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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다니다 들렀는데


지금까지 본 후회물 중에는 이게 꽤나 인상적이었던 거 같애서 올려봄.


내가 번역한 건 아니고 소설가가 되자 올라온 거 누가 번역한 게 돌아다니던 거임.





 


 



딱히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집이 근처에, 부모 간의 사이도 좋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하다. 소꿉친구, 지긋 지긋한 관계, 친구, 커플, 호칭은 뭐라고 해도 좋겠지.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에 다니면서, 진로 때문에 대학에서 처음으로 잠깐 나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인 간의 교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살고, 성장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손을 잡는. 그런 반복되는 일상들이 자신, 다카키 요이치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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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어느 날의 심야 0시 30분, 어떤 방 앞에. 자신은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방 주인의 이름은 쿠로다 사키. 어릴 적부터 함께 살고, 성장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손을 잡고, 그리고 자신이 처음 사귄 연인이기도 하며, 평생 함께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사랑하는 사람.

 

가장 사랑하고 있었을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었을 사람.

 

그런 그녀가, 고교 시절의 동급생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엉켜있다.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 왜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저 남자인가.

 

감정이 급속히 얼어붙는다. 호흡이 가늘고, 길어진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간다.

 

분명 자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었던 것이 어리석었다. 한심하다.

 

차라리 들키기라도 했다면 이토록 물끄러미 바라볼 일도 없었을 텐데. 

 

현실은 어디까지 잔인하고 무서운가. 두 사람이 엉킨 모습이 눈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아아, 왜 이렇게 된 거지?

 

 

하고 자문자답한다. 서로의 대학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녀는 혼자 자취를 했기 때문인가?

 

─왜?

 

자신은 단기 대학. 그녀는 국립대. 졸업이 가까워서 바빴기 때문에 최근 만나지 않았다. 연락도 거의 하지 못했다.

 

─왜?

 

스타일도 좋고, 미스 대회에 선정될 정도의 미인인 그녀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자신. 그녀는 1달에 한 번은 고백을 받고 있었다. 눈앞에 그녀와 엉켜있는 상대도 적어도 한 번 그녀에게 고백했던 녀석이다.

 

─왜?

 

그 녀석은 꽃미남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소꿉친구란 인연이 없으면 그녀와 평생 말할 기회도 없었을 테다. 그런 인종이다.

 

─왜?

 

오늘이, 아니 정확하게는 어제가. 그녀의 생일이니까. 매년 축하해주려 서프라이즈를 준비했기 때문에.

 

─왜?

 

그녀가 여자 친구들과 논다고 해서, 그래도 하루 넘겨 축하만은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사키가 좋아하는 나팔꽃을 모티브로 한 만년필과 메시지 카드를 함께 두고 갈 생각이었다.

 

─왜?

 

─왜?

 

─왜? 

 

왜 그녀는, 그 녀석은,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자신은 현관 앞까지 돌아가고 있는가?

 

왜 도망가는 거지? 자신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는데. 화나서 마구 소리치며 달려들면 좋은데, 영문을 모르겠다.

 

하여튼 당장 다리를 움직이지 않으면, 이대로 멈추면 죽어 버린다고 느낀다.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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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도 깊어지고 겨울이 가깝다. 야외는 물론 북풍이 몰아친다. 추우니까 돌아가자. 하지만 택시는 잡히지 않고 역까지 걷는 거지. 좋을 일도 없지만, 이걸로 좋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쉰다. 영혼이 빠지는 듯한 한숨이었다.

 

뭔가가 부족했던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오열하면서 걷고 있는 자신은 필시 익살스럽게 보이겠지만, 가엾게 보아주면 뭐 그것도 좋다.

 

패배자한테는 그런 게 어울린다고 강한 척을 해보려 해도, 웃으려 해도 웃을 수 없다. 그래서 웃자고 한 손으로 두 뺨을 들어 올려보지만, 노력이 듣질 않는다. 눈물로 손이 미끄러진다.

 

아무리 걸어도, 거리를 울며 걸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어렴풋이 남은 냉정한 판단력이 끝을 고했다.

 

 

───사랑했어, 사키. 안녕.

 

 

마음속에서 이별을 나누고, 역에서 택시를 잡는다. 그녀에게 선물하려던 만년필은 역의 쓰레기통에 던진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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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있었습니까?"

 

 

운전사 아저씨가 걱정해 준다. 내 꼴은 꽤나 심한 듯하다.

 

 

"비참한 꼴을 당했죠."

 

 

억지로 웃어 보았다. 백미러에서 본 자신의 얼굴이 어색한 곡선을 그린다. 감출 도리가 없는 가짜 웃음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와의 연락은 제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엷어졌다. 마지막 교환은 “크리스마스 일정 비어있을까?” “미안, 여자애들끼리 모임이.” “그래, 즐겁게 놀아.” 라는 시시한 것.

 

정말 여자애들끼리 모이는 거냐? 아니, 다른 녀석과 만나는 거겠지 하고 물으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새해 인사도 없이 자연 소멸해가는 관계.

 

그런 것이었다. 단념하도록 하자.

 

자연스럽게 그녀가 없는 일상이 당연하게 되어 간다.

 

허무함도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걸로 좋은 거라고. 다만 안도감과도 향수와도 다른 이상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단기 전문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친정에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친정은 그녀와의 관계가 너무 강하다.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박관념을 닮은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대학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회사에 취직. 취업 보증인에 도장을 눌러준 교수는 따로 바친 소주를 마시며 기분이 어지간히도 좋아 보였다.

 

친가에는 이제 독립하겠다고, 연락은 나중에 따로 하겠다고, 취직한 곳도 알려주지 않고 이사했다. 후에 휴대폰 번호도 변경했다.

 

이제 겨우 일단락인가. 마른 웃음이 울컥거린다. 하지만 웃고만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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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이만큼이나 떨어지면 그야 주변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회사, 일, 새로운 교제, 새로운 생활. 모든 것이 신선하고 때로는 가차 없이 힘들다. 그런 나날들에 자신이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걸 느꼈다.

 

직장 동기는 처음에야 여섯이나 있었지만, 고작 2년 사이에 자신까지 포함해 2명밖에 남지 않았다.

 

모리야마 메구미란 동료는 키가 작고 통통한 주제에 붙임성도 나쁘지, 새치가 눈에 띄고, 주근깨투성이에, 항상 어두운 기운이 나오고 있는 여성이었다. 요령도 나쁘지, 머리 회전도 느리지, 그래도 묘하게 자신과 말이 잘 맞았다.

 

서로 상사의 푸념을 늘어놓으며 함께 식사를 하고, 일을 보조하고, 서로 돕는다.

 

3년 차에는 절약을 위해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못난 인간끼리 타협하고 결혼하는 건 어떻겠냐고 프러포즈했다.

 

“지독한 프러포즈네요”, 한숨을 내쉬던 메구미는 “평생 독신으로 살 작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네요”, 하며 또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또 3년 정도가 흘렀다.

 

친정에 연락은 거의 넣지 않았다. 생존 신고에, 결혼했다고, 자녀가 생겼다고, 일이 바쁘다고, 내 집 마련으로 힘들다고, 연년생으로 아이가 생겨서 돌아갈 수 없다고 때때로 일방적으로 연락을 넣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쯤 되면 귀성을 계속 미루는 건 힘들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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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가 되기 전에 간신히 집에 얼굴을 내밀 결의를 다졌다.

 

아내는 너무 늦었다고 시끄러웠지만, 용서해주길 바란다. 나한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것이야, 사정이.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대로 전화를 걸면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다.

 

간략하게 용건을 전했다. 다음 달 3주 이상 휴가를 냈으니까 친가에 돌아갈 생각이라고. 괜찮을까?

 

 

대답은 간단했다.

 

 

“자식이 집에 돌아오는데 무슨 허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어서 며느리와 손자 얼굴이나 빨리 보여줘! 불효의 처벌은 두 손 두둑이 선물이나 챙겨오는 걸로 봐줄 테니까.”

 

 

어머니의 매도는 정론인 듯하면서도 불합리하다.

 

일단 친정에 돌아가자마자 먼저 아버지의 주먹에 맞았다. 눈앞이 핑 돌아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을 보고 아내와 어머니는 대폭소했다.

 

그리고 며느리와 어머니의 푸념 대회. 대상은 물론 자신.

 

손자와 놀고 있을 테니까 너는 가전 기구나 사 와라, 등등.

 

친해진 아내와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아버지와 조금씩 뚝뚝 대화하면서 술잔을 주고받았다.

 

 

“너는 술 마실 나이가 되기도 전에 집을 나갔으니까 말이다.” 

 

“미안.” 

 

“아무튼 건강하게 지내는 것 같으니까 괜찮은 거야. 아, 그리고 용케도 저렇게 좋은 며느리를 데려왔구나.” 

 

“응.” 

 

“뭐…….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마는. 이래저래 사정이 있는 거지?”

 

“…그동안 미안하게 됐어, 아버지.”

 

“괜찮다니까 이 자식아. 뭐, 그래도 네가 건강해서 다행이다.” 

 

“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건강해서 다행이야.”

 

 

길었던 공백 기간을 채우듯이, 아버지와 천천히 말을 나누었다.

 

어머니가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것, 독신 생활을 시작한 여동생의 것, 아버지가 치질 수술을 한 것. 이런저런 시시한 일을 포함하여 조금씩. 천천히.

 

 

"사키의 일이지만 말이다."

 

 

대충 이야기가 마치고,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투로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동시에 듣고 싶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키도 결혼한 것일까? 상대는 예의 고교 시절의 동급생일까. 아니면 더 좋은 남자를 발견한 것일까.

 

아버지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본론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사키의 아버지와 아버지는 가장 친한 친구이었으니까.

 

 

"사키의 아빠가, 사키와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더라."

 

"아, 그래. 그건 상관없지만……."

 

"상관없지만?"

 

"그 녀석은 나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거, 아니야?"

 

 

헤어진 애인과 만난다니. 보통은 싫어하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는 사정이 다른 것 같다.

 

 

"사키 짱 말이다, 네가 없어지고 나서 이따금 집까지 찾아와서 네 일을 물었다."

 

"그 녀석이?"

 

"응? 너희들 사이가 아직 나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냐?"

 

"글쎄."

 

 

미지근한 소주를 홀짝인다. 관계가 자연 소멸했기 때문에 헤어진다고도, 싫어졌다고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낸 5년의 세월은 감상을 덤덤하게 했다. 

 

 

지금이라면,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사키 짱, 네가 결혼한 것을 듣고 집에 돌아가서 혼자 밤새 울었다더라."

 

"왜?"

 

"나야 모르지. 그러니까 만나서 이야기해봐."

 

 

아버지는 잔에 소주를 따르고는 단숨에 마셨다. 

 

떠올려 보면 그때는 사키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 혹시 사키의 관점에서는 내가 제멋대로 멀어지고 이별하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결혼해버린 불성실한 남자 취급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오해를 풀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이제 와서 사키의 바람기 따위, 증거도 뭣도 아무것도 없다. 이제 와서.

 

 

"불성실한 사람 취급인가. 불합리하네."

 

 

어쩔 수 없다. 그 비난은 일단 받아들인다. 적어도 결의를 가지고 말해보자.

 

여차저차. 친가에 돌아오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나, 자신은 어떤 진리를 깨닫고 있었다.

 

가라사대, 효도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강박해와 진행되는 것.

 

가라사대, 고부 동맹군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가라사대, 장기 휴가라는 이름의 노동력 착취.

 

 

벗어날 수가 없다.

 

매일 아침부터 아이를 달래며 틈틈이 텃밭의 흙을 고르고, 낮에는 슈퍼에 가 짐을 잔뜩 들고 온다. 저녁에는 식사를 준비하고 나면 곧장 자장가로 아기 재운다.

 

도대체 휴가란 무엇이냐고 따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말하자면 부모로부터 5년 걱정시킨 처벌과 대우라는, 반박도 나오지 않는 욕설이 온다.

 

그런 어느 저녁, 사전에 연락된 시간에 사키와 사키의 부모님이 인사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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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폄하, 비방, 혐오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비했지만, 저쪽에서 방문까지 한 이상은 어쩔 수 없다.

 

여기서 견딜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쪽에서 뭐라고 말해도 나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저쪽의 자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 버리면 그 이상은 뭣도 없다.

 

현관에서 만난 것은 어째서인지 우리 부모님보다 10살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차분한 모습의 아저씨, 아줌마들. 

 

 

그리고───

 

 

그때부터 변함없이 아름다운, 스타일도 좋고, 긴 검은 머리, 길이가 긴 스커트에 마찬가지로 긴 소매 있는 옷. 여전히 예전 그대로 아름다운.

 

그런 그리운 소꿉친구가 있었다. 함께 살고, 함께 자라난, 그 연장선으로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소꿉친구가 있었다.

 

예전과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피를 토하는 노력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왈가왈부 잔소리하는 것도, 내 쪽에서 신경 쓰는 것도 촌스러운 일이겠지.

 

사키와 나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가족을 소개한다.

 

 

"오랜만이네. 소개할게. 아내인 메구미. 아들인 다이, 딸 유코."

 

"오랜만이네요. 그리고 메구미 씨, 다이 군, 유코. 처음 뵙겠습니다."

 

 

사키는 부모님에게 인사하고, 메구미와 내 아들과 딸에게 인사했다. 사키의 부모는 그저 보통으로 인사했을 뿐 깊은 이야기를 하는 일도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된 것이지만, 오래된 지인이라고 사키를 메구미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함께 먹기로 했다. 장소는 이 집.

 

예정대로 별문제 없이 회식이 진행된다. 주로 우리 부모님과 사키의 부모님이 얘기한다. 나머지는 맞장구를 친다.

 

아무것도 없다. 풍화한 광야 같은 일그러진 저녁 시간.

 

그래서 예정조화처럼 자신은 툇마루로 향한다. 밤바람을 쐬러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키가 곧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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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미는 안쪽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자신과 사키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창문은 닫혀 있으니 대화는 안에 들리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적당히 사정 좋은 장소다.

 

이렇게 사키와 나란히 앉아있으면 자신도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을 터다. 그때의 일이라든지. 왜 그랬냐고, 거짓말이지? 소문일 뿐이지? 하고.

 

하지만 이제 와 묻는대도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요이치 군, 좋은 아내를 얻었구나."

 

 

사키는 그런 두서없는 말부터 시작했다.

 

 

“놀리는 거냐?”

 

“놀리는 거 아냐.”

 

“토실토실 살쪄서 스모선수 같지, 뭐.”

 

“그렇지 않아.”

 

“뭐, 나도 좋은 아내를 얻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러브러브네.”

 

“러브러브지.”

 

“최저.”

 

“좋잖아?”

 

“좋지만.”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그날, 택시의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같은, 감춰지지 않는 억지웃음. 가짜처럼 웃으며 그녀가 물었다.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응, 그럼 동정받을 만한 이야기라고 할까, 확 깨는 이야기를 해줄까."

 

"괴롭히는 거냐."

 

"내 독백 같은 거야. 싫으면 뒤로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도 좋고."

 

 

그냥 후회일 뿐이니까, 하고 그녀는 투덜거렸다.

 

이렇게 그녀의 투정을 듣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때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흘러 넘쳐왔다고 생각하면, 그래. 끝까지 어울려줄 의무는 없지만, 여기서 결판을 내지 않으면 그녀도, 자신도 과거가 독처럼 미래를 침식할 거다.

 

툇마루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이 빼곡히 보인다. 별자리 따위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솔직하게 아름다운 밤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대답한다.

 

 

"들을게."

 

"고마워."

 

 

그럼 이야기할 테니까, 너무 깨지 말아줘. 전제를 붙이면서 시작된 이야기다.

 

 

 

 

===============

 

 

 

 

“요이치 군이 없게 되고 나서도 나는 별로 변하지 않았어. 아니, 그거랑은 조금 다를까…? 사실 처음에는 내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어.

 

미안, 지금 돌이켜 보면 바보였네. 

 

계속해서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들고, 흔들리고, 차여. 돈을 빌려, 배반해. 교제하는 지인도 화려하게 되고, 거기에 알맞은 정도의 명품이나 비싼 액세서리가 필요해졌어.

 

돈을 벌려고 원조교제 같은 것까지 손을 내밀었는데, 그중에 끔찍한 인간말종이 있었어. 응, 야쿠자.

 

지옥을 봤어. 아니, 지금도 보고 있을지도.

 

야쿠자는 나를 정부로 삼아서 엄청난 일들을 시켰어. ‘나를 위해서 해라,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해라!’ 그러는 거야.

 

약을 맞고, 각성제에 중독되어서는, 끝이었지.

 

허리에 문신을 넣어지고,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약을 사용하고. 악순환이 가속화되고, 팔이나 가슴과 배와 다리의 문신이 늘어나.

 

문신 말이야, 원래 한 번 하고 나서 2주 정도 안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야쿠자는 느긋하게 기다려 주질 않거든. 

 

그렇게 문신이 늘어나니까 화농한 부분이 아파서 또 약을 쓰는 거야.

 

여기까지 오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대학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전부 쓸모없어졌고.

 

장난감처럼 피어싱이 붙었고, 피임은 당연히 하지 않기 때문에 낙태도 2번 했다? 인격 따윈 없는 취급이야. AV에도 여러 번 출연했어. 마약을 준다니까.

 

성병에 걸려서 해외에 팔리기 직전에 부모님이 간신히 도와준 거야. 약물에 절은 체력, 지친 몸. 부모님이 알아채지 않았다면 정말로 아슬아슬했던 것 같아.

 

그 부분은 사실 지금도 기억이 애매하네요, 의사는 기적이라고 부모님께 감사드리래. 내가 감히 감사 따위 할 수 없지…….

 

야쿠자는 여죄 포함해서 징역 34년을 받았고, 나는 약물중독이 치료될 때까지 부모님한테 감시받으면서 아직도 자립하지 못하고 얹혀살고 있는 신세야.

 

참 바보 같지?”

 

 

사키는 자학하며 웃었다. 어느새 무릎을 안고, 울듯이 웃었다. 치마 아래의 다리에는 문신이 보일 듯 말 듯 하고, 곳곳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래, 참 바보네."

 

 

이미 소문으로 듣고는 있었다. 부모로부터, 여기에서 재회한 옛 친구로부터, 공연히 참견해 오는 이웃으로부터. 자신은 관계없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강변할 정도로 관계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나 견딜 수 없어도, 알고 싶지 않아도, 슬퍼도. 조용히 끝까지 들어주려 한다.

 

 

"응, 바보야. 그래서 아무튼 여기서 2년 이상 약의 후유증과 싸우고 있는데, 역시 괴로워서 말이야."

 

"지금도 괴로운 건가?"

 

"옛날에 비하면 낫지만."

 

 

사키는 독백을 계속한다.

 

 

“그래도 괴로우니까 그 괴로움에서 눈을 돌리자고, 즐거웠던 시절의 기억을 자꾸 떠올리게 돼.

 

자주 떠올리는 기억은 말이야, 호수에 가본 것, 바베큐 한 것, 요이치 군이랑 실없는 잡담을 하고 있던 것, 그리고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이라든지.

 

이제 와서 무슨 말 하고 있어, 정말.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억은 요이치 군 관련된 것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마모됐던 기억도 점점 선명해지고,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되는데 거의 1년 걸렸더라.

 

그래서… 아, 싫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지금까지도 엉망진창으로 심한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부터 말하는 건 죽을 만큼 힘들어서. 베이는 것처럼 아파서.”

 

 

그렇게 말한 그녀의 눈은 어디까지고 진지하게, ‘싫다’ 고 말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말할 필요 없잖아."

 

 

그렇다면 무리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잖아.

 

 

“싫어, 그래도 이야기하게 해줘. 부탁이니까 끝까지 들어 줘.

 

나는 말이야, 요이치 군에게 배신당했다고. 버려졌다고 생각했어. 어느새 내 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요이치 군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랑 결혼?

 

최저의 쓰레기잖아. 내 몸이 목적인 다른 쓰레기 같은 남자들과 똑같다고, 결국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따위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기억해보면 어긋나는 거야. 시기가 어긋나 있는 거야.

 

 

내 기억에서 즐거웠던 시기와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시기, 싫은 기억이 시작되는 시기가 말이야.”

 

 

사키는 별을 올려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요이치 군의 메시지가 아직 내 휴대폰에 남아 있었어. 그게 마지막 증거라고 할까. 치명적인 일격을 떠올리게 해 준 거야.

 

마지막 연락은 크리스마스의 예정이었고, 그 이후로는 새해 인사도 없었는데. 그걸 내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기억이 떠올랐어.

 

그때까지만 해도 수시로 주고받던 연락이 내 생일을 경계로 갑자기 없어졌고. 크리스마스에서 끊겨.

 

왜?

 

아니, 나도 그 이유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어. 왜냐하면 내 생일이니까, 그래서 지금이라면, 아니, 지금밖에 들을 수 없는, 하지만 듣고 싶지 않아. 아, 듣고 싶지 않은데…….”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표정을 한 사키는, 떨리는 무릎을 꼭 껴안으면서 묻는다.

 

 

"요이치 군."

 

"뭐야."

 

"혹시 내 20번째 생일날, 축하해주려고 내 집에 와줬던 거야?"

 

 

거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아니 이제 어쩔 도리도 없다.

 

불합리하게 가해자이고, 불성실한 배신자라고, 최저의 쓰레기로 매도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차라리 그쪽에 구원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둘러댄다는 거냐.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정황 증거는 있다.

 

거짓말을 해도 들킬 게 뻔하다. 여하튼 그녀는 이십 년을 함께 지낸 소꿉친구니까.

 

적어도 성의를 가지고 대하자, 싶었는데 흔들리는 이 꼴이라니.

 

 

"사키가 좋아하는, 나팔꽃을 모티브로 한 만년필을."

 

 

정직하게 대답한 자신은 역시 변변치 못한 쓰레기라고 느꼈다.

 

사키는 정말, 정말로 애타게 바라는 듯이, 지금 거기에 그 만년필이 있는 것처럼 오른손을 꾸욱 쥐고는,

 

 

"훌륭할 정도로 치명상이야."

 

 

그렇게 중얼거리고 웃었다. 어딘가 안심하는 것처럼, 과거를 깔끔히 포기하도록. 그녀는 가상의 만년필을 쥔 채 밤하늘을 향해, 위를 향해 웃었다.

 

그 오른손, 오른쪽 손등에 문신에 이끌리듯 자신도 밤하늘을 바라보지만, 나는 여전히 별자리 따위는 모른다.

 

그저 목이 아프도록 밤하늘을 올려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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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치 군. 바람피워서 미안해요."

 

"괜찮아. 화나지도 않고."

 

"거기는 좀 화가 나줬으면 좋겠는데.“

 

"바보 같긴.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어째서 사사키…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9월부터였을까, 아야카 짱한테 끌려간 미팅에서 우연히. 유일한 동갑내기 동급생이었기 때문에 친해져서."

 

"아야카 자식.“

 

"아야카 짱 비난하지 말아 줘. 그 애, 책임감 느끼는 것 같으니까.“

 

"그렇겠지, 어머니한테 들었어. 그 녀석도 대학교 제대로 못 다니고 중퇴했다고."

 

"혹시 나중에 만나게 되면, 내가 바보였던 것뿐이라고 전해주지 않을래?"

 

"그건 괜찮은데 말이야, 어째서 사사키와 잘 되지 않았던 건데?“

 

"응, 처음에는 배덕감 있어서 좋았지만, 반년도 안 지나서 싫은 면만 눈에 들어오는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고 할까, 그치만 그때는 요이치 군도 없어진 뒤였고. 사사키 군이 갑자기 화내고 성질부리게 되어서 헤어진 거."

 

"뭐야 그럼…"

 

"그러고 나서는 구질구질하게 됐지. 요이치 군이 없으니까 고백을 거절하는 것만도 고생이었고, 친구를 사귀면 괜히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와서 들이대고. 끔찍한 사람들뿐이라 힘들었고. 게다가 괜한 소문들까지 흘렀어.

 

어찌어찌 애인을 사귀어도 하는 건 섹스뿐. 아무것도 즐겁지 않고, 액세서리나 옷이 촌스럽다고, 돈이 필요하다고. 저축한 돈까지 저쪽에서 가지고 가는 거야. 결국 마지막으로 그 끔찍한 야쿠자. 남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쓰레기뿐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잖아.“

 

"그래.“

 

"하지만 요이치 군은 성실했어. 쓰레기였던 건 나였어. 세상에 남자들이라곤 불성실한 쓰레기만 있는 게 아니었어. 변변치 않은 녀석들한테 한탄하고 세계에 절망한 건 내가 바보라서. 쓰레기는 끼리끼리 사귀기 마련이라는 알기 쉬운 이유가 있었는데. 그런데도 비극의 히로인인 척을 하고 있으니까, 부끄러움을 좀 알라는 거야 나도."

 

 

사키는 자학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고, 어디 만년필이었어?"

 

"후지 문구. 그렇게까지 좋은 놈은 아니었지."

 

"그걸로 좋은 거야. 대학생한테 명품 따위 필요는 없어. 결국 누구한테 받는 건지,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했는데."

 

"그런 건가?"

 

"중요한 건 오히려 그쪽. 나라는 반면교사를 참고해서 아내한테는 그걸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선물을 전달해줘."

 

"그래, 그래.‘

 

"그리고, 아내를 칭찬해줘. 하루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뭐야 그게"

 

"마주 대해주지 않으면 여자는 헤매니까."

 

"끔찍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말이네."

 

"그치? 지언(至言)인 거야. 그리고는, 그러네."

 

"아직도 있는 거냐.“

 

 

그리고 사키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단숨에 용건을 내뱉었다.

 

 

"───요이치 군, 애인이나 첩, 필요하지 않아?"

 

"응?"

 

"순종하고, 무엇이든 말을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애인. 얼굴도 나쁘지 않고 스타일도 좋은 거야."

 

"아니, 이봐."

 

"성병도 완치했고, 얼마나 안에 내도 임신하지 않기 때문에 뒤끝 없음. 여기저기에 문신이 있는 건 마이너스지만, 반대로 말하면 요이치 군이 원하는 대로 문신을 넣어 덮어도 좋은 거지? 비용은 내가 전액 낼 거고, 피어싱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요."

 

"사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노출이든, SM이든, 배설계든, 카니발리즘이든. 모든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할까, 어떻게든 요이치 군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게. 어떨까, 상당히 이상적인 애인 아냐?"

 

"나 진지하게 화낼 거다?“

 

 

뒤에서 아내랑 자식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 녀석은.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친 사키는, 이내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대강 본인의 발언을 얼버무렸다.

 

 

"…농담이야, 농담. 자, 그럼 돌아가 볼까요? 슬슬 추워졌으니까."

 

"어이, 사키. 방금은 웃을 수 없는 농담인 거야."

 

"그래, 오한이 드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힘겹게 집 안에 들어간다.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 자신을 아내가 응시하고 있었다. 꺼림칙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리 너머로 계속 보고 있었을 테니 결백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왠지 묘하게 뜨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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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키와 말한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고, 나와 가족도 2주 후에는 자택으로 귀가했다.

 

부모님과도 바뀐 연락처를 교환했지만 내 쪽에서 연락하는 일은 그리 없다. 오히려 아내가 어머니와 아이의 것들에 대해 잔뜩 얘기하고 있는 것 같고, 나보다 사이가 좋다.

 

언젠가 놀러 와서는 아들을 만나지 않고 손자와 놀고만 돌아온 할머니는… 뭐, 이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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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귀가하고 두 달 후.

 

 

사키가 자살했다. 옛날에 둘이 놀던 공원에서 목을 매달았다고 한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은 아내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졌다.

 

 

장례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사키의 부모님이 거절하기 때문에 돌아오지 말라는 것도 전해졌다.

 

유서 사본만을 받았다.

 

 

『부모님. 먼저 떠나는 불효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생략)

 

 

모든 게 철두철미하게 자업자득이었습니다. 그저 불합리하기만 한 지옥이었다면 체념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이 지옥은 결코 불합리하지 않았습니다.

 

지옥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미래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증거도 있습니다. 

 

눈부신, 따뜻한, 안심, 단란, 신뢰, 성실, 진지하고 근면. 그런 미래가 있었을 텐데. 이 지옥에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미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견딜 수 없어집니다.

 

 

(생략)

 

 

부디, 행복해지세요. 그저 그것만을 바랍니다.

 

쿠로다 사키』

 

 

그 말들. 쏟아져 나오는 감정. 막힌 듯 터진 듯 도무지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에 나는 당황했다. 

 

이것은 사키의 제안을 거부한 데 따른 후회인가? 자신은 다시 또 잘못한 것일까?

 

만약, 만일에 편리한 애인이나 첩으로 삼아주었다면 사키는 절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와의 관계를 매우 악화시킬 것이며, 아무도 자신도 사키조차도 행복 할 수 없었을 터다.

 

적어도 떳떳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잘못은 없다. 

 

 

그럼 왜?

 

 

…아아, 그런가. 드디어 알았다.

 

 

자신은 간신히 실연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아내와 결혼하여, 아이도 둘이나 가졌다는, 그런 사정과는 관계없이.

 

 

이제 와서 사키와의 사랑에 실연한 것이다. 소꿉친구로서 함께 살아, 함께 성장하고, 함께 고통받으면서,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다.

 

 

───그런 소꿉친구가 죽었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일단 전 여자 친구가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과장스럽고.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남자에게 첫사랑은 특별하니까, 하고 뭔가 안다는 얼굴로 위로한다.

 

 

민폐에다가, 쓸데없는, 그래도 필요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해밖에 없다.

 

그녀의 죽음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