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그렇게 말하자 나에게 애원하듯이 향하던 그녀의 눈빛은 마치 죽은 사람마냥 탁해졌고 사랑을 갈구하던 그녀의 성대는 폐에 칼을 찔러 넣어서 죽인 사람과 같이 바람 소리만 났다. 어쩌면 어두운 밤을 비추던 달빛이 간신히 이제는 경첩도 무너져 내려서 가려지지 않는 창문 사이로 비추던 것이 잠깐 구름에 가려져서 그런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과 아내가 있다. 오랜 시간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급하게 떳다. 그녀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내가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만 같다. 나가던 도중 주변에서 인기척이 조금 느껴졌지만 나에게 적의는 없는 것 같기 때문에 최근에 혼란해진 정세 때문에 외출시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이전에 쓰던 검은 발검하지 않고 그대로 떠났다. 내가 나간 뒤에도 그 집에서는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진 않았다.


그날 아내가 잠에 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왔다. 나는 귀족이고 이전에 친구였다곤 하나 이전에 연정을 품었던 외간 여자를 만나고 온 것이 마음에 거슬려서 그녀에게 실토했다. 당연히 대화 말고는 아무런 일이 없었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내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며 나를 보듬어 주는 한편  내 소꿉친구인 클레트가우 아가씨를 동정하기도 했다. 



내 아내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혼인을 함으로써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평민에서 이제는 이름있는 가문의 여식이 된 그녀와 나의 아내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 정도이지만 나는 내 아내가 그녀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내도 처음에는 이전보다 나아진 생활에 조금 적응을 하지 못하는 듯 했다. 고기나 우유같은건 농사를 지어 바치고 남은 곡식을 최대한 아껴 간신히 물물교환을 통해 얻은것밖에 먹어보지 못한 내 아내는 도시에 사는 평민보다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식재료들을 보고 처음엔 당황하기까지 했다. 어찌 농작물을 키우는 사람의 집에 이렇게 고기가 많은 것이냐며 말이다. 나도 어린시절엔 배우지 못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간악한 자들에게 속으며 수탈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기를 쌓아두는 것은 생각도 못 해 봤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수탈당하지 않게 되었던 이유는 아가씨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내는 적응했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녔던 옛날과 다르게 주에 두번씩은 옷을 갈아입게 되었고 매일같이 씻을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틀에 한번은 목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대부분을 수탈 당하는 삶이었지만 자기 소유의 경작지에서 경작을 해서 세금만 빼면 전부 우리의 것이었기 때문에 일하는 즐거움도 생겼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더욱 알아가면서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녀는 누가 봐도 행복 할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는 누가 봐도 불행한 삶이었다. 평민으로 있었을 때보다도 훨씬 나아진 삶을 살아가며, 음식은 입에는 맞지만 뱃속에서 요동을 쳐서 그녀를 괴롭게 만들고 옷은 화려하지만 피부를 쓸리게 했고, 얼굴에는 분칠을 너무 자주 해서인지 붉게 올라오는 홍색 반점들도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쉽게 잃어버린 비운의 여성. 아니, 어쩌면 그 상황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었겠지. 그녀 스스로 자업자득인 부분도 있지만 몇가지 그녀가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된 것은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의 낭군을 잃게 된 것도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그저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이었겠지. 설마 그녀 자신의 아비가 어머니와 가족들을 버리고 자신만 거둬들인 데다가 재혼을 하고 그녀를 출세를 위한 정략결혼의 도구로밖에 볼 줄은 몰랐던 것과 낭군이 왕명을 위조할 정도로 대범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결국엔 그것이 들통나서 효수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난 바이츠제거 공이 효수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나와 아내가 적절한 시기에 도시에 방문을 해서 그 광경을 보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전쟁을 알지만 아내는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이러니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행복을 찾아 나섰던 아가씨는 그렇게 되었고 그녀가 떠나갈 때에 모든 희망을 내려놓았던 나와 그동안 희망을 가져보지 못했던 나의 아내는 행복해졌다.


그로부터 몇달 뒤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자식들이 있는 우리집은 습격을 받았다. 발검을 한 사내 수명이 좁디좁은 우리 집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내 식구들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마침 둘째가 병에 걸려서 장인어른이 동네의 의원에 방문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첫째 아들과 내 아내, 그리고 나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의 목을 쉽사리 베어넘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보고 난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바이츠제커 가문 뿐만이 아니라 많은 가문들이 줄줄이 엮여서 숙청을 당하던 시기였다. 주인을 잃은 병사들은 다른 주인을 섬기기도, 용병이 되기도,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원래 하던 일을 하기도 했지만 도적이 된 자들도 많았다. 이전에 밤에 훌쩍 밖으로 나섰을 때에 검을 차고 나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아직 나의 감은 죽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그들이 집에 들이닥치자마자 벽에 걸어두었던 검을 뽑아들어 무리중 하나의 목에 겨누었다.


그들은 결속력이 단단했던 것인지 동료가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감히 내 가족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느새 아내도 그들이 한눈을 판 틈을 타서 내가 챙겨주었던 단도를 벌벌 떠는 손으로 뽑아들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겨누고 있었고 아들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천장에 다락방에 올라가 내가 숨겨두었던 장전된 석궁을 아래층에 있는 무리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에게 겨누어 누구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질러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다짜고짜 발검을 하는 네놈들은 누구냐고 소리쳤다. 그때에 문이 다시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내가 20년도 전에 보고 그 뒤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자였다.


"클레트가우 경....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네놈이 그런 말을 하다니....네가 한 짓을 정녕 모르는 것이더냐!"


그렇게 소리치며 그는 마찬가지로 발검을 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말투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이전에는 꽤 거칠었지만 자식들과 주변 사람들에겐 포근한 사내였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악덕한 귀족같았다. 검을 평소에 쥐는 자가 아니었던 것인지 그 자세는 엉성하기만 했다. 내 소꿉친구이고 지금은 클레트가우 가문의 여식인 그녀의 가족들을 버린 당사자. 호즈만 폰 클레트가우 경의 표정은 내 죄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실속은 하나도 없어보이는 예장검을 내 얼굴을 향해 겨누며 덜덜 떨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마 팔의 힘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일 테다.


"경, 아무리 이 나라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중한 자리에 계시다곤 하나 적법한 영장도 없이 야밤에 남의 집에 쳐들어오셔서 발검을 하시다니요. 칼을 내려놓고 얘기를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닥쳐라! 네놈 때문에 내 여식의 혼사가 전부 허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아직도 팽팽한 긴장 상태에만 놓여서는 그 누구도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검을 한손으로 잡고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천장에 있는 아들에게 얘기했다.


"아들아,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너는 저 간악한 자를 쏜 뒤에 즉시 도망을 쳐라. 그리고 너의 아비인 데커트와 그의 아내인 에마는 클레트가우 가문에 의해 일방적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을 도성에 달려가 알리도록 하여라. 너의 외할아버지와 둘째 동생은 도성 내에 있으니 네가 빨리 도망을 친다면 그곳에 있는 정의로운 자들이 너와 우리 가족들을 도울 것이다."


나름대로 죽음을 각오 하면서 아직 동네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외할아버지와 둘째를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나와 내 아내는 결의가 되어 있었다. 가능하면 그녀까지도 살리고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 해 봐도 그건 불가능했다. 아내도 내 결심을 눈치 챈 것인지 손에 쥔 단도를 더욱 단단히 쥐어서 눈 앞에 있는 사내와 함께 자멸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부인...미안합니다. 적어도 당신을 죽이는 놈 까지는 내가 데리고 가겠소.'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와 내 아내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자들의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저자들이 왜 저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열린 문으로 안의 상황을 확인하던 자가 나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라고는 소리쳤다.


"데...데커트! 문둥이 도살자놈!"


나는 내 이름과 함께 불린 처음들어보는 이상한 별명같은 것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나에겐 좋은 상황이었다. 난 즉시 내 목을 겨누던 놈의 칼끝을 세게 잡아서 놈의 손에서 벗어나게 한 뒤 아내를 겨누던 놈에게 던졌다. 불행히도 칼의 손잡이에 머리를 맞았지만 무언가가 부숴지는 소리와 함께 그자식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지막 남은 놈을 향해 베어 넘기려 했다. 하지만 내 첫째 아들이 더욱 빠르게 그자식의 허벅지를 쏘았다.


이제 남은 것은 클레트가우 경과 그의 곁에 있던 호위무사로 보이는 놈 뿐이다. 하지만 그는 발검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클레트가우 경은 소리를 치며 그에게 발검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리며 그에게 비키라고 했고 그는 순순히 따랐다. 그때 클레트가우경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 것에 괜히 헛웃음이 나와서 한번 피식 웃어준 뒤 간단하게 칼끝으로 그가 쥐고 있는 칼의 손잡이를 툭 쳐서 간단히 무장을 해제시켰다.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과거에 복무했을 때처럼 그저 무표정하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열망이 있었던 것인지 개구리 마냥 허우적 거리며 도망가는 그를 벽까지 몰아붙이고 나는 그에게 검을 내리치려 했다.


"여보!"


하지만 내 아내가 나를 말렸다. 그제서야 주위를 돌아보니 한바탕 소란에 주변 동네 사람들과 잠깐 머물고 있던 모험자들, 마침 도적떼 때문에 마을을 지키러 온 병사 몇명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지켜보는 자들에게 소리쳤다.


"클레트가우 경은 적법한 영장이 없이 나의 집에 쳐들어와 발검을 하여 나와 나의 가족의 목숨을 위협하였습니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한 처분을 공정하신 법관님께 묻고자 합니다! 그 누구라도 제가 정의를 올바르게 세우고자함을 인정하시는 분이라면 저와 함께 도성으로 가서 저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거리다가 이내 손을 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즉시 쓰러진 자와 부상당한 자들, 클레트가우 경을 연행하였고 나는 늦은 밤이지만 즉시 도성으로 가서 그가 처분을 받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아이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홀로 병사들과 함께 마차에 몸을 실었다.


수갑이 채워진 클레트가우 경은 의외로 순순히 연행되었다. 그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죽일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병사들에게 그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흔들리는 마차에 마주 앉아 그에게 물었다.


"경,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근 30년 만에 만난 저와 저의 식솔들을 해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네놈...정말로 모르는 게냐..."


"아무것도 짐작 되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알려주마. 내 여식, 아르엘 폰 클레트가우가 미망인이 된 것은 네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거기다가 최근에 내 여식과 내통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


"그것은...아닙니다. 저는 클레트가우 아가씨와 단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홀몸이 아닌 사내로써 불륜을 했다고 할 만한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를 수행하던 내 식솔들이 내게 고한 것은 대체 무엇이더냐!"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고하였습니까?"


"네놈이 내 딸을 홀려서 이곳에 찾아오게 만든 주제에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는 내 딸을 뒤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를 홀린 적이 없습니다. 단지...과거에, 아가씨가 귀족이 되시기 위해 이 마을을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기 전의 아가씨를를 연모했었다는 것을 어쩌다 보니 고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아무튼 내 여식은 너를 만나고 돌아온 뒤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간신히 잡힌 혼사를 거부했다. 어떻게든 때려서라도 보내려 했지만 칼을 자기 목에 들이밀면서 네가 안된다고 하더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악의가 묻어나왔다. 주변의 병사들은 뜻하지 않게 클레트가우 가문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난감한 눈치였다.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아는 힘없는 자들은 목숨이 위험하기 마련이었으니까.


"네놈은 내 여식과 나를 능멸했다. 난 절대로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렇다면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이미 아내가 있는 평민인 네놈이 내 여식을 첩으로 들이겠다는 게야!"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식솔을 붙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제안은 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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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이걸 내가 4편 이상으로 쓰다니...한 6편 될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