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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괜찮네. 지금은... 잠시 혼자 있게 해주겠나?"


"하지만..."


"언니. 지금 주인님에게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안 들으실 겁니다. 지금은 그냥 나가죠."


침울한 기분으로 혼자 방에 있고 싶은 사령관이 걱정스럽게 자길 쳐다보는 콘스탄챠의 물음에 답하자 바닐라가 콘스탄챠에게 제안하고 사령관 보고 들으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인님, 그렇게 혼자 세상이 무너진 양 우울하게 계실 거면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할로윈 때 키르케 씨와 함께 합류했던 베로니카 씨가 있는 간이 예배당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혼자 우울해 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사령관이 우울해 하시든 말든 저하곤 상관없지만 언니까지 우울하게 하시면 보기 그렇거든요."


"예배당이라... 그래. 지금 나는 그대들의 주인이라 불릴만한 그릇이 아님을 몸소 증명했으니 가서 천주 지그마에게 회개의 기도를 올려야겠지. 내가 기도를 마치고 올 동안 그대들도 다른 할 일을 하게."


"알겠습니다."


콘스탄챠와 바닐라에게 지시를 내린 사령관이 밖으로 나가자 콘스탄챠가 슬며시 바닐라에게 다가와 물었다.


"바닐라. 주인님께 그곳을 추천드린 건 혹시..."


"언니, 제가 주인님께 동정심이라도 품었다고 말하시려는 건가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단지 언니까지 주인님의 웃기지도 않은 연극에 휘말려 같이 침울해 하는 걸 못봐주는 거 뿐이에요."


"후후, 그래. 그럼 이젠 뭘 할까?"


"...혹시 모르니까 컴패니언 분들도 방으로 부를까요? 저흰 잠깐 다른 곳으로 가고요."



바닐라가 말한 간이 예배당이 있는 곳에 도착한 사령관은 정갈하고 조용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전능하신 천주 지그마이시여. 오늘 당신의 후손이 지울 수 없는 우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 우행에 대한 속죄와 책임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그 옛날 드워프의 왕을 구출하고 그린스킨을 몰아내며 제국의 기틀을 다졌던 당신의 지혜를 이 불초한 후손에게 조금이라도 좋으니 나눠주시옵소서..."


자신의 의심으로 쓰러진 레이시와 그녀를 걱정하던 네오딤을 떠올리며 마음 한 구석이 쓰라린 사령관이 계속 기도를 하던 중 누군가가 자신의 곁으로 오는 발소리를 듣자 기도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수녀복 차림에 처음 보는 물건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이 있었다.


"자넨... 지그마의 수녀단에 소속된 수녀인가"


"베로니카입니다. 구원자시여. 당신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이곳으로 오신 건 처음이군요. 어떤 근심을 품고 있으신지 그 고민을 제가 들을 수 있을까요?"


처음 보는 자신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하는 베로니카를 보고 사령관은 그녀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해 버뮤다 팀과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베로니카는 사령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어두운 과거를 가졌음에도 당신을 위해 헌신하던 자들을 의심했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남았다는 말이로군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였지. 과거를 딛고 일어서 살아가던 자들을 격려하진 못할 망정 내가 그들을 의심하고 박해했다는 게 참으로 부끄러워. 제국의 황제로서 이 종말의 때에서 악에 맞서는 자들을 박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그렇다 해도, 그들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나는 그들에게 타락의 흔적이 있지 않을까 의심했어. 150년 간 홀로 외롭게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진 소녀와 있지도 않은 가짜 기억을 주입당하고 끔찍한 의식을 당했던 여자를 말일세. 그런데도 날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당신을 만나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자시여. 당신은 우리의 아픔을 아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신경쓰지 않을 작은 실수에도 가슴 아파하고 자책하고 계시죠. 그걸 알고 있기에, 그들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 겁니다."


조용히 자신에게 말하는 베로니카의 말을 곱씹던 사령관은 자료에 남아있던 이 '사령관'의 행적을 살펴봤던 것을 떠올렸다. 분명 이 남자는 자신처럼 적극적으로 전장에서 철충을 섬멸하진 않았지만, 뛰어난 통찰력과 지휘로 자신의 부하들에게 승리만을 안겨줬고 또 이곳에 있는 부하들 중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것을 떠올린 사령관은 이 육체의 남자가 만약 제국의 군대에 있었다면 분명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고 부하들과 평생을 함께 싸웠을 명장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고맙네, 베로니카여.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 그대와 같은 성직자의 도움을 받은 건 폴크마의 도움으로 황제에 올랐던 그때 이후론 오랜만이군."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구원자시여. 당신이 아까 기도를 드릴 때 말씀하셨던 지그마라는 자는... 누구입니까? 구원자께서 개인적으로 숭배하는 신이십니까?"


"천주 지그마는 단순한 신이 아니네. 인간이었다가 신이 됨으로써 전설이 된 분이지. 그분이 세운 제국의 이념은 이 종말의 때의 순간까지도 모든 제국인들의 가슴에 남아있지."


"인간에서 신으로...? 흥미롭군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베로니카의 부탁에 지그마는 쾌히 승낙하고 자리에 앉아 자신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천주 지그마의 일생과 업적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불과 15살의 나이에 오크에게 사로잡혔던 드워프의 하이 킹과 그의 일족들을 구출하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며 그 증표로 전설적인 무기 '갈 마라즈'를 얻은 것, 그 이후 옛 동료의 배신과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이라는 셀 수 없는 위협과 음모에서 살아남으며 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 세계의 멸망을 꿈꾸는 악의 전사들인 워리어 오브 카오스를 이끈 최초의 에버초즌, 모르카르와 최악이자 최강의 강령술사, 나가쉬를 쓰러트리고 제국을 통치한 끝에 80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서 은퇴해 여행을 떠났고 이후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신격화되어 신으로서 섬김을 받게 되었음을 말해주자 베로니카는 놀라움에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군요. 그런 업적을 남긴 인간이 있었다면 분명 신이라 섬김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제국은 대대손손 천주 지그마를 신으로 섬기며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네. 종말의 때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용감히 악마와 카오스의 전사들에 맞서 싸운 것 또한 그런 이치지. 비록 어쩌다가 이곳에 있게 되었지만, 난 여전히 천주 지그마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네."


"구원자께서 가진 그 확고한 믿음이라면 누구를 섬기든 그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구원자께서 말씀하신 이 지그마라는 인간의 일대기는 책으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군요. 브라우니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면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래준다면 나야 고마울 따름이지. 제국을 이끄는 세가지 힘은 믿음, 강철, 그리고 화약이지만 지금 당장 이 배에 있던 전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철도, 화약도 아닌 바로 믿음일터. 언제든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나에게 오게. 내가 하나하나 가르쳐줄테니."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오랜만에 누군가와 이렇게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누니 어딘가 후련해진 기분이군. 그럼 난 가보겠네."


자신의 우행에 대한 위로와 다시금 천주 지그마에 대한 믿음에 대해 확신을 품은 사령관이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일어서 밖으로 나가자 베로니카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곧 사령관은 마침 사령관을 찾던 다프네에게 레이시가 깨어났고 사령관의 사과에 오히려 사령관은 잘못한 게 없으니 평소처럼 자신과 네오딤을 비롯한 다른 자매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부탁을 듣게 되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이 기뻐했던 것은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 사령관이 레이시 언니를 찾아와서 거듭 사과했어. 이유? 음... 모르겠어. 케이크를 못 먹게 해서 그런 거였을까? 아무튼 레이시 언니도 왜 자신에게 사과를 하냐며 되려 당황했지만 그래도 사령관이 자길 찾아왔던 게 좋았나봐. 사령관이 나가고 나서 얼굴이 빨개진 채로 시트를 뒤집어 썼거든. 역시 사령관은 좋은 분이야. 레이시 언니도 나처럼 사령관을 사랑하는 걸까?] - 네오딤이 사령관이 떠나고 나서 수복실을 찾아온 팬텀에게 한 말. 직후 팬텀은 자신이 그곳에 없었던 것에 침울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