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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끝이다….’

 

나는 지금껏 여덟 번 죽었다. 

2020년 지구의 원래 세계에서 한번, 그 이후로 일곱 번은 모두 다른 세계에서.

 

―정확히 말하면 난 내가 생전에 본 일곱 개의 창작물 속의 세계로 전생했던 것이다.

 

생전 정보와 지식을 최대한 이용해 팔자가 드디어 피는 순간, 나는 매번 살해당했다. 그것도 아내들에게 말이다. 

 

그래, 아내들에게.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난 그 시점엔 정말 사랑했던 집사람에게 목숨을 잃었다. 일곱 번의 삶 동안 일곱 번 모두.

이제 여자라면 징글징글하다. 게다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일곱 번째 아내가 날 가장 잔인하게 죽였다.

 

[축하합니다! 퀘스트 ‘일곱 번의 삶’이 완료되었습니다]

 

눈에서 흐릿한 글자가 아른아른 거린다. 상태창, 이게 없었으면 생존 자체가 힘들었음은 분명하다.

정체는 모른다. 어쩌면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의 장난 아닐까. 환생의 원흉이기도 하다.

 

“환생, 드디어 끝난 거라고 봐도 좋나?”

 

상태창은 분명 7번만 죽으면 원래 세계로 보내준다는, 달콤한 약속을 했었다.

설마 어길 심산은 아니겠지.

내가 무(無)의 공간을 향해 소리를 치자 잠시 후 새로운 글자가 떠오른다. 

 

[‘일곱 번의 삶’ 퀘스트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 < Y/N >]

 

너무나도 바보 같은 선택지라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당연히 Y, Yes 아니겠는가.

내 생각을 읽자마자, 상태창의 글자가 뱀의 몸통이라도 된 마냥 요동친다.

 

[당신의 일곱 인연을 소환합니다.]

 

“뭐? 잠깐, 이제 여자라면….”

 

당신의 일곱 인연을 소환한다, 뭔 말도 안 되는……. 그 일곱 명의 쌍년들을 소환한다고? 이 공간에?

내 항의에도 이 텅 빈 공간을 가득 메우는 빛이 은은하게 퍼지자 형체들은 점점 윤곽을 잡아간다.

 

첫 타자는 연한 금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검은 드레스 차림의 숙녀. 

미망인이나 쓸법한 베일을 쓰고 있는 그녀의 눈살이 나를 보자마자 찌푸려진다.

 

“밀즈 님, 당신이 왜 여기에…. 아니, 부군이 살아계신다고요? 말, 말도 안 돼.”

 

여성향 판타지 소설 『그 악역영애를 죽여라』의 등장인물, 클라라 이클립스.

 

-원래라면 원작 주인공에게 처참하게 보복당해 죽어야할 인물이나, 내가 퀘스트에 따라 내 모든 걸 걸고 이 말괄량이를 갱생시켜 보았다,

 

결국은 결혼식 뒤풀이 무도회에서 어째서인지 그녀가 품은 단도에 찔려 죽었지만. 미친 년.

 

나이는 20세, 냉기가 쌩쌩 도는 청은발의 미녀

두 번째 인물은 청명한 빙검(氷劍)을 든 채로 빛 사이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미동과 표정이라곤 없는 흰 가죽의 얼굴.

 

“…강도진? 너, 정말로 강도진이야? 믿을 수 없어….”

 

헌터 아카데미물 『아카데미의 F급 헌터가 되었다』의 히로인 중 하나였던 유세라.

 

-얼음 계열 능력을 다루는 냉미녀. 나머지 히로인은 원작 주인공에서 당연히 휙 가버렸지만 그녀만큼은 나에게 남아줬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색하게 세라는 원작 주인공 파티와 함께 나를 공격했다. 저 얼음 검에 그대로 반 토막이 나버렸지. 

주인공, 그 새끼한테 세라가 이미 NTR 당했었는지는 정말 몰랐었다.

 

빛에서 걸어 나온 세 번째 인물은 체크무늬 사냥 모자를 푹 눌러쓴 연갈색 생머리의 여성.

고상한 지팡이와 겉옷 차림까지 제법 탐정 분위기가 난다. 다 허투루 집는 엉터리긴 하지만.

 

“아하, 조수군. 난 자네와 언젠가는 해후할거라고 믿고 있었다네. 정말, 정말로! 다 예상했어.”

 

추리게임 『미스 디텍티브』의 주인공인 앨리스 리들.

 

-작중 설정 상 유명한 탐정의 딸로, 제멋대로에 막무가내라 ‘조수’로서 비위를 맞춰주는 게 힘들었다. 결국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 성공했으나….

 

결혼식 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려서 바람맞히더니, 낙심한 나에게 다시 나타나 총알 한방으로 신세를 갚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

 

네 번째 인물은 긴 흑발 녹안의 늘씬한 여성으로 중화풍의 옷과 대나무 양산을 들고 있다. 스- 어디선가 독사의 스산한 위협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다.

 

“본녀, 서방님께 문안을 올리옵니다. 삼도천 건너에서 평안하셨는지요?”

 

무협소설 『천마도』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당상화(唐相花)

 

-천마도, 무림맹주도 아닌 기껏 한미한 세가의 일원으로 환생한 내가 한 지역을 주름잡는 사천당문의 아가씨와 알게 되기까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상화는 그런 서방님에게 무형지독(無形之毒), 그것도 자신이 평생을 들여 만든 끔찍한 독을 항아리 째로 나에게 들이부었다. 엄청 고통스러웠어.

 

다섯 번째 인물은 귀가 뾰족한 은발의 여인으로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묶었다.

판타지에서 엘프라고 부를 수 있는 종족이나, 슈트에 가까운 옷과 들고 있는 활만큼은 근 미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유피, 유피구나. 나 때문에 아프진 않았으려나….”

 

사이버펑크 TRPG 『섀도우 스타』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인 안나 스노우벨.

 

-드래곤과 함께 기업도시의 정점에 선 엘프 종족. 그러나 모종의 사연으로 쫓기고 있던 그녀와 함께 난 그 도시의 어둠을 파헤쳐갔다.

 

이쪽 세계에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물가물하나 안나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내 여섯 번째 아내였던 여성은 윤기 나는 밤색 머리카락을 튕기며 자신 있게 걸어온다. 메이드 옷을 연상시키는 옷에는 붉은 액체가 미약하게 튀어있다.

 

“어머, 성호 씨랑…이쪽 여러분들은 누구일까요? 후훗, 다들 신선해보이네요.”

 

공포 쯔꾸르 게임 『STP 재단의 사건일지』의 등장인물, 신하나.

 

-이 여자는 애초에 사람이 아니다. 인외의 존재이자 재단의 일원이 되어 퇴치해야하는 괴이 중 하나. 난 반대로 그녀를 도와 재단을 물리치고, 도시를 이 여자가 섬기는 외신에게 팔아넘겼다.

 

그게 절망적인 이 게임의 유일한 생존의 방법인줄만 알았으나, 하나는 본 모습으로 변해 아마도…꿀꺽 통째로 삼켰다. 

몇 년간 잘 지내다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은…. 자그맣고 가녀린 몸에 걸친 교복. 검은 머리카락에 가린 적갈색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빙글빙글 도는 듯하다.

 

“승재 오빠, 금방 다시 만나서 기뻐!”

 

웹툰 『러브&보트』의 더블 히로인 중 하나인 권나연.

 

-소꿉친구, 옆집 동생으로 말할 수 있는 사이의 인물로 원작에선 진(眞) 히로인은 되지 못했었다.

 

사살 나연이랑은 사실 결혼했다곤 할 수 없다. 애초에 우리는 미성년자였으니까.

허억, 하지만 내가 죽는 것만큼은 가장 끔찍하게 죽었다. 

 

단도보다도, 빙검보다도, 총탄보다도, 사천당가의 독보다도, 화살보다도, 통째로 씹혀먹는 것보다도.

생각만 해도 오싹해져 나는 약속을 어긴 미치광이 상태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약속과는 다르잖아.”

 

일곱 명으로부터 각양각색의 반응이 돌아온다. 반은 당황했고, 다른 반은 상황에 순종했으며, 하나는 재밌는지 싱글거리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창은 나에게 너무 가혹한 문구를 보여주었다. 피가 얼어붙는다.

 

[마지막 퀘스트. 지금까지 수고해준 사용자에게 이들 중 당신을 제일 사랑한 한 사람과 원하는 곳에서 환생할 기회를 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