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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책을 끝내고 뭘 할지 고민할 무렵, 사전에 착용해 놓은 장비로 콘스탄챠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 주인님. 아무래도 잠깐 업무를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자원 탐색을 위해 파견보낸 부대가 소규모 철충과 조우했다는 보고였다. 

 

"미안, 바닐라. 아무래도 잠깐 업무를 봐야 할 것 같아." 

 

"제가 그거 가지고 뭐라 할 것 같습니까? 걱정마시고 가시죠." 

 

"응? 너도 따라와야지. 오늘은 너가 사령관이니까. 물론 작전 지시는 내가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콘스탄챠 언니와 금란말고도 이 행위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까 그 애들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만." 

 

그 애들이라면 아까만났던 좌우좌와 더치걸을 말하는 건가. 

 

"아니, 솔직히 어제 바로 준비한거라서. 작전에 동참해준 애들말곤 몰라." 

 

"...그런데 그 차림으로 가시겠다는 겁니까?" 

 

바닐라의 시선은 내 위아래를 홅었다. 

 

내 차림은 이번 일을 위해 오드리가 급하게 마련해준 내 전용 집사복이다. 

 

멸망 전 매체에 흔하게 나오던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곁옷을 걸친 일반적인 형태다. 

 

내 신체가 상당히 커다란 체형인지라 품위보단 든든하다는 말이 더 어울린것 같다만. 

 

나는 품을 다듬는 몸짓을 내며 말했다. 

 

"뭐, 어때. 어차피 오늘 이 차림으로 계속 돌아다닐 생각인데." 

 

"..." 

 

나는 바닐라의 이상한 사람을 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재촉했다. 

 

"빨리 가자고! 사령관은 작전이 시작되면 망설이지 않는 법이야!" 

 

"하아... 알겠습니다. 가죠. 근데 무슨 일이 생기면 집사가 책임지시죠." 

 

"책임은 원래 주인이 지는..." 

 

"..." 

 

알았어, 그렇게 노려보지마. 

 

무서웡. 

 

* 

 

"어... 오늘도 무슨 생각일걸까, 왓슨?" 

 

바닐라와 함께 작전실로 들어오자 처음 들은 말이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한 소녀가 집사복 차림의 사령관에게 말한 것이다. 

 

긴 갈색 빛 머리를 땋고 총명한 눈빛이 인상적인 리앤이었다. 

 

"흠흠. 지금은 바닐라 아가씨의 집사입니다만, 리앤 양?" 

 

나는 은근슬쩍 바닐라의 어께에 손을 올렸다. 

 

반면 그녀는 영 어색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앤 옆엔 성숙한 매력을 품은 여성, 레모네이드 알파도 서있었다. 

 

"흐응~. 또 장난을 생각한 것 같지만... 지금은 넘어갈게!" 

 

리앤은 생긋 웃으며 화제를 돌려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령관님." 

 

레모네이드는 내 차림에 별다른 지적도 없이 공손한 태도로 나를 반겼다. 

 

"응, 좋은 아침이야." 

 

나는 슬쩍 자리에 앉아 철충과 마주친 부대에 통신을 연결했다. 

 

전투는 별 것 없었다. 

 

탐사 부대도 경험이 충줄한 인원들이었고 내 지휘도 더해지니 피해는 일절 없었다. 

 

지시 중 간간이 뒤의 소리에 집중하니 여성 셋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바닐라 양이지? 배틀 메이드 소속인." 

 

"아... 그렇습니다. 지금 이건..." 

 

"괜찮아. 왓슨이 독특한 일을 하는 건 나도 잘 알아." 

 

리앤과 바닐라가 속닥거린다. 

 

"바닐라 양은 오르카에 처음부터 있었지? 부럽다. 난 왓슨이 처음에 어땠는지 말로만 들어서." 

 

"저도 그렇네요. 지금은 저렇게 뛰어나신 분이지만 전엔 미숙하셨다고 하더군요." 

 

레모네이드도 그 대화에 참가했다. 

 

바닐라는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내 얘기로 흘러가자 조금씩 말의 물꼬가 열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녀의 입에서 내 부끄러운 흑역사가 방출됬다. 

 

"그땐 어이가 없었죠. 갑자기 요리대회를 연다고 하질 않나..." 

 

"그렇구나~. 왓슨은 그때에도 단순했네." 

 

"후훗, 전 귀엽다고 생각되는 걸요?" 

 

...그땐 나도 뇌정지가 일어나서 그랬던 거야. 

 

과거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현재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주제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입을 여는 건 리앤과 레모네이드였다. 

 

"즐거운 토모 때는 정말 즐거웠지. 셜록이랑 왓슨과 같이 다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전 처음 뵜을 땐 정말 늠름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메가와 철의 왕자때에도 사망자가 없다는 건 역시 사령관님의 능력이 뛰어나서 가능한 일이었겠죠." 

 

"아... 그런가요." 

 

맞장구를 쳐주던 리앤과 레모네이드는 어느샌가 나와 자신들과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바닐라는 어느샌가 그녀들의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못들은 척 작전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바닐라 양.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지금은 왓슨하고 데이트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그런. 딱히 데이트는 아닙니다." 

 

"헤헷,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왓슨. 집사복 잘 어울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흠, 그래?" 

 

나는 리앤과 레모네이드의 칭찬에 나름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장만하길 잘했다. 

 

리앤은 장난스런 미소로 내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저절로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다음에 나랑 같이 있을 때 이런 옷도 좋을 것 같네." 

 

"후훗, 저도 생각해 봐야겠네요." 

 

시선 구석에 바닐라가 우리를 보며 살짝 몸을 떤 것 같다. 

 

나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지금은 우리 아가씨 시중을 들어야 하다보니." 

 

"아가씨라... 그럼 잘 보살펴주라구? 바닐라 양에겐 소중한 시간이니까." 

 

리앤의 묘한 조언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 

 

작전실을 떠난 뒤에도 바닐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바닐라? 아까부터 말이 없던데 괜찮아?"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조금 생각을 했네요." 

 

"그래? 아무튼 나머지 시간은 어떡할까? 너가 원하는거 뭐든지 해도 되니까 말해 봐." 

 

바닐라는 그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고 그녀는 말을 꺼냈다. 

 

"그럼 좀 걷고 싶네요. 이야기 하면서." 

 

"말씀대로 하죠, 아가씨." 

 

나와 바닐라는 복도를 거닐었다. 

 

몇 분을 아무 말 없이 걸었을까, 바닐라는 입을 열었다. 

 

"왜 주인님은 이번 일을 계획 하신겁니까." 

 

"말했잖아.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 그런거야." 

 

"제가 주인님에게 독설을 하는 이유라면 제 성격 모듈이 그렇게 되어 있기에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 뿐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이어졌다. 

 

"전 어디까지나 메이드입니다. 뒤에서 주인님을 돕는 것이 적절한 입장인, 그런 메이드입니다. 저보다도 훨씬 대단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방금 만나신 리앤 양과 레모네이드 씨는 저와 비교도 할 수 없이 특별하시죠." 

 

그 말은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제가 아닌 다른 분들에 더 마음을 써주시면 됩니다. 저는... 주인님의 바보같은 관심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셨을 때...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셨죠? 아무래도... 지금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깔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바닐라." 

 

앞으로 걸어나온 뒤 그녀의 앞에 마주섰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땐 독설이 시작이었지."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지만 나중에는 그려러니 했어. 너 만의 매력이라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단순히 서로를 따라하는 걸론 많은 의미가 없더라고. 서로 행동도 비슷하지도 않았지. 그냥 평소랑 다를 바가 없었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알 수 있더라. 아, 역시 나는 바닐라를 좋아하구나. 그리고 바닐라도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갑작스런 말에 바닐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아니, 진심이야. 다른 건 몰라도 하나 만은 깨달았어." 

 

바닐라의 독설은 인간의 셜계로 인한, 반사적인 반응과도 같은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원하지도 않는 악의적인 말을 한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런 거였던거야." 

 

역지사지라는 걸 계획한 나니까 바닐라의 언행을 생각하고 따라해보려 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때마다 한심하다는 말을 하고 미숙한 행동을 하면 그걸 비웃는 시늉이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악의가 스민 단어는 단 한 글자도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하겐 떠올리기 싫었다. 

 

항상 애정어린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 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럼 바닐라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후회했을까. 

 

태생적 설계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입히는 말을 하는 그녀의 마음은.


"네 마음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 말하고 싶어. 너가 어떤 말을 해도 나는 널 사랑해. 절대 널 싫어하게 되지 않아." 

 

그녀의 손을 굳게 붙잡았다. 

 

바닐라는 고개를 돌린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포갠 손은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진짜..." 

 

잠시 뒤, 바닐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에 꾹 막힌 듯, 뭔가가 올라오는 듯한 감정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말하는 솜씨만 봐도 집사의 문란한 여성 관계가 훤히 보일 정도입니다." 

 

"아가씨의 마음에 드셨다는 걸로 듣겠습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상기된 얼굴과 에메랄드 빛 눈동자, 그리고 당겨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는 입술까지. 

 

"집사의 관리는 주인의 책임이죠. 오늘은 제가 감시해야겠네요." 

 

바닐라는 그녀 자신의 손을 잡은 내 손을 다른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한 치도 제 옆에 벗어나지 말고." 

 

그리 말하는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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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쓴 바닐라 글

다음편은 야쓰신인데 분량이 많아서 나눠서 올림



바닐라는 사랑이다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