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https://arca.live/b/arknights/62906893

2화 - https://arca.live/b/arknights/63074367

3화 - https://arca.live/b/arknights/63837106

4화 - https://arca.live/b/arknights/64499552



BGM - Deja Vu




실험이 끝난 후, 1일차.


어시스턴트를 다른 오퍼레이터로 바꿨다.

어째선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그녀에게 어시스턴트는 원래 한 달 마다 바뀌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확실히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는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 그녀는 축 늘어져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실험이 끝난 후, 2일차.


오늘도 서류 더미에서 헤엄치고 있는 동안, 그녀가 찾아왔다.

어시스턴트가 아닌데도 일을 도우려는 모습이 기특하긴 했지만, 규정상 안 된다고 말하자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새로 어시스턴트로 임명한 로렌티나의 눈빛이 조금 따가웠다.



실험이 끝난 후, 3일차.


몸이 좀 뻐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던 도중 로렌티나에게 등을 눌러달라고 말했다.

앉아서 다리를 펴고 발 끝에 손을 열심히 닿게 하려던 그때, 문이 열리고 그녀가 찾아왔다.

내 등을 누르는 로렌티나에게 상당히 따가운 눈빛을 보내더니 밖으로 나갔다.

박사도 정말 죄가 많구나, 그렇게 말한 로렌티나에게 뒤통수를 가볍게 한 대 맞았다.



실험이 끝난 후, 4일차.


의료부의 오퍼레이터와 면담을 하던 도중 그녀가 들어왔다.

면담중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옆에 다가온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의 무릎 위에 앉으려고 했으나, 로렌티나에게 저지당했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조금 위장이 쓰린 기분이 든다.



실험이 끝난 후, 5일차.


단말기가 울렸다.

받으니 아이린이였다.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주변이 상당히 시끄러운 것을 보아 분명 방은 아닌 장소겠지.

한창 무어라 횡설수설 하던 그녀는 여기 한 병 더! 라고 말하는 것으로 통화를 끊었다.

...술은 건강에 별로 좋지 않을텐데.

시계를 보니 아직 점심 시간이였다.



실험이 끝난 후, 6일차.


최근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로렌티나가 투덜거렸다.

박사가 저렇게 작은 아이를 꼬셔놓고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등,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눈은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박사. 언제쯤 이 귀여운 작은 새의 새로운 둥지가 될 예정이야? 그렇게 로맨틱한 고백을 받은 사람에게는 거부권 따위는 없는 거 잘 알지?"


게다가 가엾기도 하잖니. 그렇게 말하는 로렌티나에게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박사, 생각보다 우유부단한 사람이네...그치만 박사도 나름 생각이 있는 거지?"


아직은 시간이 좀 필요해. 그 말에 로렌티나는 재미없다는 듯 조각칼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존중은 해줄게...하지만 그 가엾은 작은 새의 마음을 배신하면 안 되는 건 잘 알지? 그렇다면 이 언니는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그렇게 말하는 로렌티나의 눈빛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무섭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언니라고 부르게 된 거야? 그렇게 묻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사진을 찍자고 했던 날...? 어쨌든 절대로 잊지 마. 박사가 작은 새에게 할 대답은 오로지 하나라는 걸."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리 친해진건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녀를 지탱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설령 내가 아니여도.

오늘은 뭔가 안심이 되는 하루였다.



실험이 끝난 후, 7일차.


"박사. 혹시 오늘은 뭔가 예정이 있어?"


그렇게 묻는 로렌티나에게 고개를 젓자, 잘 되었네. 하면서 웃은 로렌티나가 쪽지를 건넸다.


"오늘은 이베리아 및 에기르...너무 길어서 그냥 이베리아 향우회, 두 번째 모임을 할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작은 새와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아, 오늘은 그렇게 격식 차리지 않고 그냥 가도 괜찮아. 그렇게 말한 로렌티나에게, 그냥 네가 동행하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자 순식간에 무언가 압도적인 기운이 나에게 쏟아졌다.


"...바람을 피우겠다고? 그것도 나랑?"


붉은 눈을 빛내며 살벌하게 말하던 로렌티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하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없던 일로 할게. 작은 새랑 같이 가도록 할테니 신경 쓰지마."


갑자기 태도를 바꾼 로렌티나에게 어째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서 나한테 내밀었다.


"네가 직접 네 눈을 봐...세상을 다 잃은 눈빛이네."


...이건 내가 봐도 좀 그렇다.

로렌티나에게 거울을 돌려주면서 아이린을 잘 지탱해줘. 라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맡겨줘. 다만...잊지마. 작은 새에겐 네가 필요해." 


너무 고민의 시간을 길게 갖지는 마, 그렇게 말한 그녀는 재빠르게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았다.

분명 나에게 불만이 있겠지...순식간에 고요해진 집무실에 위화감을 느끼며 오늘도 기계처럼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희망이란 건 무엇일까.



실험이 끝난 후, 8일차.


"어제 모임은 나름 성공적이였어. 작은 새도 많이 귀여움 받았고. 다만..."


그 뒷 말은 무엇인지 안 말해도 알 것 같다. 뭐라고 더 말하려던 로렌티나는 내가 손을 내젓자, 주머니에서 조각칼과 나무 토막을 꺼내더니 소파에 앉아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깎기 시작했다.

뭘 하고 있어? 그렇게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마 집중하는 도중에는 말을 걸어도 모르는 타입인 모양이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 할 일에 집중하던 찰나, 스피커에서 치지직 하는 잡음과 함께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로도스의 모든 오퍼레이터에게 전합니다. 현재 훈련장에 큰 수리가 필요하여 당분간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추후 수리가 완료되는대로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가끔 훈련장을 날려먹는 오퍼레이터들이 있긴 하다.

어딘가에선 백파이프와 플래티넘과 그라벨이 치정 싸움을 하다가 날려먹는 세계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딱 좋은 타이밍에 연락이 왔다. 이 이름은...도베르만인가.


「도베르만이다. 박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퍼레이터 아이린이 그랬다.」


...아이린이? 설마?

자초지종을 듣자하니, 사격 연습을 하다가 신경질을 내면서 핸드 캐논을 사방으로 난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훈련장은 대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다.


「아무래도 최근 정신이 불안해보이는데...박사가 신경을 좀 써줘야 할 것 같군. 오늘도 사실 음주 상태로 들어왔다. 이 대낮부터 말이지.」


그래서 일단 박사의 집무실로 가져다놓으라고 시켰다. 조금 있으면 도착 할거다. 그렇게 말하고 도베르만은 끊었다.

아무리 그래도 짐처럼 가져다 놓으라고 하다니, 조금 씁쓸했다.

다만 그만큼 도베르만의 심정도 이해가 가니까 이번 일은 일단 넘어가는 걸로 하자.

잠시 뒤 드론들 위에 실려서 도착한 아이린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이렇게나 작았었나. 조심스럽게 안아서 소파에 뉘이자,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로렌티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작은 새가 갑자기 여기에?"


자초지총을 설명하자, 하는 수 없네...하면서 웃은 로렌티나는 아이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방에 데려다주려는 모양인 것 같다.

그녀라면 충분히 안심할 수 있다.

...아마도 내 역할도 대신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져서 펜의 잉크를 흘리고 말았다.

...얼굴에서 좀 흘러내리는 투명한 잉크는 상관없다.



실험이 끝난 후, 9일차.


집무실 앞이 소란스러워서 밖으로 나가니 그녀가 로렌티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에기르인! 왜 못 들어가게 하는데!"

"...작은 새야. 네 기분은 이해하긴 하는데 박사도 시간이 좀...이 언니를 믿어볼래?"

"네가, 아니 언니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한 그녀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있었다. 아직 아침인데도 한 잔 마신걸까.

말다툼도 잠시, 나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순식간에 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내 품에 얼굴을 묻고 가늘게 몸을 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자, 내 옷의 앞섶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예외로 두자.

가슴 한 구석이 아픔을 호소했다.


실험이 끝난 후, 10일차.


오늘은 드물게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로렌티나는 조각칼로 무언가를 열심히 깎고, 나는 서류를 오늘도 기계와 같이 처리한다. 오로지 그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렇게 한동안 서류를 넘기고 마지막 장에 도장을 찍으려던 찰나, 단말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기, 두목. 바쁘신 와중에 죄송함다.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슴다..."


아무래도 이 조용함은 폭풍전야였던 모양이다.

로렌티나에게 손짓하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일어났다. 

내 뒤를 따라온 그녀와 함께 도착한 로도스 아일랜드의 술집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왼쪽 벽에는 큼직한 구멍이 여러 개 뚫리고, 그 옆에서는 엘리시움이 토하고 쏜즈가 등을 두드려주는 와중에 위디가 썩은 표정으로 열심히 불 탄 곳에다가 저수포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오른쪽 벽에서는 털이 살짝 불에 탄 마운틴이 열심히 부서진 유리창 밑의 유리 파편들을 쓸어담고 있었고, 라 플루마가 한숨을 내쉬며 술이 든 상자를 옮기는 와중에도 옆에는 여전히 술에서 못 깨어나고 우르수스식 브레이크 댄스를 추다가 이스티나한테 책으로 한 대 얻어맞은 지마까지 그야말로 난장판이였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술집 한 가운데에는, 사방에 박살 난 탁자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멀쩡한 탁자 위에 커다란 술병들을 끌어안고 뺨에 희미하게 눈물 자국이 남은 아이린이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니 널브러져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한참 구멍을 수리하고 있던 제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들고 있던 망치를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제이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두목. 일단 간단히 말씀드리자면...사모님이 이렇게 만든검다..."


그렇게 제이의 말을 듣자니, 술을 한창 마시던 아이린이 우연히 지마와 시비가 붙었고, 지마의 너 박사에게 차였냐? 이 한 마디에 발끈한 아이린이 핸드 캐논을 난사하기 시작하면서 이 난리가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그 무도회장엔 지마도 있었던가. 어째서 이런 꼬라지가 된 거지.


"사모님은 최근에는 여기에 거의 상주하고 있슴다...아, 아직 아닌검까? 뭐 그래도 곧 그리 될 것 같고 두목의 체면도 있고 하니, 크게 문제 삼진 않겠슴다. 대신 앞으로 무기는 반입 불가임다."


그래도 수리비는 두목께 청구하겠슴다. 아, 그리고 저 보드카 브레이크 댄스 장인 아가씨에게도 해야겠슴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던 제이는 다시 망치를 들고 벽에 판자를 덧대기 시작했다.

이번 달 월급은 저 세상으로 가는구나. 이것이 심판인가.

어쨌든 이대로 아이린을 방치할 순 없으니 로렌티나에게 부탁해서 아이린을 방으로 옮겨놓자.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고, 술병을 살며시 뺏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로렌티나가 아이린을 안아올리자, 그녀는 어째선지 바둥바둥거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린을 로렌티나는 당혹스럽게 보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저기, 작은 새야. 이런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간단다. 자, 이 언니랑 같이 돌아가야지?"


로렌티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면서 다시 아이린을 안아들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린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격렬한 몸부림을 치는 아이린을 다시 내려놓으며 한숨을 쉰 로렌티나는 어쩌면...하고 중얼거리더니 나에게 손짓을 했다.


"박사, 박사가 한 번 안아볼래? 어쩌면 얌전해질지도."


...결과적으로 나의 품 안에서 아이린은 아주 얌전하게 안겨있었다.

솔직히 나의 체력과 힘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동안의 춤 연습으로 둘 다 많이 늘어서 그런지 다행히 어떻게든 그녀를 방 안에 무사히 데려다놓는 것에는 성공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지 나에게 바짝 붙은 아이린을 겉옷을 안겨주는 것으로 어떻게든 눕혀놓고 나오자, 로렌티나가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본 사진인데...혹시 언제 찍은거야? 너무 달콤해서 입에서 설탕이 나오겠는걸?"


사진을 보니...그때 찍었던 아이린이 내 품에 안겨서 볼에 키스하던 사진이였다.

...설마했더니 진짜로 걸어둔건가.

어쨌든 화제를 돌리기 위해 남의 방을 함부로 보면 안 되는데...그렇게 말하자, 로렌티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맞는데...이렇게나 잘 보이는 곳에 크게 걸려있다면 안 보고 싶어도 보게 되는 걸?"


그렇게 말하며 로렌티나는 자리에서 몇 바퀴 빙글 돌더니 내 눈 앞에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찌르듯이 내밀었다.

깜짝 놀란 탓에, 엉겁결에 그녀의 방에서 함께 잤던 전 날에 찍었다고 말하자, 헤에...하고 중얼거린 로렌티나는 표정이 굳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 시간은 늘 모자란 법이지."


박사, 이제 슬슬 각오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로렌티나가 오늘은 유독 무서웠다.

...아무래도 잘못된 대답을 고른 것 같다.

실험이 끝난 후, 11일차.


여태까지 일들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자, 개운치 않은 기분이 자꾸 든다.

어째서일까...아니 나는 분명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안 뒤에도 그녀는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차피 그녀는 나 말고도 충분히 다른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박사?"


...그렇겠지. 하지만...


"박사!"


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멀어진 의식을 되돌려서 앞을 보니, 로렌티나가 박수를 친 모양인지 손바닥을 맞대고 있었다.


"...좀 이상하네, 박사. 무슨 일이 있어?"


아무 일도 아니야. 그렇게 대답하자, 흐응...하고 표정이 굳은 로렌티나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서 내 이마를 찔렀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네 표정 좀 봐...그나저나 내가 거울을 빌려주는 것도 몇 번째야 이제?"


그렇게 말한 그녀는 손거울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내가 봐도 좀 심한 표정이다.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살며시 밀어내자, 로렌티나가 붉은 눈을 크게 뜨더니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전염된다던가...박사도 생각이 많겠지. 그치만..."


그렇게 말하던 도중, 갑자기 집무실의 문을 누가 쾅쾅하고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내가 가서 보고 올게, 라고 말한 로렌티나가 문을 열자 회색빛 자그마한 물체가 아주 빠르게 그녀의 옆으로 빠져나가더니 책상을 뛰어넘어 나에게 달려들었다.

뭐라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받아들자, 나에게서 떨이지기 싫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하려는지 양 팔과 양 다리를 그대로 내 몸에 두른 채 매달려온 그녀, 아이린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를 껴안아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거...내 옷 같은데?


"...저기, 작은 새야...?"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로렌티나가 앉지도 서있지도 못하게 된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단 둘이서 있는 기분이다. 이제 11일쯤 지났을텐데.

한동안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껴안고 있으니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해서 왼손으로 아이린의 허벅지를 톡톡 두들겼다.


"...안 놔요. 차라리 나를 죽여요...절대 못 놔요."


슬슬 넘어질 것 같은데 잠시만 내려와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도리질치더니 더더욱 꽉 안겨오기 시작했다.

...허리가 아프다.


"...내가 아픈만큼...당신도 아파야해요..."


이대로 같이 죽을 정도로 아파해야해요...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는 무감정 그 자체라서 이젠 공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둘이서 같이 있자고 했으면서...배신자..."


이젠 다리가 진심으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양 다리로 조여오는 허리에는 이젠 감각이 없다.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이 아파온다.

...분명 억지로라도 그녀에게서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너무 아파요..."


어떻게든 버텨내자, 마지막으로 그 한 마디를 남긴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허둥지둥 아이린을 책상 위에 눕히자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자기 시작했다.

...의료부로 가야겠다.

혹시 알코올 중독 솔루션 같은 것도 하려나.



실험이 끝난 후, 12일차.


정말로 믿을 수 없는데 갈비뼈에 금도 안 갔고, 허리도 멀쩡하다고 한다.

그래도 멍이 든 탓에 하루 정도는 입원하라는 처방이 떨어졌다.

...그녀 나름대로 힘 조절을 한 건가?


"...그렇게 된 건가. 그렇다면...아니, 이 이야기는 네게는 너무 늦은 것 같군."


사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니 고양이면서 개소리를 하는 켈시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살며시 들어주자, 그것은 훗 하고 웃더니 나가버렸다.

...망할 녹색단또년.

그리고 나가는 그녀와 엇갈리듯 로렌티나와 글래디아 그리고 스카디가 들어왔다.


"박사...그래도 많이 튼튼해졌네?"

"박사님, 운동을 최근 좀 하신 모양이군요. 소질이 있으십니다."

"...다음에 나랑 같이 산을 가르자?"


순간적으로 오퍼레이터 마운틴이 떠오른 탓에 고개를 젓자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스카디는 가져온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 맞다. 그라니가 이거 좀 전달해달라고 했어...본인도 전달 받은 거라던데...클릭이랑 씬이라는 사람이 했대."


스카디가 꺼낸 것은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사진이 얼마나 선명하게 잘 찍혔는지, 조금 놀랐다.

배경을 절묘하게 처리해서 가운데의 주인공들에게 더더욱 포커싱 된데다가 화질도 너무나도 선명한 탓에 그 현장에 있는 것 처럼 보일 정도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린과 내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키스하는 사진이지만.


"어머어머. 되게 잘 찍혔네? 이거 보정한 사람들은 고생 많이 했겠다."

"...기술에 엄청난 집착이 느껴집니다. 그 사람들과 얘기는 안 해봤지만 대단하군요."


로렌티나와 글래디아가 사진을 보고 한 마디씩 하는 동안, 나는 어째선지 액자 속의 아이린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너무나도 큰 죄를 지은 것 같다.

어째서 그런 일을 아무 생각없이 한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와서도 어째서 난 망설이는 걸까.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찾아오고, 문득 고개를 돌려서 셋을 보니, 다들 어째서인지...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글래디아마저도.


"박사...네게도 무슨 사정이 있..."

"...상어."


뭐라고 말하려던 로렌티나를 저지한 글래디아는 나를 예리한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후회하기 전에...마음이 가는대로 하십시오."


다들 가죠, 그렇게 말한 글래디아는 둘을 데리고 우아하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

...마음이 가는대로...

나는 이미 마음이 가는대로 해서 이런 결말을 맺었는데...너무 어렵다.

...오늘은 굉장히 답답한 하루였다.



실험이 끝난 후, 13일차.


차라리 실험때문에 그랬다고 진실을 말해볼까.

...아니, 그래선 안 되겠지.

점점 무언가에 갉아먹히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지만, 진실이 발목을 붙잡고 있다.

...아니 밝히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러는걸까.


진실을 밝히면 그녀에게 미움받을 것이다.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실험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결말은 당연히 비참하겠지.

이것도 내 업보다.


그녀를 조금 더 멀리해야 할 것 같다.

...미안하다 아이린.


한동안 건네 받았던 사진을 보다가 책상 서랍에 밀어넣었다.

...오늘은 집무실에 가지 말아야겠다.



실험이 끝난 후, 14일차.


그런 결심을 한 것이 어제였지만...나와 달리 그녀는 전혀 떨어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당신! 어째서 저를 자꾸 멀리하는 건가요!"


오늘도 얼굴이 빨개진 채 집무실에 들어와서 삐약삐약거리는 아이린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자 그녀는 탕 하고 강하게 책상을 내려치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부담스럽나요! 그럼 말로 해요! 말로!"


...답답하다고요! 그렇게 소리치면서 울기 시작한 아이린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 로렌티나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집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집무실 밖에서 발소리가 멀어져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엎드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날, 아이린과 로렌티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실험이 끝난 15일차.


"...알았어요. 당신도 시간이 필요하겠죠."


당신이 절 찾아올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가는 그녀의 몸은 평소보다도 훨씬 작아보였다.

집무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감도는 집무실에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기계적으로 서류를 하나하나 처리하던 도중, 로렌티나가 말을 걸어왔다.


"박사...오늘 밤에 나랑 이야기 좀 할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붉은 빛으로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밤, 와인 바에 끌려가서 한동안 잔소리를 들었다.

어제도 그렇고 그동안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건 완전 대놓고 꼬신 거 아니냐. 

이건 아무리 봐도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데 왜 모르는 척 하느냐. 

그건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냐. 

설령 동정심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이건 박사가 평생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다.

네 우유부단함은 더 이상 에기르가 용납하지 않겠다. 

그런 내용의 수많은 얘기와 한참 주고 받은 술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할 때, 이야기를 끝낸 로렌티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그동안 박사를 보니, 작은 새와 관련해서 나에게 말 할 수 없는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작은 새에게도 밝히지 못할 무언가가 있겠지."

"...그치만 너희의 관계가 겨우 그정도로 무너질까?"

"아니야, 내가 보기엔 그 아이는 너 없이는 살 수 없어. 너도 사실 그렇잖아?"

"그러니까 그 아이는 기다리겠다고 했지만...그건 옳지 않아."

"쇠뿔도 단김에 뺀다. 육지에는 그런 말이 있다고 하던데...더는 그 아이를 기다리게 하지마."

"저렇게 작은 여자 아이가 이만큼 자존심을 버려가며 너에게 매달리는데, 남자다움을 보여줘야지...마지막 기회를 줄게."


그렇게 로렌티나가 나가고, 어느 순간, 아이린이 내 옆에 앉아있었다.

언제부터 앉아있던 거지...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그녀가 말 없이 잔을 내밀었다.


"한 잔, 주세요."


언제 술에 익숙해진 걸까, 그렇게 멍하게 그녀에게 한 잔을 따라주고, 나도 잔을 비운다.

그렇게 잔이 몇 번 오가고, 조금씩 시야가 흐릿해지던 순간,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역시...제가 싫은가요?"


...당연히 그럴리가 없다.

고개를 젓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방울 떨어지던 눈물이 점점 길게 흘러내렸고, 아이린은 내 무릎 위에 올라오더니 그대로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차마 떨쳐낼 수는 없었다. 이것도 내 업보겠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껴안고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녀가 진정된 뒤에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에 대해서도, 실험에 대해서도 다 설명했지만, 다 안 뒤에도 그녀는 나에게서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데없이 저한테 그랬었군요.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도 전혀 안하더니...하지만...그런건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왜냐고요? 동기가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저를 구원해줬어요. 저는 그런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제게 진실을 밝히는 것이 두려웠다...그렇네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면 밑에 구멍 하나쯤 더 내면 그만이죠. 아니면 단추를 다시 끼워도 되고요."

"이 말을 한 것을 보면 당신도...분명 제게 마음이 있어요. 저는 알 수 있어요."

"무엇보다...그동안 제가 본 당신은 저를 단순히 실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진 않았어요. 저도 여자에요. 모를리가 없죠..."

"...제게 많은 진실을 밝혀줬으니, 이제 단 하나만 더 밝혀주세요. 당신은...저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거짓말은 금지에요."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한다면...이 핸드 캐논으로 저를 쏴버릴거에요."


자신의 자존심과 목숨을 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처연한 웃음을 지으며 핸드 캐논을 꺼내서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댄 아이린에게 더는 거짓말 할 순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그야말로 즉흥적인 실험으로 시작했어."

"하지만 너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된 순간부터, 실험으로 끝낼 수 없게 되었지."

"...그동안 속여와서 미안해. 그리고...그래도 나를 사랑해주는 너를...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는 너를 사랑해, 아이린."



"...그 말을 기다렸어요."






제 마음을 아프게 한 죄는 무겁습니다.

상처받은 제 마음이 당신에게 판결을 내립니다.

무조건 받아들이세요.


핸드 캐논을 떨어뜨리고 울면서 웃던 그녀는 나의 죄를 입에 담고, 판결을 내렸다.

...그 내용은 그야말로 명판결이였다. 

거부할 수 없는 판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그동안의 미안함과 앞으로의 사랑을 담아 그녀와 입술을 길게 겹쳤다.

...두 번째 키스는 쓰면서도, 짠 맛이 났다.

세 번째는 부디 달콤함만 있기를.











"...그래서..."


박사의 집무실, 켈시는 이마를 짚더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집어던지듯이 옆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의 눈 앞에서는 소파에 앉은 채 전혀 켈시에게 신경쓰지 않고 있는 박사와 그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두 팔을 목에 두르고 딱 달라붙어 넓은 이마를 가슴팍에 비비는 아이린이 있었다.

이젠 서로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기까지 시작한, 누가 봐도 꽁냥꽁냥 거리는 커플을 앞에 두고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Mon3tr를 억누른 켈시는 바닥을 몇 번 뒷꿈치로 내려찍고 말했다.


"박사, 그 실험의 결과라는 게 이건가? 결혼이라고? 진심인가? 진짜로? 미쳤나? 그렇게 된 건가?"

"판결의 결과인걸? 그보다, 너 왜 아직도 여기 있냐?"

"실험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시작이 그렇다 해도 어쨌든 저는 소중한 사람과 일생을 함께 할 거에요...그러니까 방해는 미리 거절할게요."

""그러니까 나가(주세요).""


켈시의 황당하다는 목소리에 이어 둘의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듯이 대답하고 여전히 딱 달라붙어서 마음껏 애정 표현을 하는 두 사람을 보던 켈시는 결국 한 마디를 남긴 채 집무실의 문으로 향했다.


"그래, 나도 이젠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망할년놈들아."


그렇게 문을 열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던 켈시는 결혼식과 주례는 로렌티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대체 왜 이런 꼬라지가 된 거지..."


흔한 착각물의 결말이 다 그렇지. 에라이 X발. 그렇게 못 다 한 말을 가슴에 담은 채 켈시는 집무실의 문을 일부러 소리내서 쾅 하고 닫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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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아이린 바이럴 겸 술 먹고 생각나는대로 써봤더니 용량 이만큼 나옴

뭐든 간에 단편 쓰겠다고 생각해도 장편으로 길게 끄는 것 같아서 

이번엔 아예 어디까지 쓸지 정해놓고 썼는데 그래도 길게 나오더라



그리고 난 드리프트 안 좋아함

모름지기 순애물의 엔딩은 해피 엔딩이여야해서 무조건 해피 엔딩으로 쓰겠다고 애초부터 마음 먹었음

근데 얀데레 엔딩은 해피 엔딩일까 아닐까


어쨌든 다음에도 삐약이 순애물이 나올지 안 나올지 나도 모름

백파 독타 작품 완결이 목표인데 언제쯤 될지 모르겠다

하찮은 똥글 읽어주느라 눈이 썩었을텐데 읽어주는 명붕이들에게는 정말 고맙다

피드백 언제든지 환영

아니 꼭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