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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암.”

 

긴 한숨이 사막을 가로질렀다.

 

“대장. 이제 여기도 철충 놈들은 안 보이는 거 같은데?”

 

“페더가 정찰 나간 게 아마 다섯 번째였었지? 그 정도 해도 못 찾는 거 보면 우리가 박멸한 게 맞는 거 같은데.”

 

휘릭.

 

워울프가 권총을 돌리며 모래 위에 늘어지게 누웠다. 카멜은 자신의 대포에 쌓인 먼지를 툴툴 털며 워울프의 투정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지루한 사막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것.

 

둘의 의견이 맞는 몇 안 되는 경우였다.

 

“아니. 정찰은 계속한다.”

 

그럼에도 칸은 전투용 마스크를 쓴 채 답했다.

 

“아아, 진짜아~ 이젠 지루하다고. 총 쏠 맛 있는 놈이라도 있으면 몰라.”

 

“그래서 저번에 발견한 칙 커맨더 군락은 너 혼자 치우게 하지 않았나.”

 

“그 놈들 치우는데 15분도 안 걸렸어.”

 

“정확히 14분 52초 걸렸지.”

 

카멜이 훅, 하고 입김을 불며 덧붙였다.

 

“그걸 기억하고 다니냐?”

 

“여기선 그런 거 말곤 할 게 없으니까.”

 

“둘 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래 보여도 한때 절대방위지역이었던 곳이다.”

 

“흐에... 네네. 알겠습니다.”

 

워울프는 길게 기지개를 피며 한가득 쌓여 있는 철충 더미 위에 몸을 눕혔다.

 

쓸데없이 맑아 보이는 하늘. 구름도 청명한 것이 온 하늘이 전부 다 파란색이다.

 

덜그럭거리며 발끝에 걸리는 철충의 신체 일부. 볼트처럼 생긴 육각형 고철 덩어리가 엄지발가락에 만져지는 것을 보니 오죽 따분한가 싶다.

 

진짜 짜릿하게 싸울 땐 집채 만한 덩어리들이 날아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으아, 하여튼 전투용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멀쩡하게 살려니 좀이 다 쑤시네.”

 

추기경들과 했던 전투. 기묘한 정육면체 속에서 교황의 수호병들과 싸웠던 경험.

 

그런 것들 속에서 살아남았으니 어지간한 싸움 가지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것이 사실이다.

 

워울프는 길게 뻗은 팔에 다시 힘을 주고 일어섰다. 너무 힘을 주었는지 몸을 일으키려 짚었던 고철이 으스스 부스러기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좀이 쑤시다면 내가 상대해줄 순 있다만.”

 

“어휴, 난 싸우고 싶댔지, 죽고 싶다곤 안 했어. 대장. 누구 하나 불구로 만들 작정이슈?”

 

“그래.”

 

칸이 섬찟한 눈을 꿈뻑이며 말했다. 워울프의 목덜미가 울컥거렸다.

 

“오랜만에 너도 어디 하나 부러져 수복실 신세가 돼 봐야 그런 소리 안 할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워울프, 네가 마지막으로 수복실에 들어갔던 적이...”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앞으로 이런 속 편한 소리 안 할 테니까 그런 소린 하지도 마!”

 

“그냥 농담 좀 했을 뿐인데, 안 되나?”

 

“농담이라도 할 소리가 있고 못할 소리가 있지! 어휴, 무서워라.”

 

그렇게 말하며 워울프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종이 봉투 속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꼬나 물고 입으로 푹푹 연기를 내뿜었다.

 

이전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을 평화.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려니 오히려 불편했던 그녀였다.

 

“나도 빨리 오르카 호로 가고 싶은데...”

 

“안 된다. 아직 철충이 남아있을 수 있어.”

 

“페더가 몇 번씩 정찰을 했는데...”

 

“스읍.”

 

“... 네엡.”

 

칸은 심호흡 한 번으로 카멜의 불평을 잠재웠다.

 

맡겨진 임무에 충실해지는 것. 그녀아 케시크 였을 때부터 습관처럼 지켜온 것이었지만 그녀가 이곳에 집중하는 것은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령관이 그녀를 이곳에 보냈을 때 했던 명령.

 

-절대 내가 돌아오란 말을 하기 전엔 오면 안 돼.

 

그 말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요 며칠 전부터, 아니, 한 달쯤 전부터 오르카 호로부턴 통 연락이 없던 탓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철충들을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것 말곤 없었다.

 

시베리아쪽으로 보내진 발할라나 북미 대륙으로 파견된 펙스 병력도 마찬가지. 오르카의 주병력을 전부 외부로 돌려놓고 오르카 호는 유유자적하게 한반도로 떠났다.

 

‘대체 왜?’

 

그가 아프단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사령관의 몸상태는 사령관보다 그를 보필했던 그녀들이 몇 배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아니. 사령관은 고작 휴가 하나 때문에 명령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도통 알 수 없는 사실에 칸은 퍽 답답했다.

 

----삑--삐비빅.

 

익숙한 기계음.

 

“어? 전화 왔다.”

 

“페더가 딴 바이오로이드 군락이라도 찾은 모양이지. 대장? 대장이 받을 거지?”

 

뒹굴거리는 워울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에 답하듯 칸은 막사 안으로 들어가 수신기를 들어 올렸다.

 

“신호 확인. 여기는 신속의 칸. 신원을 밝혀라.”

이번엔 무슨 일로 전화가 왔으려나, 내심 지쳐가던 칸은 내색하지 않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들려오던 것은,

 

“... 사령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

 

 

 

“뭘 봐?”

 

멍해있는 장화는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휘릭, 하고 스쳐간 총탄의 감각. 허공을 가르고 간 궤적에 담겨 있는 살기는 분명 익숙한 것이었다.

 

자신도 막아본 적 있던 것이었으니까.

 

그때,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아까 떠났던 장화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내가 그대로 갈 거라 생각한 거야?”

 

“너 어떻게... 아니, 왜...?”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인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거 같다, 야.”

 

답지 않게 질척이던 것을 기어코 보냈다. 자신의 끝이 다가옴을 느끼고 추하게 두려워하면서까지 보낸 녀석이었다.

 

그런 애가 버젓이 눈앞에 다시 나타난 꼴을 보자니 괜한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장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저벅.

 

“같이 싸우는 건 오랜만이군.”

 

저벅.

 

익숙한 격발음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바...르그?”

 

“정신 바짝 차려라. 상대는 지금껏 상대했던 어떤 적보다 강력하다. 총 몇 방 쏜다고 쓰러질 놈이 아니야.”

 

“우리도 알고 있어.”

 

검은 단발을 천천히 휘날리며 걸어오는 그녀. 깨진 대검을 절그럭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고아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세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보다는 자박, 거리는 소리.

 

“알고 있다고.”

 

망설임이 서려있음이라. 

 

하지만 장화가 느끼기엔 조금 달랐다.

 

자신들이 아는 누구보다도 강대한 적을 마주하니 어느 누가 그러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종류의 망설임이 아니었다.

 

“저게 우리 엄마가 아니란 것쯤은... 알아.”

 

가냘픈 목소리.

 

홍련이 임신을 한 이후로 많이 만나지 못했다. 임산부에게 행여나 악영향을 줄까, 임무 결과 보고도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태어날 막내. 그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그녀들은 나중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이나 그리워했던 사람이니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화는 자신을 부축하는 장화를 책망하듯 소리 죽여 말했다.

 

“미쳤어? 저것들을 데리고 오면 어쩌잔 거야... 쿨럭!”

 

“소리 지르지 마. 그러다가 너 죽겠다.”

 

“지금이 무슨 상황인데 그런 소리를...!”

 

“일단 잘 보고 있어봐. 나도 바보는 아니라고.”

 

마치 데리고 온 이유가 있다는 듯 당당한 장화의 얼굴. 왼쪽 눈이 충혈된 장화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바이오로이드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퍽 소름끼쳤다.

 

못 싸우는 애들은 아니다. 자신을 잡을 만큼 숙달된 아이들이고 나름 경험도 있다.

 

하지만 오리진 더스트를 치사량까지 맞은 자신도 이기지 못한 상대다. 동귀어진을 각오해야 겨우 맞상대할 수 있을 수준의 적을 엄마 타령하는 애들 셋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씨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머릿속이 죄다 꽃밭이야...!’

 

지금이라도 합류해야 한다. 바르그가 왔으니 몇 초 정도는 벌어줄 수 있을 거다.

 

그리 생각하며 장화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왜일까?

 

‘... 뭐지?’

 

사위가 심각할 정도로 조용했다.

 

“... 미호니?”

 

자신을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홍련.

 

콘크리트 더미를 솜사탕처럼 부수고 가열된 강철 와이어를 거미줄처럼 찢어발기던 놈이 덜덜 떨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미호... 미호구나...? 내 딸 미호...”

 

“... 그만해.”

 

입술을 짓씹으며 앞으로 걸어나가는 미호. 그녀 뒤에는 드라코와 불가사리가 서있었다.

 

장화와의 전투로 엉망이 된 섹션.

 

그녀의 적이었던 홍련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가련한 발걸음으로 미호를 향해 걸어갔다.

 

“아... 아, 그래. 엄마 부대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아니라 하는 거지? 그래도 괜찮단다... 이젠 엄마가 지켜줄 수 있으니까...”

 

“그만하라고!”

 

“뭐...?”

 

미호는 부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싸울 셈이야! 이젠 그만할 때도 됐잖아! 이제 겨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됐는데 여기서 더 싸우고 싶진 않아!”

 

“... 미... 호야? 왜 갑자기 화가 났니...? 엄마가 무슨 잘못이라도...”

 

“사령관이 죽어가고 있어! 지금도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이야! 지금 임무에 실패하면 죽어버릴 거라고!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 죽게 내버려두고 있잖아!”

 

악에 바쳐서 나오는 목소리. 그녀답지 않은 큰 소리에 뒤에 서있던 드라코와 불가사리까지 움찔거렸다.

 

“어우, 내가 한 소리 하라고 하긴 했는데 저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

 

부상 당한 장화를 주변에 앉혀 두고 무장을 재정비하고 있던 장화가 말을 덧붙였다.

 

“무슨...?”

 

“저 개체를 처음 봤을 때 대충 각이 나왔지. 우리가 자기 딸을 죽인 나쁜 년이라 화를 내고 있는 거면 자기 딸내미들에겐 엄청 약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겠구나, 하고.”

 

“설마 그래서... 애들을 데리고 온 거야?”

 

“그래. 운이 좋으면 안 싸우고 끝날 지도 모르잖아?”

 

그녀의 말대로 그 무서운 홍련은 미호의 말에 우물쭈물 말을 더듬고 있었다.

 

“아... 아니야. 엄마는 그냥 우리 딸들의 복수를 해주려고...”

 

“복수? 누가 복수 같은 거 해달래? 그런 적 없어! 우린 아직 살아있고, 엄마가 진짜 우리 엄마라면 그럴 필요도 없는 거잖아!”

 

“하지만 죽은 아이들이...”

 

“그만!!”

 

탕!

 

미호가 천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작은 부스러기가 투두두 소나기처럼 내렸다.

 

“이젠... 그만해도 되잖아...”

 

“... 왜?”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이제는.”

 

그 어떤 미호보다도 많은 싸움을 해왔던 그녀였다. 그 어떤 몽구스 팀보다도 격렬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미호였다.

 

허나 그 전쟁이 있었던 곳은 추기경이 있었던 VR 세계도, 드넓은 우주 궤도도, 교황의 함선도 아닌,

 

“지긋지긋하니까.”

 

오르카 호였다.

 

어느 악마가 살고 있던 오르카 호.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자매들을 죽였다. 어젯밤 힘겹게 찾아온 초코바를 나눠먹은 대원의 정수리에 총알 구멍을 냈어야 했고, 잘 자라 자장가를 불러준 어린 바이오로이드를 찾아 죽여야 했다.

 

단지 한 악마의 여흥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겨우 찾은 평화야.”

 

그 때의 악몽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게 그저 악몽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에 한없이 감사했으면서도,

 

“겨우 찾은 해피 엔딩이라고.”

 

그 악몽에 죽고 싶었던 날이 수백일이었다. 수천일이었다.

 

그랬기에 장화를 용서했다.

 

용서를 구할 리 없는, 그 무지몽매한 악종을 용서한다는,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우릴 죽여왔단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아마 엄마가 죽을 때까지 변치 않고 있을 거야.”

 

“......”

 

“그래도 사람은 바뀔 수 있잖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 믿었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영원히 자매를 죽여야만 할 운명이라 믿었다.

 

그렇게 무수한 것을 믿고, 믿고, 또 믿었더니, 오직 하나만이 믿지 못할 것이 되었다.

 

우리도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호야.

 

어느 날, 그걸 바꿔준 사람이 나타났다.

 

-그 날, 나 많이 아팠다?

 

한없이 포용해준 사람.

 

한없이 안아준 사람.

 

자신이 죽이려 했던 그 사람이, 모든 일이 끝나고 자신을 무릎에 눕히며 말했다.

 

-그래도 용서해줄게.

 

-난 미호를 많이 사랑하니까.

 

“... 엄마.”

 

그렇기에 아직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저 앞에 있는, 엄마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도 행복해질 수 있는 해피 엔딩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 믿으며 미호는 자신의 총구를 바닥으로 내렸다.

 

“돌아가자. 오르카 호로 가면 엄마도 괜찮아질 거야.”

 

“... 복수는?”

 

“포기하면 돼.”

 

“내가 어떻게 내 자식의 원수를...”

 

“용서하자.”

 

결코 쉽지 않을 일.

 

주변에 널려 있는 홍련의 시체를 보면 아직도 부아가 치민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벌벌 떨린다.

 

허나 그보다 쉽지 않았을 일을 보란 듯이 해낸 사람이 있었기에.

 

-그러니까 미호도 다른 사람들을 많이 사랑해줘.

 

-언젠가 그래야 할 날이 올 거야.

 

미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고 그렇게 행했다.

 

홍련이 팔을 내렸다. 와이어를 쥐고 있느라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검은 가닥들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디딘 땅이 그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오리진 더스트가 핏줄을 타고 울퉁불퉁 흐르는 것이 살갗 너머로 훤히 들여다 보였다.

 

“... 용서.”

 

“우스운 얘기지.”

 

죽이기 위해 태어난 바이오로이드는 있어도 용서하기 위해 태어난 바이오로이드는 없다.

 

그러기에 그 어떤 바이오로이드도 용서라는 감각을 알지 못했다. 이글거리는 분노를 자극제 삼아 싸우는 방법은 배운 적이 있어도 그것을 가라앉히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할 수 있더라고.”

 

“... 엄마가 돌아가면...”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보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령관이란 사람이 좋아해줄까?”

 

“물론이지.”

 

“그 사람이 죽게 내버려뒀는데도?”

 

“난 사령관 몸에 총도 쏴봤어. 그래도 용서해주더라.”

 

“바보 같은 사람이구나...”

 

“그래도 대단한 바보지.”

 

저벅. 저벅.

 

홍련의 발걸음에서 살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걷는 품은 피로 칠해졌다.

 

격렬한 전투. 하지만 그 원동력이 이토록 간단한 감정이었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흠.]

 

그 때문이었을까,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그녀는 자신의 뒤에서 반짝이는 붉은 카메라를 인지하지 못했다.

 

파직!

 

허공에 튀는 스파크.

 

[난 저것들을 죽이라고 만들었지, 같잖은 휴먼 드라마를 찍으라 만든 게 아닙니다. 개체-15932099.]

 

동우의 목소리와 함께 홍련의 목덜미가 부풀어올랐다.

 

“끄아아아아아---압?!”

 

[잊지 마세요. 저것들은 죽여야 할 침입잡니다. 당신 자식을 죽인 원수란 말이죠.]

 

“내... 내 딸을... 아아아아악!!!”

 

[아, 그게 문제였나? 그럼 추가적으로 기억을 덧씌우면 되겠군.]

 

차박, 차박, 차박, 차박,

 

홍련의 목을 지나는 경동맥이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불길한 초록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수천 개의 모듈. 규칙적으로 반짝이던 붉은 점들이 이내 하나의 선을 이루더니 그녀의 두뇌를 향해 무언가를 보내기 시작했다.

 

[예비 시나리오 1452-133421 투입.]

 

[거부 반응 발생. 추가적인 시나리오 투입 권고.]

 

[예비 시나리오 1994-559239 투입.]

 

[거부 반응 발생. 개연성 확보를 위한 추가 시나리오 투입 권고.]

 

[확인. 세뇌-몽구스 프로토콜용 예비 시나리오 1,993,204개 대기 중.]

 

“끄아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스파크의 소용돌이가 홍련을 감쌌다. 온몸의 혈관 속에서 오리진 더스트 특유의 보랏빛이 반짝였고, 머리카락은 정전기에 노출된 것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가히 살인적인 분위기.

 

미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가까이 가면 안 된다.’

 

그녀는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저 미지의 인공지능을 쓰러뜨리고 홍련을 구할 가능성이 제로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0.5초.

 

그 사실을 불가사리와 드라코에게 인지시키기까지 0.3초.

 

“뒤로 물러서라!”

 

“하여간 쉽게 되는 법이 없어요!”

 

바르그와 장화에게 일을 맡기기까지 0.1초.

 

달려가는 그 둘을 보며 자신의 총구를 홍련에게 겨누기까지,

 

1.2초.

 

‘... 제길.’

 

가히 신들린 솜씨였다. 이미 포기할 것을 상정하고 온 그녀였기에 괜한 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상정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콰직!

 

“뭐?”

 

“어떻게 벌써...?”

 

동우의 인공지능 레벨.

 

수천, 수만 바이오로이드의 창조주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인공지능의 속도를 고작 바이오로이드 개체 하나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달려든 장화와 바르그의 무기를 양손으로 움켜쥔 홍련이 동우의 말을 따라했다.

 

[너희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너희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도구는 바뀌지도, 바뀔 수도 없다.]

 

“도구는 바뀌지도, 바뀔 수도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콰직. 콰직. 콰직.

 

장화의 와이어가 구부러졌다. 바르그의 대검이 산산조각나버렸다.

 

홍련은 비릿하게 웃으며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그건 불량품이란 뜻이지.]

 

“그건 불량품이란 뜻이지.”

 

순식간에 안정화된 홍련의 모듈.

 

그녀의 등 뒤로 부풀었던 살점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움찔거리던 인공 근육들도 잦아들었다.

 

거대한 인공지능의 통제 아래 들어간 바이오로이드의 신체는 세포 단위부터 효율적인 선택을 하며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든 나의 도구다. 가장 효율적인 도구지. 너희들, 아니, 오르카 전체가 와도 이기지 못할 만큼.]

 

“허, 통령만 와도 떡을 치겠구만 무슨 개소리를.”

 

[헛소리! 정말 그랬다면 너희들의 사령관이 그 자부터 보냈겠지. 그게 아니라면 너희를 이곳에 보낼 이유가 있겠나!]

 

허공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거대한 기계팔이 거미처럼 움찔거리며 홍련의 주변을 향해 팔을 뻗었다.

 

각자 기괴한 무구로 장비된 채. 일전 보았던 언더 와쳐와 흡사했지만 팔의 수는 수도 없이 많았다.

 

[자! 이번 침입은 여기서 끝이다! 난 너희를 죽이고 다음 침입자를 위한 보안 프로토콜을 설계할 것이다!]

 

격양된 목소리의 동우가 기계팔을 휘두르며 일행을 위협했다.

 

그때,

 

“불량품...?”

 

저벅.

 

“크, 크흐흐흐.”

 

저벅.

 

“그래, 씨발. 느그들은 항상 그 지랄을 떨었지.”

 

분명 뒤로 가있어야 했을 장화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방금의 홍련처럼 온몸의 혈관이 보랏빛으로 반짝인 채.

 

분명 정상은 아닐 터. 하지만 그녀의 몸놀림은 기괴할 정도로 가벼웠다.

 

“이봐, 그거 알아? 엠프레시스 하운드는 심장에 모터를 하나씩 하고 다녀. 심장이 멈출 때 인공적으로 뛸 수 있도록 말이야. 죽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지.”

 

멈춰도 진작에 멈췄어야 할 심장.

 

오리진 더스트 과다 복용의 부작용으로 그녀는 이미 시체가 되었어야 한다. 그게 동우의 계산이었다.

 

“근데 마리아, 그 인간이 나한텐 특히 더 강한 걸 집어 넣더라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였더라... 그래.”

 

장화는 피식, 웃었다.

 

“불량품.”

 

“불량품이니까 그런 거라 하더라.”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도 심장은 멈출 것 같았고, 그럴 때마다 모터가 쿵쿵 거리며 가슴께를 내리쳤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

 

하지만 괜찮다. 오리진 더스트의 부작용도 거의 익숙해졌고, 죽고 싶어도 그 망할 놈의 기계 장치가 죽지 못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이, 조카들.”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뭐하긴 하지만, 미안했다.”

 

불량품인 자신이,

 

불량품이기에 할 수 있는 것.

 

그게 용서라고 사령관이 말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나왔다. 

 

왼손에는 그녀의 와이어를 들고, 오른손에는 홍련의 크로스보우를 든 채.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부탁한다.”

 

몽구스 팀의 작전관만이 들 수 있는 무구.

 

붉은 머리에, 붉은 옷을 입고, 푸른 화살을 장전한 크로스 보우를 든 채,

 

장화는 말했다.

 

“불량품들의 힘을 보여주자.”

 

 

 

*

 

 

 


심장 모터 떡밥은 287화에 뿌려놨는데 눈치챈 사람이 있을까 몰?루


암튼 재밌게 읽었으면 추천이랑 댓글 좀



다음화: https://arca.live/b/lastorigin/70007753?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