 굳힌다.

 

소리 없는 웃음은 그의 심박을 더욱 가속시켰다이젠 손을 대지 않아도 느껴질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신뢰우정그리고 또……책임감이 있지.”

 

필히 누군가를 겨냥한 말사내의 표정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물론 그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나는 보다 실재적인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해신뢰도우정도그리고 책임감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드디여 말문이 트였네보기 좋아.”

 

크론슈타트가 고개를 더 숙여 그의 귀로 입을 옮겼다미려한 듯 거친 숨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다시는 도망칠 수 없게당신을 위한 실재적인 책임감을 만들어주려고.”

 

그리고 얼굴을 원위치로아니이전보다 조금 더 가까이크론슈타트는 그를 마주보았다서로의 숨결이 맞닿는 지극히 가까운 거리점점 좁아지고 있는 건 그의 착각이 아니었다.

 

또 서서히그녀가 그의 입술로 얼굴을 들이민다어린아이라도 피할 수 있을 만큼 느렸지만지금의 그에게 저항할 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너 지금 설마…….”

 

이상을 깨달은 그가 당황의 목소리를 내보았지만곧 다다른 그녀의 입술에 막혀버렸다비유하는 것도 이상하지만흡사 뱀과 같았다.

 

다음 행동은 뻔했다맞닿은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을 만끽하고크론슈타트는 남은 한 쪽 팔도 그의 손을 깍지 껴 붙잡았다.

 

멀리서 본다면 연인 사이의 그것을 연상시킬 행동허나 가까이서 본다면 그 실상은 크게 달랐다그저 잡아먹히는 관계그뿐이었다.

 

크론슈타트는 이 뒤의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꾸물꾸물서로의 혀가 뒤섞이는 건 이제 필연이었다.

 

반항하려 한들 이미 뿌리내린 손가락은 절대 풀리지 않았다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비틀어진 의지는 쉽사리 벗겨낼 수 없었다.

 

아니뿌리내린 건 손가락이 전부가 아니었다다리도가슴도팔도모두 맞닿아 얽혀 있었다몸을 흔드는 게 고작일 뿐.

 

결국 그에게 크론슈타트의 망가진 애정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진하고진했으며또 진했다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에게 배려는 없었다오로지 자신의 애정을 주입하기 위한 일방적인 행세에 지휘관은 짓눌려 질식하기 직전이었다양손을 꼭 붙잡은 채로지독할 정도로 다정하게.

 

푸하아…….”

 

무자비한 포식이 끝나고나타나는 것은 다발로 이뤄진 투명한 실그녀의 말대로 현재 그와 크론슈타트를 실재적으로 이어주고 있었다.

 

하아하아거친 숨소리비단 그의 것이 아니었다두 남녀는 거친 숨소리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아마 이전의 나라면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했을 거야.”

 

푸른 눈의 여인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사내는 그저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는 게 고작이었다정확히는 잠시 공황 상태가 왔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당신에게 조금 더 바라는 게 많거든.”

 

고운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훑어내린다느리게아주 느리게하지만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게.

 

입술에서 내려간 손가락은 가슴에서 멈춘다여전히 두근두근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심박을 만끽한다.

 

무형의 책임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깨달은 날가장 먼저 다짐했어만약 당신을 다시금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실제로 존재하는 책임감을 만들어주자고.”

 

다시금 손가락이 내려간다가슴에서 복부로복부에서 차츰 하반신으로.

 

그렇게 실재하는 책임감으로 묶어버려다시는 놓아주지 말자고.”

 

우뚝사내의 고간으로.

 

잠깐만너 설마…….”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고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물든다손가락은 어느새 그의 몸에서 타고 올라가 그녀의 아랫배로 이동해 있었다.

 

이젠 먼 과거가 된 시절철혈의 누군가가 말했지당신이 곤란해하는 모습이겁에 질린 모습이 사랑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실재적으로 이어져 있는 두 사람의 신체가 더욱 단단하게그리고 기괴하게.

 

하고.

 

그때는 몰랐는데……이젠 나도 알 거 같아.”

 

오른손이 움직여 그의 바지를 내린다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지휘관이 가장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잠깐만크론슈타트……크론슈타트!!!”

 

그러나 달리 조치할 수 있는 건 없었다그저 입술을 움직이는 것그뿐이었다.

 

사랑해이젠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

 

아니야……이건 아니야!”

 

닿지 않는다.

 

사랑해이젠 더 이상 사라지게 두지 않을 거야.”

 

멈춰크론슈타트그만!”

 

닿지 않는다.

 

사랑해언제까지나.”

 

크론슈타트!!!”

 

닿지 않는다.

 

크론슈타트는 웃는다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행복한 얼굴로그녀가 웃는다곧 이어질 행동에 크나큰 행복을 느낄 그녀가 크게 웃는다.

 

사랑해.”

 

찌직——하고그녀의 옷이 찢어지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