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신입니다."


"근신이야♪ "


"근신 같은 소리하네! 그 사메야마조차도 나한테 감히 근신같은 걸 내릴 수는 없다고!"


여느때와 같이 시끌벅적한 콜로서스의 한 복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키팅과 렉커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일이야?"


"아니 이 백야성 꼬맹이들이 갑자기 나한테 달려들어서는 근신이니 뭐니 잔소리해대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내 질문에 짜증을 잔뜩내며 대답하는 렉커

나름 마이페이스로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지만 역시 키팅들에게는 견줄 수 없는 듯 하다.


"영문을 모른다면♪ "


"더 나빠."


"더 안좋아♪ "


"둔하고♪ "


"멍청하기까지해♪ " 


키팅 특유의 조롱이 돌림노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하는 대상이 내가 아니지만 저 의미 모를 눈빛과 악의가 담긴 것만 같은 미소는 견디기가 힘들다.


"윽.. 렉커 너 뭐 잘못한거 있는거 아니야?"


"아니 사막에서 방금 전에 돌아왔는데 내가 잘못할게 뭐가 있어!

 그리고 나는 레디젤 렌치 최고의 남자라고. 내가 잘못한게 있다 한들 백야성 녀석들에게 사과같은걸 할까보냐."


키팅이 영문 모를 장난과 조롱을 일삼긴하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그 이유나 의미가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슬슬 렉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그 덤벙대는 렉커인걸. 당장 저번주에도 함교에 놓인 운산에서 가져온 기념 복달걀을 넘어트렸다.

깨지진 않았지만 덜컥 놀랐다. 동글 동글 들썩이는게 얼마나 귀여운데.


"정말로 모르겠다면♪ "


"친절하게 알려주는 수 밖에♪ "


"발을 털지도 않아♪ "


"온 복도를 흙바닥으로 만드는♪ "


"그런 신발은 필요 없어♪ "


"차라리 맨발이 낫겠어♪ "


키팅들은 노래를 하면서 흩어지더니 품속에서 신발을 한켤래씩 꺼내들었다.


"앗! 내 한정판 쵸던 시리즈! 니네 뭐야! 왜 너희가 그걸 가지고 있는거야!!"


"가지고 있는게 아니야♪ "


"버리러 가고 있는거야♪ "


"이런 신발은 필요없어♪ "


"차라리 맨발이 낫겠어♪ "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노래가 마무리지어지자 키팅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야!! 야!! 이...!! 이 자식들이!!"


순간 어느 방향을 먼저 쫒아야할지 혼란스러워 하던 렉커는 맹렬한 기세로 정면을 향해 달려나갔다.

함교쪽으로는 안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조종사! 이번엔 또 무슨일이야?"


쓴웃음을 지으며 나타난 바이스가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어떤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알고는 있는거 같지만.


"렉커가 자꾸 흙투성이 신발로 콜로서스를 돌아녀서 키팅이 화가 났나봐

 렉커의 운동화를 들고는 사방으로 달아나 버렸어."


"하하하... 뭐랄까 키팅답네. 불만이 있으면 참는 법이 없다니까."


"근데 왜 키팅이 근신 같은 단어를 쓰는거지? 좀 뜬금없지 않나?"


아- 뭔가 알겠다는 듯한 단말마를 흘린 바이스는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에 카렌이 백야성에서 근신을 받고 콜로서스에 완전히 합류했잖아?

 콜로서스에는 다양한 이유로 여러 사람들이 합류했지만 근신같은 생소한 이유는 처음이라 그런지

 뭔가 유행어 같은게 되버린거 같아. "


"뭐? 어떻게 이런상황에 근신같은 단어를 유행어로 쓸 수가있어? 누가 그러는데?"


"어.. 예를 들면 도브? 아까도 여기 오면서 봤는데 게으른 자기 자신한테 근신을 줘야겠다면서 휴게실로 들어가더라고."


도브 이 녀석이.. 하던 짓은 평소와 같지만 괜히 그런 말을 하니 평소보다 더 괘씸하다.

비비안씨한테 일러야지.


"카렌은 어때? 혹시 그런 말장난 같은걸 들은건 아니겠지?"


"글쎄? 아무래도 카렌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속은 여린면이 있으니까 말이야. 괜히 카렌이 신경 쓸 일이 더 생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잠깐 생각에 잠겼던 바이스는 곧 나에게 말했다.


"조종사가 한번 보고 올래?"


"친구인 바이스가 다녀오는게 좋지 않겠어?"


내 질문에 바이스는 영문 모를 미소를 짓더니


"나는 오늘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키팅하고 렉커 문제도 내가 맡을 테니까 얼른 가봐."


라며 나를 재촉했다.

할 일이 많으면 나랑 나눠서 해야하는거 아닌가?

그래도 일단 카렌이 걱정되니까 여기는 바이스에게 맡겨야겠다.




***




카렌은 경비대장직에서 내려온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거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훈련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순찰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에 들고.

가끔은 갑갑해 보이지만 역시 그런 점이 카렌의 강함이겠지.

지금은 훈련이 거의 끝났을 시간이다. 서둘러서 가면 훈련이 끝나기 전에 만날수 있을 거야.

부지런히 걸어 주로 훈련실로 쓰이는 콜로서스의 빈구역에 다와가니 검을 든 분홍색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아 조종사. 훈련을 위해 온 것입니까? 드물게도 부르지 않았는데도 와주었군요."


"앗! 히이로씨 사실 그런건 아닌데.."


히이로는 후후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조종사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부르지 않으면 결코 훈련장으로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말에 뼈가 있다. 옅게 웃는 히이로의 모습이 오늘따라 조금 무섭게 느껴진다.


"그으.. 꼭 그런 것도 아닌데.."


"그래서 훈련장 구역엔 어쩐일인가요 조종사."


"아 혹시 카렌이 다녀가지 않았나요? 시간상으론 지금쯤 훈련이 끝났을거 같은데."


"카렌양 말이군요.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훈련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친구분을 조금 본받는게 어떻습니까 조종사? 그녀는 매일 4시간 이상 훈련에 시간을 쏟더군요."


"친구..요?"


"거의 매일 붙어다니고 하루 일과까지 환히 꿰고 있는데 친구가 아닌가요?"


"친구.. 네 친구 맞아요. 저.. 친구에게 조금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내일 꼭 훈련하러 나오겠습니다."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조심스레 바라보던 히이로는 훈련 약속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나를 보내줬다.

카렌의 그 다음 일정은 순찰인데.. 콜로서스가 워낙 넓으니 막연히 돌아다닌다고 만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친구..라 카렌과 나는 친구일까? 같이 보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분명 많은 일을 함께 해냈다.

지금 내가 카렌을 걱정하는 건 친구이기 때문인건가? 카렌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나와 스카이워커 단 둘만이 존재하던 세계는 어느날 갑자기 끝났다.

말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며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신없이 날아왔다.

모르던 것들을 잔뜩 알게 되고

처음 만난 것들에 흠뻑 취해버리고 

소중한 사람들도 한가득 생겨버렸다.

그 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은...


"냐..냥!!"


갑작스런 고양이 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필리시가 수상한 자세로 창고 앞에 서 있었다.


"무..뭘 보는거냥!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거냥?"


"아.. 필리시가 아니고 유미구나. 혹시 카렌 봤어?"


"카렌? 유미는 모른다냥 필리시는 알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내가 근신을 준 상태다냥.

 그러니까 다른곳 가서 알아봐라냥."


"근신? 유미. 근신은 그럴때 쓰는 단어가 아니야. 또 그렇게 말장난으로 쓸 상황도 아니고."


"냥? 무슨 단어를 어떻게 쓰든 유미의 마음이다냥! 귀찮게 그만하고 가라냥! 창고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냥."


"유미! 똑바로 대답해. 그런식으로 막쓰는 단어가 아니라고."


"냐..냥.. 왜그러냐냥.. 근신은 소중한 사람이기때문에 받은거라고..

 필리시도 유미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근신을 준거뿐이다냥.."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한거야?"


내려던 화는 사라지고 그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조종사. 내가 해준말이야."


"카렌..?"


내 뒤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카렌이 서 있었다.

분명 어제도 만났는데 어째선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

온종일의 이유가 눈 앞에 있음을 깨닫고 말을 건내려는 순간 카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식당에서 특별 간식이 나온다던데 들었어 유미? 늦게 가면 숫자가 부족할지도 몰라."


"뭐라냥! 그럴 수는 없다냥! 유미는 필리시 몫까지 두 개를 먹어야한다냥!"


유미가 격렬한 속도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복도는 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언제나와 같은 카렌이지만 왜인지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유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은 뒤돌며 나에게 말했다.


"나를 찾았다며 조종사? 우리 얘기 좀 할까?"




***




나와 카렌은 조용히 이야기할 장소를 찾아 내 방으로 왔고

소파에 앉아있던 카렌은 정적을 깨며 말을 시작했다.


"필리시한테 근신에 대한 얘기해준거 나야.

 콜로서스 안에서 작은 오해가 도는 모양이더라고."


슈모르와 디바우러호의 공세를 영웅적인 결단으로 막아낸 카렌.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건 감사와 찬사가 아닌 근신이라는 처벌이었다.

백야성 귀족들의 행태야 하루이틀일이 아니었으나 백야성의 성주는 바로 카렌의 아버지.

나는 그녀가 경비대장이라는 군인신분으로도, 성주의 딸이라는 가족의 신분으로도 배신을 당한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내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적이 있던가?

 내 아버지는 잘 알고 있을거야 백야성의 성주이며 집정관, 백야성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태양.

 그리고 아름답고 친절한 어머니, 나에게 언제나 상냥했던 언니가.. 있었어."


카렌이 앉아 있는 소파와 내가 앉아있는 침대는 고작해야 한두걸음 떨어져 있었지만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은 십여년 전의 과거를 바라보는 듯했고

나는 모르는 카렌만의 시간이 나와 그녀의 거리를 벌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는 아버지도 그렇게 고집스럽지 않았어. 여느 가족처럼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 그리고 전쟁이 우리를 덮쳤어. 

 어느날 어머니와 언니 없이 홀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나에게 두 사람이 전쟁에서 실종되었다고 말하셨어.

 그리고 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지. 

 언제 어디서 실종되었는지, 그 후로 혹시 들린 소식은 없는지, 왜 더는 찾으려하지 않는지,

 어린 나는 끝없이 아버지에게 되물었지만 돌아오는건 끝없는 침묵이었어.

 나는 마음 둘 곳을 잃고 말았어. 넓디 넓은 궁전에서도 내가 숨 쉴 수있는 공간은 없었어.

 행복했던 기억은 빠져들수록 깨어났을때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어. 

 그저 무기력하게 방황하던 나는 어느날 깨달았어 이렇게 가만히 있는다면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직접 궁금해하던 답을 찾고,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고, 내 마음을 둘 곳을 찾아야 된다고 말이야."


차분한 어조로 긴말을 내뱉던 카렌은 어느샌가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 후의 삶은 투쟁에 가까운 노력의 연속이었어. 어떻게 살아야할지 정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걸 해내고 지켜내는 것에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더라.

 그러다가 너와 이 콜로서스를 만났지. 이전의 나였다면 슈모르로부터 그저 백야성을 지켜내는데에 만족했을지도 몰라. 

 다운타운에 피해가 좀 있더라도 경비대장의 사명인 백야성 수호를 이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저 숨 죽인채 카렌의 말을 듣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도 종종 시선을 휘어잡고는 했으나 지금의 그녀에겐..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지켜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너와 이 콜로서스를 타고 나아갈거야.

 이번 근신은.. 떠나는 내 등을 밀어주는 아버지의 손.. 그게 이번 근신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걸 깨달았어.

 그날 이후로 영영 받을 수없을 거라고 생각한 아버지의 애정이었는데.. 어쩌면 내내 보내오던 애정을 이제야 느꼈는지도."


카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너무 길고 깊은 이야기를 단숨에 꺼낸 까닭일까. 약간 숨이 차고 조금 상기된 것 같은 얼굴.


"어머니와 언니.. 내 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백야성을 나왔어.

 앞으로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 이 콜로서스에 올랐어.

 그리고.. 내 마음을 둘 곳을 찾기 위해.. 너한테 묻고 싶어.."


카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잡는다.

코를 맞댈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눈동자 속에 나의 모습이 보인다.

눈을 감자 이윽고 영혼과 영혼이 맞닿은 것만 같은 황홀한 감촉이 나를 관통했다.

감응을 제어 할 수가 없다. 등줄기를 따라 전류가 흐르고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만 같다.

아직까지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카렌의 손길만이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내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조종사.. 너를 좋아해.

 내 마음을.. 너의 곁에 두어도 될까?"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아니면 멈췄으면 좋겠다.

나의 삶에서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카렌에게서 받아든 애틋한 마음이 내 안에 담기기엔 너무 벅찼다.

이 마음을 어디 두어야 할까. 어찌 옮겨야할까. 혹여 터져 버리는 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내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감응을 통해 전해져오는 카렌의 마음은 이미 꽉 차버린 줄 알았던 내 안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카렌의 떨리는 손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카렌의 넘처흐르는 애정 사이에서 조금씩 불안의 감정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럴때가 아니다. 나는 말하지 않아도 카렌의 마음을 알 수있지만 그녀는 아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해 카렌을 끌어 안았다.


"카렌! 내 새로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바로 너야.

 늦게 대답해서 미안해. 너처럼 온전히 마음을 전해줄 수는 없지만 

 대신에 더 노력 할게, 더 많이, 더 크게 말해줄게.

 좋아해. 사랑해. 사랑해. 카렌 너를 사랑해.

 나한테.. 부디 너의 마음을 맡겨줄래?"


으스러져라 카렌을 끌어안은 탓에 그녀가 긴장하며 숨을 참았다가 단숨에 내쉬는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졌다.

굳은 몸에 힘을 풀고 나를 마주 끌어 안아주는 카렌. 얼굴을 볼 수 없는게 불만이었는지 몸을 조금 밀어내더니

이마를 맞대고 나를 바라본다.


"대답이 너무 늦었잖아. 나는 아이테르가 아니고 오로리안이라고."


달뜬 숨을 내쉬며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하던 카렌은 갑작스레 재밌는 생각이라도 났는지

평소같지 않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안되겠어 조종사. 6시간.. 아니 12시간 근신이야."


"뭐? 근신? 갑자기?"


카렌은 나를 끌어 안은채로 문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이 


잠겼다.



카렌 정실단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