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차 링크


1편 : 라이덴

https://arca.live/b/yandere/48837373


2편 : 감우

https://arca.live/b/yandere/49669665


3편 : 호두

https://arca.live/b/yandere/56185332


4편 : 신학

https://arca.live/b/yandere/69813903


5편 : 유라

https://arca.live/b/yandere/80878276





티바트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조용할 일 없을 리월항의 거리. 여느 때와 같이 거리를 걷던 아이테르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 이상해. 분명...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몇 번을 길을 되돌아가서 찾아봐도, 이리저리 경로를 꼬아보아도, 자아도취에 빠진 척 거울을 보며 슬쩍 뒤를 보아도, 자신을 수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테르는 밖에 나설 때마다 자꾸만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여나 인파 속에 숨었나 싶어 일부러 사람이 없는 한적한 장소를 골라서 찾아가도 여전히 시선은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야. 분명 누가 날 감시하고 있어. 하지만, 대체 누가?"


숙소로 돌아온 아이테르는 몇 번이고 고민을 해보았지만, 아는 사람 중에 자신을 미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미행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아이테르를 미행할 이유는 없었다. 최소한 아이테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역시 안 되겠어. 이런 건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리월에서 미행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이테르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암상 찻집으로 찾아갔다.


"... 야란 씨."

"어서 오... 표정이 왜 그래? 마치 고백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능청스러운 농담은 여전하시네요."

"누가 들으면, 내가 쓰잘데기없는 말장난이나 즐기는 사람으로 보이겠는걸?""틀린 말은 아니잖- 아아아아악!! 잠깐만요! 아아악 잘못했어요! 머리! 머리털 다 뽑혀요! 아아악!!!"


그렇게 암상 찻집 들어간 지 정확히 15초 만에 머리끄덩이를 붙잡히는 신기록을 세운 아이테르는 야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누가 널 미행하는 것 같다고? 어지간히 할 짓도 없는 사람이네."

"......"

"그야 당연하잖아. 넌 딱히 욕심도 없는데 흠결 캐낼 게 뭐 있다고 널 미행해? 누가 억지로 날조해봤자 분명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가 있냐' 아니면 '굳이 리월항의 영웅을 이렇게까지 비난해야겠냐' 라며 널 두둔할걸?"

"하지만, 벌써 2주가 넘었어요! 이젠 집 밖에 나가는 것도 겁이 나서 못 나가겠다고요."


네가 스토커에 겁먹는 날도 있냐며 야란은 가볍게 웃었지만, 아이테르의 거듭된 하소연에 야란은 못 이기는 척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당분간 내가 곁에 있어줄까?"

"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정보력 하나는 리월에서 손에 꼽을 정도고, 그 정보 중에는 내가 직접 미행해서 알아낸 정보도 많아. 다른 말로 하면... 미행하는 녀석의 심리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말이지. 내가 곁에 있는데, 세상 그 누가 널 미행할 수 있겠어? 자, 어떻게 할래?"


아이테르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다. 그야, 야란은 신뢰할 수 있었으니까.


다음날부터, 야란은 아이테르가 모험가 길드 의뢰를 위해 집 밖으로 나오는 시간에 맞춰 앞에서 기다렸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어김없이 야란은 아이테르와 함께했다.


"아직도 누가 미행하고 있는 거 같아?"

"지금은 별 일 없는 거 같아요."

"녀석도 알아챈 거겠지. 내가 곁에 있다는 걸."


그리고 며칠 만에, 아이테르는 더 이상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도 약 일주일 동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자, 그날 밤 아이테르는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창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아이테르는 눈을 떴다.


"이 새벽에 뭐야... 잠도 못 자게..."


소란 피우는 놈이라도 있으면 조져버릴 작정으로 창문을 연 아이테르는, 명백히 창문 바로 옆에서 누군가 급히 몸을 숨기는 소리가 난 것을 눈치챘다. 바로 그쪽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낙엽 하나가 날아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기분 탓이겠지?"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며 다시 누웠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약간 가려지는 위화감. 누군가의 인기척과 시선. 아이테르는 잠드는 순간까지도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아이테르가 잠을 설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며칠 정도야 정신력으로 버텼지만 계속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자 아이테르는 누가 봐도 피곤에 찌들어있는 모습이 되었다.


"오늘의 의뢰는 유명 낚시터를 점령해버린 츄츄족 토벌... 여행자, 너 괜찮아?"

"......"

"여행자?"

"... 아, 죄송해요. 깜박 졸았네요..."


심지어는 의뢰를 받는 도중에도 졸아버리는 통에 아이테르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캐서린마저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평범한 츄츄족 야영지 수준이 아니야. 아예 주둔지나 부락 수준으로 병력이 많다고. 그 몸으로 괜찮겠어?"

"... 괜찮아요..."

"캐서린 말 듣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옆에서 지켜보던 야란도 은근슬쩍 경고했지만, 아이테르의 고집은 완고했다.


"... 저, 괜찮아요."

"그럼 내가 좀 도와줘? 어차피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으나 옆에서 도우나 미행 차단에는 비슷하지 않아?"

"부탁한 건 스토커 따라붙지 않게 옆에서 봐달라는 것뿐이었잖아요. 거기서 의뢰까지 떠맡길 수는..."

"...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이테르는 결국 지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츄츄족 주둔지에 도착했다. 당연히 그에게 어그로가 끌린 츄츄족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었고, 아이테르는 차분히 츄츄족의 전력을 분석했다.


'왼쪽에 폭도 하나에 싸움꾼 셋, 중앙에 방패병 둘에 돌격병 셋, 오른쪽에... 얼음탄 츄츄... 몇 마리지...?'


평소였다면 가볍게 처리하고도 남았겠지만, 지금 아이테르는 원소력을 폭발시키는 건 둘째치고 당장 적의 규모부터 파악하기 힘든 상태였다. 그래도 실력이 어디가진 않아서 선봉대 몇 마리 정도는 단칼에 해치워버렸지만, 한계가 찾아오는 건 그리 길지 않았다.


'이상해... 분명 적이 보이는데... 어디서 오는지... 몇 마리인지... 모르겠어...'


여기서 정신이 흐트러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아이테르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아보려 했지만, 결국 츄츄 싸움꾼 하나가 아이테르의 뒤통수에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내 퍽 소리와 함께 아이테르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고, 정신을 잃어가는 아이테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반투명한 물빛 형체가 지나가며 츄츄족을 파란 실로 묶어버리는 모습이었다.




"으..."

"정신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테르는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


"여긴... 어디죠?"

"내 은신처 중 하나야. 임무 수행 중 예상 밖의 일이 생기면 재정비하려고 만들어 둔 건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아이테르가 자신의 몸을 살펴보자, 뒤통수가 욱신거리고 머리가 울리는 것만 제외하면 큰 이상은 없었다.


"저, 쓰러졌던 거죠?"

"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 안 나?"

"... 그건 아니지만."

"다행이네. 기억까지 잃었으면 꽤나 골치아플 뻔했거든.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늘 하루 종일 그 모양이었는지, 말하는 게 좋을 텐데."


잠시 망설이던 아이테르는 이내 그 자신을 미행하는 누군가가 결국 밤중에 창문으로 자신을 엿보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뭐야, 그거 때문이었어? 너 진짜 바보야?"


야란의 말에 살짝 열받은 아이테르가 뭐라 따지려고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내가 맡은 일이 너 스토킹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거 아니었어? 그럼 말을 해야지,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밤까지 같이 있어달라고 해요..."

"어머, 누가 들으면 내 정보망이 밤만 되면 뚝 끊기는 줄 알겠네?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을 꺼냈을 거 같아?"

"... 그럼 무슨 생각이신데요?"


야란은 대답을 잠시 미루고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테르에게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어느 정도 내려다보는 각도에서 가까이 붙어있었기에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야란의 특정 신체부위(사실 닿기 직전이었다)가 부담스러웠던 아이테르가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야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집에서 같이 자면, 되는 거 아니야?"

"...?"


잠깐 상황파악이 늦은 아이테르가 벙찐 표정을 짓자, 야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아이테르를 살짝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란 씨, 잠깐만요, 숨 막..."

"그렇게 부끄러운 기색 다 내고 다니면, 나중에는 어린아이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겠는걸?"

"지금 저 놀리는 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숨을 쉴 수 있게 된 아이테르가 놀리지 말라고 화내려는 순간, 아이테르는 보고야 말았다.


"정말, 힘들었겠네."


평소의 항상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아닌,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우면서도 걱정이 담긴 야란의 미소를.


"......"

"뭐야, 너 우는 거야? 아니아니, 그렇다고 억지로 눈물 참을 필요는 없어. '영웅'이라는 칭호 때문에 누군가한테 하소연할 기회도, 마음껏 울 수도 없었지? 지금까지 쌓인 거, 여기서 전부 털어내버려. 앞으로는, 내가 전부 곁에서 받아줄 테니까."

"흑... 흐윽..."


아이테르는 야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오열했다. 그리고 그 덕에, 그는 자신의 시선 밖에서 야란의 표정이 바뀐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간단한 호감작 하나 간파하지 못하고 자신의 약점을 모조리 드러낸 상대방을 비웃는, 항상 아이테르가 조심스러워하던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흐아암..."

"잘 잤어? 어제 의뢰는 상당히 힘들어 보이던데, 더 자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요즘은 마음이 편해서 평소보다 잠이 잘 오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결국, 아이테르는 한동안 야란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야란과 함께 아침을 먹고 나서서 그날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돌아와 함께 자는 게 습관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어느새 두 사람은 누가 보면 가족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그 행복한 나날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 야란 씨, 저 진짜 나가야 하는데요..."

"안 돼. 너 발목 접질린 지 아직 7일밖에 안 됐잖아."

"그 정도면 그냥 방치해도 낫고도 남잖아요..."

"무슨 말 하는 거야?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아직 속은 아니거든?"


한 달 정도가 지나고, 아이테르는 야란이 조금씩 그에게 과잉보호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게, 조금만 위험한 의뢰를 맡으려고 해도 "그건 위험할 거 같은데" 라고 말린다거나, 작은 생채기 하나만 생겨도 다음 날 의뢰를 못 나가게 막고 아예 다친 부위를 쓰지도 못할 정도로 두껍게 붕대를 감는다거나, 심한 경우는 새벽에 화장실 갈 때도 어디 가는지 일일이 말하고 시간제한까지 둘 정도로, 거의 '통제'에 가까운 보호가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 이러면 스토커한테 쫓길 때랑 다를 게 없잖아."


어쩌면 스토커가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소한 스토커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볼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자신의 행동에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지도 못하니까.


처음 느꼈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만 했지만, 일주일 내내 의뢰도 못 나가게 하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이 들 때쯤 아이테르는 야란이 단순히 보호 목적으로 자신과 동거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렇게 아이테르가 야란과의 동거를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한 지 약 2주 후,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 야란 씨, 꼭 이렇게 자야 해요?"

"이렇게 안 자면 너 또 나 몰래 일어나서 나갈 거 아니야?"


자려고 침대에 누운 아이테르를 끌어안은 야란. 부담스러웠던 아이테르는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야란은 도저히 아이테르를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날 야란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아이테르는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을 쐬었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야란을 마주쳤다. 결국 야란은 '외출 금지라고 했는데 몰래 나갔다'라는 명목으로 아이테르를 침대에 구속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


무언가 항변할 거리가 없을까 싶었지만 결국 아이테르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


수많은 팔들이 자신을 옥죄어오는 악몽을 꾸던 아이테르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야란이 자신을 안은 채로 몸을 더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야란 씨...? 잠버릇인가...?'


당연하지만 잠버릇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한 손짓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부끄러움에 아이테르가 잠시 굳어있는 사이에 야란의 손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야란의 손이 아이테르의 사타구니에 닿기 직전.


"야란 씨!!!"


아이테르는 억지로 야란을 떼어내고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다시피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대꾸하는 야란을 보자 안 그래도 억눌러 왔던 아이테르의 불만은 분노로 전환되어 폭주했다.


"그동안, 스토커한테서 지켜주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제가 말을 안 했는데, 지금 야란 씨는 그 스토커랑 다를 바 없어요. 아니, 스토커보다 더 심해요. 최소한 스토커는 내 몸에 손댄 적은 없으니까."

"......"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해요."


사과는커녕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는 모습에 결국 완전히 정이 떨어진 아이테르는 그대로 야란의 집에서 나왔다. 아이테르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미동조차 없던 야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손가락으로 입을 한 번 훝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의외로... 생각이 짧네."




일주일 후, 야란과 같이 있지 않았는데도 스토커가 쫓아다니는 느낌이 사라지자 안심한 아이테르는 아무런 걱정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만민당에서 향릉 얼굴이나 보고 밥이나 먹을까..."


결정까지 1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만민당으로 직행한 아이테르는 향릉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 직후, 아이테르는 향릉의 표정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어... 어... 아, 안녕? 잘 지냈어?"


자신을 보자마자 살짝 놀라며,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서도 당황스러움을 최대한 숨기려는 모습.


"향릉, 무슨 일 있어?"

"이, 일이라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뭐 먹을래?"


계속 모르는 척하는 모습에 캐물어봤자 득 될 건 없다고 판단한 아이테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음식만 먹고 조용히 나왔지만, 그 반응은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향릉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청심 한가득 들고 월해정에 찾아갔더니 감우는 아이테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화악 붉어지면서 "아아... 하와와..." 같은 이상한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고, 각청을 찾아갔을 땐 노크하자마자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급하게 서랍을 걸어잠그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감우마냥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는 건 덤.


"... 다들 왜 나만 보면..."


의문은 우연히 신학을 만나고서야 풀렸다.


"여기서 만나네요?"

"스승님은 내가 속세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시니까. 그보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신학은 트여있던 의복 옆부분에 작게 접은 채 끼워두었던 사진을 꺼내 아이테르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그 사진은, 아이테르가 상반신을 노출한 채 잠들어있는 사진이었다. 이런 사진이 있는 거부터 이미 정신이 혼미해질 법도 한데, 신학의 다음 말은 아이테르에게 극한의 수치심까지 한 사발 끼얹었다.


"노출증이라는 게 이런 거야?"

"... 이런 사진이 왜 신학 씨한테 있어요?"

"자고 일어나 보니 숙소 앞에 놓여 있었어. 난 네가 보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제가 이런 변태짓을 왜... 하아..."


그제서야 향릉, 감우, 각청이 보인 이상행동의 원인을 파악한 아이테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 스토커, 이젠 이런 짓까지 하는 건가."


물론 야란의 곁으로 돌아가기는 싫었기에 아이테르는 가볍게 짜증 한 번 내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네가 보낸 게 아니라니까 하는 말인데, 이 사진 내가 가져도 될까?"

"... 류운차풍진군님께 보여 드리지는 마세요."


사진을 다시 끼워두는 위치가 영 남사스러운 걸 보고 아이테르는 급히 고개를 돌려 자리를 비웠다.


"진짜 유치한 사람이네."


스토커에 대한 추가적인 디스는 덤.


하지만 사건은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내 어깨 장식... 어디 갔지?"


며칠 후,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이테르는 자신이 항상 어깨에 차고 다니던 장신구가 사라진 것을 눈치챘다.


"내가 잘 때 벗어두고 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날 아이테르는 모험가 길드 의뢰도 포기하고 하루종일 집안을 둘러봤지만 장식을 찾지는 못했다.


그렇게 또다시 며칠 후. 속 편하게 늦잠을 자고 있던 아이테르의 방 문을 천암군이 세게 두드렸다.


"천암군 여러분이 여긴 무슨 일로..."

"천권성님에 대한 암살 미수 혐의로, 체포합니다."

"... 네?"


아이테르는 잠시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느라 눈만 몇 번 깜박였다. 그 모습을 본 천암군 병사도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희도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수사 과정에서 여행자님이 용의자로 지목된 이상 예외를 둘 순 없습니다."

"도망갈 생각도 없어요. 그보다, 응광 씨는 괜찮으신 거죠?"

"다행스럽게도 어깨에 경미한 찰과상만 입으신 걸 제외하면 별다른 부상은 없으십니다."


아이테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자신이 리월에서 쌓아둔 신뢰도 있고, 애초에 최근 응광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증거도 없을 거라며 자신만만한 상태로.


"어서 와, 여행자."

"... 야란 씨?"


취조 장소에서 아이테르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야란. 그리고 싸늘하게 식은 야란의 표정을 본 순간, 아이테르는 이 일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겠다는 걸 직감했다.


"... 어떻게 된 일이에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응광이 잠시 망서 객잔에 볼일이 있어서 걸어가는 도중에 어딘가에서 화살이 날아왔어. 다행히도 어깨에 살짝 빗맞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화살이 발사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이게 나왔거든."


야란은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제 어깨 장식... 이게 왜 여기에...?"

"이거 때문에 지금 네가 용의선상 제 1순위야."


아이테르의 표정이 굳었다.


"... 제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요?"

"이것뿐만인 줄 알아?"


야란은 그 이후로도, 아이테르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몇 개 더 내놓았다.


"하... 그 근처에 간 적도 없는데 어째서..."

"내 정보력으로도 사건이 조작된 증거는 찾을 수 없었어. 현재까지의 정황으로는... 아마 그 누구도 네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없을 거야."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아이테르는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야란은 이해한다는 듯 아이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일단 오늘의 조사는 여기서 끝이야. 하지만... 칠성 암살 미수 사건이니만큼, 부득이하게 네 신변을 구속할게."

"... 마음대로 해요."


스토커 사건, 야란의 과보호와 성추행, 반나체 사진 유출, 심지어는 칠성 암살 미수 혐의까지 뒤집어쓰게 생긴 아이테르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2주일 내내 갇혀있던 아이테르는 보물 사냥단 하나가 아이테르의 물건을 훔쳐서 가지고 있다가 그날 근처에서 잃어버렸다는 얼토당토않은 증언을 한 이후에야 풀려났다.


그 보물 사냥단원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 있었던 게, 조금 꺼림칙했을 뿐.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지친 발걸음으로 오랜만에 햇빛이나 보러 밖으로 나간 아이테르. 그러나 하늘도 아이테르의 편이 아닌지,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그에게 가해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밝지는 않았다.


"......"


주변 사람들이 자신 보고 수군대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아이테르였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쓸 힘 따위 없었기에 그는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 이게 뭐야?"


방문 앞에 누군가 던져놓고 간 전단지를 주워 읽은 아이테르는 경악했다.


자신이 칠성 암살 미수 혐의로 구속되었던 2주 동안의 그의 공백을 가지고, 아이테르가 그동안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고 다녔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적혀있었다.


아이테르는 당장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거세게 열었고, 마침 급히 달려오고 있던 감우와 마주쳤다.


"여행자님! 괜찮으신 거에요?"

"... 감우 씨,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희도 모르겠어요. 사건을 파악하자마자 바로 사실이 아니라면서 칠성의 입장문을 내놨는데, 도저히 소문이 가라앉질 않았어요. 오히려 억지로 감싸주는 거 보니 리월 행정 체계에 여행자님의 파벌이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으윽... 대체 왜..."

"일단 여행자님은 당분간 밖에 나오지 말고 기다리고 계셔주세요. 저희가 어떻게든 해결을 해볼게요."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칠성 측에서 몇 번이고 해명해도, 아이테르를 향한 괴소문은 줄어들기는 커녕 점차 번져갔다. 심지어 숙소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이테르를 위협하다가 천암군에 끌려가는 사람마저 나타나자, 아이테르는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 여행자. 나야 향릉. 문 좀 열어줘."


문이 열리고, 향릉과 묘 사부의 눈에 들어온 건 초췌해진 채 눈에 생기가 사라진 아이테르의 모습이었다.


"... 괜찮니?"

"... 아니요."

"우리 딸도 그렇지만, 나도 여행자 네가 결백하다고 믿고 있다. 아무리 주변에서 이상한 소문을 떠들어봤자 넌 영원히 우리 향릉의 친구고, 리월의 영웅이야. 그 점 잊지 마라."

"이거 먹고 기운 내! 나도 그렇고, 행추랑 중운, 호두, 그리고 각청까지 전부 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

"... 고마워요. 두 사람 다."


여행자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삼키고 향릉이 건네준 음식을 받아 돌아갔다.


"... 아직 어린 친구가 무슨 큰 죄를 졌다고 다들 그렇게 물어뜯는지 원. 배은망덕한 것들."

"조만간 진실이 밝혀지겠죠. 만민당 잘 나가는 거 시기해서 위생 문제로 시비 걸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결국 잘만 운영되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이번 일은... 너무 가혹하구나."

"부녀가 대화하는 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저도 잠시 여행자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두 사람 사이에 야란이 끼어들었다. 이내 묘 사부는 야란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향릉과 자리를 비웠다.


두 사람이 사라진 걸 확인한 후, 야란은 문을 두드린 다음 곧장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문을 열고 나온 아이테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한 장의 쪽지뿐.


암상 찻집.


아이테르는 그 쪽지를 보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 얼굴을 가린 채 암상 찻집으로 달려갔다.




"빨리 왔네?"

"... 무슨 일로 부른 거에요?"

"아, 별 건 아니야. 그냥... 네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이테르는 긴장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네 반나체사진 유포, 살인 미수 누명, 그리고 이번 의혹까지, 누가 한 건지 궁금하지 않아?"


아이테르는 말없이 야란을 그저 쳐다볼 뿐이었고, 야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리에서 스윽 일어났다.


"널 스토킹할 정도의 은밀함. 칠성을 당당하게 저격할 정도의 무예. 네 옷을 벗기려 침투할 정도로 수준급의 은신 및 잠입 능력. 누가 봐도 속을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정보력과 신뢰. 그리고 얼마 전, 너한테 원한을 산 사람. 그게 누구일 거 같아?"


아이테르의 손이 떨려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었어요?"

"예뻐해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아이한테, 내가 무슨 벌을 줘야 할까?"

"... 제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


아이테르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검을 꺼내 야란에게 겨누었지만, 야란은 조금의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가만히 있어야지.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제가 설마 야란 씨 하나 정도도 무력으로 상대 못 할 거 같아요?"

"그래... 날 굴복시키고 자백하게 하겠다? 진짜 생각이 짧은걸?"

"무슨 말이에요."


야란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아이테르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 신분은 외부에 전혀 알려져있지 않아. 지금 난 총무부 소속 직원이자 동시에 암상 찻집 주인인데... 두 신분 중 어느 것이든 이 정도의 정보조작을 시도할 수는 없어.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끌려가서 자백해봤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 뒷세력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는 소리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예를 들면, 너. 아니면... 이번 일을 덮고 싶어하는 리월 칠성?"


야란은 손가락으로 아이테르의 뺨을 약하게 찔렀다.


"아, 물론 너는 '응광이 이를 공인하면 된다' 이런 말을 하고 싶겠지? 그런데 어쩌나? 응광에게 비밀 정보원이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분명 이를 빌미로 칠성이 리월 시민들을 감찰한다는 소문이 돌 텐데? 너 하나 때문에 칠성까지 곤란하게 만들려고?"

"제가 아니고 당신 때문이겠죠. 그리고, 굳이 정보원이 아니더라도 스파이라서 기밀을 빼내려 했다는 설명 정도는 누구라도 가능해요."

"하하하, 꽤나 당돌하네. 그럼... 이건 어때?"


야란이 허공에서 물의 실을 소환해 잡아당기자, 갑자기 벽에서 사진 수십 장이 흩어져나왔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아이테르와 친한 친구들의 사진이었다.


"과연 얘네들 주변에, 내 사람이 얼마나 있을 거 같아?"


아이테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야란은 아이테르를 깔보듯 웃으면서 사진 한 장을 집었다.


"이 아이는 네 평판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계속 널 찾아가서 응원해주던 애였지? 이런 좋은 친구가... 손님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면 어떨 거 같아?"

"향릉...!"


아이테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하고 싶어?"


아이테르의 손에서 힘없이 검이 떨어졌다. 야란의 눈에는 더 이상 리월의 영웅, 진실을 위해 분투하는 소년은 없었다.


"잘못... 했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이제 그만..."


그녀의 눈에 아이테르는, 그저 모든 걸 내려놓고 패배자를 자처하며 눈물 흘리는 연약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겨우 그걸로? 잘못했다기에는 말뿐인 거 같은데?"


야란이 말하는 바는 너무나도 뻔했다. 그랬기에, 아이테르는 더욱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이테르의 자세가 서서히 무너졌고, 이내 아이테르의 무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사죄를 하려면 무릎은 꿇어야지. 그래도 예절은 아는 거 같으니... 상을 줘야겠지?"


무릎을 꿇은 채 울먹이는 아이테르한테 천천히 다가간 야란은 이내 무언가를 꺼내어 아이테르의 목에 가져다 댔다.


철컥.


"이건...!"

"아하하하, 왜 그래? 너무 기뻐? 하긴, 천권성 특별 정보원의 펫이 되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니지?"


아이테르의 고개가 떨어졌다. 스토커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야란에게 부탁하러 간 순간부터 이미 그녀의 손애귀에 떨어진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야란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야란은 이내 피식 웃더니 아이테르의 뒤로 살짝 움직였다.


"그때 못한 거, 마저 해야겠지?"


어느새 야란의 손이 아이테르의 사타구니에 닿아 있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은밀함이나 부드러움 따위는 없었다는 거.


"자, 잠깐만요, 야란 씨..."


아이테르가 발버둥치려는 순간, 그의 귓가에 마치 정신을 녹이는 듯한 야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지...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아직도 모르겠니? 그리고... '야란 씨'가 뭐야? 펫이라면 펫다운 말을 써야지."


절대복종.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격조차 스스로 내려놓으라는 명령. 아이테르는 거부하고 싶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야란을 만족시키는 것, 하나뿐이었다.


"주인님..."


결국 그날, 리월의 영웅은 그저 한 사람의 유흥거리로 추락해버렸다. 여동생을 찾기 위한 소년의 모험도, 그저 주인을 위해 복종하는 삶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일관적인 게 지각하는 거 하나뿐이네. 한 달 내내 멘탈이 갈려나가다가 일단 쓰기로 한 건 써야 하니까 어떻게든 꾸역꾸역 쓰긴 했는데.


원래 이번 화 결말을 아이테르가 야란이 손 쓰는 걸 몰랐던 채로 "날 지켜주는 건 야란 씨밖에 없어" 이러면서 스스로 밑에 들어가는 엔딩을 쓰려 했는데 시발 그렇게 써보려니까 아이테르가 존나 저능아가 되어버리더라.


아무튼 이번 화 너무 질질 끌다가 제대로 조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