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의 나라인 이나즈마에서 라이덴 쇼군이 막부의 주요 가신과 함께 호위를 받으며 도시를 행진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일제히 쇼군을 향하여 납작 엎드려 절하며 그들의 강대하고, 신성한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런데 누가 말했던가? 운명적인 날은 따로 없다고.

 

“아빠, 저 누나는 누구야?”

 

그러나 절을 하는 사람들의 틈새에는 눈앞의 광경에도 당황하지 않은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라이덴 쇼군을 보면서 호기심을 느낀 어느 어린 소년의 말 한마디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소동의 원인은 바로 폰타인에서 이나즈마로 건너온 상인의 아들인 장폴이었다.

 

“저 어린 것이 감히 쇼군님에게 무례를 범하다니!”

 

“장폴! 고개를 들지 말라고 했잖아!”

 

장폴의 말에 막부의 병사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장폴과 그의 아버지 세바스티앙에게 다가갔다. 세바스티앙조차도 철없는 아들의 행동을 타박하였다.

 

‘아이고, 세상에! 어쩌면 좋아?’

 

‘저 아이 다섯 살밖에 안 될 텐데.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그리고 라이덴 쇼군의 행차를 구경 중이던 사람들은 저 소년이 막부로 끌려가서 큰 벌을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쇼군의 충신임을 자부하는 저들은 장폴이 쇼군에게 함부로 손가락질한 것만으로도 죄라고 여기는 판국이다. 이제 막부의 병사들이 장폴과 세바스티앙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사람들은 가을바람 앞에 낙엽처럼 파르르 떨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만하거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그럴 수도 있잖느냐?”

 

라이덴 쇼군이 손을 내밀며 막부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거짓말처럼 장폴과 세바스티앙에게서 물러섰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쇼군의 자비에 안도함과 동시에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장폴이 어린 외국인이어서 그냥 넘어가는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너는 이름이 뭐니?”

 

라이덴 쇼군은 그런 이나즈마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보다 온화한 시선을 저 어린 소년에게 집중했다. 라이덴 쇼군의 입가에 뜻밖의 미소가 떠올랐고, 그녀의 냉철하고 금욕적인 겉모습 이면에 보기 드물게 따뜻함이 드러났다.

 

“장폴이요, 누나.”

 

라이덴 쇼군이 확인한 장폴의 모습에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나즈마의 아이들은 하늘에서 천둥이 치면 쇼군님이 크게 노하셔서 그렇다며 벌벌 떠는 판국이다. 하지만 이 소년은 달랐다.

 

“거기 자네.”

 

“네, 네?”

 

“자네가 장폴의 부친인가?”

 

“네! 그렇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잠깐 천수각으로 데려가도 되겠지?”

 

“아…. 예!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세바스티앙은 왠지 모르게 어린 아들을 팔아먹는 기분이 들어서 찝찝했지만, 별수 없었다. 라이덴 쇼군은 이나즈마의 신. 거역한다는 선택은 처음부터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1시간 후, 천수각에 있는 천수각에 있는 라이덴 쇼군의 방. 실내에서는 오직 장폴과 쇼군만이 다과상 앞에서 즐겁게 얘기를 나눌 뿐이었다. 

 

“넌 폰타인 출신이라고 했니?”

 

“네, 맞아요.”

 

“많이 먹으렴. 이나즈마의 간식은 폰타인의 간식과는 재료와 풍미가 다르겠지만, 그래도 아무쪼록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저는 마음에 들어요! 저는 단 거 좋아하거든요. 근데 어른들은 단 걸 못 먹게 해서 속상해요.”

 

“저런. 그런 안타까운 일이. 앞으로 여기에 자주 놀러 오렴. 그러면 초콜릿이든 경단이든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에헤헤, 네!”

 

어쩌면 좀 더 즐거워 보이는 쪽은 쇼군일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그녀는 평소에 무심하고, 위엄이 넘치는 쇼군의 모습이 아니라 보다 온화하고 다정한 에이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고작 오늘 처음 보는 장폴에게서 뭔가를 느꼈던 것이었다. 장폴이 가진 순수함. 그것이야말로 쇼군이 추구하는 영원의 가치가 아닌가 싶었다.

 

“벌써 저녁이 되었구나, 장폴. 너의 아버지가 기다릴 테니 먼저 돌아가 보거라.”

 

“정말요? 하지만 나는 누나랑 좀 더 오래 있고 싶은데….”

 

어느 날이었다. 장폴은 주 1회씩 쇼군이 있는 천수각에 놀러 오는 게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낯선 폰타인의 아이를 경계했던 막부의 사람들도 이제는 서로에게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익숙한 관계가 되었다. 그 쇼군이 총애하는 아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곤두세울 여지가 없게 된 거겠지.

 

“아버지가 싫니?”

 

“아니요. 아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요새 좀 힘드신 일이 많으신 거 같아요.”

 

“그렇구나.”

 

그리고 그날 장폴이 돌아간 직후, 쇼군은 막부의 첩자들에게 지시를 내려 장폴의 아버지인 세바스탕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했다. 첩자들은 만국 상회 소속인 세바스티앙은 무거운 세금만으로도 모자라서 이도의 관리들에게 온갖 부조리를 당한다는 보고를 받은 순간, 쇼군은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만국 상회의 외국 상인들을 괴롭힌 관리들을 저잣거리에서 참수하고, 효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요새는 걱정거리가 없니, 장폴?”

 

“네. 아버지를 괴롭히는 나쁜 관리들이 사라지고, 새로 온 관리들은 다들 착한 사람들이에요.”

 

쇼군은 장폴에게 무릎베개를 해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얼굴이었다.

 

‘이 아이도 결국은 인간. 언젠가 성장하고, 늙어가면서 나보다 먼저 죽게 되겠지?’

 

장폴이 지금은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그래봤자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몸. 100년도 간신히 채우는 인간의 몸. 언젠가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순수함을 잃어버릴 것이며 점점 노화가 진행되면서 이 아이 또한 쇼군의 기억 속의 한 파편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슬펐다. 언젠가는 장폴이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게 될 것이고, 가정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행복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게 나여서는 안 되는 걸까?’

 

세월은 흘러, 또 흘러 장폴이 조금씩 자라나면서 1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갔다. 쇼군은 마침내 장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처음에는 막연히 그 순진무구한 아이를 귀여워했던 것뿐이라 여겼으나 조금씩 장폴을 갖고 싶었고, 자신만이 그 아이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장폴. 생일 축하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생명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기왕 태어났으면 축복을 받아야 마땅한 법. 그러니 올해 너에게 줄 생일 선물은 굉장히 특별할 거란다.”

 

“특별한 생일 선물요? 정말요?”

 

에이는 환하게 웃는 장폴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장폴에게 다가가 중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서 번개의 인장을 만들어 그것을 장폴의 이마 속에 스며들게 했다.

 

“음? 이게 생일 선물인가요?”

 

장폴은 머릿속이 고요해진 느낌에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너에게 축복을 내려준 거야.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말이지.”

 

에이의 말에 눈동자가 팽창된 장폴. 에이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십여 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제스처였다.

 

“네가 늙고, 쇠약해져서 나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내 마음이 찢어질 거 같아서 그래. 아, 어쩌면 너를 위한 선물이라기 보다는 나를 위한 선물이 된 기분이네?”

 

적막이 에이의 방을 가득 메웠다. 장폴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내 결심한 눈빛으로 에이에게 말했다.

 

“쇼군님. 아무래도 이게 쇼군님이 제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겠군요.”

 

“!”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에 에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

 

“3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이제 슬슬 폰타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리고?”

 

“고향 땅에서 저를 기다리는 약혼녀가 있거든요. 하하.”

 

“뭐라?”

 

쑥스러워하는 장폴의 말에 에이의 표정이 급격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방의 조명이 조금씩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는 거 같은데요? 조명 장치를 새로 바꾸셨나요?”

 

“그건 말이야….”

 

에이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그 순간, 장폴은 실내의 분위기가 그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기초적인 호신술만 익힌 평범한 상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한 채 그대로 난생처음 보는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뭐, 뭐야? 여기는? 여긴 대체 뭐냐고!”

 

“여기는 일심정토야. 원래는 이렇게 쓰이길 원하지 않았어, 장폴. 너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면 대비하려고 일심정토를 너에게 연결했었는데.”

 

“쇼군님…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장폴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에이를 노려봤다. 항상 그를 자상하게 대해준 에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욕망을 불사르는 괴물만이 존재할 뿐.

 

“그거야 뻔하지 않겠니? 너를 오직 나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니까.”

 

에이는 싸늘한 미소와 함께 장폴에게 달려가 그를 밀어서 쓰러트렸다. 가벼운 바람에 쓰러지는 나무판자처럼 땅에 넘어진 장폴의 하복부 위에 올라탄 에이는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옷을 벗어서 옆으로 던졌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 왔구나, 장폴?”

 

* * *

 

에이에 의해 일심정토에 구속된 장폴은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졌다. 에이가 기분이 좋다면 좋은 대로, 기분이 나쁘다면 나쁜 대로 몇 번이고 그의 몸을 요구하여 교미를 일삼았다. 아니, 말이 좋아서 교미지. 사실은 강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장폴은 쇼군에게 마지막 선물을 받고 폰타인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신인지 알려주고 싶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산산조각났다.

 

“제발… 그만 하세요. 제가 아는 다정한 쇼군님으로 돌아와 주세요.”

 

장폴은 흐느끼면서 에이에게 애원했다. 저건 가짜 쇼군일 거다. 함께 했을 때는 늘 따뜻했는데,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껴주던 에이였다. 그런데 폰타인에 있는 약혼자의 곁에 돌아간다는 말에 한 순간 눈이 뒤집혀서 이런 끔찍한 일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한 에이였다.

 

“네 잘못이야. 나의 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일 줄로만 알았던 네가 돌아보지도 않고,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게 죄란 말이야.”

 

에이는 미소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장폴의 하반신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내가 추구하는 것들을 다신 쫓지 못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나를 멸시해도 너만 내 곁에 있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지. 그런 네가 감히 나를 떠나려고 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설득의 결과는 가혹했다. 에이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장폴의 몸 위에 올라타서는 그를 착취하고 난 뒤, 그의 손에 펜과 종이를 잡아줬다.

 

“내가 시키는 대로 받아적으렴.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폰타인에 있는 네 약혼자를 죽일 거란다, 장폴. 나는 쇼군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이제 다시는 폰타인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

 

에이는 장폴의 귀에 대고 음산한 속삭임을 날린 후, 그의 뺨을 핥았다. 독사다. 참으로 독사와 같은 마음가짐이다! 장폴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절망하였다. 하지만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인생 최후의 용기를 발휘하였다. 그는 빨리 종이와 펜을 들어 뭔가를 끄적였다.

 

“미카엘라. 내가 폰타인으로 돌아가길 거부한 것은 내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나 장폴은 당신을 누구보다도 진정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결국 피치 못할 사정으로 우리 사이의 인연은 끊어졌어. 허!”

 

에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신의 눈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 번개의 신인 그녀에게 반항을?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이다.

 

“아무래도 너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각인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될 거 같구나?”

 

“…….”

 

장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에이는 다시 한번 그의 몸 위에서 허리를 흔들었고, 아마도 이 반항의 결과는 뻔한 결말이겠지. 하지만 괴물이 되어버린 쇼군에게 굴복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쇼군이야 껍데기 뿐인 장폴이나마 얻었으니 그걸로 괜찮겠지.

 

“이제 너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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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 오랜만에 글 썼는데 실력 다 죽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