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은 무슨 소원 빌었어?"

별똥별 보다는 조금 덜 밝은, 하지만 더 투명한 에밀리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는.....에밀리가....."

본심은 아니였다. 단지 그녀의 여러가지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였다,

토라진 표정도 귀여워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와 가까워진 탓이였을까?


"나는.....에밀리가....앞으로도 열심히 582에서 노고해줬으면 좋겠어!"

입을 떼자 마자 후회했다. 아니, 절반 쯔음 말했을 때 이미 후회했지만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에 생각한걸 끝까지 말하는 고집을 부렸었을지도


".....사령관......"

조금 덜 짖굳은 농담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괜시리 앙증맞은 토라진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라면, 하지만 유성의 궤적처럼 느릿하지만 선명한 미소가 비춰졌다


"나는 사령관이랑 영원히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어"

나의 몹쓸 말에 그녀는 따스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북극성이 보일 계절이였음에도

봄날 같은 속삭임이 내 마음을 녹였고.....내 추한 내면을 비추는 그녀의 밝은 눈빛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웠다.


"에밀리 나도 사랑해"

포근한 이해심을 품은 그녀를 사랑했다. 나의 짖굳은 말에도 웃어주는 그녀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해줘야했던 말은 사랑해도 고마워도 아니라

미안해였다. 또 그 자존심이 허락 못한다면 최소한 입맞춤은 못할지언정 손 정도는 잡아

줄 수 있었다. 그 땐 알았을까? 따스한 두 피부를 다른 누군가와 맞댈 수 있는게 그 날이

마지막이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비서들의 꾸중에도 고쳐지지 않는 내일로 미루는 습관은

그녀에게 했어야할 말과 행동을 다가오지 않을 내일을 위해 남겨두게, 버려두게 만들고는

내일이면 더 나은 말을 할 수 있을거라는 글러먹은 생각으로 침대에 몸을 눕게 했다.





".....아침....인가?....아니 어두워....새벽인가?"

새벽 조차 아니였음을 알았다. 새벽이라면 달이 저물어 가는 어스름이 방을 비췄어야 했다.

아직 밤이라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잠든 느낌이 선명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어둠 따위가

아니였다. 보통 갑작스레 깨어났을 때는 머리가 띵한 느낌과 함께 깨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아픈 느낌이 없고 정신이 뚜렸했다. 아니,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기엔 눈을 뜬

기억 조차도 없다. 마치 눈을 뜨고 잠이 들어, 눈을 뜬 채로 깨어났다는 듯이, 아니 그 이전에 

어째서 눈을 뜨고 감는 시시콜콜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거지?


가위에 눌린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을텐데

분명 깨어났다면 눈이 무거워야 한다. 하지만 눈꺼풀에 끈끈하게 붙은 눈꼽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의식적으로 깜빡여 본다......깜빡......깜빡.....깜....빡....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눈꺼풀이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아. 하지만 확실히 시각이 가려졌다 보여졌다를

반복하고 있어. 확실히 눈을 깜빡이고 있는게 확실해 하지만 어째서 시선의 변두리를 중심으로 시야가

좁아지며 시선의 한가운데를 마지막으로 작아지며 눈이 감기는 것일까 마치 카메라의 조리개 처럼


어찌된 영문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낯설지만 익숙한 지하실의 공허한 풍경, 그곳보다도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드는 눈을 움직일 때 마다

찰칵거리는 날카로운 기계음 그리고 마침내 내 눈은 내 모습을 비춰줄 얕게 파인 물웅덩이를 찾아냈다. 
















"씨발 내가 대체 왜 언더와처가 되어있는거야!!!!!"


그걸 확인해서야 나는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아니, 사람의 팔다리에 해당하는 둔탁한 연결부를.......

다섯 손가락 대신 흉물스러운 절단기와 레이저 포인터가 그리고 탁한 액체가 담긴 연료 공급기가 달려있는.....


사람의 의식이 저 혐오스러운 쇳덩이 안에 감금된 채로 

으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공포에 몸부림 칠 때 하는

공통적인 제스쳐인 손발을 휘젖는 동작을 하려고 했으나


촉수 같은 전선에 매달린 금속 연결부들이 마구 허공을 헤집으며

공기를 찢는 듯한 기동음을 낼 뿐이였다. 하지만 나를 진정으로 두렵게

만드는 소리는 원치않은 새 몸이 내는 소음 조차 되지 못할 기계음이 아니였다.


사뿐사뿐 앙증맞은 구둣소리

너무 멀리 있었기에 귀라는 기관이 음성 감지 센서로 대체되었기에 들을 수 있는 소리  

그러나 지금은 없는, 사람의 온기가 있던 귀이기에 수많은 소리 중에 뚜렷히 기억하는 그 소리


....사랑하는 나의 소녀 에밀리의 구둣소리....


쇳덩이 속 전자회로에 갇힌 사람의 의식이 

카메라 렌즈에게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라고촬영하라고

음성 감지기에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라고녹음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처음으로 새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찰랑거리는 은발, 흐트러짐 없는 적안, 가녀리지만 강인한 다리

작고 귀여운 손은 섬세하지만 자신 보다 큰 중화기를 견뎌내는

끈기가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있는 어두운 지하실까지 저것을

들고서도 사뿐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지


"에밀리....이게 어떻게 된거야? 내가 왜 언더와처가 된거지?"

내 육성대신에, 음성 출력 장치에서 나온 노이즈가 낀 기계음이 말했다. 


"별똥별이 소원을 들어준거야 사령관"

그 둔탁한 기계음을 조소하듯 가늘고 아름다운 미성으로 그녀가 읆조렸다.


"뭐?"

다급한 사이렌처럼 기계음이 울렸다. 


"그랬잖아. 사령관은 내가 앞으로도 내 일을 계속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사령관이랑 영원히 같이 있게 해달라고 빌었잖아 바로 어젯일이니까 기억하지?"

그녀의 미소에는 쇳덩이가 되어버린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온정과 왠지 모를 서글픔이 있었다.


"설마....."

치지직 거리는 노이즈에도 사람 같은 두려움이 선명하게 깔렸다


"맞아. 별똥별님이 우리의 소원을 둘다 들어준 거였나봐"

아아, 이토록 악의적인 농담을 애처로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이는 그녀는 도대체......








"사령관.....너무 쓸쓸했어.....너무 외로웠어......"

차라리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것이 독설이였다면 나았으리라


"제녹스가 나보고 미안하데 괜히 소유자의 심박동이 낮아지면

출력이 증폭되는 기능이 있어서, 사령관이 나를 철충들 사이에

반격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맞게만 하던 거였잖아.,......."

그녀가 단짝과 다를바 없는 자신의 중화기를 상냥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차가운 지하실에서 연고 하나 바르지 못하고 상처투성이로

싸우는 것도 견딜 수 있었어, 서늘한 공기가 상처를 할퀴고 쓰라려도

사령관에게 도움이 된 것만으로, 사령관의 고맙다는 한 마디로 나는

견딜 수 있었어 근데....기억나? 그 날 하루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걸 잊어버리고 그냥 지휘실로 가버렸잖아?"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기억 못한다고 해도 화내지 않아....기억 하는게 더 이상한거야....

나에겐 사령관 밖에 없지만, 사령관은 나 말고 바라볼 여자가 많잖아?"

그리고 다른 눈에서 흘러내린 두번째 눈물이 하얀 턱 끝에 고인다.


"....에....밀리....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

한 번만 더 입술을 열면 세번째 눈물이 흘러내릴거 같아서 미안하단 말로 급히 말을 끝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눈물도 바다에 잠긴 것처럼 무거운데 세번째 눈물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의 

마음이 익사해 버릴 것만 같아서. 사람의 목소리를 잃기 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반복한다.


"...에밀...리....미안....해"

최대한 사람다운 자연스러운 음성을 내려고 쥐어짜내봐도 나오는 것은 먼지 쌓인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이즈 섞인 기계음이였다 제발 부탁이니 이 기계음이라도 좋으니 그녀에게 닿아다오


"사령관....나 이제 너무 행복해 맨날맨날 일만 시켜서

사령관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언더와처의 얼굴만 봐왔는데 이제 사령관이 언더와처가

되었으니까 일하는 내내 사령관과 만날 수 있게 되었어

이제 우린 영원히 함께야 사령관 앞으로 떨어지지 말자"


에밀리......더 이상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내 마음을 찢어놓지마....

이 어두운 지하실을 다 밝혀놓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짖지 말아줘.....

제길....제길.....왜 사람의 목소리가 남아있을 때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못한거야.....








"자아....이제 사령관의 성실한 바이오로이드가 을 시작할게"

일.....그 한 글자가 이렇게 무겁게 들릴 줄이야. 일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

일을 시키는 입장인 내가 그토록 가볍게 말하는 그 일이라는 것은....지독하게도 잘알고있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카메라 조리개를 바짝 조였다.

시야가 변두리 부터 좁아진다. 시선 한 가운데 여전히 그녀의 촉촉한 

입술이 보인다 그 앙증맞는 손가락 끝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 마저도

그리고 그 날의 별똥별 보다 눈부시고 아름다운, 그러나 익숙한 섬광이 어둠 보다 먼저 시야를 덮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육성으로 지를 수 있는 비명 보다 더 끔찍한 소리를 질렀다.

아날로그 텔레비전 전선이 산성비에 젖어 파지직 거리는 소음이 현학적으로 들릴 정도로 기괴한 기계음을

그 괴성과 동시에 카메라 렌즈가 깨짐과 동시에 시신경이 뜯겨나간 고통에 신음했고 연결부가 광선에 녹아내릴

때에 뼈와 신경이 짖이겨지는 통각에 몸부림쳤고 피를 대신해 망가진 발전기의 액상형 전류 윤활 매스가 흘러내렸다.


부글거리는 아픔의 늪에서 차가운 눈물 또 한 방울이 서슬퍼런 기계몸에 떨어졌다.

마치 열을 식히는 듯이 눈물이 떨어지자 고통이 멈췄고 고통은 슬픔과 죄악감을 뒤바뀌었다.

나는 그녀에게 세번째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다.


"나도 미안해 사령관.....하지만 사령관을 사랑한 만큼 너무 미워....나를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두고

내가 아픈 만큼 사령관도 아팠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을 했어....하지만 나도 사령관이 그 때 몹쓸

농담을 해서 내 토라진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사령관의 여러가지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야"


"사령관의 괴로워하는 표정도 너무 매력적이야 귀여워"

푸른 기계 용액을 찰팍찰팍 밟으며 그녀가 다가와 살포시 앉아서 나를 내려봤다

다 망가져서 부품이 드러난 기계 연결부에 그녀의 따스한 입술이 애절하게 닿았다.

마치 그 때 만큼은 기계 몸이 사람의 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의식이 흐려진다.

놀랄 것도 없다. 최대출력의 제녹스에 맞은 언더와처가 곧 절명한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건 내가 아니던가

 

"사랑해 사령관. 내일 또 보자"

이 한 마디를 끝으로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내.....일....?"



꿈이 아니였다. 깨어난 뒤에도 나는 언더와처였다.

가공할 속도로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빌어먹을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인공지능 연산회로가 분석해낸 나는 언더와처고 앞으로도 언더와처일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조금의 여과도 없이 기억 소자에 쑤셔넣고 있으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리 없었다.


이제 나에게 곧 닥칠 일을 안다.

내가 에밀리를 정확히 몇 번 지금의 내가 있는 곳으로 출격 시켰는지

나의 대뇌피질을 대신하는 전산회로가 사소한 오차 하나 빠짐 없이 가르쳐주니까

하지만 그 천문학적인 숫자도 별똥별에 속삭인 "영원"에는 한 없이 작은 숫자겠지


아아 또 그 소리가 들린다 

너무나도 앙증맞은 발소리. 사뿐사뿐 내 마음을 간지르는 구둣소리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지하실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두려운 소리가


치맛자락이 찰랑거릴 때 마다 탄력있게 흩날리는 저 성운처럼 화사한 머릿결과

그 머릿결 사이로 나를 애증어리게 바라보는 홍옥을 깍아낸 듯한 매혹적인 적안


나의 죄악에 방아쇠를 당길 자격이 있는 유일한 소녀가 오고 있다

가혹하면서도 달콤한 징벌을 내리러 다가오는 아름다운 징벌자가


"좋은 아침이야 사령관"

그녀가 잔인할 정도로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원히 계속 될 나와 그녀만을 위한 세계에서의 이틀째 아침이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