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핸드폰 잠금화면에 비쳐진 시간은 오후 11시 30분. 슬슬 그녀의 생일이 온다. 난 고개를 떨궈 내 손에 쥐여진 상자를 봤다. 파랑과 흰색이 절묘하게 배열되고, 왼쪽 하단에 브랜드 로고가 은색 양각 처리가 되있다.


그런데, 도무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는 아직도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몇 년간 함께 시간을 보내던 나란 존재는 이미 말끔히 지워진 채로, 쾌감을 즐기며.. 문득 탁자 위에 100일 기념 액자가 보였다. 거기에 그녀의 집에 있던, 밤꽃냄새가 지독하게 나던 액자가 서로 겹쳐졌다. 속이 쓰리다. 가능하다면 위를 토해서 솔로 박박 문질러 닦을 수 있길 바랬다. 그것조차 못할 정도로 난 무력한 몸이다. 결국 난 그녀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한 거였다. 아무리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녀를 믿을려해도, 액자를 볼때마다 절망과 배신감, 나 자신에 대한 초라함이 솟구쳐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새벽을 지새고 시계를 보니 7시였다. 난 입술을 꽉 깨물고 결의를 다지며,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잤어? 미안, 어제 너무 아파서 선물 주려는 것도 까먹고 하루종일 잤어. 아직 등교하려면 멀었으니깐 공원에서 만날 수 있을까?] 문자 옆에 달린 1은 눈 깜짝할 새에 지워지고 답장이 왔다.


[괜찮아! 아프면 당연히 푹 쉬어야지. 어쩐지 어제 점심에 전화했는데 안 봤더라. 그럼 공원에서 봐.]


난 폰에서 시선을 떼고 침대에 놓았다. 울분을 한숨으로 내쉰다. 그게 그녀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뻔뻔하게 날 걱정하는 게 그런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믿으려하는 내 성격에 대한 자조인 건지. 가볍게 몸을 물로만 씻어내고 옷을 입은 후, 선물을 가방에 넣어 매고 공원으로 걸어갔다. 분명히 내 자취방이 공원과 가까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얼마 전에 사준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공원 중앙 분수 옆에 서 있었다. 머리 양 옆을 매듭지은 검은색의 긴 생머리와 대조됐다.


그녀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발을 꼼지락거리다가 날 보자 그녀 특유의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살포시 걸어왔다. 그녀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걱정이 한껏 묻은 말투였다. 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러면서 그녀는 어제 못 봤으니깐 잠깐 걷자며 내 손을 붙잡고 앞장섰다. 그래, 그녀는 이런 사람이다. 모두를 보살펴주고 타일러주는, 믿음직한 여성. 그게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녀는 가끔씩 내 안색을 살펴보는 듯 뒤돌아 보았다. 그런 상황이 있고 나서도, 넌 여전히 타인을 신경쓰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우선 이것부터 받아줘." 난 그녀를 멈춰세우고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에 있는 상자를 내려다 봤다. 그녀는 그와 함께 백화점에 갔을 때 이 목걸이를 봤을까. 그가 사줬을 선물에 비하면, 이건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보다도 하찮은 것일까.


그때, 난 차라리 그녀가 선물을 거절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아파하는 건 나 혼자뿐인 게 확실하니깐. 예전부터 나같은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그녀가 고작 내 슬픔에 공감해주는 게 내 마음을 더 아리게 했으니깐, 그녀가 거절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우와, 나 이거 저번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건데, 어떻게 알고 사줬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상자를 받고, 목걸이를 꺼내 자신의 가녀린 목에 걸었다. "정말, 정말로 고마워! 나, 어떻게 보여?"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내 칭찬을 기다리듯, 날 바라봤다.


그리고 난,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그리고 내 솔직한 감정을 다하여 말하였다. "예뻐. 너만큼은 아니지만."그리고 그녀는 내 대답이 마음엔 든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날 껴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포옹에 내 마음은 어긋났다.


어느새 1교시 시작까지 30분도 안 남은 시점이다. 지하철을 타고 간다면 느긋하게 도착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녀와 나는 오전의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빛을 반사해 하얗게 보이는 분수를 나란히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다.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지, 얇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사파이어를 매만진다. '이 아이는 내가 줘서 기뻐하는 걸까, 아니면 또다른 귀금속이 생겨서 기뻐하는 걸까.' 난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찢었다. 그녀는 물욕과는 거리가 멀다. 전자의, 정말 내가 줬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엊그제까지의 나라면 이 믿음은 확고할테지만, 그녀의 방에서 본 그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자른 거 같은 광경을 회상하자면...


"■■아, 슬슬 시간 다 된 거 같으니깐 역으로 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 내려보며 말한다.


"아, 생각해보니 나 전공서적 안 가져와서 말이야.. 먼저 가, 챙기자마자 바로 갈게."


"아니, 기왕이면 우리 남친이랑 같이 가고 싶은데?" 그녀는 입가에 손을 대며 나긋하게 웃는다.


"아니, 시간도 별로 없잖아. 이러다가 너도 늦을거 같은데, 얼른 가."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거부하는 날 보고 잠깐 놀랐는지 멈췄다가 알겠다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역의 출입구쪽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뒤를 보다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새 그녀는 사라지고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자취방에서 가방에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쑤셔놓고 있었다. 몇 안되는 소설책, 전공서적, 노트. 난 책상 위에 꿋꿋하게 있는 액자를 봤다. 사진 속엔 정지된 나와 그녀가 영원히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다시 눈을 돌리면 그 액자는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난 웃었다. 사진 속엔 든 나보다 더 크게 웃었다. 이 상황이 우스꽝스러워서 웃고 있었다. 목이 쉬어서 피가 섞인 기침이 나와도 난 계속 웃었다. 난 결국 울분이 섞인 웃음을 지속하며 액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얼마 전에 비워서 액자는 통 안에 자기 혼자만 남아있었다. 그 액자의 유리에 비친 나를 보았다. 난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이젠 잊어버려야 할 때이다.



본격적인 얀데레는 다음화나 다다음화부터 등장할 듯. 내가 글을 좀 느리게 쓰는지라 다음화가 다음주에 나올수도 있는데 그래도 빨리 써보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