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레스 엘 아르카데나

이미 멸망해버린 제국의 마지막 황자의 왼쪽 가슴에는 어떤 날붙이에 찔렸는지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흠...역시 안되는건가."


주위는 온통 시체와 불길뿐

살아있는 인간이라고는 황태자뿐이었다


"전하! 그 상처는!"


더이상 살아있는 사람으로 부르기 어려운 망국의 성녀 루크레시아가 클라레스의 상처를 보고 급하게 뛰어온다


"아 이것 말인가? 늑대와 싸우다가 그만 이빨에 물려버렸도다."


그는 자신의 상처따위는 별거아니라는듯 루크레시아에게 당당히 말했다


"그나저나 이쪽은 이렇게 쫒겨났다만. 아직 그 천민은 싸우고 있겠구나."

"흠..."


클라레스는 비와 피로 얼룩진 자신의 애검 용검 라르고의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벌써 쫒아오다니. 꽤나 급한 상태로 보이는군."


클라레스가 바라보는 곳에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최후의 발키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라. 가서 너의 구원자를 구하거라. 성녀여."


클라레스의 말을 들은 루크레시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클라레스를 쳐다봤다

그는 이미 더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이었다

뚫린 가슴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검을 잡은 손조차 미세한 떨림이 보일정도였다


"흥. 짐은 전부터 발키리와 자웅을 가리고 싶었도다. 그러니 어서 천민에게 가세해서 이 게임을 끝내도록."


이것이 그의 허세임을 알고 있었지만 루크레시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존경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황실에서 뵙겠습니다. 황태자님."


"돌아오면 성녀라는 직함대신 광대라고 불리게 해주마."


루크레시아는 대답대신 지금 싸우고 있는 레이에게 가세하는걸 선택했다



루크레시아가 사라지자,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왕궁은 일순간 고요를 찾았다


하지만 고요는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비켜주지는 않겠지."


발키리가 쥐고있는 칼날에 닿은 빗물이 모조리 증발한다


"물론. 저래보여도 짐의 신하라서 말이지."


클라레스는 자신이 눈앞의 상대에게 단 일합도 제대로 버티지 못할것을 직감했다


상대는 아마도 제한이 완전히 풀린 상태

그에반해 자신은 중상을 입었다


반드시 죽을것이다

하지만 그딴건 이제와서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오도록."



그 말을 신호로 둘은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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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입에서 올라온 피를 뱉자 검은색 피가 바닥에 튀었다



"이거야...원..."


발키리와의 격돌은 깔끔한 패배였다


그 여파로 전신의 뼈가 박살나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대어있는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할만하다고 생각했거늘."


오판이었다


그건 이미 신에 필적한 무언가였다


그런것에 대적하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지어진다


그렇게 벽에 기대어 있자, 발키리가 떠난 방향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발걸음은 불규칙했으며 질질 끄는 소리마저 간간히 들렸다


그리고 귀에 들려온건 의외의 목소리


"폐하...살아계십니까?"


자신이 천하다고 핀잔을 주었던 자칭 성녀 루크레시아였다


"물론. 움직이지는 못한다만."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루크레시이는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대어 말을 걸어왔다


"......패배했습니다."


짧고 간결한 보고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이의 감정은 간단한게 아니었겠지


"싸움의 마지막 순간. 구원자님께서는 제게 살아가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어째서 저같은것에게 살아남으라고 말씀하신건가요."


울분이 터져나와 빰에 흐른다


비와 눈물은 이미 구분을 할 수 없어졌다


"성녀여. 어째서. 라고 했느냐? 그야 간단하지 않겠느냐. 그 천민은 언제나 남을 배려해왔지. 그건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을거다."


클라레스의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그러니 마지막은 자책하지 말고 그가 네게 준 시간을 부담없이 사용하도록. 그게 네가 천민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손끝부터 사라진 감각은 어느새 온몸에 이르렀다


"말이 길었군. 뒤는 부탁하마."





클라레스의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감사합니다."


벽 너머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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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8챕터 보고서 생각나는대로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