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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지휘관."


비스마르크가 옅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


지휘관은 그녀가 내민 손을 살포시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비스마르크."

"훗.... 이렇게 다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

"나도."


두 사람은 은은한 미소를 교환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른 연인들이었다면 키스를 할 정도로 정 깊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

그것이 두 사람의 거리였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전용 집무실?"


지휘관의 말에 비스마르크가 되물었다.


"응. 아무래도 집중할 공간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 동안 밀린 일들도 확인해야 하잖아."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에게 철혈을 부탁하고 사라졌었다.

하지만 엇갈린 운명 탓에 현재는 프리드리히가 다른 차원으로 사라졌고, 다시 그녀가 돌아온 상황.

제대로 인수인계를 해줄 사람이 없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비스마르크가 다 해야 할 거다.


'아마도.'


혼자 그 많은 양의 자료를 살펴보려면 자신만의 공간이 필수였다. 그래서 지휘관은 그녀가 원하는 방을 선택하게끔 맡겼다.


"음, 따로 없어도 괜찮아."

"응? 하지만 돌아온 철혈의 수장이잖아. 업무에 혼선이 안 생기려면 아무래도-"

"그 정도는 부하들도 양해해줄 거야. 오히려 당신과 함께 있는 편이 결제 받는 경로를 줄이기 더 용이하겠지."


비스마르크가 살짝 웃었다.

문득, 그녀의 미소가 전보다 더 짙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수장으로서의 대접은 둘째치고, 당신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워."

"뭐....?"

"당신은 나와 함께 일하는 게 싫은가?"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지휘관이 당황하자 그녀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럼 그걸로 충분해."

"...그래, 알았어."


전에 없이 고아진 미소에 지휘관은 저도 모르게 승낙해버렸다.


"그럼, 그렇게 부탁할게. 이만."


비스마르크가 모자를 고쳐쓰며 약식으로 경례하고 떠난다. 지휘관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그녀가 한 발, 한 발 걸어갈 때마다 짧은 치마에 뒤덮인 엉덩이가 출렁거렸다.


"핫..!"


지휘관은 정신을 차렸다. 어느 순간 엉덩이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어.'


미소도 더 은은해지고, 표정도 한결 좋아졌다.

게다가 눈빛과 복장은 뭐랄까....


'좀 야시시해진 것 같기도 하고.'


보는 입장에서는 눈이 즐겁긴 한데....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조금 마음이 걸렸다.


'비스마르크는 메타에 침투당하고 있었지. 그걸 의장을 강화하는 걸로 경유해서 막고 있고.'


메타 침식에 핵심이 되는 큐브의 손상을 보강한 요크타운과는 경우가 달랐다.

비스마르크는 요크타운과는 달리 큐브를 직접 치료하지 못했다. 즉,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일로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걸까?


신경이 쓰였다.


'당분간 지켜봐야겠어.'







"좋은 아침이야, 지휘관."


다음날, 지휘관이 업무실에 들어섰자 비스마르크가 반겼다.

그녀는 창밖을 구경하고 있다가 그를 향해 뒤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햇살이 후광처럼 쬐이는 가운데, 미소와 함께 금발이 화사하게 빛났다.


"아.... 좋은 아침."

"혹시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시선이 느껴지는데."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멋쩍게 말을 돌리는 그를 보며 비스마르크는 곱게 웃었다.


"훗.... 자, 지휘관. 그럼 업무를 시작할까?"

"응. 오늘 하루 잘 부탁해."

"...그래. 함께 힘내자, 지휘관."


두 사람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서로 마주보고 앉는 형태였다.

업무가 시작된 이후, 계속 종이 넘기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와중, 지휘관은 살짝 고개를 들어 비스마르크를 보았다.


'되도록 캐묻긴 싫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지금의 비스마르크는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예전에는 뭐랄까... 음....


'조금 노잼...이었지.... 나쁘게 말하면.'


진지하게 말하면 진지한 성격이었고.

거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여자였다.

자신의 꿈, 건강, 돈, 명예, 사랑, 그리고 즐거움. 그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그러다보니 여유가 없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지휘관.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비스마르크와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지휘관은 깜짝 놀라서 당황했다.


"아, 아니. 아무것도. 미안해."

"훗...."


비스마르크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업무에 집중한다.


"크흠...."


'방금 그 미소는 좀.. 반칙이네.'


지휘관은 괜히 낯이 뜨거워졌다.

그는 비스마르크를 다시 한 번 본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금발 미녀가 보였다.


'다시 보니... 엄청 예뻐졌네.'


살짝 부끄러운 정적 속에서 아침 일과가 끝났다.

지휘관이 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비스마르크는 그런 그를 가만히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점심을 먹을까?"

"좋아. 하지만 점심은 따로 먹는 편이 좋겠어."

"응? 왜?"

"우리가 너무 붙어 다니면 시기를 살 수도 있으니까."


옳은 말이었다. 인원이 많기에, 각자 정해진 시간 동안만 지휘관과의 만남이 허락되니까.

다들 굶주려 있다는 걸 그도 안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것이 옳다.


"어쩌다 보니 당신과 함께 업무를 보는 것이 특별대접이 되어 버렸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기뻐하고 있었다.


"그럼 지휘관, 식사 맛있게 하도록 해."

"응, 비스마르크도."


그녀가 먼저 떠났다. 지휘관도 책상을 정리하고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


'왜 안 오지?'


점심 시간이 끝날 무렵인데도 비스마르크가 오지 않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1분..... 50초... 40초.....


'설마?'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비스마르크는 아직 메타 침식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다면?


덜컹-


지휘관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훙-


검이 허공을 가르자 바람이 일었다.

금발의 여성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빠른 춤사위였다.


'검을 휘두르고 있었구나.'


지휘관은 숨어서 그녀를 지켜본다. 고도로 집중하고 있어서 점심 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는 듯했다.

비스마르크는 금발을 휘날리며 춤을 췄고, 지휘관은 아름다운 그 춤사위를 보며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후..."


연습을 끝낸 비스마르크가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그러면서 말한다.


"숨어서 지켜보는 건 나쁜 버릇이야, 지휘관."

".....알고 있었어?"


지휘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스마르크가 훗, 하고 웃었다.


"이 검이 신경 쓰이는 건가?"

"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휘관이 되물었다.


"당신도 휘둘러 볼래?"

"어, 어...? 아니, 음....."


지휘관은 당황했다.


"검 휘두르는 걸 빤히 보고 있어서 검을 원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그러니까......"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었어?"

"그게 말이지-"


문득, 지휘관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쓰러졌을까 봐 걱정돼서 찾아왔다고 하려니 부끄러웠다.


"...맞아. 검이 궁금했어."

"후후."


비스마르크가 검을 주었다. 지휘관은 관심도 없는 검을 관심 있는 척하며 구경했다.


"....지휘관. 아침부터 계속 시선이 느껴지던데. 혹시 일부러 날 귀찮게 하는 거야?"

"귀, 귀찮게 했어...? 미안. 난 그런..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가 당황해서 횡설수설 변명한다. 그러자 비스마르크가 조금 소리를 내어 웃었다.


"농담이야, 지휘관. 당신도 당황할 때가 있구나."

"하하...."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분명하겠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 그는 굳은 미소를 지었다.


"응, 그렇지...."


그 대답에 그녀가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지휘관.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이 군모를 써 볼래?"

"응? 군모?"

"내가 씌워줄게. 자."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서 모자를 씌워주었다.


"후후, 잘 어울리네."


그녀가 연하게 웃는다. 하지만 지휘관은 침착할 수가 없었다.

모자를 씌워주는 것 치고는 상당히 가까웠다. 가슴과 가슴이 닿을 정도로 말이다.


"저기, 비스마르크. 좀 너무 가까운 것-"


그때, 그녀가 그의 목을 팔로 휘감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분홍색 입술이 닿자 촉촉함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목에 두른 팔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그를 잡아 당겼고, 풍만한 가슴은 탄력 있게 그의 가슴을 압박했다.


".....!"


지휘관은 깜짝 놀라서 얼어붙었다.

키스는 영원처럼 길었다. 그러나 섬광처럼 짧았다.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두 사람의 입 사이에 얇고 긴 실이 축 늘어졌다.


"오늘, 당신을 저녁에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비스마르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두 사람은 여전히 포옹한 채였다.

눈을 마주치치 않은 채, 서로 몸이 닿은 온기만 느끼며 대화가 오갔다.


"...응."

"그럼, 오늘 저녁에."


비스마르크가 떠난다.

설렘을 두고서.


꿀꺽...


지휘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본다.

흔들거리는 엉덩이가 보인다.

그리고...


'아.. 섰다....'







밤이 되었다.

지휘관은 약속대로 비스마르크를 찾아갔다.


"조금만 기다려주겠어? 곧 식사 준비가 끝나."

"아, 응..... 천천히 해."

"후후."


앞치마를 두른 비스마르크가 엉덩이를 보이며 요리를 한다.

지휘관은....


'큰일이네. 또 섰다.'


아까 한 키스와 젖가슴이 닿았을 때의 감촉이 떠올랐다.

지금 그는 업무할 때와는 다른 이유로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돌겠네.... 한 발 빼고 왔어야-'


"자, 지휘관."


비스마르크가 음식을 내놓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여러 요리가 식탁으로 올라온다.


"와인?"

"고마워."


와인을 따라주는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그녀가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가 시작됐다.


"입맛에 맞으면 좋겠는데."

"맛있어.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는 평소 칭찬이 박하지 않은데, 말문이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그나저나 지휘관."

"응?"

"아까 점심 때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혹시 날 찾기 위해 뛰어다녔던 건 아니야?"

"아....."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내가 쓰러진 줄 알았다고?"

"응. 거짓말해서 미안해."

"아니, 괜찮아. 그 정도는."


비스마르크가 빙그레 웃는다. 그녀가 스테이크를 썰어 먹으려다가 포크를 멈칫했다.


"왜 그래?"

"....기뻐서."


잘 보니, 그녀는 웃음을 참느라 고기를 먹지 못하고 있었다.

방긋 웃고 싶은 마음과 냉정해야 한다는 마음이 싸우고 있는 듯했다.


"그래, 날 걱정해준 거구나, 지휘관. 정말로 고마워. 난 괜찮아.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그러니까....."


그녀가 말을 하다가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돌렸다.


"괜찮아?"

"...이 기쁨이 주체가 안 되네. 지휘관이 날 그렇게 생각해줬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아니 뭐, 음...."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어쩐지 멋쩍어졌다.

비스마르크의 새로운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후후후...."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운지, 아까부터 계속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신."

"응?"

"아까 키스했을 때 섰지?"

"어....?"

"알고 있어. 몸이 딱 붙어 있었으니까. 또, 나도 오이겐에게 여러 가지로 그쪽 지식을 들어서 잘 알아. 당신, 내 엉덩이랑 가슴을 빤히 보고 있었지?"


움찔. 지휘관은 동요했다.


"아, 그게....."

"괜찮아. 반쯤은 그러라고 입은 옷이니까."

"어....? 그 말은......"

"후후후."


그녀가 요염한 미소를 흘렸다.


지휘관은 당황했다.

수많은 여자를 상대해봤던 그다.

드센 여자도, 요염한 여자도, 섹스머신 그 자체인 여자도 전부 상대해봤고, 그만큼 여자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를 상대로 이렇게 여유가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난 혼자 여행할 때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어. 때로는 목숨이 위험하기도 했고, 때로는 내 선택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했지."

"......"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이전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주 소중한 것을."

"뭔지 물어봐도 될까?"

"훗..."


비스마르크가 미소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어쩐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비스마르크가 깨달은 건 아마도.....


"지휘관, 이 콘돔을 써볼래?"


나름 진지한 사색에 잠기려고 할 때 그녀가 말했다.

지휘관은 다시 얼이 빠져서 되묻는다.


"네?"

"콘돔 말이야. 당신도 잘 아는 물건이잖아?"


그녀가 아주 얇은 콘돔을 꺼내 흔들었다. 현재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얇은 녀석이었다.


"어, 저, 저기 그 말은...."


당황한 그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한다. 그때 무언가가 그의 자지를 건드렸다.

꼼지락거리는 느낌을 보니 발이었다.


"훗.... 날 원하고 있구나, 지휘관."


비스마르크가 웃었다. 다시 보니, 그녀는 열심히 요리한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식사할 때 요리가 아니라 그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였다니. 정말로 기뻐."

"비스마르크....?"

"지휘관. 나는 변하기로 했어. 물론, 목표는 전과 같아. 하지만 조금 더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이 순간의 내 감정을 소중히 하고 싶어. 이건 그렇게 변하기로 한 내 다짐이자, 나를 원해주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나의 보답이기도 해."


비스마르크가 포크를 내려놓고 식탁 밑으로 사라졌다.


지익-


몇 초 후 그의 지퍼를 내리는 소리와 함께, 팬티 속에서 자지를 꺼내는 느낌이 들었다.

식탁보 아래로, 거대한 자지에 가까이 붙은 비스마르크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콘돔의 포장을 찢고, 그것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내가 씌워줄게."


그제야 지휘관은 깨달았다.

비스마르크는 처음부터 요리가 아니라 그를 먹을 생각이었다는 걸.

요염하게까지 느껴졌던 일렬의 행동들은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의 헐떡임도 거칠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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