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나는 남주들이 다시 쳐들어와서 나를 닦달하면 어쩌나 하고 벌벌 떨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쭈뼛거리며 수업에 들어가니 남주들은 나를 경멸에 찬 눈으로 보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왜 갑자기 왜 저런대?


내가 의아해해서 그들을 눈으로 좇으니 그들의 중심에 있는 아리시아가 보였다.


그녀를 보고나서 나는 이해했다. 아리시아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에게 설명을 한 것이리라.


웃으며 말을 하던 아리시아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리시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싸악 사라졌다. 아리시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남주들이 아리시아의 시선을 따라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하지도 않은 짓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니 적잖이 상처받았다.


‘내가 안했다고!’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빙의한 몸의 원주인이 실제로 저지른 짓이니까.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들리게 큰 소리를 칠 배짱이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시아의 태도를 보아하니 갈 길이 정말로 멀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포기하면 내 목숨이 날아간다.


이 적대적인 환경을 중화시키기 위해선 내가 가진 모든 능력과 지식을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빙의자인 나는 생존하기위해 분투하는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 * *



“오늘은 드디어 여러분의 마력을 활성화 시키는 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여러분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성녀에게 이겨내지 못할 고난은 없습니다.』에서 마법은 대체로 성인이 된 이후에 사용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마력을 활성화시키는 과정을 성장이 끝난 이후에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마력을 활성화 시키면 성장에 악영향을 끼친다. ……라는 설정이다.


작가가 그렇게 설정했으면 그런 거겠지.


깊게 생각하면 지는 거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력활성화 의식을 거행하면서 『성녀에게 이겨내지 못할 고난은 없습니다.』의 주요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거냐면……


“쥴리아나 레이첼란스!”


이크! 내 이름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빙의한 몸의 이름이 불렸다.


“네!”


나는 허겁지겁 제단 앞으로 나섰다.


의식을 감독하는 마법교수가 내가 앞으로 나서자 나에게 잔을 건넸다. 잔 안에는 분홍색의 반투명한 액체가 있었다.


“이것을 마시고 진 가운데에 서십시오, 영애.”


나는 그렇게 했다.


액체는 희미한 벚꽃향이 나는 것 외에 특별한 맛은 나지 않았다.


내가 액체를 마시고 기하학적으로 그려진 진 가운데에 서자 진 바깥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뭐라고 중얼중얼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몸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면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체의 말단까지 서서히 퍼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오감 외의 새로운 감각이 일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오감 중 그 무엇과도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 감각 각각과 조금씩 비슷한 면이 있었다.


나는 선천적인 감각기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장애를 회복할 때 느낄 어색함과 신선함을 느꼈다.


아아, 이것이 마력을 감지하는 감각이구나.


내가 새로운 감각에 신기해하고 있을 때 마법교수가 말했다.


“영애, 의식은 끝났습니다. 내려가셔도 됩니다.”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하고 내려가자 의식을 받으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조금 술렁였다.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것에 말이다.


이 악역영애야, 얼마나 막되 먹은 삶을 살았으면 가장 기본적인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놀라냐고!


내가 이 몸의 원주인을 욕하면서 의식이 끝난 사람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가니, 드디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학생들이 가장 기초적인 마법을 쓰면서 신기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쥴리아나 님!”


쥴리아나의 세 추종자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들은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쥴리아나 님, 마력이 느껴지시나요?”


“그렇네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며 슬쩍 내 주위에 감돌고 있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실감하며 그것을 압축시키고 거기에 전구를 이미지했다.


그러자 빛 덩어리가 생겨났다.


우와! 신기해!


“역시……쥴리아나 님.”


“처음으로 마법을 쓰시는데 벌써 이렇게 능숙하시다니!”


“쥴리아나 님이 이번에 의식을 받은 사람 중에 제일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세 명은 호들갑을 떨면서 아부했다.


하지만 이들의 아부가 마냥 공허한 것이 아닌 게 『성녀에게 이겨내지 못할 고난은 없습니다.』의 설정에 따르자면 쥴리아나는 마법에 꽤나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천 명 중에 한 명꼴의 재능 말이다. 귀족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쥴리아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쥴리아나와 함께 의식을 받게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클라우드 벵기엥은 마법진과 마도구, 마법약을 이용하여 마법을 쓰는 외술에도 이미 통달해 있었고, 자신의 몸을 통해 마력을 느끼고 그것을 조작하여 마법을 쓰는 내술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대략 천 만 명 중에 한 명꼴의 재능 말이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아리시아의 경우는……측정불가, 비교불가. 혼자서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지킬 수도 있는 능력 전무후무한 재능을 소유했다고 한다.


이것을 알게 된 쥴리아나는 아리시아의 재능을 질투하면서 더욱 아리시아에 집착하게 된다고 한다.


……아. 그러고보니 마법을 쓰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중요한 일을 깜빡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가 깜짝 놀라,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놀라서 비명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비명소리는 제단에서 들렸다.


그리고 제단에는……


“아리시아!”


아리시아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섬뜩한 비명소리. 사람의 입에서 날 수 없을 그런 소리가 아리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된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리시아의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 안에서 깊이를, 무게를, 밀도를 가늠할 수 없는 막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폭주.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마력을 품은 사람이 마력을 활성화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전례가 없는 일. 전무후무한 재능을 지닌 아리시아이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리시아가 비명을 지르자 네 명의 남주가 제단으로 달려갔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을 텐데도 달려가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아리시아를 좋아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과 마법교수는 알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하며 남주들을 막아섰지만 남주들은 그들의 제지를 뚫고 아리시아에게 접근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리시아!”


가장 먼저 브레톨리우스가 아리시아에게 접근했다. 그가 아리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자 아리시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


“크윽!”


아리시아가 손을 뿌리치는 것과 동시에 브레톨리우스가 저 멀리 날아갔다. 아리시아의 손짓에 따라 움직인 마력이 그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브레톨리우스에 이어 안시엘과 티자일이 아리시아에게 접근했지만 그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희대의 천재 마법사 클라우드는 달랐다. 다른 세 남주들에 비해 육체적인 재능이 없었던 그는 제일 늦게 아리시아에게 접근했지만 덕분에 세 남주들이 아리시아의 손짓에 따라 튕겨져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무작정 아리시아에게 다가가는 대신 아리시아에게 일어나는 일을 분석하고 해석했다. 순식간에 그 모든 과정을 끝낸 그는 주위 마법사와 마법교수에게 내가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쓰면서 뭐라고 지시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과 마법교수는 처음에는 당황한 듯 하나 이내 클라우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리시아를 둘러싼 마력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는 동시에 한 발자국씩 아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아리시아에게 다가가던 그가 아리시아의 지척에 닿자 그는 아리시아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날뛰던 마력이 진정되었다.


아리시아의 입에선 더 이상 비명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소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리시아의 몸에선 여전히 막대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고, 아리시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간신히 사태가 수습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튕겨져 날아간 세 명의 남주들이 다시 아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클라우드는 어깨가 오르내릴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세 명의 남주들은 궁금증과 질투가 섞인 눈으로 클라우드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그에게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타깃을 변경했다.


그들은 시선을 돌려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바로 나 말이다.


나는 그들의 매서운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챘다.


아씨, 내가 안 했다고요!


하지만 소심한 나는 변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 명의 남주들은 나에게 다가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닦달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렇다.


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 * *



정신을 차려보니 양호실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누운 병상에서 가장 먼 병상에 아리시아가 누워있었고, 네 명의 남주가 그녀를 둘러싼 채 침울한 표정으로 의사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척을 하며 설명을 엿들었다. 의사는 막대한 마력이 소유자의 내면을 휘저어 결국에는 죽게 되는 질병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리시아가 겪은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고, 그래서 치료할 방도도 없다고 말했다.


브레톨리우스는 정말로 방법이 없는지 되물었고, 의사는 왕태자의 질문에 황송하다는 듯이 굴었지만 그의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안시엘과 침통한 듯 신음을 흘렸고, 티자일은 이 나라의 의술은 이 정도밖에 안되냐며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클라우드는 말없이 아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차마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 알리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러니 이 틈을 타서 살짝 스포일러를 하겠다.


이 사건은 클라우드 루트의 주요 사건으로 아리시아가 마력폭주를 겪은 이후 클라우드는 이 현상에 대해서 몇날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분석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력폭주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낸 그는 여기에 봉마초라는 구하기 힘든 약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른 남주들과 함께 그 재료를 채집하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뭐, 당연히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클라우드는 그 약초와 다른 재료들을 배합하여 아리시아를 치료할 약을 만들어 아리시아를 치료한다. 깨어난 아리시아는 세 명의 남주에게 감사를 표하고, 특히나 공이 큰 클라우드에게 볼에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그의 노고를 치하한다. 평소에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 클라우드는 아리시아의 입맞춤을 받자 얼굴을 잔뜩 붉히고 어버버 거리다가 도망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끝이 난다.


웹소설 화수로 그 분량을 나타내면 대략 15화정도 되는 긴 사건이지만…….


어머나? 제 방에는 그 구하기 힘들다는 봉마초가 있네요?


어쩐 일일까?


……어쩐 일이긴.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미리 구해둔 덕분이지.


물론 내가 직접 구한 것은 아니다.


돈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많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법.


모험가들을 고용해서 봉마초를 구해뒀다.


그런데……생각해보니 남주들 돈 많잖아. 나처럼 모험가들을 고용해서 구할 것이지 왜 직접 모험을 떠나서 구했을까?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뭐, 중요한 것은 내가 봉마초를 구해뒀다는 것이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남은 문제는 그 봉마초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클라우드에게 넘겨 주냐는 것.


그리고……


……


화장실 가고 싶은데……남주들 언제 양호실에서 나가?



* * *



-클라우드 side-


클라우드 벵기엥은 직면한 문제 때문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가 직면한 문제는 아리시아가 겪고 있는 마력폭주의 해결방안을 구하는 것. 완전히 불가능한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희미하게나마 그 실마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 신기루마냥 다가갈 때마다 저 멀리 도망가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이는 자화자찬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미 어린 나이에 그의 마법스승이 전수한 지식을 모두 깨우쳤고, 마력을 직접조정해서 마법을 쓰는 내술을 할 수 있게 된 이후에 그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그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자부심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제기랄!”


그는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과 종이뭉치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머리를 감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천재는 무슨 천재란 말인가!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책을 던지고, 발을 구르는 등 소란을 일으켰다.


그렇게 한참동안 난리를 친 이후 조금 성이 풀린 그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골아떨어지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리시아의 상태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을 내리 굶은 것 때문에 지독하게 허기졌다. 하지만 아리시아는 마력폭주로 인해 물 한 방울도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녀를 두고 어떻게 자신의 몸을 챙길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자신의 고통과 아리시아의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을 때.


똑! 똑! 똑!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클라우드……씨?”


여자 목소리. 그의 연구실 겸 침실 문을 두드리는 여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리시아 폴라리스.


그가 놀라서 문을 열자 그의 기대와는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쥴리아나 레이첼란스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기대와는 다른 인물이었기에 클라우드는 실망했다.


그리고 그가 싫어하는 인물이 실망시킨 것이기에 클라우드는 분노했다.


“네가……왜 여기에 와있는 건데!”


클라우드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그가 소리를 치자 쥴리아나는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잠도 자지 못하고, 허기진 몸으로 소리를 지른 클라우드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고 문턱을 잡았다.


그가 어지러움을 잠재우기 위해 가만히 있는 동안 정신을 차린 쥴리아나가 눈을 떴다.


“괜……찮으신가요?”


쥴리아나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서려있었지만 아직 분노하고 있던 클라우드는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용건입니까, 레이첼란스 영애.”


쥴리아나는 말을 고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잠도 못 주무시고, 식사도 거르시면서 연구를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식사를 하시라고.”


“필요 없습니다.”


차갑게 내뱉은 클라우드는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쥴리아나가 조금 더 빨랐다. 그녀는 몸으로 문을 못 닫게 막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리고. 아리시아, 아리시아를 치료할 방법을 찾은 것 같……”


“네가 감히 아리시아의 이름을 입에 올려!?”


클라우드의 갈무리되던 분노가 다시 폭발했다. 그 분노가 살의의 역치까지 닿자 클라우드는 진심으로 쥴리아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지독할 정도로 단련된 그의 이성이 아직 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쥴리아나는 클라우드가 소리치자 다시 몸을 움츠렸다.


어찌되었건 여자. 그것도 아름다운 여자였기에 클라우드는 폭력을 휘두르려는 자신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십시오.”


“보, 봉마초!”


쥴리아나는 눈물을 글썽이는 와중에 간신히 외쳤다.


“예?”


클라우드가 되묻자 쥴리아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보, 봉마초를 쓰면 좋지 않을까요? 제가 알기로 봉마초라는 독초가 있는데, 이 독초를 먹은 마법사는 약효가 몸에 도는 동안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 그러니 이 독초를 쓰면 아리시아의 마력폭주를 제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도, 독초라고 해도. 그러니까. 모든 약은 과하면 독이 되고, 모든 독은 적당히 쓰면 약이 된다고 하잖아요!”


클라우드는 쥴리아나의 말을 흘려들으려고 했지만 그의 이성은 착실하게 그녀의 말을 분석하고 있었다.


횡설수설하는 듯 하지만 그래도 나름 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클라우드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실마리가 구체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조제식과 그 작용에 대해서 빠르게 써내려갔다.


그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조제식이 완성되었다. 그는 재빨리 필요한 재료 목록을 작성했다. 다른 것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재료가 없었다. 봉마초 말이다.


해결 방법을 찾은 이상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옷장 앞으로 뛰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실내복에서 모험을 하기에 좋은 튼튼한 옷으로. 쥴리아나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무시했다.


옷을 전부 갈아입은 그는 아직도 쥴리아나가 방 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쥴리아나가 뿌리까지 있는 약초 한 다발을 건넸기 때문이다.


“그건…….”


“보, 봉마초예요.”


“그걸 왜 당신이?”


“제, 제, 제가 개인적으로 실험을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실험한다고 미, 미리 구해둔 거예요.”


그는 무의식적으로 쥴리아나가 내민 봉마초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지식으로 그것이 봉마초인지 아닌지 식별하기 시작했다.


봉마초였다.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실험이 있어야겠지만 1차적으로 맞다고 식별했다.


클라우드가 봉마초를 든 채 말 없이 서 있자 쥴리아나는 쟁반 위에 있는 뚜껑을 치웠다. 그러자 간단한 내용물의 샌드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리고, 식사를 많이 거르셨다고 들어서…….”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쟁반을 내밀었다.


클라우드는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받았다.


클라우드가 전부 받자 쥴리아나는 “그, 그러면 수고하세요.”라고 말한 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클라우드는 쥴리아나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는 책상 위에 쟁반과 봉마초를 올려놓고 그 두 가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두 가지의 처분은 금방 결정났다.


그는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봉마초를 가지고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 * *



-아리시아 side-


아리시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세상이 새로운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감각이 낯설었지만 그것들이 그녀에게 무척이나 우호적이라고 느꼈다.


조금 덥다고 느끼고 있던 그녀는 살짝 그것들을 움직였다. 그러자 시원한 느낌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그녀는 목이 마르다고 느꼈기에 살짝 그것들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갈증이 서서히 해소되었다.


그 이후 그녀는 눈을 떴다.


“아리시아!”


그녀의 눈이 세상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녀가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니 잘생긴 네 명의 남자가 그녀를 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브레톨리우스는 눈물을 살짝 글썽이고 있었고, 안시엘은 성호를 그리고 있었으며, 티자일은 귀를 쫑긋거리며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피로가 가득한 클라우드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나, 아리시아?”


브레톨리우스가 말했다.


“예……괜찮아요?”


아리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무슨 일이 일어난거죠?”


“어디까지 기억나나?”


“네? 그러니까……마력활성화 의식을 받기 위해 제단 위에 오르고……오르고?”


거기까지 기억해낸 그녀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기억이라기 보다는 몸에 남아있는 감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자극되는 그 느낌, 온 몸이 찌부러지는 듯하고 부풀어 오르는 듯 한 그 느낌, 자신의 몸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 느낌,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는 듯 한 그 느낌.


“아아아아아아아.”


아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아리시아!”


아리시아가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감각에 매몰되려하는 그 때에 클라우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매몰되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네? 예? 우디?”


“너는 지금 여기에 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모두 지났어. 너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아. 그들은 너를 받아들였다. 그러니 너도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이라뇨?”


“마력.”


클라우드는 아리시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타 꽃과는 달랐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듯 한 질감의 꽃이었다. 삼차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모양의 꽃이었다.


그녀가 그 꽃을 신기해하며 받아들이자 꽃이 활짝 폈다. 그리고 꽃잎을 주위로 퍼트리기 시작했다.


“어머?”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주위로 퍼져나가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네 명의 남자도 꽃잎이 주위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남자 중 한 명. 클라우드는 그것을 심미안이 아닌 학자의 눈으로도 보았다.


클라우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내민 꽃은 받아들인 자의 마력을 시각으로 보여주는 마법이었다. 보통은 꽃의 밝기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지만, 아리시아는 밝아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처럼 화사하게 피어서 주위로 자신을 퍼트리고 있었다.


그는 아리시아의 마력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고 분석했다.


자신의 재능을 훨씬 뛰어넘는 아리시아의 재능에 그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열등감도 아리시아의 무사에서 오는 안도감과 비교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놀라움의 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아리시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브레톨리우스는 침착하게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마침내 클라우드가 마력폭주 치료약을 만들어서 너에게 먹인 게 방금 전이었다. 클라우드가 없었다면…….”


브레톨리우스는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시아는 클라우드를 보고 말했다.


“고마워요, 우디.”


클라우드는 갈등했다. 그는 자신의 양심과 자신의 이득을 저울질 하다가 양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레이첼란스 영애……의 덕을 봤다.”


레이첼란스 영애라는 말이 나오자 밝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리시아는 밝았던 표정을 지워버리고 물었다.


“쥴리아나가 왜요?”


클라우드는 아리시아의 태도가 냉랭해지자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여기서 말을 끝내는 것은 안 꺼내니 만도 못할 것이다.


클라우드는 쥴리아나가 마력폭주 치료약의 실마리를 준 것, 그리고 치료약의 핵심재료인 봉마초를 구해준 것을 가감 없이 말했다.


클라우드의 말이 전부 끝나자 한 소녀와 네 남자는 침묵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과 지금 들은 이야기를 매치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앞뒤가 전혀 맞지가 앉았다.


“레이첼란스 영애가 어째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거지?”


“음……”


“심문해볼까?”


“관 둬. 썩어도 준치라고 그녀도 이 나라의 귀족이다.”


네 남자는 쥴리아나의 꿍꿍이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쥴리아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아리시아는 네 남자보다 좀 더 깊게 쥴리아나에 대해서 생각했다.



* * *


-쥴리아나 side-


오늘 아침 수업을 들어가니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아리시아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다. 마력폭주 치료했구나.


그녀가 살아서 다행이다. 만약 잘못되어서 그녀가 죽었다면 남주들이 나의 수작이라며 나를 죽이려고 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씨 억울해!


……이 악녀야, 그러니까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고!


내가 이 몸의 주인을 욕하고 있을 때.


“아.”


아리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리시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저 생명의 은인인데요.


그렇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차마 항변하지도 못하고 눈을 돌렸다.


하아. 정말로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