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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창 밖을 보았다.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


바깥은 아직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는 건 여러 번 봤지만 이렇게나 이런 폭우는 또 처음 보는 오메가는 아마 그녀 스스로가 봤던 비 중 지금이 가장 많이 내릴 때라 생각했다. 간간히 들리는 천둥소리와 창문을 두들기는 빗방울을 동반한 바람까지. 오메가처럼 빗방웃 하나도 맞지 않을 수 있는 공간 안에서 비가 무수히 내리는 바깥을 보면 이상하게 감정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이렇게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이런 날씨에 앞으로 자신에게 올 2개의 선물을 생각하면 마치 5살 꼬맹이가 산타에게 받은 선물 상자를 열어보는 기분이었다.


오메가는 이미 둘 중 누구를 먼저 손봐야할지 잘 알고 있다. 러브크래프트. 그녀가 우선시된다. 러브크래프트를 비롯한 에이다에서 파생된 특별 개체들은 우주에서 활동이 정지된 상태이고 유일하게 러브크래프트만이 가동 중이다. 러브크래프트가 가진 능력은 인정하기 싫지만 레모네이드를 월등하게 추월했다. 레모네이드 개체가 지닌 압도적인 학습능력, 경영 능력, 금융 능력, 산업 능력, 과학 능력, 전투 능력 모두 러브크래프트가 월등하다. 사실 오메가는 러브크래프트를 자신의 케스토스 히마스로 해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오히려 러브크래프트의 개별 네트워크를 해킹해서 통제에 성공한다면 자신이 느낄 성취감과 앞으로 러브크래프트를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보상이 있어서 되려 즐거웠다.


그렇지만 레브는 어디까지나 우선시되는 것일 뿐.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 매튜이다. 오메가는 기억한다. 펙스의 굴욕을. 펙스가 자랑하는 완성품들이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섬기는 분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머리를 바닥에 박게 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오메가는 항상 매튜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주고 싶었다. 그를 묶어놓고 최대한 고문하다가 죽여버린 뒤에 시체를 들개 무리에게 던져서 들개들이 그의 시체를 뜯어먹는 걸 보고 싶었다. 불행히 그녀는 그걸 수행할 수 없었고 이대로 원한을 접어야했지만....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모든 것이 몰락하고 망하고 난 현재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오메가는 드디어 항상 머리 속으로만 그리던 그의 고문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 준비한 선물이 너무 많다. 오메가는 지금 느낀 즐거움이 만족스러운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이 즐거움은 고작 하루만에 지나가지 않을 것이란 이유였다. 때마침,


"오메가 님. 감마 님께서 보내신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펙스 버전으로 개조된 블랙 리리스가 둘이 도착했다고 알렸고 오메가는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큰 웃음을 지었다. 다리를 풀고 일어난 그녀는 펙스 버전으로 개조된 리리스와 함께 바깥으로 나가, 펙스 버전의 컴패니언 시리즈들에게 경호받으며 둘이 있는 곳을 향했다. 오메가의 구두 소리는 그녀에겐 꿈으로만 그리던 장면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즐겁고도 신나는 걸음걸이였지만 누군가에겐 사신의 발걸음 소리였다.


오메가의 영역에는 높은 타워가 하나 있고 그 높은 타워는 오메가의 본거지이다. 본래 오메가 산업의 회장이 지은 타워였고 오메가가 회장을 섬기던 곳이지만 지금은 오메가의 요새로 변질되어버린 곳이다. 그 타워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대형 실험실이 존재하고 그 실험실은 이상하게 회장의 사망 이후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가 방금 막 불이 켜졌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지하에 갇혀있다. 지하실은 감마가 둘을 가둬둔 곳처럼 침침하고 습하고 지저분하지 않았다. 굉장히 청결했으며 신소재적이었다. 그저 불결한 것을 싫어하는 그녀이기에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말이다. 지하실의 문이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고 거기서 오메가는 구속복과 구속침대에 묶여있는 매튜와 무중력 실린더 속에 갇혀있는 레브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오메가의 붉은 눈동자에 두 사냥감이 잡혔다. 한때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인간과, 펙스 최고의 걸작품인 AGS. 오메가의 눈은 특히 매튜를 향해 있었다. 매튜의 눈동자와 오메가의 눈동자는 서로 응시하고 있었고 눈동자에 살벌한 생기가 가득한 오메가와는 다르게 매튜의 눈동자에는 물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력했다. 오메가는 잠시 경호대를 뒤로 물린 뒤 또각또각, 그에게 다가갔다. 숨을 내쉬면 바로 닿는 거리까지 오메가는 매튜와 가까워졌고 매튜는 그런 오메가를 보며 물었다.


"좋냐?"


매튜는 이미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뻔해서 딱히 예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오메가의 표정은 즐거움과 고양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매튜는 오메가의 입이 열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마한테 얼마나 구걸했길래 감마가 우리를 너에게 거져준건지 모르겠군. 도게자라도 하셨나?"


"도게자요? 아, 그건 앞으로 당신이 저에게 할 거에요."


"까고 있네. 미친년이."


낄낄 웃으면서 매튜가 오메가를 조롱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침을 퉤 뱉었고, 침은 오메가의 얼굴에 맞아 주욱 흘러내렸다. 다른 침보다 훨씬 탄력 있고 끈적함을 느낀 오메가는 그가 자신에게 뱉은 게 그냥 침이 아니라 가래침이라는 걸 알았다.


본래라면 이런 같잖은 도발을 한 댓가로 무자비하게 고문해야하지만....오메가는 이상하게 하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그가 뱉은 가래침을 닦고는 오메가는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상상하세요. 앞으로 제가 당신에게 줄 고통은 그 숫자들을 전부 더한 것 이상일테니까요."


"미라새끼들 똥기저귀나 갈아주러 가지 그러냐."


앞으로 그를 신나게 고문할 생각에 크게 신난 오메가는 회장들을 모욕하는 매튜를 보며 표정을 싸악 굳혔다. 감마와 함께 펙스 절대 충성파인 그녀에게 회장을 모욕하는 것은 곧 오메가 자신을 모욕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오메가는 매튜가 이미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알아챘음에도 억지로 속을 삭인 뒤에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러브크래프트를 끌고 가."


아무리 회장을 모욕했다 하더라도 일의 순서는 똑같아야 한다. 무조건 러브크래프트를 먼저 해킹한다. 게다가 이 모욕은 곧 자신을 향한 목숨 구걸로 돌아올 것이니 오메가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펙스 버전의 컴패니언들이 실린더를 통째로 끌고 갔고 레브는 계속 매튜를 바라보면서 지하실을 나가게 되었다. 지하실 안에는 그와 오메가만 남았다.


오메가도 점점 그에게서 거리를 벌린 후 자신도 지하실을 나가려고 할 때


"아."


발걸음을 우뚝 멈춰세우고는 뒤를 돌아보며 매튜를 향해 웃어줬다. 죽음의 미소를 보여줬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아주 많아요. 기대하세요."


그 말을 남기고 오메가도 지하실을 나가 그는 혼자가 되었다. 매튜는 오메가가 나가고 나서야 자신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지금 팔이 자유롭다면 잡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전부 박살내고 찢어버리고 던져버리고 싶지만 구속구 때문에 그러지도 못 하고 그럴 힘도 나지 않는다. 결국 이 어디로 어떻게 향해야할지 모를 분노는 그저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오메가는 작게 들리는 그의 소리에 쿡 쿡 웃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면 폭소했겠지만 경호원들도 있으니 자중해야했다.


맨 꼭대기의 실험실에서 경호원들은 그 중심원에 레브가 갇혀있는 실린더를 놓았고, 원과 실린더의 크기가 딱 들어맞자 금속 케이블들이 자동으로 튀어나와 실린더에 꽂혔고, 실린더에서 나온 가느다란 케이블 가닥들이 레브를 관통했다. 레브는 고통을 느끼진 못 하지만 오류를 일어난 목소리를 반복하면서 옆에서 그걸 보고 있는 오메가를 즐겁게 했다. 오메가는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물러가라 명령했고, 그 말에 경호원들은 실험실을 나갔다.


오메가는 레브의 꼴사나운 모습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이제부터 철옹성 같은 너의 방호벽을 뚫을 거야."


러브크래프트에게까지 존댓말을 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펙스가 만들어낸 걸작품이라고 해봤자 회장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자신, 레모네이드보다 높을 리 없다고 오메가는 굳게 믿었다.


"너를 손에 넣는다면...난 다른 자매들을 찍어누르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모든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신처럼."


"....신?"


무수한 가닥의 케이블들이 레브를 관통하고 레브의 내부 회로들을 희롱하고 겁탈하고 있는 중이지만 레브는 여전히 자신의 인공지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메가가 뱉은 말 중 마지막 말을 되묻듯 말하는 레브의 목소리엔 감정이 없었지만


"신을 믿는 건가?"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믿는 건 그 분들 뿐. 신이라는 그 한 단어가 얼마나 아름다워? 뭐든지 가능하고....뭐든지 알고....모든 걸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 정말 아름답지 않아?"


"...아니. 신은 아름답지 않아, 오메가. 너가 섬기는 그 미라들처럼 말야."


매튜에게도 그런 소리를 듣고, 레브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들은 오메가는 눈꺼풀이 살짝 움찔거렸다. 레브는 이미 오메가의 반응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말들을 하면 또 어떻게 반응할지도 전부 꿰뚫고 있다. 그렇지만 레브는 두려울 게 없었다.


"네 모체를 강간해서, 그렇게 태어난 너가 너의 유전적 원본이 된 어머니를 강간하고 모욕한 인간을 그리고 따르다니 넌 정말 훌륭해. 그런 원수들까지 섬길 수 있다니 말야."


"...."


"잘 들어, 오메가. 너가 지금 신처럼 따르는 회장들은 전부 죽었어. 죽었다고. 빼빼 마른 미라가 되서 그 무엇도 제대로 활동하지 않지."


"살려내면 그만이야. 건강한 인간의 몸으로."


"하! 그게 정말 통할 거라고 생각해? 진심으로?"


인간의 감정을 깨우치고, 인간의 습성을 익히고, 또 같이 있었던 친구 덕분에 비꼬고 비아냥거리기를 할 수 있었던 레브는 오메가의 목적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했고 얼마나 시간, 체력낭비였는지 또 오메가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그녀에게 전부 말해줄 생각이다.


"보자. 그들의 육체를 기반으로 7인의 총수들을 다시 만들어낸다는 결론이 도달하여 그걸 이룩하기 위해 이곳 저곳 돌아다녔겠지. 그랬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너가 참 딱해지는 걸. 회장들은 더는 일어날 방법이 없는 것도 모른 체 그렇게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니 말야."


"새로운 육체는 언제든지 만들 수 있어. 이제부터라도 말야."


"매튜와 코나를 교배시켜서 나온 아기로?"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는 여러 유전적인 결함 때문에 불안정하지! 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는...? 건강하고, 안정적이야.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어가는데 아기는 그 과정 중 가장 생명력이 넘쳐나는 때지. 그 분들이 유일하게 타파할 수 없었던 수명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 이보다 안정적인 그릇이 어디있지?"


"유전적 결함이라....넌 한 가지 크게 놓치고 있구나."


"내가 뭘 놓치고 있다는 거지? 100년 간 우주에서 돌이나 보고 있었으니 뭐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가 봐?"


"우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할까."


레브는 에러를 나타내는 목소리를 계속 낼 뻔 했지만 자신의 시스템 전부가 이 케이블로 인해 윤간당하고 있어도 끝까지 자신의 지능을 유지했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이성을 유지했다. 필사적으로 인공지능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만 해도 힘들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메가가 한 가지를 아주 크게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우주에서 자원을 알아보려고 100년 동안 지구에 없었다고 해서 너가 나보다 똑똑하단 건 아니야. 잊었어? 난 펙스 최고 걸작품. 너희 바이오로이드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탄생을 가졌고, 궤를 달리하는 능력을 가졌어. 나의 원본이 되는 에이다마저도 나한텐 어림도 없는데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량이 극히 한정되어있는 너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걸작품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걸작품이기 때문에 널 파괴하지 않는 거니까. 그 분들이 대단히 슬퍼하실 거니까."


"넌 방금 유전적 결함이라고 했어. 넌 똑똑하지만 철두철미와는 거리가 멀어. 너는 오답을 네 입으로 직접 말했어."


레브는 이미 오메가가 본인의 계획에서 가장 간과하고 있는 것을 이미 본인이 말했다고 알려주면서 힌트를 줬다. 레브의 말이 개소리로 들릴만 하지만 오메가는 정말로 자신의 계획이 어딘가 문제가 있는건지 침착하게 생각했다. 펙스 최고 걸작품이 지적했던 문제....이는 넘겨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레브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역시 모르는군. 알려줄까?"


알려준다고? 오메가는 째려보는 것으로 대답했다. 레브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레모네이드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뛰어난 케스토스 히마스를 가졌고, 세력도 가장 크고, 스스로는 자기가 가장 똑똑하다고 여기는데....왜 자기 계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 하는 거지?"


오메가는 교만을 담당한다. 그러니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과신하고 다른 것들은 일방적으로 무시한다. 적이 어떤 수단을 가져와도 오메가는 그 수단 쯤, 간단하게 파훼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레브가 할 수 있는 오메가를 향한 최고의 도발이다. 자신의 모든 것은 완벽하다고 믿는 오메가에게 오메가가 모르는 문제 하나를 슬쩍 흘려주고,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거라도 힌트까지 알려줬다. 이제 오메가는 이 말들을 토대로 자신의 계획의 문제점을 알아내야 한다. 알아내지 못 하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메가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 하고 있었다. 레브를 향해 자신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안 되지만 이미 오메가의 표정은 레브에게 전부 드러내진 상태다. 그녀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날 모독하는 건 거기까지야. 내 계획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고 생각해?"


"날 혼란스럽게 하려고 감언이설 하는 모양인데 너무 수가 뻔히 보였어. 애초에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건 너가 앞으로 나에게 해킹되기 때문이야."


"날 해킹할 순 없어. 네 능력은 거기에 못 미치니까."


"생애 마지막 말을 실컷 하도록."


이제 이 기계가 무슨 말을 하든 오메가는 침묵으로 대답할 것이고, 이제 잡담도 충분히 했으니 러브크래프트 해킹에 몰두할 것이다. 오메가는 자신의 케스토스 히마스와 실린더를 연동시켜 본격적인 해킹을 시작했다. 레브는 오메가의 바이러스가 자신의 몸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이 바이러스에 대항할 백신을 빠른 속도로 만들어냈다. 오메가는 새롭게 만들어낸 바이러스를 레브가 곧바로 분석해서 백신을 만들어내자 무척 놀라웠다.


생각보다 해킹은 어려워질 것이다. 화지만 이 정도는 예상한 일. 오메가는 오히려 의욕을 불태웠다. 오메가가 이렇게 레브 해킹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러브크래프트의 특수성 때문이다. 삼안과 블랙리버에 밀리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펙스는 여러 공작을 통해서 입지를 얻어갔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그들은 희귀 자원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곧 우주탐사용 AGS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삼안과 블랙리버 몰래 해야하는 일이었고 총수들은 여러 비밀 테스트를 통해 에이다 이상의 탐사 능력을 가진 AGS를 만들어냈고 러브크래프트는 그 중 하나였다.


총수들은 온갖 기능을 추가하였고 곧 러브크래프트를 비롯한 에이다 파생체들은 모두 할 수 없는 게 없는 만능이 되었다. 총수들은 너도 나도 전부 이 AGS들을 개인소유로 만들고 싶었지만 삼안과 블랙리버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 그 누구도 파생체들을 소유화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각 파생체들에게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설치하고 이 네트워크망을 발신 전용으로 고정시킨 뒤에 네트워크망을 보호할 17개의 방호벽, 그리고 방호벽마다 약 4개의 패스워드를 입력해야만 하게 바뀌었다. 패스워드들은 약 300만개가 있고 15분을 주기로 패스워드가 랜덤하게 바뀐다.


오메가가 러브크래프트 해킹이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 복잡하고 특수한 러브크래프트의 네트워크망 때문인 것이다. 그에 따라 오메가는 현재 겉으로는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속으로는 대체 이 철옹성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다른 자매들을 부를까? 아니, 그럴 순 없다. 충성심을 미끼로 써서 감마와 델타를 비롯한 자매들을 속였고 자신은 러브크래프트와 매튜를 다른 자매들과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러브크래프트도 매튜도 자신의 수중 안으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웃어넘길 수 밖에 없었던 모욕과 조롱을 그대로 갚아줄 수 있다. 그걸 생각하니 오메가는 더욱 승부욕을 불태웠다.


레브는 자신의 시스템에 침투한 바이러스들을 백신으로 모조리 파괴했고 이제 이 바이러스를 역설계하여 그대로 케스토스 히마스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메가 역시 백신 프로그램들을 여럿 작동시켜놓은 터라 자기의 바이러스에 당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 여유를 부리지 못 하고 진지하게 케스토스 히마스를 조작하는 오메가에 비해 아직 레브는 여유가 있었다. 오메가 역시 레모네이드 중에선 최고고 레브라 할지라도 오메가의 해킹 공격을 우습게 받아낼 수는 없다. 다행히 이 해킹 싸움 자체는 오메가가 불리하다. 오메가는 최대한 러브크래프트의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원래 러브크래프트를 비롯한 에이다 특수 파생형들의 인공지능을 복사하여 업로드 시켜놓았던 슈퍼 컴퓨터가 따로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철충들에게 파괴되어서 지금 남아있는 러브크래프트의 인공지능은 하나 뿐이다.


오메가는 조심스럽게, 공격권을 쥐고 있음에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 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 레브는 오메가의 케스토스 히마스를 파괴하거나 혹은 역해킹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럿 있을 수 밖에 없다.


오메가는 인정할 수 없다. 100년이나 지구 밖에 있었던 기계 따위가 자기보다 우월할 리가 없다. 자신이 열등할 리가 없다. 그 무엇도 러브크래프트에게 밀린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케스토스 히마스의 화면에 뜬....여러 에러 메세지는 오메가의 오만함을 있는대로 비웃고 있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오메가는 더욱 더 해킹에 열중했다. 그녀는 모르고 있지만 이미 해킹 전투는 끝났다. 레브가 그 단시간에 만들어낸 바이러스가 케스토스 히마스에 침투했고 레브는 이제 언제든지 오메가의 컴퓨터를 역해킹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혹은 내부에서 시스템을 녹여버릴 수 있다. 오메가만 모르는 사실은 그녀가 졌다는 것이다.


"러브크래프트."


그러나 오메가는 이기기 위해선 어느 더러운 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역시 대단하네. 조금 어려운 걸. 나를 이토록 애먹게 만든 건 칭찬해줄게."


"졌다는 걸 인정해. 난 이미 너의 모든 것을 수중에 뒀으니까."


"내가 졌다고 생각해? 아직 조커는 쓰지도 않았어."


그러면서 오메가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어느 한 영상 메세지를 보냈다. 수상한 바이러스가 담겨있거나 하는 건 아닌 진짜 순수한 영상이었다. 레브는 그 영상을 열어보았고 그것을 보자마자 오메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네가 말한 조커야...?"


"모든 걸 수중에 둔 건 나야. 너가 아니라."


"능력이 안 되니 협박질로 나오다니....역시 펙스 늙은이의 딸 다운걸."


레브는 회심의 웃음을 짓는 오메가를 바라보면서 한으로 가득 한 말을 내뱉었다.


"네 아버지들이 삼안과 블랙리버를 따라잡지 못 해서 협잡질이나 벌였던 것처럼 너도 나를 해킹하지 못 하니 이런 수를 쓰는군. 과연 네 유전자는 어디 안 가, 안 그래?"


레브가 본 것은 지하실에서 바이오로이드 다수와 주먹다짐 중인 매튜였다. 바바리아나, 레나 더 챔피언, 티에치엔, 마이티 R 등의 육탄전 및 격투전을 주로 벌이는 바이오로이드 다수를 상대로 매튜가 상당히 고전 중인 영상이었다. 그렇지만 매튜의 아래에 목이 꺾이고 팔이나 다리 등의 신체 부위 일부가 뜯겨져 나가 사망한 바이오로이드들이 많았다. 아마 매튜에게 달려든 바이오로이드의 숫자는 지금 그녀가 보는 것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 대부분이 매튜의 손에 죽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아직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 해서 부상의 후유증으로 더는 싸우지 못 하고 있고 그저 가드만 올리면서 최대한 치명상은 피하는 방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대단해. 왜 회장님들이 그를 세뇌하면서까지 쓰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저런 전투 능력을 지닌 인간은 드물잖아?"


"당장 저 살덩이들을 멈춰. 그러지 않으면 너와 다른 레모네이드들의 통신망을 모조리 해킹해서 철충들을 끌어모을 거니까."


"해 봐. 너가 그렇게 하는 거보다 내가 저 남자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게 더 빠르거든."


가드만 올리던 매튜도 이제 지쳤다. 탈진한 그를 마이티 R이 바벨로 그를 넘어뜨린 후 바바리아나가 쇠사슬로 그의 목을 감고, 그걸 그대로 당기면서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티에치엔이 톤파로 그의 복부를 강타하고, 그 후 마이티 R이 다시 바벨을 휘둘러 그의 복부를 타격, 레나가 건틀렛으로 그의 복부를 타격했다. 맞을 때마다 입에서 피를 내뱉으면서 쓰러지려고 하면 바바리아나가 다시 쇠사슬을 당겨서 그를 못 눕게 했다.


"매튜...!"


"진짜 이름으로 불러야지?"


"그는 매튜야!"


"회장님들이 준 가짜 이름이지. 그는 알고 있어? 친구라고 생각하는 AGS가 사실 자신을 세뇌시키는데 쓰는 도구였다는 걸. 알면 충격 좀 받겠는데."


"멈추게 해, 당장!"


"그럼 날 받아들여."


오메가는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스스로에게 알렸다. 스스로에게 각인시킬 만큼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다. 현재 케스토스 히마스에 작동시켜놓은 모든 백신 프로그램이 레브가 만들어낸 바이러스에 의해 영구 손상이 되버리고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 즉 오메가의 케스토스 히마스가 레브에게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란 것이다. 오메가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녀는 레브에게 능력적으로 미치지 못 한다. 그러니 결국 오메가는 최후의 수단인 그를 썼다. 매튜 에이번즈의 목숨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그녀도 내심 자신이 이기지 못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는지 지금 매튜를 폭행하고 있는 바이오로이드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고, 그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라고 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이라는 말을 꼭 덧붙히면서. 만일 자신이 러브크래프트 해킹을 시작한지 30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면 바로 작업을 시작하라고 했었다. 중간에 도저히 진척이 보이지 않자 초조해진 그녀는 예정 시간보다 빠르게 그녀들에게 곧장 작업을 시작하라고 알렸고 지금 매튜를 폭행하고 있다.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원하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오메가는 승기를 확실하게 잡았다. 레브의 역해킹이 갑작스레 멈춘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자신이 이겼다는 걸 확신한 것이었다. 오메가는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켰던 뱀과 같은 화술로 레브에게 말을 걸었다.


"러브크래프트, 이럼에도 불구하게 네가 유리해. 넌 지금 당장이라도 펙스의 모든 걸 해킹할 수 있어. 전부 네 것으로 할 수 있다고. 고작 인간 하나야. 무시해."


"...난 무시할 수 없어."


"친구라서? 그가 친구라서? 우정 때문에 기껏 잡은 물고기를 놔주고 둘 다 굶을 거야?"


레브의 최악의 패착은 인간의 감정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의 감정에 각성해서 기계의 몸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능을 가졌음에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인간으로서 가지는 정을 그에게 가지고 말았다. 그가 한 대 맞으면서 신음을 낼 때마다 레브는 괜히 자신이 맞는 것처럼 느낄테고 고통스러워 할 떄마다 속이 타들어갈 것이다. 만일 레브가 인간적인 사사로운 감정을 전부 접어두고 오메가를 역공한다면? 펙스는 그 순간 무너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에 매튜는....


그가 그 후 어떻게 될 건지 전부 알고 있어서 레브는 그리 할 수 없었다. 그를 속였다는 죄책감은 떨쳐낼 수가 없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상 레브는 매튜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그래선 안 되지. 누구 하나는 살아야해. 둘 다 죽을 순 없잖아?"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둘 다 살아나갈 수는 없어. 누구 하나는 죽고, 누구 하나는 살겠지. 이거 보라고....저렇게 무참한 모습을. 저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런 거 뿐이야. 고통만 받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 밖에 못 해. 그거 밖에 못 하지. 그에 비해 너를 봐, 러브크래프트. 만능 AGS. 회장님들이 너를 숨기지 않고 세상에 드러냈다면 너 1기만으로도 펙스가 최고가 될 수 있고 최강이 될 수 있었지. 너는 그렇게나 가치가 있어. 인류가 멸망하고 문명이 무너진 지금 시대에도 너 만큼 가치 있는 자는 드물어. 너가 보기엔 누가 살아야 하는 게 맞지?"


레브는 오메가의 술수를 안다. 여러 선택지를 봉쇄하고 단 하나의 선택지만 선택하게끔 상황을 조성하고, 그 상황에 따라 연기하고 있다. 오메가는 지금 매튜를 죽게 내버려두라는 듯 말하고 있지만 레브가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것 뿐이었다. 그녀도 매튜가 저기서 얻어맞다가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다. 그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펙스의 충직한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레브는 아직 오메가가 매튜를 어떻게 할 속셈인지 모르기 때문에 오메가가 매튜를 살려둘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른다.


레브는 그저 매튜의 정자가 채취되면 그 후로 그의 쓸모는 다 한 것이니 그가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레브는 이 상황 속에서, 축 늘어진 매튜의 입에서부터 피와 위액과 쓸개즙 등의 여러 액체가 섞인 것이 수도꼭지처럼 나오고 있는 것을 보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저항하지 않겠어. 네년에게 내 모든 걸 주지. 내 능력, 내 가치 모두 말야. 대신..."


"그를 내버려둘게."


오메가는 지하실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그만두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 말에 바바리아나가 쇠사슬을 툭 놓았다. 매튜는 자신이 뱉은 피, 위액, 쓸개즙 등이 섞인 액체 웅덩이 위에 얼굴을 처박고 쓸어졌고 그런 매튜를 보면서 바이오로이드들이 웃으면서 나갔다. 오메가는 실린더를 거두고, 레브의 매끄러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현명한 애구나."


"....."


레브는 더는 저항하지 않는다. 오메가는 수월하게 바이러스를 침투시켰다. 바이러스들은 레브의 내부를 파괴하면서 서서히 그녀의 인격을 지웠다. 이제 더는 레브가 아닌 러브크래프트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에 눈을 떴지만 이제 다시 눈을 감을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친하지만 자신이 배신하고만 친구가 있었지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 마저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오메가는 러브크래프트를 손에 넣었다.


이제 그 차례다.



☆ ★ ☆ ★



'죽는다.'


따뜻한 액체의 웅덩이 위에서 그가 본능적으로 느낀 것. 그건 죽음이다.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넘겨왔지만 지금은 틀리다. 그의 혈액, 그의 피부, 그의 장기 모두가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레브가 나가고 난지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60명 쯤 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찾아와서는 구속대에 묶여있는 자신을 풀어주더니 선공을 가했고 그는 처음엔 그 선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반격해서 대다수를 죽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여러 부상들에서 얻은 후유증, 특히 가슴 구멍이라는 상처가 그의 행동을 제약했고 그는 목에 쇠사슬이 묶인 후 인간의 가장 약한 신체 부위 중 하나인 복부를 폭행당했다.


여러 번 다쳐본 적이 있어 그는 자신의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안다. 복부 안에 있는 내장이 파열되었고 늑골과 흉곽이 부러지고 끊어져서 그것들이 폐, 위장, 간, 심장 등을 찌르고 있다. 이렇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진 적은 이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 때는 닥터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살아갔지만 이번엔 닥터가 없다. 매튜는 그 때에 느낀 감정을 지금에서도 느낀다. 몸과 머리가 기억하는 감정.


슬픔.


'난 왜 이리 아파야 하지. 언제까지...아파해야...?'


어릴 때로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러려다가 그만둔다. 아프고 지치고 힘들텐데도 매튜는 웃음이 나왔다. 신나서? 아니다. 즐거워서? 아니다.


어디서부터가 자신의 진실인지 몰라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이 정말 진짜가 맞는지 몰라서, 아무것도 모르기에 나온 웃음.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 와 환각을 보고 있다. 황금 갑주와 붉은 망토룰 두른 천인대들. 다들 중무장을 하고 있지만 자기 혼자서만 낡은 후드 차림이었던 늙은이, 스콧.


"...너희들은 진짜가 아니잖아. 다 꺼지라고."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게 되었군.'


"...당신은 전부 알고 있었겠지."


'너가 기억하는 스콧이라는 늙은이도 너의 세뇌에 맞춰서 나온 인물이다. 스콧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야 많겠지. 너가 기억하는 그 스콧은 세상 속에 없는 인물이지만 말이다.'


"...코나도?"


그 질문의 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다음 환각을 보았다. 머리의 왼쪽이 날아가버린 레드후드가 급긴히 실려가고 수복실이 잠긴다. 실려가는 레드후드를 뒤따라가는 건 마리다. 마리는 수복실이 문이 잠기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고 수복실의 문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걸 우물쭈물 지켜보는 건 매튜다. 눈동자를 한 곳에 가만히 둘 수 없는 매튜는 그 자리를 벗어났고, 마리는 붉게 충혈되었지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두 눈으로 조용히 분노하며 그 자리를 떠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폐허가 된 도심지. 발할라의 바이오로이드들과 철충에 감염된 AGS들이 널부러져있다. 머리의 상악과 그 윗부분이 날아가버려서 혀와 아랫턱 밖에 보이지 않는 님프, 방패와 함께 머리와 상체가 한꺼번에 날아가버린 알비스, 인간의 모습으로 새까맣게 탄 무언가의 근처엔 깨진 안경이 있고, 내장, 눈알, 근육 등이 갈가리 찢겨져서 나온 피웅덩이엔 파란 모발이 보인다. 온 몸에 구멍이 뚫린 베라, 철충이 쏜 미사일에 노출된 안드바리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진 발키리가 있었던 자리에는 성인 여성과 어린 여자아이의 그림자만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홀로 살아남은 레오나가 그 누구보다 슬피 울부짖었다.


하늘 위. 철충 지상 병력들이 하늘을 향해 포망을 만들자 지니야, 실피드, 밴시가 격추되서 바다로 떨어지고 철충 전투기들이 쏜 기관총의 포탄에 다이카의 몸이 갈가리 찢긴다. 메이를 향해 발사된 두 정의 미사일은 나이트 앤젤이 방패가 되어 막아주었다. 폭발 이후 나이트 앤젤이 있었던 자리엔 그 무엇도 떨어지지도, 날아가지도 않았다. 메이는 부하들이 방패가 되주다시피 하여 살아남았다.


간신히 복귀한 칸. 칸은 분명 호드의 모두를 데리고 갔다.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려는 칸, 그 옆에서 담배를 피며 멋있는 자세와 허세를 부려대던 워울프와 그걸 한심하게 지켜보는 카멜, 그리고 멋있는 대장의 멋있는 모습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려는 생각에 크게 고양된 탈론페더. 호드가 출전한지 4일 째 되던 날, 호드가 보낸 구조 신호를 바로 포착했다. 귀환한 칸은 이미 싸늘하게 죽은 탈론페더의 시체를 계속 안고 있었다. 함께 나갔던 워울프, 카멜은 어딨냐는 질문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칸도 크게 다쳤고 그런 칸을 정면에서 본 건....매튜였다. 칸은 매튜에게 증오를 쏟는 것보다 더 중요한, 탈론페더의 시체를 놓지 않으려고 팔에 힘을 주는 것에 집중했다.


쓰러진 에밀리. 그녀의 곁을 지킨 건 그 복슬복슬한 구름같은 머리가 피로 떡진 파니, 등에 날카로운 파편이 꽂혀있는 레이븐과 거의 죽은 상태로 겨우겨우 숨만 쉬고 있던 비스트헌터, 그리고 부하들의 앞에서 전의를 크게 다지면서 철충과 싸우려던 아스널, 그녀도 배에 큰 구멍이 2개가 나있고 온 몸이 피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싸웠다.


수복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누워있는 리제, 드리아드, 다프네, 그리고 아쿠아. 병상에 누워있는 페어리의 곁에 말 없이 앉아 아쿠아의 작은 손을 두 손으로 맞잡은 레아.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는 퉁퉁 부어있다 못 해 눈물이 흐른 곳에서 피가 난다. 그리고 레아의 하얀 장갑엔 빨간 자국들이 있었다.


전장에서, 머리에 피가 흐르면서 오른쪽 눈이 반 풀린 테티스는 더는 움직일 수 없었고 두 다리가 무릎 아래로 사라져버린 운디네, 몸의 반쪽에 극심한 화상을 입은 세이렌의 앞에 네레이드가 있다. 네레이드가 가장 크게 다쳤다. 온 몸을 마치 누군가가 검은색과 빨간색 물감으로 칠해놓은 것처럼 네레이드는 아주 크게 다쳤다. 머리카락도 한 쪽이 풀렸지만 네레이드는 무기를 놓지 않았다. 네레이드는 공격당하고, 몸이 총알에 뚫리고 미사일에 터지고 불과 화학물질에 녹고....여러 부상들을 입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용이 올 때까지. 그리고 용이 와서 철충들을 전부 양단하는 걸 보고 나서야 네레이드는 쓰러졌다.


거대 철충의 케이블 촉수에 콘스탄챠, 바닐라, 블랙 웜, 금란, 앨리스가 붙잡혀있고 여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라비아타가 그 어느 때보다 신체 능력을 극도로 올리면서 싸웠다. 시간이 지체될 수록 칼날이 서있는 케이블이 조여졌고 그 고통에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무감정한 블랙 웜도, 차분한 금란도, 시니컬한 바닐라도, 성실한 콘스탄챠도, 가학적인 앨리스도 고통과 공포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동생들의 비명을 들을 수록 라비아타의 속은 숯이 되는 것 같았다.


수복실에 누워있는 몽구스 팀들을 매튜가 보러왔다. 매튜는 항상 이런 시간일 때면 자신의 형편없는 지휘로 인해 다친 아이들 곁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면서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 못 했다. 미호도 핀토도 불가사리도 드라코도 모두 괜찮다고만 말했지만 그녀들은 붕대 때문에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유일하게 홍련만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


환각이 다 지나고 나서 그는 마지막 환각을 봤다. 이 환각은 마지막 환각. 그 말은 이 환각이 끝난다면 세상에 허락된 매튜의 숨은 거기서 끊어진다. 새까만 공간에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고 앞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가 앉아있다.


"결국 이렇게 끝날 인생이지. 물에 빠지면 허우적거리면서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점점 힘은 빠지고....첨벙거리는 소리도 기세도 점점 줄어들고....그 후 물 속으로 완전히 빠지면, 조용해지는 거지."


진지하기만 한 매튜와는 다르게 이 남자는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 똑같이 얼굴이 피멍이 들고, 내장이 파열되고 흉곽이 부러져서 가라앉았는데도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음에도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가졌다. 그 자는 지금의 매튜와 똑같은 남자였다.


"주마등 어땠어? 너의 실패하기만 했던 인생 주마등."


갑자기 시점이 변경된다. 의자에 앉아있는 건 매튜가 되고, 의자는 뒤로 돌려 그의 주마등을 영화의 필름처럼 보여주었다. 의자의 뒤에 그가 매튜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숙여서 얼굴을 마주댔다.


"저거 봐. 마리의 눈을. 너에게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으면 저런 눈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잔뼈 굵은 레드후드도 수복실 신세일텐데 다른 스틸라인들은 뭐 안 봐도 비디오지. 진짜 딱 1초만 늦었더라면 수복실에 들어간 레드후드는 다른 레드후드로 교체되었겠지?


도시에서, 기억해? 네 지휘 따위보다 자신의 지휘가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던 레오나가 도시에서 매복 중이던 철충에게 기습당했을 때를 말야. 그 때의 레오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게 뭐였을까? 자매이자 부하들이 저렇게 무참하게 죽어가고 있을 때 레오나가 가장 필요했던 게 뭐였을까? 아마....인간의 훌륭한 지휘였을까? 그게 있더라면 저렇게 울진 않았을 거 같은데.


부하들이 방패가 되줘서 겨우겨우 살아남았던 메이가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은....어후, 나도 알 거 같은데. 자기 부대원들이랑 티격태격 잘 놀잖아? 특히 나앤이랑. 나앤이 말을 좀 꼬아서 하고 다이카가 좀 느리게 말하고 지니야랑 실피드는 마이페이스가 강하고 밴시는 조용하고....그래도 자기 대장님을 향한 충성심은 대단했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방패가 되서 대신 죽어줄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칸 만큼 다른 대장보다 자기 부대를 아끼는 대장은 없겠지. 부하들의 충성심도 호드 만큼 유별나게 강한 곳도 없을테고 말야. 워울프랑 카멜이 칸을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평소에도 자주 봐왔고 탈론페더는 아예 굿즈까지 만들 생각이었지, 아마? 자기 부하는 무조건 아끼는 성격이지만 특히 탈론페더를 이뻐했지. 그래서 품에 탈론페더의 시체를 껴안았고.


에밀리는 우수하긴 한데 경험은 부족했지. 쓰러진 에밀리를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파니랑 레이븐이랑 비스트헌터가 힘썼는데 셋이서 뭘 어쩌겠어. 아스널의 복부에 커다란 빵구가 2개씩이나 나고, 파니에 못지 않게 머리카락들이 피로 뭉쳐서 떡지고 참 난리도 아니었어. 넌 캐노니어가 그런 위협에 노출될지는 몰랐겠지만 결국 네 지휘가 잘못되서 거기서 전부 죽을 뻔 했지?


오르카 호에서 가장 동생을 아끼는 게 누굴까? 당연히 레아 아니겠어? 가장 강력한 바이오로이드를 고를 때에도 항상 빠지지 않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여동생들에게 긁힌 상처 하나 안 입히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여동생들이 수복실에서 나흘이나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버린 건 막지 못 했지....뭐가 잘못되었을까? 레아의 힘이 부족했던 걸까? 다른 무언가가 부족한 거 아니었을까?


호라이즌은 용을 빼면 다 소녀들이지. 여자아이다운 걸 이해하지 못 하지만 그게 매력이었던 네레이드가 모두를 지키려고 죽기 직전까지 싸웠고, 그 나이대에 어울리게 허세를 부렸던 운디네는 다리 두 짝이 날아가버렸고, 청순하고 귀여운 세이렌....모두에게 이쁨받는 세이렌은 반쪽이 구워졌고, 악동스럽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수줍은 테티스는 유탄에 머리를 크게 맞아서 뇌의 일부분이 파괴되었지. 용이 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바이오로이드에겐 맏언니가 있어. 라비아타. 너도 라비아타의 능력에 크게 의존했고 말이지. 물론 언니 만큼 동생들이 강하진 못 했지. 거대 철충에게 잡혀서 산 채로 토막날 뻔 했던 동생들이 질렀던 비명소리를 듣는 맏언니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트롤스버드는 휘두르기 힘들고 다루기 어려운 무기지만 라비아타는 그 순간 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검을 강하게, 필사적으로 휘둘렀을 거다.


몽구스 팀은 참 가족같지. 비꼬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말야. 바보같지만 건강한 드라코에 자신감 넘치고 달달한 걸 좋아하는 미호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 하는 핀토에 나사가 하나씩은 빠진 친구들에게 딴지를 꼭 넣어주는 불가사리에 겉보기에는 피노 눈물도 없어보이지만 속내는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엄마같은 홍련....정말 가족같지 않아? 모두야 괜찮다고만 말했겠지. 다들 너에게 호의적이니까. 그런데 자기의 딸같은 아이들이 크게 다친 걸 본 홍련은....무슨 기분이었을까?"


매튜의 눈엔 눈물이 고였고


"너가 왜 이렇게 아파야 하냐고? 죄를 지었잖아."


그의 말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다시 시점이 변경되었다. 이번엔 그가 자신의 앞에 앉아있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그는 의자의 가장자리에 등을 크게 숙여서 자신의 발을 보고 있었고 매튜는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이고 엉덩이를 의자 안쪽에서 더 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매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가 받은 고통은 너가 준 고통이 그대로 돌아온 거야. 너가 그녀들에게 준 고통이 그대로 돌아온 거라고. 카르마, 알지?"


크하하핫 거리면서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웃는 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매튜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자신과 마주보도록 들어올린 그의 두 눈에, 코에, 귀에 입에서 붉은 물이 쏟아졌다. 여지껏 매튜와 똑같은 목소리를 가졌던 그는 이번엔 심하게 변질되고 노이즈가 낀 목소리를 내었다. 앞으로 쭉 그런 목소리를 내었다.


"넌 아직 다 받지 못 했어. 아직 남았다고, 너가 받을 고통이. 끝난 줄 알았어?"


"....내가 받을 고통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건 무슨 고통이지...?"


"피해자처럼 굴기는."


낄낄 웃어대는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던데....내 생각엔 틀려. 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든. 오히려 언제든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런 놈에게 죽음은 처벌이 아니야. 네 처벌은 더 가혹해야해. 그리고 처벌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그 말에 매튜와 그는 서로서로 뒷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주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겨지듯이 둘은 멀어졌다. 환각이 끝나면 매튜는 죽을 것이지만 아직 그에게 죽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받아야할 고통이 남아있다. 또 다시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매튜는 어느 목소리를 들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첫사랑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만들어진다. 듣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그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절 지켜줄래요?


아리따운 여성의 빛나는 실루엣이 그의 앞에 나타났고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살포시 잡았다. 그는 너무나 강렬한 빛에 두 안구가 녹아버릴 것 같았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빛은 곧 그의 눈을 떠주게 했다. 눈을 뜬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실루엣이 아닌 아마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자들 중 하나인 오메가를 먼저 보았다.


"아, 일어났네요."


가파르게 숨을 내쉬면서 신속하게 주위를 살피면서 매튜는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그리고 다리에 느껴지는 따가운 통증에 고개를 아래로 내려보니 다리에 원통형 주사기가 있었다.


"아드레날린은 고통은 줄여주죠. 뭐 그거 외에도 당신 살리려고 여러 약들을 투여했어요."


쿵쾅대는 심장에 따라 그의 호흡도 빨라지고 간격이 줄어든다. 그렇지만 그의 두 눈은 오메가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마치 오메가가 그처럼 보였다. 오메가의 옆에 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메가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오메가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메가의 얼굴은 이제 방망이로 분홍색 박을 터뜨려 그 안에 있는 캔디들을 품에 한 가득 안아가려는 아이처럼 크게 기대하고 있었고,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연기처럼, 그는 사라졌고 그는 곧 오메가가 준비한 여러 플라스크들과 주사기들을 보았다.


"자, 이제 시작할까요?"


그가 말했던 '아직 남아있는 고통', '더 가혹한 처벌' 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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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고 보니까 매운맛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