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 https://arca.live/b/counterside/69068593
드디어 첫 데이트네요.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래걸렸는지, 기대만큼 로맨틱한 제안은 아니었지만 뭐, 이 정도쯤은 봐주도록 할까요.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런데, 이 남자 너무 급발진 한 건 아닌가 싶네요.
아마 예정도 계획도 없었겠죠.
계속 걷고만 있는데, 데이트 플랜 급조로 머릿속이 복잡한 건지
제가 품위도 없이 이렇게나 손을 휘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손 잡아줄 생각조차 않는 걸 보니 조금 화가 나는 것 같기도.
..첫 데이트를 망치고 싶진 않으니 참기로 하죠.
“여기, 평이 좋던데 여기서 먹을까?“
꽤나 유명한 파인 다이닝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농어를 시그니쳐로 하는 걸 알고 고른건진 모르겠지만, 제법이에요.
다만..
“손님, 예약하셨습니까?“
”예,예약?“
..매달 1일 열리는 예약이 필수인 식당이라 예약이 안 됐으면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겠죠.
”하하.. 다른 데로 갈까?“
”좋아요.“
“..어쩐 일로 불평 한 마디 없냐, 무섭게.”
“실례네요. 저는 늘 자기 감정조절을 잘 하는 레이디랍니다.”
”아.. 그러셔요...“
그냥 같이 걷기만 해도 표정관리가 힘들 정도로 기분이 좋지만
굳이 티낼 필요는 없겠죠. 기고만장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물벼룩 주제에.
물벼룩 주제에.
데이트에 여자친구 손도 안 잡아주는 물벼룩 주제에.
한참을 걸은 뒤 다시 도착한 식당도 역시 농어를 취급하는 해산물 레스토랑인걸 보면, 제 취향을 고려해서 식당을 찾고 있는 것 같군요.
제법 기특한데 칭찬이라도 해둘까요, 아니, 아무래도 버릇이 나빠지면 곤란하니 그건 보류해야겠어요.
“로이.”
“...응? 뭐야, 이름으로 불러서 긴가민가 했네. 왜?”
“유명 레스토랑들은 예약이 필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렇게 걷기만 하는 것도 좋지만, 레스토랑만 찾아다니다간 아무데도 못 들어갈걸요.“
”켁, 그런 거였나? 난 또 내 차림새때문에 퇴짜맞는 줄 알았지.“
차림새가 뭐 어때서요.
조금 풀어 헤친 셔츠도, 슬림한 수트 핏도 봐줄 만 한데.
“에휴, 그럼 어쩌지? 아가씨 입맛에 맞을 만 한 식당을 모르는데..”
“당신이 평소에 먹는 음식이 궁금해요.“
”에엥? 나는 그닥 고급스럽게 안 먹는데...“
”괜찮아요, 저는 민트초코만 아니면 다 잘먹으니까.“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네요.
도대체 평소에 뭘 먹고 다니길래 저러는 건지?
덕분에 더 궁금해졌어요.
“뭐, 입맛에 맞는 요리 없다고 투정하지 마라.”
“제가 뭐 어린앤가요. 에스코트부탁드려요.”
번화가를 벗어나 처음 가보는 골목으로 들어섰지만, 로이는 여전히 손 잡을 생각을 안 하네요. 제가 덥썩 잡아버려도 괜찮은 걸까요.
하아, 리드하는 것보단 리드 당하는게 취향인데, 이 미련한 물벼룩. 여자친구의 음식 취향공부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좀 알아뒀으면좋겠어요.
“다 왔어. 여기가 내가 주로 다니는..”
“펍이네요. 술꾼이신 줄은 몰랐는데.”
“아, 술은 자주 안 마셔! 그냥 어릴때부터 단골이기도 하고, 음식도 나쁘지 않거든 여기.”
어릴때부터라면 버넷경의 손에 이끌려 왔을 수도 있으니, 버넷경도 이 펍의 단골이었을 수 있겠군요.
다 쓰러져가는 것 같긴 하지만.
“..역시 좀 그렇지? 지금이라도 딴 데 갈래?”
“아뇨. 여기서 먹고 싶어요.”
“고집은..”
머리를 긁적이며 로이가 문을 열어주었고, 넓지 않은 실내 좌석에 띄엄띄엄 앉은 손님들은 각각 커다란 맥주잔을 손에 쥐고 있네요.
이 분위기, 낯설지만 왠지 싫지만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 뭐야? 로이 아니냐? 왠 여자를..”
“시끄러, 주인장! 괜한 데 관심 갖지 말고..”
“아가씨, 혹시 이 놈팽이한테 협박같은 걸 당하고 있다면 왼손을 흔들어 주쇼. 내가 도와줄테니.”
재밌는 분이네요.
“웃기지마! 이 사람은 그러니까... 저..“
“안녕하세요, 엘리자베스라고 합니다. 이 놈팽이의 여자친구에요. 잘부탁드려요.”
대체 왜 여자친구라고 당당히 말 못하는 건가요?
제가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요?
"오, 말도 안 돼.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어쩌다..”
“로이, 당신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길래 이런 이미지인가요?“
”난 늘 똑같이 살거든? 너한테 하는거랑 다를 바 없어.“
”...그렇다면 조금 납득이 되네요.“
납득이 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에요.
길길이 날뛰는 로이를 보니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
아마 주인장도 저랑 같은 생각인거겠죠.
”젠장, 난 어딜가도 이런 대접을 받는구만. 그래, 뭐 먹을래?“
”추천해주세요.“
“후회 안 하지? 내가 먹는 걸로 시킨다?”
스카치 에그, 피쉬 앤 칩스와 패스티, 그리고 맥주 한 잔.
“왜 맥주는 한 잔인가요?”
“너도 마실거야?”
“제 입은 입으로 안 보이나 보죠?”
그래서 입맞춤은 시도조차 안 하는건가요.
“그런건 아닌데 넌 왠지 홍차만 마실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단 말이지.”
“실례네요. 저도 술은 좀 마실 줄 알아요.”
”아가씨, 이 놈팽이가 무슨 속셈인 줄 알고 같이 술을 마셔?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이 아저씨, 재밌는 분인 줄은 몰라도 눈치가 없는 분이셨네요.
제가 지금 노리고 있는 게 바로 그건데 말이죠.
”진짜 술 마실거야?“
”왜요, 술 마시는 여자는 싫은가요?“
”윽,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왜 얼굴은 빨개지고 그러시나요. 자기가 무슨 수줍음타는 소녀인줄
아나.
..나름 귀여운 맛이 있단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전 당신이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저를 공략해줬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좋다 이거야. 건배하자고, 홍차폭탄.”
“건배사는?”
“..어.. 너무 예쁜 내 여친을 위해 건배?“
..치사해요.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면, 그리고 그런 대사를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하면,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잖아요.
맥주란거, 생각보다 훨씬 목구멍이 따끔거리네요,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는다는 건지, 로이는 이보다 시원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인데 나만 이거 맛 없게 느껴지는건가요?
뭐 됐어요.
어차피 제 주된 목적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적당히 홀짝거리다가..
”어, 어? 홍차폭탄! 맥주 한 잔도 다 못비우고 쓰러지면 어떻게해?“
”으음..“
귀족 레이디로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썩 내키진 않지만,
저는 목적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진취적인 여성이니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면 남자가 욕정하기 더
쉽다고 들었어요.
“아이 씨, 이렇게 술에 약한 줄 몰랐는데. 아저씨, 여기 계산 좀.”
“뭐야, 약이라도 탔냐? 맥주 한 잔에 이렇게 떡이 될 수 있는거야?”
“내가 그렇게 무뢰한으로 보여? 이래봬도 나 좀 진지해. 소중히..
아껴주고 싶고, 신중하고 싶다고.“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요.
오히려 거칠게 덮쳐주면 좋겠는데요.
”쯧쯔.. 아주 신사 납셨구만.“
”일단 업어야 겠다. 읏샤!“
로이의 등이 이렇게 넓은 줄 미처 몰랐는걸요. 예상외로 안락해요.
..저, 무겁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얌마, 서비스다.“
”뭔데? 사탕이라도 넣었어?“
”사탕은.. 이따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거다. 조심히 가라.”
술이란 건 좋은거네요.
취한 척하고 이렇게 남자친구 등에 업힐 수도 있고.
아마 제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오늘도 별 일 없이 데이트가 끝났을거에요.
로이는 그런 남자니까.
“야, 엘리자베스. 여기가 기관이랑 좀 먼데, 일단 내 집으로 가도 되겠냐?”
“우웅.. 네..”
“취한 거 맞아? 대답이 너무 바로 나오는데..”
시끄럽네요, 이 의심암귀.
얼른 당신 침대에 눕히란 말이에요!
“그.. 우리 오늘 뭐 별거 안 했잖아? 그래도 나 좀 즐거웠다. 너도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더라.”
이 타이밍에 그런 간지러운 멘트하긴가요, 정말. 치사해요.
하지만 로이, 이거 알아요?
오늘은 아직 안 끝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