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모음


*간략히 썼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할 수 있다*



1. 유럽의 상황

스웨덴 제국은 핀란드 만을 중심으로 카렐리야, 잉그리아, 에스토니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발트해 제국을 만들어 나갔고 30년 전쟁을 통해 비스마르, 베르덴 등

독일에서도 땅을 얻어 북유럽에서 강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1697년

스웨덴의 칼 12세는 젊은 나이인 15살로 칼 11세의 뒤를 물려받았다


칼 12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우습게 보지 말라고

군사력을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 차르국은 동란 시대에 걸쳐 여러 외국의 개입을 받고 있었고

그중 스웨덴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웨덴은 스톨보보 조약으로 러시아가 발트해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진입로인 잉그리아를 점령해 발트해의 접근을 차단했다

표트르 1세는 군주에 오르자

국가 개혁을 시도하여 러시아 차르국을 무역과

강력한 육군, 해군에 의존하는 군대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재위 기간 동안 영토를 넓혔고

특히 발트해의 입지를 다시 잡으려고 했고 스웨덴과의 마찰은 불가피했다

유럽에는 러시아 말고 반스웨덴파가 여러 존재했는데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4세는 크리스티안 5세의 뒤를 이어

반스웨덴 정책을 계속했고 스웨덴에 뺏긴 옛 영토를 되찾으려고 했다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인 아우구스트 2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절대군주제로 만들려는 목표가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는 발트해의 진입을 목표로 

덴마크는 2차 북방전쟁에 잃은 영토를 되찾으려는 목표로

작센은 리보니아를 되찾으려는 목표로 셋이 함께 모여

프레오브라첸스코 조약을 맺어 북방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1700년 2월 22일


북방동맹이 선제공격을 시작하면서 대북방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리가 공성전)



2. 스웨덴의 파죽지세

북방동맹은 사방팔방으로 스웨덴을 공격했다

칼 12세는 처음에는 덴마크를 먼저 제압하기로 하였고

스웨덴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코펜하겐 근처에 군대를 배치했고

7월 20일부터 7월 26일까지 코펜하겐 포격을 시행한다

기습에 사로잡혀 공격에만 집중해 수도를 방어할 수 없었고

이 틈을 노려 칼 12세는 훔베르크에 상륙했고

결국 스웨덴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트라벤달 조약)

적수가 한 명 줄어들었고 칼 12세는 곧이어 러시아로 향하면서

미리 보내던 군대와 합류하게 된다


11월, 나르바에서 전투가 일어나게 되는데


스웨덴은 러시아군과 병력이 3배나 차이가 났지만

제대로 훈련받았고 날씨를 잘 활용했지만, 러시아는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장교들도 군사 훈련이 없는 젊은 귀족들로 채워진 탓에

스웨덴은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약 30,000 러시아 병사에서

18,000명의 피해와 참전한 장교 5명 중 4명을 포로로 만드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나르바 전투)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칼 12세는 계속 러시아를 추적하기보다 

또 다른 적인 아우구스트 2세 즉, 작센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치기로 하고

군대를 돌려 남진하게 된다


이에 따라 표트르 1세는 군대를 재편성할 시간을 갖게 되었고

니콜라이 비들루를 초대하여 군 병원을 조직하는 등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3. 폴란드와 작센

 

칼 12세가 아우구스트 2세를 맹렬히 추격하고

전투를 이루게 된 곳은 다우가바 강이었다


작센이 강을 이용하여 방어하고 있기에 쉽게 뚫을 수 없을 것 같았으나

밤새도록 진행된 포격, 강을 건넌 스웨덴군을 무너뜨릴 두 번의 공격을 

모두 실패해 패배하게 된다

1702년 7월 19일


이번에도 병력 차이가 2배나 가까이 났고

심지어 포는 4문 밖에 없었는데 칼 12세의 전술 덕분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클리슈프 전투)

칼 12세의 승리는 멈출 줄 몰랐다


이번에는 풀투스크에서 전투가 일어났는데

스웨덴의 사망자 수는 20명이지만, 작센은 500명과 사망자와

800명이 포로가 되는 승리를 보여줬다

(풀투스크 전투)

아우구스트 2세가 계속 저항을 하던 와중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클리슈프 전투로 피폐해졌고 스웨덴의 약탈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협상의 요청이

들어왔고 칼 12세는 평화의 조건으로 아우구스트 2세의 폐위

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선출을 꼽았다


그렇게 170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국왕이 되었고 폴란드에선 아우구스트파와 레슈친스키파로 나누어져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폴란드 내전)

아우구수트 2세는 포기하지 않고 작센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프라우슈타트 전투에서 크게 좌절되고 만다


러시아와 작센 vs 스웨덴의 대치 상황이었는데

스웨덴은 병력 차이는 기본인데다가 이번에는 포가 없었다


전투 당시 스웨덴의 장교는 칼 구스타브 렌스쾰드였는데

이러한 악조건을 이겨내고 기병대로 양쪽에 있는

작센군을 몰아냄과 동시에 양측으로 둘려쌓인 포위망이 만들어졌다

화려한 포위전술 덕분에 러시아와 작센은 20,000명의 병력 중

약 15,000명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밖에도 이 작전은 완벽한 협공 전술 중 하나였으며 교과서적인 예이자 

작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하게 된다

칼 12세는 작센으로 향했고 여러 번의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승리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스웨덴과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조약의 내용은 아우구스트 2세는 폴란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러시아와의 동맹관계 포기가 있었고 이 조약은 체결되게 된다

(알트란슈테드 조약)


그 후 폴란드 내전에서 승리한 레슈친스키파는

스웨덴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4. 다시 러시아 지역으로

나르바 전투는 표트르 1세한테 큰 좌절은 안겼지만

칼 12세가 남진하면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발트해 부근을

되찾을 기회를 제공했다


1702년 1월 9일

스웨덴 동부 리보니아에서 다시 한번 양쪽 군대의

전투가 일어나게 되고 이번에는 러시아가 승리하게 된다

(에라스트페르 전투)


이는 대북방전쟁에서 러시아가 처음으로 거둔 중요한 승리였으며

모스크바에선 대규모 승리 행사가 열렸다

같은 해 10월

대북방전쟁에서 첫 번째 공성전이 일어났고

13시간 동안 진행된 러시아의 포격 이후 스웨덴 사령관은

명예로운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한다

(그 외에도 러시아가 자꾸 터널을 만들려는 시도가 잦았다)


표트르 1세는 요새에 가해진 피해를 복구하면서

옛 스웨덴이 지은 이름을 버리고 실리셸부루크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두 전투 덕에 러시아는 다시 잉그리아로 진출할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표트르 1세가 니엔 요새를 점령하면서

역시 스웨덴식 이름을 버리고 당시 선진화된 곳이 독일어권이라서

도시의 이름이 독일어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결정한다


1703년

표트르는 러시아 차르국의 새 수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설하기로 한다


표르트는 모스크바를 싫어했는데

1. 다른 유럽 국가와 거리가 멀어 고립된 것 같다

2. 해안 문제에도 관심이 갔었고 아르칸젤스크를 대처할 새 항구가 필요해서

이 2가지 이유로 표트르는 모스크바를 싫어했다

하지만 여기서 쉽게 무너질 스웨덴은 아니었다


리가 남쪽 근처에서 전투가 일어났는데

혼란스러운 난전 끝에서 스웨덴이 승리하였다

(게마우에르토프 전투)


다만, 러시아에서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고

그냥 말로만 지나가는 듯한 그다지 아프지 않았던 패배로 취급된다

그 뒤로도 아담 루드윅 레벤하우프트가 지휘하는

야콥슈타트 전투에서 이기게 되어 러시아의 진격을 잠시 동안 막아냈고

좋은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표트르 1세가 더더욱 현대식 군대를 

마련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폴란드와 작센을 끝내고 온 칼 12세는 러시아로 진격하기로 한다

그전에 표트르 1세가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네바 강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칼 12세는 거절하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한다

1708년 7월

러시아 군대와 당시 26세였던 칼 12세가 만나게 된다


스웨덴은 늪지라는 공격에 다소 불리한 지형과 러시아의 강력한 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을 기습하고 격파한다

(홀로크진 전투)


러시아군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전반적인 지휘권이 없었던 탓에

행동을 조정할 수 없어 교전할 수가 없었다

10월 9일

8시간의 전투 끝에도 결과가 나지 않고

양 군대가 버텄으나 러시아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

스웨덴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러시아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마차와 대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많은 스웨덴군은

보급품이 들어있던 마차가 불태워졌기에 남은 건 술뿐이었고

대부분이 술에 취하면서 수천 명이 숲에서 길을 잃어서

러시아의 승리로 전투는 끝났다

(레스나야 전투)





그래도 그 뒤로도 스웨덴이 승리한 전투가 여럿 있고

그 어떤 위기가 다가와도 스웨덴이 이길것 처럼 보였다.....





5. 대한파

1708~1709년 비정상적인 추위가 닥쳐왔다

이 한파는 추위도 추위이지만 기간이 엄청 길었다


베네치아의 석호가 얼어붙을 정도였으며

10월부터 찾아온 한파 때문에 기상변화로 기근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스웨덴은 이 한파로 인해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약 2,000명 이상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표트르 1세의 초토화 정책 때문에 더욱 머리가 골치 아팠다


러시아는 추위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기에 악천후에 대비하고

조심스럽게 진영 근처에 머물렀지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

슬슬 스웨덴의 군량이 떨어지자 칼 12세는 폴타바를 공격하기로 했다


초기에는 스웨덴이 우세였으나

훈련된 러시아군의 활약과 표트르 1세의 방어전술

그리고 반격을 가해 스웨덴의 측면을 공격했고 얼마 가지 못해

스웨덴은 30,000명 중 6,900 ~ 9,234명의 사망자, 약 3,000 명이 포로가 된다

(폴타바 전투)

스웨덴 역사상 가장 큰 군사적 재앙이었고 이 전투는 반스웨덴 연합의

터닝포인트가 됨과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 악화된 스웨덴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참담한 패배는 전쟁의 승리자를 결정냈지만 끝을 내진 못했다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고 남은 군대는 페레볼로크나에서 항복한다

스웨덴의 상황은 전투의 패배 말고 더 있었다

보리스 쿠시킨의 노력 덕분에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왕이 되었고

쏜 조약으로 표트르와 아우구스트의 동맹관계를 맺었고

드레스덴 조약으로 덴마크와 아우구스트, 코펜하겐 조약으로 덴마크는

러시아하고도 동맹 즉 다시 한번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연합이 부활했다


그 후로도 하노버 조약으로 영국-하노버가, 슈베트 조약으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거의 스웨덴파는 유럽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6. 전쟁의 후반기

칼 12세가 오스만으로 가자 러시아와 오스만 간의 군사 충돌이 일어났다

(1710~1711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한때 유럽을 공포로 몰아놓던 오스만이라 그런지 러시아는 큰 피해를 보았고 표트르가 죽을 뻔했다


결국 러시아는 프르투 조약 아드리아노플 조약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칼 12세는 오스만 전선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14일 만에 스웨덴으로 돌아간다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부서진 스웨덴군은 이길 가능성이 작았고 전에 실패했던 요새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비보르 공성전)


그대로 스웨덴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갑작스러운 흑사병에 발발에 양쪽 군대는 피해를 심각하게 입었으며

특히 스웨덴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는데 스톡홀롬 인구 55,000명 중

22,000명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전염병 발발 이후 표트르 1세는

황폐화하고 열약한 도로가 있는 핀란드 지역에 빨리 보급을 전달하기 위해

해안 근처 위주로 공격하기로 명령했다


1713년 5월

러시아는 헬싱키에 있는 스웨덴과 대처하게 되었고

이미 나약해진 스웨덴을 상대로 기병 없이 승리를 이루어냈다

(헬싱키 전투)

시간이 점점 지나자 스웨덴군은 오합지졸이 되었다


펠케네 전투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포위 엔딩 날까 봐 서부를 지키고 있던 군대가 갑자기 철수하고

나머지 군사들이 열심히 싸웠으나 한 쪽이 이미 무너진거와 다름없기에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철수한다


철수한 군대는 나푸에에서 만났고

치열한 전투 끝에 러시아가 승리하게 된다

(나푸에 전투)

그렇게 나푸에 전투의 승리로 러시아는 핀란드 대부분 지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핀란드인은 러시아의 통치를 반대하며 파르티잔 전술로 대항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는 아주 많은 군세와 학살을 시행했다

(대격노)


약탈과 강간은 만연했고 5,000~10,000명이 노예가 되었다가 돌아왔고

대격노 시간 동안 총 사상자는 20,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1714년 9월 29일, 카자크는 하룻밤 사이에 800명을 도끼로 학살했으며

또한 페스트 때문에 더 많은 인명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 후 1721년 평화 이후 인구나 경제가 복구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스웨덴은 해전을 이용하여 상륙할 생각을 하였으나

표트르가 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만든 이유를 몰랐던

스웨덴은 압도적인 군사 차이로 패배하게 된다

(강구트 전투)


스웨덴에 엄청난 피해는 아니지만

강, 바다를 이용하려면 러시아의 70척이나 되는 갤리선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스웨덴은 마지막 기운까지 모으면서 전투를 방어했다

상대 국가들도 스웨덴의 용기를 인정할 정도였으나

전략적으로 별 효과가 없었고 압도적인 물량 차이 때문에 뒤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칼 12세는 오스만에서 돌아오고 1716년 2월부터

덴마크와 별도의 조약을 맺기 위해 노르웨이 전역을 진격한다


하지만 프레드릭스텐 공성전 중 칼 12세는 총에 맞아

사망했고 스웨덴은 포격을 중단한다

그 후 스웨덴은 철수하기로 했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강렬한 눈보라가 몰아쳤고 매서운 추위로 첫날 밤에만 200명이 사망했다


많은 말이 죽었으며 5,800명 중 약 3,000명 산에서 동사하였고

군사 숙소로  이동하는 데에도 700명이 사망하였다

남은 2,100명도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왕이 죽어서 무력감은 물론 600명이 불구상태가 되었다

(카롤러너 죽음의 행군)

스웨덴은 왕이 죽은 거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 전투해야만 했다


1720년

덴마크와의 프레데릭스브로 조약으로 비스마르 지역을 대항함과

덴마크는 스웨덴과 싸우지 않기로 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병력을 러시아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1720년 8월 7일

마지막 해전이 일어났지만, 서로 자기가 이겼다고 주장하고

(그랭감 전투)


그 후 몇 번의 소규모 전투와 1721년

다시 한 번 스웨덴을 습격해 전쟁이 끝나게 된다



7. 끝

여러 국가와 전쟁을 일으키던 탓에 조약을 2번 맺었다


먼저 하노버, 프로이센이 참여한 스톡홀롬 조약으로

스웨덴 독일 북부 지역을 당사국끼리 분할하는 조약이었다


그 다음은 러시아와 맺은 뉘스타드 조약으로

핀란드를 돌려받는 대신에 잉그리아, 카렐리야 등 발트해 지역을 매각해야 했다

 

대북방전쟁으로 스웨덴은 유럽의 강대국의 지위와 동쪽으로

확장도 종식되었으며 자유시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뒤 불만을 품은 스웨덴이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켜 땅을 찾으려고 했으나

영토 변경에는 큰 변화가 없게 되었다


반면, 러시아는 북유럽에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발트해 해안까지 얻으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함과

1721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 나중엔 영국과 겨루게 되는 국가가 되었다








내가 맘에 안든거 대북방전쟁 말고도 더 있는게 그건 나중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