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익숙한… 아니, '익숙했던' 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난 다시 돌아왔다.

그 때와 똑같이 갑작스럽게, 그 때와는 다르게 그 쪽에서 이 곳으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오른손을 얼굴 위로 들어, 천장에서 나를 비추고 있는 형광등의 빛을 가렸다. 그 뒤에는 손을 여러 번 쥐었다가 피는 행동을 반복했다.

눈과 손, 그리고 머리는 이상 없다. 그리고 때 마침 멀리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필시 성능 좋은 바이크의 엔진소리일터, 이제 귀도 이상 없다는 걸 확인했다.


오뚝이처럼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 봤다. 혹시 지금 시간을 알 수 있는 시계라도 있는지 확인했지만, 이 곳은 정말 익숙한 천장이 보이는 곳이다.


'…집에 시계를 안 달았지.'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라, 집 구조 자체를 까먹은 내 실수다. 그래도 시계를 안 달은 걸 정말 일찍 깨달았으니 아예 모두 망각한 건 아닐지도.


'이게 있는데, 왜 굳이 시계를 달려고 하는지 생각한 적이 있었지.'


나는 내 휴대전화를 꺼내, 지금 내가 있는 장소의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놀랐다. 이미 그 쪽으로 갑자기 이동한 거에서 부터 이미 더 이상 내가 놀랄 건 없겠다고 생각한 옛날의 나를 바보 취급하면서.


'…전혀 흐르지 않았잖아.' 마치 내가 여기로 오니까 그제야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내가 그 쪽으로 가면서도, 이 쪽에서의 시간은 단 하루 조차도 흐르지 않았다.


아주 조그맣게 시간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내가 그 동안 그 쪽에서 겪었던 시련들과 기분 좋으면서도 당혹스런 경험들을 모두 부정하듯이 이 곳에서의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으니까.

머리 속에서는 모두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거늘, 시간적으로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라는 듯이. …이런 걸 '구운몽' 당했다고 하는 걸까.


하지만 이내 내가 해야할 일들을 머릿 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밥 먹자.'


일단 밥을 먹자. 그리고 내일이나 모래라도 좋으니 알바를 구해보자.

아무리 저 쪽에서 팔자 좋게 있었다고 한들, 이 곳에서의 나는 그저 이 나라의 한 청년에 불과하기에 삶을 잇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

저 쪽에서 어느 순간 각오했던게 이렇게 크게 도움이 될 줄 몰랐다.

'나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방심하지 않고 살아가니 벌써 할 일이 머릿 속에서 샘솟으니 말이다.


'…난 정말 인간이 아닌 걸지도.'


아니면 그냥 나라는 인간이 이런 걸지도.


-


사라졌다.


그녀들의 구원자가 사라졌다.

승리한 유일한 세계를 단일 세계로 만들어 버리고, '잔불' 들의 한풀이를 한 그녀들의 구원자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져야 했지만, '의지하는 게 많을 수록, 없을 때의 고생이 심해지는 법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비록 그녀들이 의지하는 대상은 하나 뿐이지만, 그 하나 뿐인 대상에게 의지한 건 너무나도 많았다.


슬프다.


그녀들은 자책했다.

우리들의 기대가 그녀들의 빛과 소금을 너무 부담스럽게 했나, 아니면 우리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나.


허나, 그를 가장 가끼이에서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봐온 로열 네이비의 메이드대 소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맡고 있는 메이드장 '벨파스트' 는 대부분의 소녀들과는 다르게 다른 의미로 슬퍼했다.


그는 그녀에게 항상 말했다. "나는 여기에, 그러니까 이 세계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이방인이지. 그러니까 너도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각오 정도는 해둬."


당시 벨파스트는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머리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말 그대로야. 나는 이 세계에 갑작스럽게 온거니까.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야. 애초에 내가 내 세계에서 이 곳으로 흘러들어온 것 조차, 이미 과학적인 현상을 초월한 무언가라고."


그녀는 그 당시 그의 말을 반 쯤 이해했으나, 그래도 아직 남은 반의 의문을 품은 채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그의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


'…이런 의미셨군요.'


그는 자신의 건강과 그 외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녀들의 세계를 결국 구원해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구한 세계로 부터의 감사함을 받지 못한 채로 사라졌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세상사란 말인가.


그가 말한 게 마음 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에게 너무 정 주지마. 애초에 나는 그런 정을 받을 자격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래도 고맙네."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저를 주인님으로부터 떨어뜨리게 만들려고 하신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주인님은 정말 잘 못 선택하신 겁니다. 저는 이미… 아니, 아직은 거기까지 말하지 말자. 모든 말은 정말 만일 그가 그녀 앞에서 다시 나타날 때, 그 때 말할 것이다.


그런 다짐을 할 때 쯤, 메이드대의 숙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도 급한 듯한 목소리와 그에 걸맞는 강한 노크 소리가 세 번 들렸다.


"벨파스트 메이드장! 거기 있는거 알고 있으니 들어가겠네!"


잠시 후, 어떤 한 인물이 들어왔고, 그 인물은 벨파스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다.


"워스파이트님? 무슨 일이시죠?"


"폐하께서 메이드대들을 전원 소집한다는 명령을 내리셨다. 어쩌면, 다시 한 번 지휘관을 섬길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을 남기셨어. 자네들도 같이 오는게 좋을 게야."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명령이다. 중앵식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학수고대한 명령이다.


"당장 소집하겠습니다."


"소집하고 모두 대동해서 알현실로 오게. 워낙에 중대한 상황이라 각국의 모든 정상들이 다 모였으니, 정말 몸가짐을 신중히 해야할걸세."


"그리하겠습니다."


"난 전했네."


그녀는 폐하의 명령을 전달한 후, 급하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기다려주세요. 주인님.'


이번에는 마음 뿐만 아니라, 몸도 전부 바치겠습니다.

…항상 힐긋 쳐다보시던 제 몸을요.   


그냥 글 한 번 싸질러 봤다.

길게는... 안 쓸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