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같은 부피의 금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화사한 골든 블론드, 보석과 달리 스스로 빛을 내는 생기 넘치는 녹보석안, 흠집도 없고, 오염도 되지 않은 백옥 같은 하얀 피부, 장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것 같은 단정한 이목구비, 희대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조각상들 사이에 서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비율 좋은 몸매.

나는 그 소녀를 알고 있었다.

쥴리아나 레이첼란스.

올해로 열일곱 살인 소녀는 레이첼란스 후작가의 외동딸. 왕국의 유력가문인 레이첼란스 후작가의 유일한 계승자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귀한 대우를 받아왔다. 그러했기에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안하무인적이고 오만한 폭군같은 성격을 가진 소녀였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으면 짜증부터 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괴롭히는 것도 서슴지 않는 등, 신이 외면과 내면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한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신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한 듯.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언제나처럼 방약하게 굴던 그녀는 같은 학교를 다니는 소녀 한 명을 괴롭히게 된다. 이유? 그런 것은 딱히 없었다. 단순히 흥미 본위일 수도 있고, 그 소녀가 메고 있는 리본이 그녀가 멘 리본과 같은 색이라는 것이 거슬려서 일 수도 있었다. 혹은 심심해서 일 수도 있었다. 사소한 이유였기에 그녀도 괴롭히는 이유를 잊고 말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소녀는 쥴리아나의 주위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괴롭힘을 받아도 전혀 굽히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쥴리아나는 그 소녀를 집중적으로 괴롭히게 된다.

소녀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쥴리아나의 괴롭힘을 모두 버티어내고, 쥴리아나가 도를 넘은 괴롭힘을 가하자 쥴리아나에게 따귀를 쳐올리는 강단까지 있었다.

생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찌검을 당한 쥴리아나가 길길이 날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사건을 겪은 이후 쥴리아나의 괴롭힘은 악의뿐만이 아니라 살의까지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쥴리아나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소녀에게는 조력자가 많았다. 어느새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왕국의 왕자,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견습 기사, 희대의 천재 마법사, 수인 왕국 유력 가문의 후계자 등 출신 성분도, 능력도, 외모도 뛰어난 남자들이 소녀를 비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가 괴롭히는 소녀가 훗날 구국의 성녀로 불리게 되는 평민 소녀라는 것.

소녀는 쥴리아나의 모든 괴롭힘을 극복하고, 최후에는 쥴리아나가 획책한 괴물의 습격과 음독으로 인한 생사의 위기까지 이겨낸 후, 구국의 성녀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사건을 겪고 쥴리아나와의 입장을 역전시킨다.

소녀는 쥴리아나를 용서치 않았다. 쥴리아나의 악행을 전부 알리고 공론화한 이후 쥴리아나를 처벌했다.

쥴리아나의 최후는 비참했다. 괴물을 다시 불러 습격을 하려다가 괴물의 통제권을 잃어 역으로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후작인 아버지가 간곡히 빈 덕분에 극형은 면하지만 높은 탑에 죽을 때까지 감금되어 미쳐버린다거나, 처벌을 받기 전에 얼굴 모를 습격자에 의해 살해당한다던가,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 그나마 아름다웠던 외모가 흉측해져서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는다던가.

어쨌든 비참했다.

여기서 의문이 들 것이다. 내가 어째서 쥴리아나의 미래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쥴리아나의 미래가 왜 여러 개 인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쥴리아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드물게 멀티엔딩요소를 택한 소설의. 쥴리아나는 어느 엔딩에서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캐릭터였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쥴리아나가 괴롭히는 소녀가 그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말이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서술 되는 소설의 특성상 쥴리아나의 최후는 비참했지만 그녀의 최후를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설이 연재 될 때 쥴리아나를 빨리 죽이라고, 쥴리아나 때문에 하차하겠다는 덧글이 도배 되고, 쥴리아나가 죽는 장면이 나오자 축제가 벌어졌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는 쥴리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쥴리아나도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와 쥴리아나의 손끝이 닿았다. 차갑고, 딱딱했다.

나는 뻗은 손을 내 볼로 가져가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리고 쥴리아나도 자신의 볼로 손을 가져가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그렇다. 내가 보고 있는 쥴리아나는 거울 속의 쥴리아나였다.

나였다.

나라고.

지금 내가 쥴리아나가 되었다고.

볼을 꼬집었을 때 아팠으니 꿈이 아니라고.

이대로라면 쥴리아나의 비참한 최후가 나의 최후가 될 것이라고.

망했다구요, 흐허허허허헝!

나는 절망했다.

“왜 내가 쥴리아나인데에에에에에에에!”

어느 루트를 가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악역에 빙의가 되는 건데!

아니, 보통 빙의를 하면 주인공에게 빙의를 하는 게 정석 아냐? 왜 악역에게 빙의를 하는 건데?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땅을 쳤다.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고 손이 아팠다. 꿈이 아니라는 게 더 확실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진심으로 눈물이 나왔다. 왜 내가 싫어하는 캐릭터에 빙의가 되는 건데. 그것도 비참한 최후가 확정된 캐릭터에.

나는 버둥거렸다. 생떼를 부렸다.

싫어싫어 바꿔줘. 다른 캐릭터로 바꿔줘. 주인공으로 바꿔줘. 주인공으로 바꿔서 잘생긴 남캐들이랑 꽁냥꽁냥할거야. 남캐들한테 눈총받기 싫어. 내 애캐들이 나를 보면서 질색하는 거 싫어.

그렇게 한참을 버둥거릴 때.

쾅! 쾅! 쾅!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 기세가 워낙에 난폭해서 내가 직접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히끅!”

나는 겁을 집어먹고 울음을 그쳤다.

너무 소란스럽게 한 건가? 그래서 이웃집에서 쳐들어온 건가?

그렇게 내가 벌벌 떨고 있을 때.

“문 열어요. 쥴리아나 레이첼란스.”

차가운 분노가 가득 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죠? 나오세요.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조, 조용히 하겠습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문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안 들렸나보다.

쾅! 쾅!

방금 전 보다 더 큰 소리가 문에서 들렸다. 발로 걷어차는 게 확실했다.

“놔와요! 화내기 전에!”

이미 화났잖아요!

하지만 차마 지적할 수는 없었다. 지적했다가는 더 화를 낼 게 분명하니까.

나는 벌벌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가련한 모습의 미녀가 있었다. 쥴리아나다. 그리고 나였다.

차마 이런 꼴로는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었기에 나는 급하게 몸을 정돈했다.

다시 쾅! 쾅! 쾅!

“나, 나가요!”

나는 허둥지둥 몸단장을 끝내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쥴리아나보다 반 뼘은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수수한 성품을 나타내는 검은 단발, 그녀의 올곧은 성품을 나타내는 적갈색의 눈동자, 그녀의 활발한 성품을 나타내는 그을린 피부, 그녀의 직설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뚜렷한 이목구비, 그녀의 성실한 성품을 나타내는 균형 잡힌 몸매.

나는 이 소녀를 알고 있었다.

아리시아 폴라리스.

소설의 주인공. 쥴리아나의 괴롭힘을 받는 장본인. 그리고 쥴리아나의 종말의 선고자. 모든 남주들의…… 

철썩!

눈에서 번쩍하고 번개가 쳤다.

번개가 지난 후 볼에서 활활 불이 났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아리시아는 눈에 힘을 가득 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철썩!

다시 눈에서 번쩍. 볼에서 활활. 눈물이 찔끔. 목에선 끅끅.

“쥴.리.아.나.”

아리시아는 쥴리아나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그 목소리에 실린 분노가 얼마나 가득한지 나는 또 얻어맞을까봐 몸을 움츠렸다.

“잘도. 잘도 저에게 그딴 짓을 저지르셨더군요.”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즉시 다시 감았다.

소설 속 묘사에서는 아리시아는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아직 젖살이 덜 빠져서 귀여움이 남아있는 얼굴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아리시아의 모습에서는 그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노로 피가 잔뜩 오른 그녀의 얼굴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에는 순둥순둥한 개도 분노하여 이빨을 드러내면 흉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가 지금까지 당신의 만행을 참아 온 것은 당신의 괴롭힘이 어린애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이번에 저지른 짓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어요.”

아리시아가 내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니,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눈 떠요.”

목소리에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리시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말 그대로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쥴리아나. 당신은 저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요. 저는 당하고만 사는 것에 성미에 맞지 않는 사람이에요. 당신 집안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든 상관없어요. 당신 집안의 보복을 받더라도 저는 이번 일을 기필코 되갚아 줄 거예요.”

뜨거운 몰타르처럼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분노로 달아오른 피부에서 피어오르는 살냄새가 내 코를 가득 채웠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김이 내 입술에 닿았다.

“쥴리아나 레이첼란스. 부탁이니 저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말아주세요. 제가 당신에 대한 분노를 꺼트리지 않도록.”

아리시아가 내 멱살을 놓았다. 그녀는 내 몸에 닿은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이 손을 털어냈다.

그 태도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아리시아는 손을 털어내는 행위를 전부 마친 후에 마지막으로 나를 노려봐주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나는 그녀가 코너에서 몸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가녀린 몸이었다. 하지만 그 내면은 결코 연약하지 않았다.

아리시아가 사라졌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내 체내 시계가 간신히 정상 작동을 시작한 후에야 나는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았다. 방문에 기대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었다.

볼이 아팠다. 타인의 분노를 산 것이 무서웠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억울했다.

그리고……내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번 사건.

아리시아가 처음으로 쥴리아나에게 반격을 시도한 이 사건을 겪은 이후 쥴리아나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된다.

인망을 잃고, 품격도 잃고, 집안의 비호도 잃고, 최후에는 목숨까지 잃게 되는 나락.

나는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간절한 소망을 입 밖으로 흘렸다.

“살려주세요.”

악역 영애 쥴리아나 레이첼란스에게 빙의한 나는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