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시! 언제까지 자고만 있을꺼야!”

 

“..에?”

 

부스스한 시야 너머로 언젠가 본 거 같은 교복을 입은 분홍머리의 여성분은 아마도 저를 뜻하는 것 같은 애칭을 부르며 제 어깨를 흔들었어요.

 

“자, 자! 일어났으면 얼른 준비하고 나가자! 쉬는 시간 끝나겠어!”

 

따스한 햇볕이 내려 쬐는 적막한 교실에서 그렇게 말하는 분홍머리 여성 (분홍이라고 할게요!)은 부끄러움 같은 건 없다는 듯이 교복을 훌렁 벗더니 자신의 옷 주머니에서 체육복을 꺼내 들곤 갈아입기 시작했어요.

 

“..에에?”

 

꿈..인 걸까요?

 

아직도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고 있는 와중에 옷을 다 갈아입은 분홍이가 다가와서 제 눈 앞에 손을 대고 흔들었어요.

 

“댕시.. 머리 괜찮아? 평소보다 웃는 얼굴이 더 바보 같은데?”

 

“바..바보!? 바보 아니거든요!?”

 

분홍이는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이 ‘이제야 좀 평소의 댕시같네!’라며 씨익- 웃어 보였습니다.

 

“자! 빨리 빨리 갈아입어~ 이러다 늦어서 감점 받았다간 레이 선배처럼 한 학년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구!”

 

‘어? 그러면 내가 댕시 선배가 되는건가?’ 라면서 제 가방으로 추정되는 곳을 뒤적이던 분홍이는 대시라는 제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체육복을 꺼내 들어 저에게 건넸습니다.

 

“설마~ 내가 옷까지 입혀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체육복을 쥐고서는 음흉한 표정을 짓는 분홍이의 모습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저는 뺏듯이 체육복을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에헹~ 댕시~ 이럴 때만 눈치가 좋다니까~”

 

같은 여자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저는 재빨리 교실에서 나와 화장실을 향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 처음 보는 환경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은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달려가 익숙하다는 듯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분명 제가 이런 학교를 다닌 적은 없으니 꿈일 게 분명한데..

 

“대~앵~시~ 언제까지 갈아 입을 꺼야!”

 

“꺄악! 놀랐잖아요!!”

 

갑자기 나타난 분홍이는 뒤에서 제 가슴을 꽉 움켜쥐어서 저도 모르게 있는 힘을 다해 분홍이를 뒤로 밀쳐버렸어요. 밀쳐버리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분홍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엉덩이를 쓰다듬고는 음흉하게 웃을 뿐이었어요.

 

“헤헤 댕시는 뭘 먹고 그렇게 더 키운거야~”

 

“에.. 에에? 저.. 풀만 먹었는데요..”

 

분홍이는 제 말에 뭐가 그렇게 웃긴 지 깔깔 거리면서 제 등을 팡-팡- 소리가 나게 쳤습니다.

 

“댕시도 차암~ 오늘도 어머니가 해 주신 도시락을 그렇게 자랑 해 놓고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분홍이는 여전히 웃으면서 ‘왜 그래~ 갑자기 얼굴 굳히고~’ 라고 말했지만, 저는 전혀 표정을 풀 수 없었어요. 

 

“..저기, 이름이 뭐 예요?”

 

“뭐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나야 나! $@%^&@잖아! 서운하게 왜 그래~”

 

“…”

 

분홍이는 서운하다는 듯이 자기의 이름을 소개했지만 여전히 제 귀에는 #!$%^$@같이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만하셔도 돼요.”

 

일순 분홍이가 웃는 모습 그대로 멈췄어요. 분홍이 뿐 아니라 시끄럽게 울리는 매미 소리도, 밖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소리도, 마치 세상이 그대로 정지한 것처럼..

 

“저는 바보지만.. 그래도 저희 부모님이 단 한 번도 저를 위해서 도시락을 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구요..?”

 

어째서 분홍이 외의 다른 학생들은 하나도 없었는지, 어째서 10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있었는데도 수업 종이 울리지 않았는지, 어째서 분홍이가 제 등을 쳤을 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는지..

 

꿈이란 참 잔혹하네요, 제가 공원에서 풀을 뜯다가 우연히 본 분홍이와 친구들을 보고 잠시 나마 가졌던 헛된 꿈을 이렇게 보여 주다뇨..

 

“..네가 원한다면 계속 있을 수도 있어.”

 

분홍이가 정적을 깨듯이 그렇게 말했어요.

 

아마, 이 꿈의 뒷 내용 역시도 너무나 달콤해서 어쩌면 분홍이의 말처럼 계속 남아있는 것을 더 바랄지도 몰라요. 하지만 꿈이란 건 역시 깨라고 있는 거 잖아요?

 

“정말? 밖으로 나가면 너는 여전히 부모님 빚더미에 앉아 제대로 된 집도 없이, 가족도 없이, 불안전한 생활을 계속할 뿐인데도?”

 

“빚더미에 올랐다고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포기는 언제 해도 상관없지만, 노력은 지금이 아니면 못 할 수도 있으니까요.”

 

분홍이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어요. 마치 ‘이런 바보는 또 없을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행동은 분명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누구라도 행복한 삶과 힘든 삶을 고르라고 할 때 힘든 삶을 고르는 사람은 몇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전 불행하지 않은 걸요? 힘들지라도.. 리타 언니, 호라이즌 대표님,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으니까요!”

 

힘들더라도 불행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세상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어요. 분홍이는 사라져가면서 저에게 속삭였어요. 정확히는 못 들었지만 아마..

 

 

 

‘다음엔 실제로 만나~’같은 내용이 아니었을까요?

 

 

 

******

 

 


 

“대시,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리타 조금은 쉬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무려 3건이나 해결한 대시는 꿀잠을 잘 권리가 있는 겁니다.”

 

“..어디서 또 이상한 단어를 배워 온 거야?”

 

“요즘 닥터 릴이라는 블로그에서 최신 유행어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안주하는 휴먼들과는 달리 저는 언제나 최신 유행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하여간 고철 로봇 주제에 말만 많아 가지고는..

 

“뭡니까 리타,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거 같은데 감봉 펀치 맛 좀 보고 싶은 겁니까?”

 

“너, 그 닥터 릴인지 뭔지 블로그 그만 봐!”

 

‘하여간 휴먼들은 고오급 유머를 따라오지 못 한단 말입니다.’라며 방 구석 충전기로 뽈뽈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이런 곳에 꼬맹이를 계속 두면 정서상으로 안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뭐, 내가 할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으음.. 리타 언..니?”

 

이런 복잡한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태평한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깬 꼬맹이의 모습을 보고 괜히 심술이 난 나는 대시의 볼을 꼬집으며 ‘이제 일어났냐 잠꾸러기?’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흐윽..”

 

“..응?”

 

대시는 볼을 집은 내 손을 잡더니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자, 잠깐 대시.. 왜 그래..?”

 

“흐아아앙!!”

 

이내 대성통곡 하는 대시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충전기를 꼽고 날아온 호라이즌이 하단부에 달고 있던 쇠몽둥이를 내 머리위에 떨구면서 ‘또 대시를 울린 겁니까!?’라며 화를 냈다.

 

“아니!? 내가 언제 울렸다고 또 울렸다고 하는 거야!”

 

나는 억울하다!

 

“대시, 말해 보시죠. 리타가 괴롭혀서 또 우는 거죠?”

 

“아..니.. 그게 아니라.. 아파서요..”

 

“역시 리타 때문이지 않습니까?”

 

“억울하다!!”

 

이 정도로 꼬집으면 고철 덩어리인 너도 안 아플 거라고!

 

“규소 기반 생명체인 저에게 그런 소리를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리타, 학습 능력이 없군요.”

 

“…”

 

아니, 것보다 헛소리 할 시간에 꼬맹이나 달래주지 않고 뭐하는 거야!

 

“리타가 꼬집은 게 아파서 운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달래 줍니까? 리타.. 역시 지금이라도 학교 다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조용히 해!”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는 꼬맹이를 두고 헛소리나 하는 고철덩어리는 무시한 체 대시 옆에 앉았다.

 

“왜 그래 꼬맹이,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그래? 악몽이라도 꾼 거야?”

 

꼬맹이는 내가 등을 쓰다듬어 주자 조금씩 훌쩍임을 멈추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오히려 행복한 꿈이었어요.”

 

“그런데 왜 울어?”

 

대시는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머뭇 거리더니 ‘왜냐면 그 꿈에는 대표님도.. 리타 언니도 없었는걸요.’라고 말했다.

 

“그럼 행복한 꿈 맞네.”

 

나도 저 고철덩어리도 없는 삶이라니, 그야 말로 행복한 꿈이지 않나?

 

“누가 고철이라는 겁니까!”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냐..

 

“그치만..”

 

대시는 여전히 고개를 파묻고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이렇게 리타 언니랑 대표님이랑 있을 때가 가장 기쁜걸요..”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베시시 웃고 있을 거라는 건 왜 인지 너무 뻔하게 예상됐다.

 

깡통도 아마 그 정도 눈치는 있는 것인지 아까 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체 주위를 붕붕 날아다닐 뿐이었다. 대시가 말한 나와 고철덩어리가 있을 때가 가장 기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이렇게 온화한 분위기라면 뭐.. 나쁘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는 않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대시는 꿈에서 학교 생활을 하는 자신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행복했지만, 동시에 나와 호라이즌이 없어서 너무나 슬펐다고.

 

하지만 정말로 나와 깡통이 있는 현실 쪽이 훨씬 행복했다면,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꼬맹이가 무언가를 숨길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분명 마음 속 깊숙하게 남아있는 후회와 아쉬움은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언젠가 생활이 좀 안정이 되면, 꼬맹이를 학교에 보내야겠어.”

 

이건 꼬맹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생각이다. 왜냐면.. 그것이 부모님처럼, 떳떳한 어른이 되는 길이니까.

 

“정말이지, 떳떳하지 못한 어른이네요 리타.”

 

“..시끄러워 깡통로봇!”

 

 

 

******

 

 

 

저에겐,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모듈은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행복하다면서 우는 대시와 그걸 바라보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는 리타의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뭔가 신호가 중간에서 멈추는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생각해보니 엠버도 가끔 제 모듈이 있는 곳에 와, 울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있지 호라이즌, 너무나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다 보면, 문득 눈꺼풀을 덮는 햇볕에 눈물이 나곤 해.’

 

‘그게 무슨 진공관 뒤집어지는 소립니까 엠버.’

 

‘행복한 순간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단지 찰나에 순간에 사라진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슬프게 만들거든.

 

언젠가 네게 울고 싶어 질만큼 행복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너는 그제서야 우리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생명’이 된 걸 거야.’』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리타와 대시는 분명, 그런 감정을 느꼈던거겠죠.

 

“호라이~즌! 뭐해 언니 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재생을 중단하시겠습니까?]

 

“시끄럽습니다 레이첼, 그렇게 크게 말하지 않아도 제 청각 센서는 정상 작동 중입니다.”

 

 

 

헤밍웨이가 말했습니다.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고. 

 

제게 아직 까지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시가 좋아했고, 리타가 투쟁해왔던 이 세상에서, 벽에 부딪혀 울면서도 끝까지 나아가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사라져, 당신들이 흘리지 못한 눈물이 비가 되어 땅을 적셨지만, 남아있는 저에게 그 땅은 더욱 단단해질 테니까요.

 

그러니 당신들의 여정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제게 남긴 마지막 말들이, 그 유지가 저에게 아직 까지 남아있으니까요.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대사가 끝나기 전엔, 막은 내리지 않는다. 라구요.

 

 

 

비가 온 뒤엔, 땅은 굳기 마련이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