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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씨바알..."


방바닥에 담배 꽁초가 여기저기 떨어져있고, 잿가루가 바닥을 하얗게 칠한 것으로 모자라 방 안에는 담배 연기가 구름을 그리고 있었다. 덤으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 술병과 아직 조금 남은 술이 흘러나오는 술병도 있었다. 뽕, 하고 새로운 술병의 뚜껑이 따이는 소리 후엔 후우우우 하면서 새로운 담배 연기가 나오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 소리를 내고 있는 범인은 워울프. 앵거 오브 호드의 바이오로이드이다. 그녀는 스틸라인이 매튜를 포위했을 때 그 후에 합류하여 그에게 여러 상처를 안겨준 바이오로이드이다. 작전은 성공했고 자신 역시 마지막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을 거들은 승자지만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다. 이건 다른 앵거 오브 호드도 마찬가지다. 워울프는 이전보다 더 술에, 담배에 의존했다. 앵거 오브 호드는 전원이 전 사령관 축출에 찬성한 세력으로서 워울프도 당연히 찬성에 손을 들었다. 여러가지로 그라는 인간은 별로였다.


멸망 이전의 남자다운 결단력도 없고, 지휘 능력도 개판, 남자로서의 매력도 적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사정은 몰라도 당장 워울프 자신의 사정을 따져본다면 그에게 말을 걸려면 4번씩이나 같은 말을 했어야 했고 그는 항상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보다 못해 상담이라도 해줄까 하면서 같이 술이라도 먹을까 했지만 그는 끙끙대는 것을 누군가에게 풀지도 않았고 술도 잘 먹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다시 마음에 들었던 때가 생겼는데 그의 오르카 호 탈출 사건이다. 워울프는 비밀을 싫어한다. 그냥 모든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날것으로 보여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그녀는 비밀 속에 그의 무시무시한 야성이 숨어있다는 것이 대단히 놀라웠다.


게다가 직접 붙어보니 꽤 강했고 무엇보다 대장인 칸마저도 2번씩이나 제압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워울프는 게다가 이젠 현 사령관에 대한 혐오감이 치솟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칸 대장만 가면 된다. 칸 대장에게 그냥 그를 기절시켜서 데리고 오라고 한다면 1시간도 안 되서 그는 잡혀올 것이다. 그렇게나 쉬운 임무를 이렇게나 복잡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렇게나 가학적이고 고통스럽게 만들다니....워울프로서는 이해하기도 싫었다. 대충 현 사령관의 의도가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특기도 살리지 못 한채 이리저리 린치당했고 결국 그렇게 죽을 뻔 했다. 한 번은 실려가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저게 시체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신기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면서 현 사령관을 원망했다. 쫓아낸 것만으로 충분하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워울프는 담배와 술을 구할 때 외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다행히 나머지 앵거 오브 호드는 바깥에서도 잘 활동했다. 하지만 탈론페더를 빼면 둘도 정상이 아니었다. 퀵 카멜은 자신의 기관포만 보면 자신이 가한 공격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기관포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칸은 아예 잠을 자지 못 하고 있다. 눈에 그려진 화장이 화장인지 다크써클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칸과 퀵 카멜, 워울프는 현 사령관의 작전을 듣고 그녀가 미쳤다고 판단을 내려서 아예 자신들 선에서 그를 제압하려고 했다. 그래서 아머드 메이든과 베로니카에게 손을 구한 것이다. 그가 스틸라인에게 저렇게 린치당해서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것보다 그냥 자신의 선에서 깔끔하게 상처를 조금만 입고 기절하는 것이 훨씬 나아보였다. 하지만 그의 전투 기술은 경험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칸보다도 오래된 경험이었다. 현재 칸은....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신의 선에게 그를 제압하지 못 했다고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탈론페더만이 그 작전에 참가하지 않아서 무사했지만 탈론페더는 대체 뭐가 어찌 흘러갔으면 앵거 오브 호드가 자신을 제외하고 전부 이 지경이 됐나 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아예 작전 참가를 하지 못 했지만 모두들 현 사령관에 대한 평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스틸라인 다음으로 그에게 가장 많이 소모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그래도 그의 마지막은 대단히 높게 평가해주었다. 추하게 투표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이 아닌 사령관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었고 그 모습은 레오나마저 칭찬하게 했다. 그렇게 그는 그냥 내버려두면 되었다. 하지만 현 사령관, 그녀는 오히려 전 사령관을 포획하는 것으로 모자라 닥터의 기계 안에서 60일을 보내야 할 정도로 매튜를 병신으로 만들어놨다. 매튜의 상태를 직접 보고, 그녀는 이건 아닌 거 같아서 현 사령관을 찾아갔지만 그녀는 레오나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허를 찔러서 자신들을 패배시켰지만 레오나는 돌이켜보면 이는 대단히 전략적인 행동이라 보았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사령관직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사령관으로서의 자각은 있었다는 것임으로서 레오나를 비롯한 발할라 자매들은 이를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었다.


현 사령관은 제아무리 인류의 상황이 이렇다 하더라도 너무 그 선을 넘어버렸다. 레오나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그녀의 명령을 교묘히 무시하거나 곡해하는 것으로 소극적인 저항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그녀의 터치는 없다. 레오나는 뭔가 이 모든 일이 자신을 비롯한 축출 찬성파들의 행동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앞뒤 생각도 안 했구나...싶었다. 그저 그녀의 능력만을 보고, 가면만을 보고 그를 대신할 훌륭한 사령관으로 보았더니 이빨을 드러내니까 그제서야 독사라는 걸 알았다. 이렇게나 눈이 낮았다니....레오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녀는 잠시 매튜를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남성상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사령관으로서의 능력도 없었다. 코나가 사령관이 된 후엔 오르카 호의 희생은 줄어들었지만 지휘관인 자신으로선 사령관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미리 알 수 있다. 하지만 현 사령관은....대체 무슨 인물인지 감이 오질 않는다. 가면을 쓰기 전과 후가 너무나도 다른 인물이라니....하지만 또 이렇게 생각하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적어도 가면은 쓰지 않지만 언제나 스스로를 비밀 속에 파묻는다. 자신에게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좋을텐데, 괴로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은 정말로 싫었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겐 털어놓았다는 것도 싫을 것이다. 레오나는 다른 발할라 자매들을 생각했다.


님프...그렘린...샌드걸...베라...알비스...안드바리...모두 그의 축출에 찬성한 자신의 부하이자 자매들. 이들도 레오나 그녀처럼 그에게서 느끼는 이미지가 완전히 동일했다. 항상 이상한 침묵을 유지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과묵하고, 무엇보다 행동 하나하나에 비밀이 숨겨져 있음에도 그걸 절대 누군가에게 풀려고 하지도, 토해내려 하지도 않는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중 유일하게 공개적인 반대표를 던졌던 발키리만이 그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발키리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중에서 유일하게 현 사령관의 사냥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대장인 자신은 부하들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고 부하들은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불려간 뒤 온 몸에 폭력의 흔적을 달고 나왔다. 이 사실은 지금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한 번은 직접 현 사령관, 그녀를 찾아갔고 이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추궁했다. 아직 그가 실린더 속에서 회복을 하고 있을 시기, 속내를 드러내기 이전처럼 모두에게 상냥하게 웃어주고 일을 도와주기까지 했던 그 모습을 한 악마에게 가서 추궁했었다. 솔직히 레오나는 신체의 어딘가에 멍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그녀는 말로만 답해주었다.


'철혈의 레오나가 불평도 하네? 희귀한 모습인 걸?'


'사령관, 난 대답을 원했어.'


'대답....그래, 해줄게. 대답. 으으으음...아니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왔고 자신의 이마에게 손가락을 툭 찔렀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몰랐다. 그녀의 말을 듣기 전까진.


'말 안 할래. 해봤자 이해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래도 굳이 듣고 싶다면야....너 정말 이기적이구나?'


갑자기? 이기적이라고? 그 말에 레오나는 의아함을 얼굴에 보였고 그녀는 그걸 보면서 더욱 더 웃을 뿐이었다.


'아하하하! 그거 봐! 이기적이잖아, 안 그래? 너희들의 전 사령관이 지금 실린더 속에서 오늘내일하는 상황인데 너가 와서 나한테 물어본 거는 그의 몸 상태는 좀 어떻냐는 것도 아니고, 왜 자매들에게 불명예적인 손찌검을 했는가, 야?'


레오나는 그 말을 듣고는 표정이 급히 싸해졌고 서둘러 사령관실을 나왔다. 또 사령관실에서 멀리 떨어졌는데도 그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그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그의 비밀스러운 모습과 이상할 정도로 둔한 행동과 반응에 의해 괜히 짜증만 났던 때가 자주 기억나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몸으로 고작 한 사람의 힘으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허를 찔러서 넘어가는 대단한 판단력과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의 순간에 스스로 권력과 자리를 놓는 그의 많이 없었던 사령관다운 모습. 그리고, 현 사령관의 사악한 전술에 의해 죽기 직전의 상태로 돌아온 그의 모습. 지금도 생각하면 그 죽어가는 몸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을텐데도 끝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은 경탄을 자아내었다. 레오나는 그제서야 그는 사령관으로서 존재해야할 남자가 아니라 군인으로서, 전사로서 존재해야할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전 사령관과 현 사령관....그 어느 쪽도 달갑지가 않다. 전 사령관을 보면 죽어가는 자매들이 떠오른다. 배에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던 님프, 철충 AGS에게 밟혀죽는 그렘린, 후면의 비행장치가 폭발하고 그 폭발에 휩싸여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던 샌드걸, 철충에 의해 참수되는 베라, 방패와 몸통에 똑같은 크기의 구멍이 나있는 알비스, 원래라면 철충과 만날 일이 적은 안드바리마저 당하는 모습, 또 그 와중에서도 아이러니하게 자신과 발키리 만큼은 어떤 전장에서도 무사했다. 그를 보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간 자매들이 생각난다.


현 사령관을 보면 그녀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저번에 보였던 모습은 진짜 그녀인지, 아니면 가면을 쓴 것일 뿐인지...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까지도 들리는 것 같은 그 광소는 그녀가 결코 정상인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전 사령관이든 현 사령관이든....레오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그래, 죽어간 자매들을 위해서라도...난...'



☆ ★ ☆ ★



다음 날, 또 그와 그녀가 만났다. 그는 불만이 가득했고 그녀는 행복이 가득했다.


"뭘 그리 실실 쪼개."


"100년만에 만난 남편이 눈 앞에 있으니까?"


매튜는 그 말에 그녀의 왼손 약지를 슬쩍 보았다. 반지는 커녕 반지를 낀 자국마저 없다. 그런 손으로 남편이니 뭐니 지껄이는 게 솔직히 우스웠다.


"너 같은 썅년을 위해서 반지를 샀던 그 때가 정말 그립군. 그 돈으로 치킨이라도 사먹을 걸 그랬는데."


"하지만 이미 샀지? 그 반지는 지금 소실돼서 아깝지만, 반지보다 자기가 나한테 반지를 선물했다는 게 더 중요하니까."


"너가 어떤 새끼인지 알고 있었더라면 난 절대 그걸 사지 않았어."


분이 안 풀리는 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린 그를 보았다. 저렇게 짜증내는 모습도 사랑스러울 수가, 하면서 그녀는 더욱 흐뭇해졌다.


"미안해, 자기. 60일이나 실린더 안에서 자고 있어서 심심했지?"


"차라리 그냥 거기서 혀 깨물고 죽는 게 훨씬 나았지....네 년의 얼굴을 다시 볼 바에야."


"그런 거 치곤 날 그리워 한 거 같던데...."


그 말에 매튜는 고개를 다시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등받이 쪽으로 등을 피고 자신이 알아낸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사령관실, 자기도 쓰던 거였지? 책상 밑에 뭔가 써놨던데...."


"...."


"스콧, 에반, 제이콥, 아돌프, 쟝, 보리스, 니콜, 타일러, 슈옌....그 외 기타 등등...."


"그 외 기타 등등이라고?"


마지막에 그녀가 생략하려고 하자 그는 눈을 사납게 바꾸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책상 밑에 적혀진 모든 이름들은 그가 직접 적은 것이다. 언제는 너무 외로웠던 적이 있었고, 너무 과거가 그리웠던 때가 있었다. 천인대로서의 과거가 깨끗하고 자랑스럽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때가 그리웠다. 거기엔 정말로 999명의 이름을 적었다. 괴로울 때마다 그 낙서를 보면서 다시 힘을 얻고,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기운을 차리고....그랬었다. 천인대 인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져 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선 그 외 기타 등등이라고 생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코나는 그런 거 따윈 관심없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엔 내 이름까지."


코나는 쿡 쿡 웃었다.


"밀당이야, 자기? 날 지금 이렇게 미워하고 있지만 사실은 날 엄청 그리워했다니....눈물이 나오려고 그러네."


그녀는 진짜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보였고 그 시늉 때문에 그는 더더욱 그녀가 못마땅했고 빨리 그녀를 안 보고 싶었다. 심지어 그 눈물이 진짜 말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나온 눈물이라 더 악질이었다. 매튜는 눈 앞의 그녀, 코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너가 하나도 그립지 않았어. 네 이름을 쓴 건 그냥 천인대의 일원이었으니까야. 난 거기에 적힌 이름들을 보고 힘을 냈지. 싸이코였던 에반의 이름도 내가 보면 힘이 났어. 하지만 네 이름을 보면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짜증만 났지. 차라리 눈 앞에 있던 게 에반이었다면 옛날 얘기도 하고 그랬을텐데 하필이면 너냐?"


"나는 왜? 나도 자기랑 똑같이 싸웠잖아? 같이 사선을 드나들지 않았던가?"


"그 때를 생각할 수록 더 미치겠더군. 네가 보여준 모습이랑 그 때의 모습이랑 전혀 매치가 안 돼. 현실에 타협하고 천인대의 일을 '즐겼다' 가, 다시 눈이 뜨여졌을 때....넌 괴로워하는 나를 위로해줬어. 너의 품이 나한텐 안식처였어. 천인대 및 파이로 몰락의 주범이 너라는 걸 알기 전까지도 나에게 너가 전부였다고. 근데 넌 나한테 뭘 줬지?"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내리치려고 했지만 탁자 위의 수갑 때문에 팔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자신이 주먹을 쥐었다는 것은 보여줄 수 있었다. 그의 사나운 표정과 악 다문 이는 그녀의 웃음을 살짝 가시게 했다.


"넌 내 모든 걸 부수고, 내 아버지도 죽이고! 날 속이기까지 했잖아!"


"...자기, 자기도 레오나랑 똑같아. 이기적이야."


코나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등받이에 등을 대었던 것을 다시 굽혀서 얼굴을 가까이에 대었다. 둘은 아무렇게나 침을 뱉어도 상대의 얼굴을 향할 정도로 가까웠다.


"난 천인대에게 모든 걸 잃었어. 내 엄마 아빠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파이로의 균형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죽었어. 난? 나는 어찌 됐지? 왠 맹인에게 거둬들여지고 억지로 전사로 자라났어. 자기가 나타나기 전에 난 너무 힘들었어. 자기랑 나는 천인대라는 미친 조직에서 유일하게 눈이 뜨여진 사람들이었잖아....그래서 더더욱 자기랑 내가 똑같아 보였어. 내가 한 짓들? 내 복수이기도 했지만 천인대와 파이로는 그렇게 무너져도 싼 놈들이었어."


"...너랑 내가 같다고, 정말로 그리 생각하나? 틀렸어. 너랑 나는 달라."


그는 그녀의 말을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고 냉소를 보이면서 자신과 그녀가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미친 조직에서 유일하게 정상인 2명이 너랑 나라서, 둘은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넌 존나 멍청한 거다. 난 사랑한다고 항상 내 귓가에 속삭였던 건 전부 거짓말이었어.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나에게 있어서 천인대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았어야지."


"천인대가 자기에겐 가족 위치고, 싸이코 에반은 양아치 형제고 스콧은 아버지라서? 자기, 자기야말로 멍청해. 그런 유사가족보다야 곧 가족이 될 내가 있는데 왜 그런 놈들한테 가치를 둬?"


"너한테는 네 모든 것을 빼앗은 개새끼들이었겠지만....나한텐 하나 밖에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넌, 내가 보는 앞에서, 스콧을 죽였어!!"


그가 마지막에 소리를 높히자 그녀는 짝! 하고 그의 뺨을 때렸다. 워낙 강하게 때렸는지 그의 고개가 획 돌아가는 것으로 모자라 때린 부위가 파랗게 물들여지기까지 했다. 코나는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 입을 딱 다물고 눈을 살짝 찌푸리며 화를 내는 희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다시 앞쪽으로 돌린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아직 힘이 남아있는 그녀에게 맞으니 상당히 아파왔지만 그래도 그의 분노는 아픔으로 인해 잠시 망각된다던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함이 없었다.


코나는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킨 뒤에 손을 치웠다.


"...스콧이 내 모든 걸 앗아갔어. 난 복수를 한 거야."


"내 앞에서 죽였어야 했어? 그래, 나한테도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 스콧은. 하지만 그런 쓰레기같은 남자도 나한텐...!"


"아버지, 였겠지. 하지만 난 스콧에게 내 진짜 아빠를 빼앗긴 것으로 모자라 내가 앞으로 받을 부성조차 주지 않았어."


"스콧이 너한테 부성을 안 줬다고!? 그럼 널 거둬들여서 천인대로 키운 건 뭔데!"


"난 천인대가 되길 원치 않았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코나!!"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확실하게 구별했다. 그 정도의 이성은 아직 남아있었다.


"내가 하는 말보다 너가 하는 말을 더 잘 들어줬지. 다른 녀석들에게나 나한테도 쓰지 않았던 '제자' 라는 표현을 너한테만 썼어. 나보다 너를 더 가까이에 뒀지. 나를 여러 번 사지에 보냈지만 너 만큼은 여러 번 보호했고! 왜 네 출격 횟수만 적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냐?!"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내가 원래 살았어야 할 행복한 삶을 부숴버렸는데!"


"....너에게 부성을 주지 않았다면 널 살려두지도 않았겠지."


천인대는 아이마저 죽인다. 화근을 자르는 것과 더불어 자신들이 벌인 학살극에 의해 망가진 아이를 배려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건 그저 살인일 뿐이다. 만일 스콧이 코나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코나가 살아있었을까, 코나를 왜 가장 가까이에 뒀을까, 왜 코나 만큼은 사지로부터 보호하려고 했을까. 스콧은 매튜를 아들로 여겼지만 또 코나를 가장 아끼는 애제자이자 딸로서 여겼다. 하지만 코나에겐 그가 자신을 무엇으로 여겼든 간에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채 망가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스콧을, 천인대를 굳게 믿고 있고 그리워 하는 자신의 전 남친이 너무나도 미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저렇게나 보고 싶어하는 스콧을, 천인대를, 꿈 속에서조차 나오기를 꺼려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그건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기, 그렇게나 스콧이 좋았구나. 그렇다면 앞으로 들려줄 이야긴 자기에게 아주 불행한 이야기일텐데."


그는 모른다. 파이로는 그의 생각 그 이상으로 훨씬 추악하고 그 추악한 파이로가 낳은 천인대들은 그 추악함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던 조직이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알아봤자 원래부터 그런 놈들이 모인 곳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매튜 에이번즈. 저 남자는 천인대가 막장 조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가족이자 형제들이었다는 점으로 그들을 옹호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 진실은 너무 가혹할 테지만....그는 어차피 진실을 원한 것이다.


"천인대의 선발 기준, 뭔지 알아?"


그녀의 그 말에 그는 잠시 에반이 생각났다. 에반을 죽이기 직전 그가 말했었던 천인대의 선발 기준. 그걸 듣지 못한 채 그를 죽였지만 그녀에게 그 말이 나오니 그는 살짝 관심을 보였다.


"몰라. 알아도 의미없겠지."


"어머나...그럼 큰일인데."


그는 저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잘 들어, 자기. 천인대의 선발 기준은....'세상에 어느 정도의 증오를 담을 수 있느냐' 야.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지? 그럼 자기의 경우를 들어 말해줄게. 자기, 난 이전부터 파이로를 지배하는 3인의 회장을 노려왔어. 그 늙은이 3명을 죽이면 파이로와 함께 천인대는 무너질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 마치 지금의 오르카 호처럼 파이로는 3인의 회장에게 비정상적으로 의존하는 체제였으니까. 회장들을 치러갈 때....나를 포함한 여러 천인대들의 상세 기록이 적힌 파일들이 있었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자기, 부모님이랑 사이 안 좋았지?"


사이가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 매튜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들인지도 모를 존재였다. 분명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지만 그 둘은 자신을 아들로 대하지도 않았다. 매튜는 간만에 떠오른 부모였지만 그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코나는 그의 표정이 저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사이가 안 좋은 수준이 아니겠지. 자기는 부모라는 작자들을 혐오하고 있잖아. 그치? 그런데....요즘 좀 이상한 일 없었어? 자기의 부모랑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 왠 어린아이한테 굉장히 잘 해주는 환각이라던지."


"너가 그걸 어떻게...?"


"만일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불행이 사실 배후가 있다면 어떨 거 같아?"


그녀가 말했던대로 그런 환각을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철충에 감염된 AGS와 싸워서 겨우겨우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 역시 큰 상처를 입었다. 그저 아픔으로 인해 뇌가 잠시 환각을 보여준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코나가 하는 말엔 뭔가 더 배후가 있는 것 같았다.


"한 파일을 봤어. 성실한 남자와 자상한 여자의 사이에서 태어나 부모와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날 아이를 천인대로 지목했어. 회장들은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기를 기다렸고, 자신들의 예상대로 그 아이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 정신적으로 더 성숙했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착한 성심을 가졌고, 외로움을 잘 탔다고 했지. 그렇게 그 아이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을 때 행동을 시작했어. 일가족을 잡아들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뇌를 크게 조작해서 성실한 아버지를 불량하게, 자상한 어머니를 표독스럽게 만들고 아이는 그저 이전의 기억을 없애버렸지. 그 상태로 일가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고 회장들은 아이의 마음 속 일부분이 부서지기를, 아이의 인간적인 무언가가 죽기를 기다렸어. 그 아이가 어른으로 성숙해지고 나서도 자신의 북극성, 인생의 나침반을 찾지 못 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스콧을 시켜 에반을 보냈지."


코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코나의 눈동자엔 동정과 안타까움이 섞여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는 그는....눈을 살짝 찡그린 채 입을 조금 벌렸고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 하는 것이었다.


"그 자를 덮쳤던 화학 물질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고 쓰여있었지만, 그들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강화 수술로 태어난 천인대보다 3배 더 강한 자가 우연찮게 탄생했는데. 그들은 개의치 않고 그 자를 천인대에 소속시켰고 그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모든 인생이 기만되고 조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최후까지 천인대에 있기를 선택하고 말았어. 그리고 지금은 그들을 가족으로, 형제로 생각하고 있고. 정말 안타까워...."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매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방대한 량의 정보가 들어와서인가, 아니면 믿기지 않는 진실을 들어서인가.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저 말이 진실일 거라는 보장도 없거니와....무엇보다 그 자가 누구인지 너무 잘 느끼고 있어서 그 정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방금....뭐라고...."


"아이러니하지, 안 그래? 자신이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자가 사실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자들이 부리는 꼭두각시였다니."


"아니...아니야..."


"이게 바로 천인대의 선발 기준이야, 자기. 그 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가 단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었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고, 자신의 일부분도 잃고....심지어 주변에서 줬던 사랑마저 더는 받지 못 했지. 아이는 아이를 외면한 세상에 남모를 분노와 증오를 가지고 있었고 천인대로서 활동할 때 그 동안 묵혀두었던 독기를 방출했지. 아이는 세상을 증오했어. 하지만 아이의 증오가 향해야했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파이로의 늙은 3명이었는데....참 안타까운 이야기야."


"닥쳐!! 전부 거짓말이야!"


주먹을 꽉 쥐고 탁자를 쾅 치려고 했지만 수갑 때문에 팔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고 벌떡 일어서려고 했지만 의자의 수갑에 묶인 다리 때문에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라도 크게 외쳤다.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고 동요하는 모습을 확인하자 코나는 그가 들을 수 있을지 모를 이야기를 하나 더 꺼냈다.


"화학 물질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자기, 지금 스스로가 뭔가 많이 부족해졌다고 생각해?"


"내...내 모든 삶은...."


역시나 듣고 있지 않고 코나가 해준 말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모를 경계에 있어서 그는 그저 부정만 했다. 코나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이 눈 앞에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편안했다.


"이전보다 힘도 잘 안 나고, 좀 느려지고, 왠지 더 쉽게 지치지?"


"스콧....정말 그런 거에요...?"


"자기의 몸 안에 있던 화학 물질들이 거의 다 사라졌어.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시간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어. 100년 정도 지났으니까 그 정도는 없어졌겠지? 그러니까....이젠 일반인이다, 이거지."


"누가 설명 좀 해줘!!"


"그러니까 자기, 이제 밖으로 나가봤자 개죽음만 당하니까 그냥 여기에 있어. 식사도 맛있게 나오고, 시설도 편안하고, 또 주변 여자들도 많잖아? 나도 있고."


매튜는 듣지 않았다. 그저 혼란만 느꼈다. 코나는 그가 저렇게 혼란스러워 하는 게 정말 불쌍했고 그냥 짜잔! 농담이었습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러한 것은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코나는 마치 천일야화의 이야기꾼인 그녀처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라고 작게 속삭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출입문을 열기 전 그를 돌아보며 그녀는 애완동물을 부르듯 혀를 차면서 그를 동정했다.


"저런, 불쌍한 맷....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난생 처음이야....자기의 내면은 너무 연약해. 그러니까 더더욱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거겠지?"


그리고 그녀는 잠시 그가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귀울일 때를 정확히 노려서 그의 정신과 마음을 무너뜨릴 한 가지 창을 던졌다.


"다 끝났어....매튜."


그리 말하곤 그녀는 취조실을 나갔고 그는 자신 밖에 남지 않는 취조실의 고요함 속에서 그저 고개를 숙였다.



☆ ★ ☆ ★



취조 이후, 코나는 몽구스 팀을 시켜 그를 다시 감옥 안에 넣었고 감옥에서 그를 3일간 내버려두었다. 소완은 그를 위한 건강식을 준비했고 오드리는 그가 입었으면 하는 옷들을 제공했고 다프네는 그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 좋은 향을 가진 꽃들로 만든 방향제를 선물했다. 그는 취조 이후 무언가가 크게 상실된 것처럼 무기력하게 행동했다. 그래도 소완이 식사를 가져다주면 먹고, 오드리가 옷을 주면 입어보고, 다프네가 선물해준 방향제를 맡아보는 등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을 향해 주는 선물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받아준 뒤엔 반드시 침대로 돌아가 등을 보이며 눕는다는 것이다.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이 방문했다. 그의 축출에 찬성한 바이오로이드들도 그를 한번 보고자 방문하려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그의 신상을 지키고 있는 리리스에게 거부당했다.


"이제와서 저 분을 뵙고자 하신다니 너무 뻔뻔하기 그지없으신 거 아닌지?"


축출 찬성파들이 올 때마다 리리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들을 되돌려보냈다. 리리스 말고도 컴패니언 시리즈의 모두가 그의 감옥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리리스는 저렇게 찬성파들을 비수로 찌르는 것과도 같은 말을 해서 돌려보낸다면 하치코는 그저 안 된다고만 하면서 고개를 숙였고, 페로와 페더는 무표정과 침묵으로 요청을 묵살했고 펜리르는 으르렁거렸다. 그녀들이 그의 감옥 근처를 지키는 것은 코나의 명령이 아닌 그녀들의 자원이었다.


리리스는 수시로 등을 보이며 누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한번 홍련을 찾아가 그의 상태가 왜 저런지 물어봤었고 홍련은 그때 이렇게 답했다.


"취조 이후로 항상 저러시고 계십니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무기력해졌어요...."


취조 이후에 저렇게 되었다면 현 사령관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걸까? 리리스는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도 아파졌다. 저 분이 누군가를 끌어안는다는 건 질투가 느껴지는 일이지만 자신에게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이니 그 정도는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나 무기력한 모습은 낯설었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거면, 아니 자신이 불가능한 일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리리스는 현 사령관에게 직접 찾아갔고 이에 대해 여쭸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으음, 조금 심했을까나? 그래도 그가 반드시 알아야할 것들이었어. 난 그것들을 말했을 뿐이야. 걱정마렴, 리리스. 나도 너처럼 그를 아끼니까."


아낀다는 주제에 그를 시체로 만들어놓는 전술을 사용했다니....리리스는 현 사령관에 대한 혐오가 한층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자신도 그녀가 좋은 사람이기에 그의 자리를 차지한 그녀를 욕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었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이후로 리리스는 그녀에 대한 호감을 접어버렸다. 펜리르도, 하치코도, 페로도, 페더도 이전처럼 그녀를 대하지 않았다.


그때, 리리스의 바로 앞에 어느 바이오로이드가 다가왔다. 리리스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자신에게 다가온 바이오로이드가 누군지 확인했다. LRL이었다.


"궈, 권속은...."


LRL은 고개를 옆으로 빼어서 감옥 안의 그를 확인했다. 등을 보이며 누운 채로 미동 하나 없는 그.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리리스를 향해 물었다.


"내가 가까이에 가도 되겠느냐...?"


"네."


리리스는 옅게 웃으면서 그에게 가는 길을 허락했다. LRL은 몇 안 되는 축출 반대파였고 오르카 호의 아래에 갇히는 그를 항상 보고싶어 했다. 리리스가 길을 비켜주고 LRL은 다다닥 달려가 그의 감옥 앞에서 멈췄다. LRL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리고 가방을 열어서 참치캔 3개를 꺼내 그에게 건냈다.


"궈, 권속! 안드바리를 겨우겨우 설득해서 짐이 가져온 것이다! 일...어나주겠나?"


그 말을 들었던 것이 틀림없는 그는 마치 무시하는 듯 움직이지 않았고 LRL은 주눅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는 침대에서 몸을 때고 LRL이 보이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정말로 반가운지 살짝 기죽었던 얼굴이 다시 화사하게 돌아왔다. 그는 LRL 근처로 가 그녀가 넣어준 참치캔을 받았다. 3개 중 하나는 그녀에게 던져준 그는 말없이 참치캔의 뚜껑을 깠고, LRL도 서둘러 캔 뚜껑을 따냈다. LRL은 포크로 참치를 덜어먹었고 그는 맨손으로 참치를 덜어먹었다. 이 행위는 LRL을 위해 매튜가 고안해낸 것으로 LRL 특유의 그 감성을 위해서 서로가 참치캔 하나씩을 가지게 된다면 꼭 서로를 마주보고 이것을 먹는 것이다. LRL은 마치 결의를 다지는 것 같다고 좋아했으며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면 항상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먹는 것만 가능할 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둘의 참치캔이 텅텅 비었다.


"권속,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LRL은 그와의 대화를 위해 오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오늘은 인간에게 있어 생일이나 다름 없는 날이다. 생일이라고 했지만 그녀가 만들어진 날이 아니었다. 오늘은


"바로 권속과 내가 만난 날이지!"


LRL과 매튜가 처음 만났던 날, LRL은 지금처럼 멀쩡한 옷이 아니라 이리저리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100년 동안 등대를 지켜온 LRL을 칭찬해주면서 그녀와 교감했고 그녀는 그가 오르카 호의 사령관임에도 그를 격식없이 대했고 그도 그걸 더 선호했다. 오르카 호에 오게 된 LRL을 위해 오드리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감성을 제대로 자극시켜주는 검은색의 고스로리 드레스를 만들었고 LRL은 그와 오드리에게 무척 감사하다면서 뽐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봤던 책에 적혀있던 드래곤 슬레이어가 소방도끼가 아니라 긴 장검인 것으로 묘사되었으니 만큼 긴 장검도 하나 만들어주었다.


그는 그저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을 LRL이 1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홀로 등대를 지켜온 것에 대한 훌륭함과 그 동안 느꼈을 고독에 대한 보상을 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제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 해도 어린아이처럼 만들어졌으니가 그녀를 어린이로 인식하였다. LRL 뿐만이 아니라 아쿠아, 코코, 닥터, 더치 걸 같은 어린아이 바이오로이드에게도 그는 무척이나 잘 해줬는데 이는 그가 살해한 여러 아이들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LRL은 그가 아무 말이 없지만 자신을 보는 눈은 이전이랑 똑같다는 걸 알았기에 주눅들지도 풀 죽지도 않았다.


"그 동안 홀로 먹어왔던 참치는 이상하게도 그 깊은 맛이 살아나지 않았으나 권속과 함께 드는 이 참치는 그 맛이 극상이로군!"


이렇게 말할 때면 그는 항상 LRL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LRL도 그의 강하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 정말로 행복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없다. 조금만 뻗으면 닿는 거리지만 그는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


"분명....권속의 옆에서 먹는 건 더더욱 맛있을테지. 그, 그러니까 권속! 조금만 기다려! 내가 다른 권속한테 잘 말할테니까...."


"LRL."


그러자 그가 드물게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LRL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젓다가도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참치를 가져다줘서 고마워. 안드바리가 허락하지 않았을텐데."


"후...후후! 안드바리라 할지라도 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원하는 것을 영원히 지킬 수 없는 법이지!"


"훔쳤구나. 안드바리가 화낼 거야."


LRL을 쓰다듬어주지 못할 뿐이지, 그는 평소처럼 그녀를 대하였다. LRL은 이렇게 즐겁게 그를 보면서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척 심각한 상태로 실려왔던 그가 떠올랐다. 그때를 떠올릴 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고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LRL은 그의 앞에서 그러한 추태를 보일 수 없다 생각했고 곧 자신의 소방도끼를 건내면서 말했다.


"자! 받거라."


"드래곤 슬레이어를...? 네 보구잖아."


"특별히 빌려주는 것이다! 권속은 무기가 없으니 이거라도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 수복되고 튼튼하게 다시 지어진 것이었지만 소방도끼 만큼은 그대로였다. 그리 크지 않고, 도끼날의 이가 조금 나간 그것을 내려놓고 그가 있는 쪽으로 밀어넣은 LRL은 당당한 포즈를 취했다.


"들어보거라.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댈 선택할지 안 할지 직접 확인해야만 한다!"


들어보라는 말을 감성적으로 말했고 그는 옅은 웃음을 띄면서 소방도끼를 집었다. 그저 평범한 소방도끼일 뿐이지만 LRL은 그가 그걸 들어올리자 눈에 띄게 좋아했다.


"오오오! 드래곤 슬레이어의 선택을...! 축하한다, 권속! 드래곤 슬레이어의 두번째 선택자가 되었구나!"


"그런 거 같네."


"축하한다! 아, 그래도 명심하거라. 준 게 아니라 빌려준 거다! 언제든지 찾으러 올 테니 품에서 떨어뜨려놓지 말거라!"


"알았어. 항상 소중히 가지고 있을게."


"좋다! 그럼 이 몸은 돌아가서 다음 만찬을 약탈해야겠구나! 잘 있어라!"


호다닥 뛰어가면서 LRL은 웃었고 그는 LRL이 멀리 가자 소방도끼를 들고 침대 근처에 놓고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 그가 보인 모든 모습을 보고 있던 2명의 바이오로이드, 용과 라비아타가 방금 광경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후유증은 없나보네요. 건강 상태도 양호해요."


"무기력한 것만 뺀다면 그는 괜찮군."


그를 가둔 감옥 안에는 수감자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기기가 있고 그녀들은 그 기기에 보이는 정보를 보며 말했다. 그는 그때처럼 단식하지 않고 식사든 간식이든 잘 먹는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그는 물만 먹으면서 운동만 했다면 이번엔 먹을 것만 먹으면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도 LRL이 가져온 참치를 하나 먹고 누웠다.


라비아타와 용은 적어도 그가 식사는 하니까 건강에 크게 이상이 없을 거라는 것엔 안심하고 있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무기력은 예상치 못 했다.


"그가 무기력해진 것은 사령관과의 면담 이후였지. 그의 몸엔 어떠한 상흔도 없었으니 분명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무언가가 그를 저리 만든 것이 분명하오."


용이 하는 말은 간단하게 현 사령관이 그에게 무슨 말을 했든 행동을 했든 그것이 그의 정신적, 심리적인 요인을 미쳤고 그 요인이 곧 무기력함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 사령관과의 면담 이후이면 당연히 그녀에게 무슨 짓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둘은 감히 그녀에게 물어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두려워서도 아니고 여동생 혹은 부하들이 그런 짓을 당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녀를 마주하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어서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고, 저 분께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라비아타가 답답해하고 있을 때 용은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했다. 자기도 답답해 미칠 노릇이지만 그러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어떤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우선 그녀, 코나에 대해서다. 코나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발키리가 발견하고 이를 레오나에게 보고, 레오나는 지휘관 회의에서 이 정보를 모두에게 알렸다. 그의 축출이 벌어진 이후 그녀는 사령관에 되었고 모두를 효율적으로, 또 최소한의 희생만 일으키면서 지휘했다. 그녀는 그 때까진 모든 바이오로이드에게 친절했다. 그런 그녀가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바이오로이드들이 숨기고 있던 전 사령관인 그를 알고 나서이다. 그녀는 처음엔 지휘관 개체들을 부하들 앞에서 폭행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공개적인 망신을 주었고 그 후엔 부하들을 노렸다. 특이한 건 그의 축출에 찬성한 바이오로이드들만을 노렸고 반대와 중립은 그대로 두었다. 용은 중립을 지켰고 그래서 그녀로부터 안전했다.


무적의 용은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들 사이에서 가장 지휘가 높은 지휘관 개체로서 코나를 보좌했고 코나 역시 그녀의 방대한 전투 데이터를 신뢰하여 부관으로 두었다. 부관이었던 그녀는 코나가 매튜의 탈출 영상을 수시로 봐온 것이 떠올랐고 이를 토대로 여러 생각을 하다가 라비아타에게 물었다.


"라비아타 공."


"네."


"만일의 일이오. 만일, 그녀와 그가 안면식이 있는 구면이었다면...어떨 거 같소?"


용의 질문에 라비아타도 뭔가 생각에 빠졌다. 그녀와 그가 구면이라면 서로는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라비아타도 여러 번 보았듯 그녀는 그를 만날 때 유독 신나보였다. 그녀의 신난 모습은 독 안에 든 쥐 작전 이후로 그가 오르카 호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계속 그러했다. 이는 그저 인류 최후의 여성이 인류 최후의 남성을 알았고 이를 통해 인류 재건이 예정보다 더욱 더 빨라질 것임을 알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 취조실 안에는 영상을 볼 수 있는 카메라도, 안에서 둘이 나눈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스피커도 없다. 그걸 알 수 있다면 둘이 가진 모종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두 분이 구면이라도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진...."


"그렇소. 그건 아무도 모르지.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고 싶으나 솔직히 불가능하잖소. 그는 무기력하고, 그녀는..."


둘은 그 이후로도 수시로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를 만나러 온 바이오로이드들, 감옥 안에서 그의 행동. 모두 변함없이 그대로고 오르카 호는 평화롭다. 그러나 둘은 이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고 곧 그녀들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어느 때와 똑같이 라비아타와 용이 그의 상태를 확인 중이던 때에


"언니!!"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아타가 가장 먼저 그 목소리에 반응했고 용은 그녀보다 한 박자 더 늦게 반응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콘스탄챠였고 언니인 라비아타는 여동생의 다급한 소리에 예민하고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항상 데리고 다녔던 보리도 없이 콘스탄챠만 왔고 그녀는 목소리 뿐만 아니라 행동도 다급했다.


"무슨 일이니?"


아직 상황은 모르지만 콘스탄챠가 자신을 재빨리 부르는 것으로 보아 뭔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건가 싶어 라비아타가 조심스레 물었다. 콘스탄챠는 라비아타의 물음에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목구멍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아 그저 우왕좌왕했다. 말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고개를 가만히 둘 수 없는 콘스탄챠를 보는 라비아타는 더더욱 불안해졌다.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큰일이 벌어진 거 같소만."


용은 재빨리 무언가 큰 것이 있다는 걸 말했고 콘스탄챠는 그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아타는 일단 그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안내하렴!"


그 말에 콘스탄챠는 빠르게 자신이 온 방향을 역행하여 뛰어갔고 둘은 그녀를 따라갔다. 콘스탄챠를 따라가면 갈 수록 보리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바로 보리의 짖는 소리였다. 보리는 콘스탄챠처럼 착하고, 흔히 알려진 개의 정보처럼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 강하다. 주인을 향한 충성심 외에도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빨을 보이거나 짖거나 하지 않는 정말로 훌륭하다. 그런 보리가 짖고 있다. 라비아타는 보리가 짖는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철충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오르카 호 안에 철충이? 그럴 리가 없다. 그랬다면 콘스탄챠가 이리 당황할 리 없다. 그렇다면 보리가 오르카 호 안에서 철충을 발견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셋이 도착한 곳은 약한 조명이 켜져 있는 방이었고 거기엔 라비아타와 용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둘 다 경악을 금치 못 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어딜 가나 했더니, 언니랑 용은 데리고 왔구나?"


코나가 있었다. 라비아타는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 콘스탄챠의 목소리를 못 나오게 할만 하다는 것을 알았고 곧이어 자신 역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심각하고도 엽기적인 일이라는 걸 알았다. 용은 곧바로 격노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용의 격노를 담은 말에도 코나는 싱긋 웃고는 귀에 손을 대어 말했다.


"몽구스 팀은 그를 취조실로 데려다 놓도록."


이어피스에 손가락을 땐 그녀는 팔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왜? 이게 그를 여기에 묶어둘텐데! 너희들한테도 좋을 거야."


"그대는 사령관이오! 그런 자가 이러한 짓을 하다니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오? 이건 미친 짓이오! 정신 나간 일이란 말이오!!"


용은 전 사령관이 그 많은 전술적 실수를 저질러도 호통을 치지도 않고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모두의 앞에서가 아닌 그와 단 둘이서만 있을 때 그의 전술적 실수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면서 그것을 보강할 수 있도록 조언 역시 해준다. 물론 그렇게 노력했어도 그의 전술적 견해는 높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은 그에게 한 번도 분노하지 않았다. 호라이즌이 꽤나 피해를 입었을 때도 그를 질타하지 않았다. 그랬던 용이 코나에게 매우 격노하고 있다.


용은 자신이 인간의 명령에 항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에 감사했다. 당장 그녀를 막아 그 미친 모습을 멈추려고도 했지만 그녀는


"무적의 용과 라비아타 프로토타입, 그리고 콘스탄챠 S2는 잘 들어라. 당장 돌아가고 오늘 너희들이 본 이 곳과 이 광경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도록. 그리고 보리를 당장 치워라."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차가운 카리스마를 보이며 넷을 압도했다. 용은 분명 자신은 인간이 내린 명령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녀가 내린 명령에 그만 몸이 얼어붙었다. 이 모습은 또 뭐지? 그녀의 뒤에 강력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콘스탄챠는 깽깽거리는 보리를 확 끌어안아 마치 코나로부터 떨어뜨려놓듯 데리고 갔고 모두 서로의 눈빛만 교환하며 조용히 방을 나갈 뿐이었다. 코나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나가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 앞에 있는 광경에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방을 발랄하게 폴짝 폴짝 뛰며 나갔다.



☆ ★ ☆ ★



다시 취조실에서 그녀와 그가 마주했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그는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고개도 옆으로 돌리고 있는 그는 이전처럼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코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앞을 톡톡 치면서 그를 불렀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할 일을 계속했다.


"요즘 많이 무기력하다고 들었어. 밥은 잘 먹지만 다 먹고 나서는 무조건 눕는다고. 그러다가 소 된다?"


"...."


"난 뚱뚱해진 자기도 좋아. 귀여울 거 같아. 항상 근육만 있는 몸인데 지방이 좀 생기면 좋을 거 같아. 곰처럼."


"...."


"자기의 무기력한 모습도 매력 있고 좋지만 역시 자기의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을 모두가 좋아하니까. 자기의 무기력함을 이겨낼 수 있는 첫번째 코스를 진행할게. 총 3가지 코스가 있어."


"...."


그는 끝까지 무시했다. 안 들리는 척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말을 안 들을 리가 없다는 말에 첫번째 코스를 진행했다.


어차피, 그는 반응할 수 밖에 없다.


"첫번째 코스는....자기가 이 곳의 사령관이었을 때 바이오로이드들과의 추억을 보는 거야."


그녀는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고 카메라도 스피커도 없는 취조실 안에 있는 유일한 모니터의 전원을 켰다. 번쩍! 하고 검은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화면에 다채로운 색들이 가득 찼다.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방의 사각에서 찍고 있는 각도였다. 그는 그 영상을 보며 탈론페더의 카메라인 것을 알았다.


여러 모습이 찍혀있었다. 그저 사령관실만이 아닌 식당, 복도, 화원, 목욕실, 정비실....오르카 호의 모든 곳에서 찍힌 모습들이었다. 그녀가 그는 무조건 반응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이 그와 교감했고 그 역시 거기에 행복해하는 모습들이 잔뜩 찍혀있었다.


콘스탄챠가 커피를 들고 와 서류 작업 중인 그에게 건내고 그는 그 커피를 마셔서 맛있다고 했다. 콘스탄챠는 기뻐하며 웃었다.


LRL과 함께 참치캔을 까먹었다가 안드바리에게 공평하게 혼났다.


켈베로스와 하치코, 펜리르와 함께 오르카 호를 365바퀴를 돌았고 셋은 뛰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불가사리가 그와 함게 초코 도넛을 나눠먹다가 드라코와 핀토가 난입해 도넛의 반을 훔쳐가고 미호가 슬쩍 초코 도넛을 남몰래 가져가서 도넛이 얼마 없자 그가 불가사리에게 도넛을 양보했다.


페로가 그의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었고 그 모습을 페더와 리리스가 흐뭇해하며 보았다. 페로는 그 행복한 시선과 그의 따뜻한 품이 만족스러웠는지 웃으면서 자고 있었다.


리제가 다른 바이오로이들을 질투하고 있을 때 그가 리제를 꼭 안아주자 리제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으나 그는 그런 리제가 귀여운지 옅은 웃음을 띄웠다. 행복한 리제와 함께 다프네와 드리아드, 아쿠아 이렇게 총 4명과 함께 예쁘게 가꾼 화원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백토와 모모에게 쫓기는 뽀끄루 대마왕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뽀끄루를 숨겨두고 둘에게 숨겼다. 백토는 젠틀맨이 세뇌당한다면 구해주겠다면서 전기톱을 보였고 그때 그는 간담이 조금 서늘해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들키지 않았다.


아르망이 무릎 위에 앉고 그는 그런 그녀를 쓰다듬었다가 옆에서 샬럿이 부럽다는듯 쳐다보자 샬럿도 쓰다듬어주었다.


아스널이 듣는 귀가 많음에도 상관없이 성적인 말을 하고 있을 때 비스트헌터는 에밀리의 귀를 막았고 그는 얘써서 무시했었으나 아스널은 꺾이지 않았다.


오드리가 만든 옷을 더치 걸과 트리아이나가 입자 그는 그걸 정말 어울린다고 칭찬해주었고 오드리는 그의 눈이 높다는 것을 무척 흥미로워 했고 더치 걸과 트리아이나는 자신이 어울린다는 말을 듣자 무척 쑥쓰러워했다.


라비아타가 그에게 검을 들이밀었던 때를 수시로 사과했고 그는 라비아타를 껴안아주면서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대답하자 라비아타는 무척 당황스러우면서도 그의 품과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 듯 거절하지 않았다.


네오딤이 금속으로 그에게 하트를 만들어주고, 에키드나와 스카디는 그를 적극 유혹하고, 팬텀은 그의 곁에서 주뼛거리고, 레이시는 두통을 호소하면 그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졌고 그러면 왠지 모르게 고통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폰이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를 껴안고, 린티는 그걸 능글맞게 쳐다보고, 슬레이프니르는 자신도 안아달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블랙하운드와 하르페이아는 그의 등에 몸을 기댔다.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티아멧을 말 없이 위로해주고, 스스로를 몰아붙히는 랜서 미나의 훈련량을 줄이라는 명령과 함께 항상 힘내줘서 고맙다면서 그녀를 칭찬하면 그녀도 나쁜 기분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소완이 해주는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면 소완이 좋아했고, 100년 전 코나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고 그녀가 스콧을 죽였을 때 느꼈던 충격이 가시지 않아 사령관으로서 집중하지 못할 때 위로해준 마리아, 포티아가 소완의 특훈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차린 요리를 그가 맛있게 먹어주자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했고, 아우로라의 초콜릿을 먹으면서 달다고 말하면 아우로라가 아주 기뻐했다.


힘들어하는 그가 자신을 위해 응원해주는 캐럴라이나를 보자 힘을 내었고, 밤에 키르케와 함께 술을 마셨고, 천인대를 그리워하던 매튜를 위해 써니가 서커스 묘기를 보이자 그는 신기해하면서 그녀를 보면 써니는 웃었다.


포츈이 과로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그가 포츈을 직접 도와주자 포츈은 그를 껴안아줄 정도로 좋아했고, 이그니스가 땀을 닦아달라고 부끄럽나는듯 부탁하자 그는 능숙히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고, 노리는 것처럼 그에게 육탄 공세를 하는 엘븐과 그의 팔을 껴안자마자 얼굴을 붉힌 다크엘븐 그리고 항상 느긋느긋하게 그의 곁에 있는 세레스티아....


쉬고 있는 그에게 웃으면서 찰싹 달라붙는 네레이드, 자신의 화장을 자랑하고 그가 칭찬해주면 웃음이 멈추지 않는 운디네, 단 둘이 있으면 접근해서 그를 보며 쑥쓰럽게 웃는 세이렌, 그에게 소악마스러운 장난을 치며 킥킥 웃는 테티스를 보며 웃어보이면 테티스는 벌쭘해하면서 그에게 다가가면 그에게 역공으로 장난을 당하는 모습....


용이 사령관실에서 그와 단 둘이 있을 때 그의 전술적 실수를 지적해주며 거기에 조언을 해주고, 그가 비록 용의 조언과 지적으로부터 성장은 하지 못 했어도 그녀로부터 들은 지식을 공부하려는 모습에 흐뭇해하는 용....


그는 그 모습들을 슬쩍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축출되었어도 그녀들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자신에 의해...많은 바이오로이드가 죽었다. 매튜가 그녀들의 축출에 별 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스스로 사령관직을 내려놓은 이유였다. 그녀들이 자신을 내쫓은 거에 그는 불만이 없었고 이는 당연한 것이라 여겼지만....그도 저 때가 그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정도로 저 때를 그리워했다. 코나 역시 매튜도 저 때를 그리워하고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기꺼이 되돌릴 거라는 걸 알기에 그가 자신의 말을 안 들었어도 괜찮았다. 첫번째 코스를 밟는 순간 두번째, 세번째 코스를 밟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어때, 자기? 저때가 그리워?"


"....그리워."


"돌아가고 싶지? 어렵지 않아. 그저 자기가 여기에만 있으면."


"하지만...."


"자유도 좋아. 자유로운 것도 최고지. 하지만 봐봐. 자기를 내친 아이들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를 사모했던 아이들도 있어. 저런 여자들을 두고 정말 떠날 거야?"


"....."


"떠난다면 언제 돌아올 거야? 자기가 떠나면 저 애들은 오르카 호에서 자기를 기다리겠지. 그럼 자기는 저 애들을 위해서 대체 언제쯤 돌아올 거야?"


코나가 말한 첫번째 코스는 바로 그와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의 추억을 말해주면서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던 그립다는 말은 빈말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 정말로 그리운 것이다. 그저 회상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때의 모습을 본다면 그리움은 배가 될 것이고 코나가 그에게 기다리는 그녀들을 위해서라고 말하면 그가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날 기다리는 모두....그 녀석들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난 그래도 떠날 거야. 나갈 수도 없겠지만 만일 나갈 수 있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나갈 거야. 철충에게 죽더라도."


코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결과와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 그는 망설이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정한 걸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남자니까.


"그래. 맷...자기는 그런 사람이지. 그럼 자기, 몇 가지 물어볼게."


코나는 다음 코스로 넘어가기로 했다.



☆ ★ ☆ ★



『나는 자기와 바이오로이드 사이의 갈등을 봤어. 카메라 기록으로 본 거지만. 자기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아이들에게 항상 당당하지 못 하게 있었어. 왜?』


레오나를 비롯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그 방송을 들었다. 분명 취조실 안에 스피커는 없었으나 코나는 닥터가 만들어준 소형 스피커를 통해 오르카 호 전체에 자신과 그의 대화를 들려주고 있었다. 코나는 또한 이 방송을 그의 축출에 찬성한 년들이 들었으면 했다. 레오나와 발키리를 비롯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들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모두 방송을 듣고 있었다.


『알래스카 때를 기억하나?』


『응. 기억하지.』


『그럼 거기서 내가 가장 많이 죽였던 것도 기억하겠군.』


『자기는 거기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소속이라면 누구든 죽였지. 하지만 자기, 그건 좀 멀리 갔어. 자기가 죽인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와 이곳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다르잖아?』


『그렇다고 생각하나? 넌 모를 거다.』


발할라의 자매들은 모두 그 방송을 유심히 들었다.


『후방을 습격해 보급품을 관리하던 안드바리 모델의 머리통을 쪼개서 죽였고 난 안드바리를 보면 그 때가 떠올라. 알비스 모델의 배를 뚫어버렸던 내 주먹, 베라 모델을 검으로 두 동강냈었지. 하늘로 날아올라 도망치는 샌드걸 모델을 끝까지 쫓아가 머리를 뽑아버렸고 그렘린 모델이 만든 기계와 함께 폭사시켜 새까만 인형처럼 만든 적도 있었어. 님프 모델의 머리에 샷건을 쏴서 머리를 터뜨렸었고 발키리 모델의 목을 부러뜨렸고...』


『레오나 모델의 척추를 부러뜨린 뒤에 낭떠러지에 떨어뜨렸었지.』


『....그래. 나도 안다. 그때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오르카 호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아예 다르지. 하지만 난 그녀들을 보면 떠올라. 내가 잔혹하게 죽였던 그 시체들을. 하지만 이제와서 내가 명복을 빌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지?』


『발할라로 갔을 거야. 싸우다 죽었잖아?』


『그건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이었어. 마치 사람이 개미를 밟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지.』


『그러니까 자기는....이런 식으로라도 그들에게 명복을 빌어주고 싶다는 거네. 자기가 죽이고, 천인대가 죽였지만 그때를 속죄....』


『속죄는 바라지도 않아!』


그의 외침에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바이오로이드들이 움찔했다. 레오나와 발키리만이 그저 듣고 있었다.


『....그냥, 발할라의 자매들을 보면....그 때만 떠올라. 내가 죽일 일이 없는 아군이 되었어도 떠오른다고. 그래, 난 의도적으로 그녀들을 피해다녔고 그녀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 했어. 항상 답답하게만 보였겠지. 하지만 그 때를 기억하는 나에게 설령 아군일지라도 내가 잔혹하게 죽인 적이 있는 모델과 똑같은 바이오로이드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이렇게 말해도 난 스틸라인 다음으로 그녀들을 많이 소모했어. 내가 도게자를 하더라도 절대 용서받지 못 할 거다. 영원히....』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소속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축출 반대파였던 발키리마저도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자신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이러한 과거를 가졌던 자신이 스틸라인 다음으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를 소모했던 때는 언급하였고 그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건 자기비하였고 그 자기비하는 발할라 자매들에게 심장을 꿰뚫는 꼬챙이로 다가왔다. 레오나는 큰 충격을 받아 굳은 상태였다.


『그럼 스틸라인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것도 비슷한 이유네.』


『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만이 아니라 스틸라인이 임무에 포함되어 있다면 개의치 않고 죽였다. 너도 봤잖나. 우리가 쏜 무기에 다채롭게 죽어갔던 스틸라인의 바이오로이드들....불굴의 마리는 나에게 계속 덤벼들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녀를 어찌했지? 아예 일어서지도 못 하게 다리를 부러뜨리고는 목을 부러뜨려 죽였지! 사지가 날아갔던 노움....아예 시체도 흔적도 못 남겼던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몸의 반쪽이 날아간 실키....전부 오르카 호의 스틸라인이 아니지만....』


『볼 수록 떠올려진다는 거네. 자기의 탓이 아니야.』


『....난 그저, 나의 멍청한 지휘로 죽어가고 다쳐간 그녀들을 위해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거 외엔 하지 못 했어. 이래도 내 탓이 아니라고?』


마리도, 다른 스틸라인의 바이오로이드들도 모두 소스라치게 놀란 상태였다. 자신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어갔다는 것이 놀라운게 아니었다. 마리는 그의 또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둠 브링어는? 묘하게 꺼려했잖아.』


메이가 화들짝 놀랐다. 다른 둠 브링어 소속 바이오로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랑 내가 같이 죽었을 때를 기억한다면 너가 말해봐라.』


『내가 가짜 좌표를 보냈고 거기서 둠 브링어가 직접 거기에 전략 폭격을 가했고 우린 거기서 폭격에 휘말려 죽었다....고 생각했었지. 사실 이렇게 살아있는데.』


『날 죽였던 바이오로이드들이니까 내가 조금 꺼려했던 것도 있겠지. 나도 그녀들의 화력은 잘 안다. 그렇다고 둠 브링어가 내린 폭탄의 폭발을 본다면 내가 죽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느꼈던 열, 굉음, 충격, 고통....지금도 기억해.』


『그럼 자긴 둠 브링어를 싫어해?』


코나의 물음에 메이가 특히 자세히 들으려고 했다. 코나도 이 질문을 가장 유심히 들을 자가 메이라는 것을 알고 뱉은 말이었다. 메이는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답이 나오면 어떡하지 하고 초조해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메이의 기분을 배려한건지


『....가짜 좌표를 준 네 잘못이지, 둠 브링어의 잘못이 아니야.』


메이가 생각했던 답의 반대를 말했다. 메이는 안심하면서도 더더욱 크게 상심했다.


『페어리 시리즈와는 사이가 좋았는데 레아랑은 별로였던데. 왜?』


『레아가 옳다. 레아를 제외하면 페어리 시리즈들은 정원사가 본업이었지. 난 그런 바이오로이드마저 전투에 투입하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자기 동생들을 사지로 내모는 사령관에게 호의를 보이는 언니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지?』


『그럼 레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동생들을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하고 싶군. 이래봤자 내가 레아의 여동생들을 죽일 뻔 했던 건 변하지 않을 테지만.』


리제, 다프네, 아쿠아, 드리아드가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동생들의 시선을 등으로 느끼고 있음에도 정원에 물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그의 속마음을 이제서야 알자....아까부터 한 식물에게만 계속 물을 주고 있었다.


『칸도 자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던 거 같던데. 자기는 칸을 어찌 생각해?』


『훌륭하지. 나는 배웠어도 그걸 써먹지 못 했지만 칸은 앵거 오브 호드를 훌륭하게 지휘했다. 내가 지휘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이더군. 칸이 아니었다면 그 전투는 철충들이 승리했겠지. 칸은 자기 동료들을 아끼지만 난 그런 동료들을 비효율적으로 지휘하는 것으로 모자라 소모하려고도 했지. 난 지금까지도 칸에게 고개를 들 수 없다.』


『칸이랑 직접 싸워봤잖아. 어땠어?』


『지휘도 훌륭한데 본인의 전투력도 출중했다. 칸의 공격 하나하나는 내가 온 신경을 집중해서 피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내가 지는 전투였지. 모든 전투가 그랬다. 칸의 일격 하나하나가 전부 그랬어.』


앵거 오브 호드의 바이오로이드들의 가슴이, 특히 칸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후에도 그는 자기가 느끼는 바이오로이드들에 대해서 말했다. 매튜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죽인 적이 있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가 그녀들에게 깎듯이 대한 것도, 그녀들을 계속 배려했던 것도, 그녀들의 무시와 멸시를 그저 받아들였던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인대로 활동했을 땐 그녀들을 직접 죽였고, 오르카 호의 사령관이 되자 그녀들을 소모했다. 매튜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전사도 군인도 아닌 그냥 살인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전사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야. 난 그냥 살인마지. 무고한 바이오로이드를 죽인 살인마. 행복한 가정을 파괴하는 살인마. 아이를 죽인 아이 살인마. 지금도 그때랑 별로 크게 다르지 않아. 내가 직접 죽인 것과 내가 내린 명령으로 간접적으로 죽인 것의 차이지. 이런 주제에 난 너가 보여줬던 영상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어. 바이오로이드를 소모한 주제에 바이오로이드들과 행복하게 지내던 때를 떠올리며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희대의 미친 사이코패스. 그녀들에게 사과할 권리도 없어. 내 지휘로 인해 죽은 자들만 불쌍한 거지....차라리 네가 와서 다행이야. 더 이상 내 멍청한 지휘로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자기를 좋아하는 애들도 있잖아.』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난 그녀들을 무책임하게 소모했어. 너가 봤을 땐 어떻지? 이랬는데도 난 여기에 있을 권리가 있는 것 같나?』


『그러면 더더욱 자기는 여기 있어야지. 자기가 소모시킨 바이오로이드에게 미안함을 느낀다면 자기는 여기에 남아서 평생을 속죄해야하지 않겠어? 그런데 자기를 봐, 무책임하게 떠나려고 하잖아. 그게 옳은 거 같아?』


『그녀들을 지휘할 능력이 되지 않음에도 사령관이 된 시점부터 난 무책임한 게 맞아. 책임 질 능력도 없는 주제에 사령관이 된 멍청이지. 너가 세운 작전에서 난 그녀들에게 죽었어야 했어.』


두번째 코스가 이거다.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좋았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자신과 그가 나누는 대화를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것이다. 그 방송을 듣고 축출 찬성파는 그의 진심을 알고 후회하기를, 중립과 반대도 여기에 슬픔을 느끼길 바랬다. 게다가 예상치 못 했던 효과까지 얻게 되었는데 바로 매튜가 말하면서 감정에 복 받쳐 그만 자신의 본심을 말해버린 것이다. 덕분에 바이오로이드들이 느낄 죄책감과 앞으로 닥칠 후회가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즐겁기 짝이 없었다. 찬성파든 반대파든 중립파든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동요할 것이다.


매튜는 바이오로이드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항상 이를 숨기고 비밀로 뒀다. 하지만 그녀들은 알고 있다. 그가 비밀을 숨기고 있고 그 비밀 때문에 괴로워 한다는 걸. 하지만 그는 이 비밀을 절대로 다른 누군가에게 풀지 않았다. 그녀들은 비밀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데도 그 고통을 참으려고만 하는 그가 답답했고 싫었다. 그도 그녀들이 이러한 점을 싫어하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비밀과 자신의 괴로움을 함부로 풀 수가 없었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어 그녀들에 대한 그의 평가가 그토록 낮았던 것이다.


『자기는 이때까지 쭈욱 괴로웠던 거네. 천인대로서의 일이 괴롭고 감추고 싶은 흑역사였겠지. 하지만 그건 감춘다고 없어지는 과거가 아니었어. 천인대라는 미친 조직을 증오했지만 형제로서 가족으로서 사랑하기도 했지. 스콧을 아버지처럼 생각했잖아. 어쩌면 현실의 아들이 그러하듯 아버지에게 애증을 품듯이 자기도 스콧에게 애증을 품었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지는 애증을. 그런데, 누군가가 그 형제들을 죽도록 유도하고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모자라 자기도 죽였지.』


『좆나 뻔뻔하게 말하는 군.』


그는 이를 으드득 갈았고 그 이 가는 소리가 방송에서도 크게 들렸다. 매튜는 그 형제들을 죽도록 유도하고 아버지를 죽인 범인인 그녀가 마치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닌 그저 남에게 벌어진 것처럼 그를 동정하듯 말하자 그녀가 유독 더 증오스러웠다.


『그 때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았구나. 100년 전 일이 되었지만 자기에겐 여전히 바로 몇 초 전의 일처럼 느껴졌겠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들이 100년 전 일이 되어버렸는데 깨어나고 나니 왠 예쁜 미녀들이 자기를 데려다가 사령관 자리에 앉혔지. 자기는 사령관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과거의 기억에도 빠져있었어.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지만 자기는 그만 실수를 저질렀지.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잊으려고 하는 실수를 말야.』


그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악을 말하기엔 너무 두려워서 그저 감췄지만 그건 독이 되어 자기를 침식했고 자기는 거기에 고통스러워했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들을 부르지 않았네. 자신의 죄악이 바로 눈 앞에 그려질 테니까.』


『....』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입을 드디어 열었다.


『...나를 향해 웃고, 나를 좋아하는 모습....그건 순수한 의도고, 순수한 사랑이었겠지. 하지만 난....다르게 보여. 마치 천인대였던 매튜 에이번즈가 지금의 매튜 에이번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난....바이오로이드에게 그 무슨 말도, 해선 안 되는 놈이야....』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말을 멈추고 그저 먹먹해진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모두, 이제서야 그의 본심을 알았다. 그는 그녀들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녀들에게 큰 죄책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미워하고 혐오한다. 그녀들이 봤던 그의 비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의 진상이 풀리고 이젠 그녀들 모두가 알게 되었다. 메이는 훌쩍거리며 울었고, 마리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눈을 찔끔 감았고, 칸은 잘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피웠고, 레오나는 홍차의 수면이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레아는 주저앉아 흐느꼈고, 홍련은 다른 몽구스 팀의 위로를 받고 있지만서도 슬픔이 밀려왔다. 라비아타는 말 없이 눈물을 훔쳤으며 용은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의 모든 걸 알았고, 그의 비밀을 알았고, 그의 고통을 알았다. 하지만....모두 이걸 알았음에도 의미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모든 게 끝났다. 이제 더 이상 그와 그녀들은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그녀들은 선을 넘어버렸고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오르카 호 안에 감도는 침묵만이 그와 그녀들의 길의 중간에 장벽이 세워졌다는 걸 알렸다. 그리고 이 장벽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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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 싶었던 장면을 드디어 쓰게 됐다. 매튜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과거에 대한 비밀들을 영원히 묻고 싶어했지만 영원한 건 없는 법이고 자신 역시 그 비밀 떄문에 무척 고통스러워했음.

바이오로이드들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 매튜가 뭔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걸 알지만 장본인이 그걸 알려주지도 않고 자꾸 숨기려고만 해서 답답해했음. 매튜 축출 사건은 매튜의 형편없는 지휘 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매튜 자신이 시원하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거기에 따른 커뮤니케이션도 하지 않은 덕에 일어난 일. 그러니까 사실상 매튜의 탓이 가장 큼.

매튜가 느끼는 내적 갈등은 그녀들에게 무한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류를 재건해야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신의 두 마음이 충돌했고 결국 책임감을 벗어던지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지. 그래서 그의 선택이 더더욱 부질없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음.

매튜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60일 동안이나 회복기에 놓였고 심지어 70%만 회복된 상태라 이따금씩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도 바이오로이드를 원망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함.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거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