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호수는 언제나 잔잔하다.

 

바람이 불어도땅이 흔들려도설령 몸부림치는 무언가가 떨어져 가라앉더라도 호수는 출렁이는 일이 없다그것은 그저 고요히 삼킬 뿐이다목구멍을 벌린 아이처럼아래가 텅 빈 무저갱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수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자리에 가만히 앉아 몇 시간이고 쳐다보다 보면 호수가 이루는 아주 조그만 움직임이 보인다.

 

우리들이 호수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생명체에 가깝다그것도 아주 고등한 정보 생명체호수는 지식에서 태어나 지식을 먹고 지식으로 돌아가는 생명체들이 뭉친 거대한 군집 집단이다.

 

가만히 주시하고 있노라면 호수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움직임이 보인다마치 수만 마리의 애벌레가 뒤엉키듯이끈적하게 몸을 부벼대고 있는 수많은 문자들이.

 

나타나는 문자에는 통일성이 없었다학회는 이를 두고 수만 가지 문자가 전부 다른 언어체계에서 온 것이라 추측했다.

 

타오를 듯한 갈증을 가지고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매달렸지만결국 성과를 보진 못했다오직 학회장만이 그 모습을 보며 미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결국 호수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거의 다 포기하고 몇몇 반골들이 남아 연구를 이어나가는 실정이다그나마도 얼마 가지 못할 것 같지만.

 

세기의 대발견도 좋지만학회에는 널린 게 시대를 초월한 지식이다눈만 돌리면 따 먹을 수 있는 과실이 널린 곳에서 누가 힘들여 씨앗을 키우려고 할까지식을 갈망할수록 더 크게 다가오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교수만큼은 정기적으로 호수를 보러 오곤 했다휴양지에서나 보일 법한 간이침대를 가져와 호수 곁에서 시간을 때우는 모습이휴가를 즐기러 온 중년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교수의 눈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대담한 사람은 없었지만정상인의 범주 내에서였다자타공인 학회 최고의 미치광이 중 하나인 리벳은 예의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교수는 머릿속으로 며칠 전 그녀가 던진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있으니까 꼭 노땅 같아 보여.’

 

노땅이라시간이 벌써 그리 흐른 건가.

 

교수가 학회에 처음 들어왔을 땐 아직 파릇한 청년이었다허리는 굽지 않고두 다리엔 힘이 있었다거기에 타고난 재능까지 있어 학회의 유명 인사가 되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게 만만해 보였었지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지식들이 교수의 머릿속에 있었으니교수는 말 한마디로 나라를 살 수 있는 거부(巨富)였다.

 

학부장이 되는 건 반쯤 당연한 순리였고결국 그리되었다

 

그리고 학부장이 된 날 그녀를 만났다.

 

“......”

 

상념에서 깨어난 교수가 고개를 들어 호수를 쳐다봤다오늘도 여전히 호수는 고요했다.

 

이만큼 안면을 익혔으면 이제 인사 정도는 해 줄 법 하지 않나교수는 그리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호수를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함이다.

 

집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세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처음 했을 땐 반나절을 내리 집중해야 겨우 볼 수 있었지만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은 몇 분으로도 충분했다.

 

어느 정도 눈에 힘을 풀자 호수 전체가 꾸물거리며 움직였다마치 여름철 죽은 고양이의 시체에서 구더기가 꿈틀거리듯이실제로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었다.

 

...준 비 하.....

 

어디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교수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식의 성찬을 준비하라더 많은 지식을더 많은 진리를비로소 열리는 문에 바칠 제물을

 

호수의 목소리였다호수는 이렇게 가끔 외부로 자신의 의지를 전하곤 했다.

 

호수와 직접적인 교류를 하기 위해선 학회장의 권한이 필요하다정확히는당대 학회장의 목소리만이 호수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죠멸망으로부터 이어지는 진리가 뭘 뜻하는 겁니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정답을 찾아야 한다멸망으로부터 이어지는 진리를.

 

당연하게도 호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똑같은 문장을 되풀이하는 호수를 보며 교수가 입술을 할짝댔다.

 

갈증이 심했다목이 마른 듯한 느낌이 들어자꾸만 침을 삼켰다.

 

지식을 완성하라폭발하는 별무리에서 오롯이 존재하는 분이 찬미를 딛고 오리니.

 

달조차 없는 밤에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꼭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한다먹물처럼 짙은 바닷속에서사악한 무언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마치 그 누군가가 바닷속을 쳐다보듯이.

 

교수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천천히 호수 근처로 다가가자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검게 물든 호수의 수면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가 교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찬미하라찬양하라찬송하라별그늘에서 태어날 그분께 마땅한 경배를 바쳐라.

 

사악한 향기가 났다동시에 뇌를 잠식하는 페로몬이었다교수는 술에 취한 기분으로 계속해서 걸었다식충식물의 아가리에 빠진 듯한 기분에 작게 몸이 떨렸다.

 

마침내 호수 가까이 도착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본능이 위험하다고 외치는 것일까.

 

하지만 이제 와선 되돌아가는 것도눈을 돌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교수가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성찬을 준비하라수확의 계절은 탐식자의 안에서 무르익는다피 흘리는 목소리가 오래된 성서를 완성하리라.

 

온갖 지식의 보고가 눈앞에 있었다한낱 인간이 측량하지 못할 정보가 눈앞에 있었다인류가 수백만 년의 진화 끝에 도달할 진리가 눈앞에 있었다.

 

마침내 손 안에 들어올 지식에 환희하며 움켜쥐려는 순간,

 

교수님뭐하고 계신 건가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교수가 정신을 차렸다

 

뻗은 손은 호수까지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을 남겨두고 있었다.

 

“...추태를 보였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교수가 태연하게 옷을 툭툭 털었다학회장에델 마이트너는 훈계하듯이 말했다.

 

또 혼자 오신 모양이네요여긴 말 안 듣는 저희들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호기심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늙은이의 주책이라고 이해해 주시길.”

조심해 주세요저희들과 하나가 되는 것도 좋지만교수님께서 해줘야 하는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학회장님.”

 

교수는 대답을 하며 에델의 표정을 보려 애썼다그러나 짙은 안개 때문에 희미한 실루엣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교수는 그 사실에 자그마한 분노까지 느꼈다물론 그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그는 포커페이스의 달인이었다.

 

너무 오래 있진 마세요저희들이 언제 또 장난을 칠지 모르니.”

 

에델은 짧은 당부를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졌다그녀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노려보던 교수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길고 긴 침묵이 흐른 뒤에교수가 어깨를 들썩였다그러다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광소했다.

 

당연히 미친 건 아니다교수는 진정 즐거워서 미친 듯이 웃었다.

 

 

교수가 학부장이 된 날 다가온 여자가 있었다자신을 에델 마이트너라고 소개한 그녀는 그날 밤 교수와 단둘이 밀회를 가지기를 원했다.

 

밀회라고 해서 천박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학회의 교양 있는 자들은 육체적인 쾌락에 연연하지 않는다하지만 그녀가 학부장의 권력 때문에 접근했다고 생각한 교수는 그 초대를 거부했다.

 

담백한 거절에도 그녀는 웃었다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보듯이.

 

그리고 교수는 보았다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진짜 악마.

 

전율에 굳어버린 교수를 보며 악마가 속삭였다

 

-호수에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날 이후 교수는 매일같이 호수를 찾았다그리고 미친 듯이 호수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학회원의 은밀한 일기부터낡은 창고에서 썩어가던 자료들까지.

 

훌륭한 연구자의 모습에 다들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교수는 연구를 목적으로 자료를 수집한 게 아니었다.

 

그는 깨달았을 뿐이다자신이 얼마나 지식을 쌓든 간에저 괴물이 있는 한 학회장의 자리는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학회장의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학부장은 볼 수 없는오직 학회장만 열람 가능한 지식이 있었기에.

 

그런 이유로교수는 오래전부터 학회를 배신하는 상상을 해 왔다

 

에델 마이트너는 학회의 꼭대기에 서서 수많은 지식들을 속삭여 주지만거꾸로 말하면 그녀 아래의 존재들은 그녀가 허락한 정보만 알 수 있다는 게 된다.

 

그리고 교수는 에델이 적선하듯이 던져 주는 지식 따위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 왔다레지나와 같은 대학의 교수로 들어가 그녀를 자신의 행동 범위 안에 두었고학회 몰래 세상에 숨겨진 지식의 파편들을 수집했다.

 

그 모든 일의 목적은 단 하나뿐이다에델 마이트너를 끌어내리고 그녀의 지식을 전부 취하는 것.

 

그리고 교수의 계획은 이미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교수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호수가 일렁이더니 가느다란 촉수 한 줄기를 뽑아냈다둘은 서로 가까워지더니마침내 그 끝이 맞닿았다.

 

손톱 아래를 간질이는 감각에 교수의 얼굴에도 희열이 떠올랐다.

 

에델 마이트너는 호수를 말 안 듣는 저희들이라고 칭했다그렇단 말은에델 마이트너로 총칭되는 그 수많은 인격들이 군체 의식으로 묶여있는 건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면그녀 몰래 호수와 교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요 며칠 사이 계속해서 호수에 머무른 건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성공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도박이었으나결국은 성공했다넘치는 희열에 몸을 파르르 떨며 교수가 생각을 이어나갔다.

 

학회장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모른다면방금 호수엔 어찌 알고 찾아온 것일까알고 있다면어째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일까.

 

언젠가 상상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오면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예상했다며 싸늘한 냉소를 지을까당황으로 그 고운 얼굴을 물들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설령 그 대가가 목숨이라고 해도새로운 지식미지에 대한 탐구야말로 그의 삶을 달구는 연료였으니.

 

상상만으로 등골이 떨려온다언젠가 현실이 될 그날을 상상하며교수는 소리 죽여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