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중 2인 얀붕이가 초 5인 얀순이를 처음 만난 곳은 계곡이었음. 여름방학에 집에서만 뒹굴거리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부모님 손에 끌려오다시피한 얀순이는 낮을 가려 아빠 뒤에 숨어 빠꼼 고개만 내밀었었음.


짜증이 이빠이 솟아 있는 상태의 얀순이의 얼굴은 싸늘했지만, 그래도 예뻤음. 뚜렷한 이목구비에 긴 다리와 흰 피부는 얀붕이의 마음을 완벽하게 저격했음.


얀붕이가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고,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도 않았을텐데 용기를 내 숨어 있는 얀순이에게 다가가 놀자며 손을 내밀었음. 


얀순이의 부모님도, 자신의 부모님도 모두 자길 바라보는 시간이 무거웠지만, 다행이도 얀순이의 어머니가 얀순이를 떠밀었음.


짐 정리는 어른들이 할테니 애들은 놀고 있으라면서 말야.


얀순이는 조심스럽게 얀붕이의 손을 잡았음. 얀붕이의 심장은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뛰어, 그렇게 불거진 얼굴을 들킬까 앞장 서 걸었음.


조금은 가파른 비탈을 지나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계곡에서 두 사람은 같이 놀았음.


얀순이에 푹 빠진 얀분이의 노력 끝에 언제 툴툴 거렸는지 모를 정도로 친해졌음.


얀붕이와 얀순이의 부모님들 모두 바쁜 사람인지라 당일 치기 여행에 불과했지만, 휴양지의 마법에 걸린 것 처럼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두 사람이 착 달라 붙어 다녔음.


집에 가기전에 서로 번호도 교환하고 피곤에 빠진 얀순이가 차 안에서 잠들 때까지 카톡도 했음. 딱 하루 만났다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된 거임.


그 이후로 얀순이와 얀붕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통화하거나 학교 수업 중에도 서로에게 카톡을 날리면서 시시덕거림. 불행히도 아버지들의 사업이 바빠 이전처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얀붕이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음.


그렇게 2학기의 중간 고사가 끝나고 친구 생일 파티에 갔다는 얀순이의 말을 시작으로 카톡의 실타래를 풀어가다 얀붕이는 얀순이의 생일이 머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음.


딱 이번년도만 힘들자는 아버지의 말을 볼 때, 얀붕이는 여름 방학의 만남이 겨울 방학에도 이뤄질 거라 생각할 수 없었음.


결심한 얀붕이는 생일에 얀순이를 만나러 가기로 함. 막상 못갈지도 모르니까 얀순이에게 말은 하지 않았음. 집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최소 두 시간 반. 익숙한 곳도 아니고 처음 가는 곳인데 그리 시간까지 걸리니 중학교 2학년인 얀붕이에겐 큰 부담으로 느껴졌음.


근데 그래도 생일 당일 얀붕이는 낯선 버스에 몸을 실었음. 평일에 학교가 끝나고 가는 거라 얀순이를 잠깐만 만나고 돌아오더라도 밤 10시가 훌쩍 지나있을 테고, 따로 부모님한테 말도 안했으니까 혼날게 틀림 없음에도 불구하고 얀붕이는 빠꾸없이 엑셀을 밟았음. 왜냐하면 보고 싶었으니까.


초행길이라 이리저리 해맨 끝에 얀붕이는 얀순이가 살고 있는 동네까지 3시간이 걸림.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카톡을 보냄. 중학교 2학년 답게 우연히 왔다면서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면서 말이야.


늦은 밤, 얀붕이는 얀순이를 아파트 앞의 놀이터에서 만날 수 있었음. 두 사람은 매일 같이 만났던 것처럼 어색함 없이 이야기를 나눴음.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선물을 건냈음. 마음만 같아선 더 있고 싶었지만, 더 늦으면 집에 돌아갈 수도 없어서 얀붕이는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했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얀붕이는 뒤지게 혼났지만, 마음만큼은 존나 뿌듯했음. 그 먼 길을 홀로 가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주일 뒤.


얀붕이는 수업 중에 얀순이에게서 카톡을 받았음.


오빠 저 남자 친구 생겼어요!


얀붕이는 머리가 띵했음. 이해할 수 없었음. 뭔가 세상이 잘못 돌아가도 단단히 잘못 돌아 거 같았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얀순이의 카톡을 무시할 수도 없었음. 지금까지 그래왔듯 친한 오빠처럼, 친한 오빠가 할만한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내 카톡을 보냄. 축하한다든가 놀린다든가 하는 그런 마음을 찢어서 보내는 카톡을.


그때부터였을 거임. 얀붕이의 아버지 사업이 좆망하기 시작한 게. 바람 잘날이 없는 흉흉한 집안에서 얀붕이는 어딜 갔다느니, 손을 잡았다느니, 뭘 받았다느니 하는 너무나 순진무구해서, 악의처럼 느껴지는 얀순이의 카톡에 꼬박꼬박 답장을 해줬음. 근데 차마 통화는 못하겠어서, 카톡만하고 통화는 갖은 이유를 끌어와 피했음.


그리고 집 안에 차압딱지가 붙은 날. 얀순이는 남자 친구가 노래를 불러줬다면서 얀붕이에게 음악 파일을 보냈음. 너무 잘부른다느니 하는 쓸 때 없는 사족들을 보며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전화를 걸었음. 


너무 오랜만에 목소리 듣는다는 얀순이의 말에 혹시나 싶다가도 이내 이어지는 오빠 그거 들었어요? 라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상기된 목소리를 들은 얀붕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음.


그래도 얀순이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고 얀붕이는 첫사랑의 말을 차마 끊을 수 없어 통화는 2시간 가량 이어짐. 통화가 끝나고 얀붕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음. 그냥 정해진대로 늦은 밤에 짐을 한아름 들고 어머니와 함께 집을 떠났음. 배터리가 없는 휴대폰은 침대 아래에 내버려둔 체로.


얀순이는 다음 날 아침 얀붕이에게 카톡을 보냈음. 답장이 오지 않았음. 수업시간에도, 점심에도, 하교길에도 카톡을 보냈음. 오빠 일어났어요? 부터 시작된 카톡 메시지는 오직 자신이 보낸 것만 있었고 12시가 지나 다음날이 00시가 될 때까지도 1이 사라지지 않았음. 그때 얀순이는 통화를 걸었고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자동 응답기의 소리만 들었음.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얀순이가 보낸 카톡은 수백통이 넘었고 전화는 백통이 넘었음. 부모님께 물어보면 알 수 있을테지만, 그렇게 알게되면 다 끝날 거 같아서 차마 묻지도 못했음. 남자 친구의 카톡에는 답장도 안하고 얀붕이와의 카톡을 쭉쭉 올려보면서 얀순이는 뒤늦게 깨달았음.


아, 이런 게 첫 사랑이구나.


사실 얀순이가 남자 친구를 사귄 것엔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의 감정이 없었음. 유치하게만 보였던 남자들이 얀붕이를 통해서, 남자도 유치하지 않을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고 얀붕이가 자신의 생일에 찾아온 그 날 남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음.


그리고 평소라면 거절했을 고백을 수락했을 뿐임. 왜냐면 남자 친구는 얀붕이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음. 남자 친구와 카톡을 하거나 통화를 하는 것보다 얀붕이와 카톡을 하고 통화를 하는 게 훨씬 더 즐거웠고, 남자 친구는 얀붕이와의 대화에 있어 가십거리에 불과했음.


손을 잡았던 순간 그다지 좋지 않았음. 손을 잡았다고 얀붕이에게 이야기하는 게 좋았음. 선물을 받았을 때도 즐겁지 않았음. 선물을 받았다는 대화를 얀붕이와 나누는 게 즐거웠음. 너를 위해 노래했다는 노래를 들을 때도 행복하지 않았음. 얀붕이와 떨어져 있음에도 같은 소리를 듣는다는 게 행복했음.


첫 사랑에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함을 깨닫는 것에 딜레이가 있다는 걸, 얀순이는 그제야 알 수 있었음. 그 날 얀순이는 펑펑 울면서 부모님께 얀붕이에 대해서 물어보고 답을 들을 수 있었음. 얀붕이 부모의 사업이 어려워졌다든지, 연락이 안된다든지 얀붕이와 대화할 때 하나도 느끼지 못했던 나쁘기만 한 이야기들을 듣고 얀순이는 또 다시 펑펑 울어버림.


얀순이는 다음 날 바로 남자친구와 헤어졌음. 그리고 얀붕이를 찾으려고 했음. 얀붕이의 학교에도 전화해보고, 아버지에게 부탁도 해보고 근데 그래도 얀붕이는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 없었음. 얀순이의 인생은 그렇게 잿빛으로 변했음. 


그렇게 6년이란 시간이 지나 얀순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음. 입도 잘 안 열던 때와 달리 지금은 많이 나아져 친구와 웃으며 대화도 할 수 있지만, 마음에 뚫린 구멍은 여전했음.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절친의 낡아빠진 구형 핸드폰을 좀 바꿔~~~ 하는 찡찡거림을 웃어 넘기며 집으로 돌아온 날. 얀순이는 거실에 놓여진 다과상을 봄. 먹다만 찻잔이 놓여있어서 주방에서 요리하는 엄마한테 누구 왔어? 라고 물으며 허기진 마음에 손으로 다과를 집어 먹는데 화장실에서 누가 나오는 거임.


쓱 고개를 돌려봤는데, 얀붕이가 거기 있었음.


키는 컸지만, 예전처럼 웃음기도 없고 무슨 고생을 했는지 젖살도 다 빠졌고 다크서클이 초췌하게 내려와 있는 모습으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에 딱 굳어버린 얀순이는 눈을 껌벅이다 멀찍이서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음.


얀붕이 오빠 기억하지? 오늘부터 너 과외 봐주기로 했어.


반가워 해야할까. 화를 내야할까. 어느쪽이든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 얀순이는 입을 꾹 닫고 이를 악 물었음. 그런 얀순이 앞에서 얀붕이는 화장실의 불을 끄곤 어색하게 입을 열었음. 


안녕, 오랜만이네. 나 기억하니? 


6년이 지났으니까 오랜만이고, 고작 4개월을 알았으니까 기억하지 못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얀붕이의 인사는 아무 것도 아닌 인사말인데 얀순이는 그 말이 너무나 서운했음. 자신만 그 때의 그 시절을 특별하게 여긴 것 같아서. 바보 같아. 얀순이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 어렵사리 인사를 건냈음.


안녕하세요. 하고.


얀순이의 아버지가 늦게 온다고 했기에 세 사람은 이른 저녁을 먹었음.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얀순이가 애꿎은 밥알만을 괴롭힐 동안 얀붕이는 넉살 좋게 얀순이의 어머니 질문에 대답했음. 주된 질문은 역시나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였음.


고등학교는 못 가서 검정 고시를 치뤘다느니, 아는 사람을 통해 취직했다느니, 군대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느니, 그래서 2호선 라인의 대학에 합격했다느니. 얀붕이의 입에서 나온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역경을 극복한 성공담 그 자체였음.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생은 드라마가 아님.


얀붕이는 의식적으로 고등학교를 갈 수 없어서 절망했다든지, 취직은 했지만 시다 취급을 받았다든지, 군대에서 공부하기 위해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손에 꼽다든지, 당장 돈이 후달려서 이 과외를 꼭 맡아야한다든지, 당장 어젯밤도 야간 알바를 뛰고 이 자리에 왔다든지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쏙 뺐음. 


얀붕이에게 이 자리는 오랜만에 만난 첫 사랑과의 재회 같은 새콤달콤한 자리가 아니라 자기 PR을 해야하는 면접장이었기 때문임.


얀붕이는 대학생이 아닌 대학에 입학이 결정난 것에 불과한 신분이었지만,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와 과외를 하나 잡을 수 있었음. 그러나 그것만으론 필요한 금액을 맞추기엔 택도 없었음. 


불행 중 다행으로 과외의 평가가 좋아 한달만에 주부 네트워크를 통해 소개 받은 사람이 얀순이의 어머니였을 때는 정말정말 놀랐음. 하지만 그 뿐이었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뒤 인생에 쌔게 후려 맞은 얀붕이에게는 첫사랑의 추억을 곱씹는 것조차 사치였기 때문임.


얀순아 어때?


과외의 행방을 결정할 어머니의 마지막 물음에 얀붕이는 식탁에 앉아 처음으로 얀순이를 봤음. 옅게 인상을 찌푸린 얀순이는, 어릴적과 달리 조금 쌀쌀해진 거 같았음. 한창 고등학생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얀붕이는 부디 그 쌀쌀 맞음이 이 모든 것을 망치지 않길 빌었음. 제발, 제발. 입이 바짝바짝 말랐음.


그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얀순이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한 번 보고 얀붕이를 한 번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음.


과외는 일주일에 삼일 하기로 했음. 3월 모평에서 결과를 보고 연장할지 안 할지 결정한다는 어머니의 말은 조금 야속했음. 하지만 그건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이 노력으로 해결해야하는 문제니까. 어찌되었든 얀붕이는 기뻤음.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얀붕이는 현관 앞에서 신입사원처럼 고개를 꾸벅 숙이곤 문을 닫았음.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질렀음. 올해가 시작된 지는 두달도 되지 않았지만, 올해에는 좋은 일만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았음. 그 순간이었음.


전자식 도어가 끼릭끼릭 소리를 내더니 이내 후드를 뒤집어 쓰고 츄리닝 바지를 입은 얀순이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왔음.


엘리베이터는 아직 오지 않았음. 낯을 가리는 듯 멀찍이 서 있는 얀순이에게 얀붕이가 먼저 말을 걸었음. 다음 주 부터는 과외를 받은 학생이니까. 친해져야만 했음.


어디가?

편의점이요.

발 시렵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음. 얀붕이의 말 재주가 없었던 탓도 있고, 얀순이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얀순이는 도망치듯 구석에 자리 잡았음. 얀붕이는 의식적으로 그 대척점에 섰음. 그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얀붕이였음.


옛날에 계곡에서 놀 때 재밌었는데 너무 오래되서 기억 잘 안나지?

나요.

어?

기억 난다구요.


어딘가 신경질적인 얀순이의 대꾸에 얀붕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기억력 좋네. 같은 시답잖은 말을 내뱉었음. 


그것밖에 안되는 짧은 대화였지만, 좋은(고가의) 아파트 답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무척이나 빨라서 띵 하고 1층에 도착했음. 구석에 있던 얀순이가 쏜살처럼 튀어나갔음. 한창 민감할 나이라 그런가. 얀붕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의 문을 열고 나가는 얀순이를 뒤따라 나감.


밖은 어두웠음. 얀순이는 멀찍이 걸어가고 있었고. 주황빛 가로등 아래를 걷는 얀순이는 어딘가 위태해보였음. 얀붕이는 짧은 고민 끝에 얀순이에게 달려갔음. 타닥, 타닥. 요란한 발소리에 걸음을 멈춘 얀순이의 옆에 선 얀붕이는 아으 춥다. 그런 말을 내뱉었음. 가로등 아래에서 얀순이는 얀붕이를 바라보며 눈을 껌벅였음.


뭐에요.

... 편의점 간다며, 데려다줄게.

왜요?


그 퉁명스러운 물음에 얀붕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음.


왜가 어딨어.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말야. 안 그래?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어서, 우리라는 말이 좋아서, 관계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아서 얀붕이의 무관심에 쌓인 앙금이 사르르 녹은 얀순이는 피식 웃어버림. 그 미소는 얀붕이에게 있어 육년만에 처음 보는 첫 사랑의 미소였음. 내가 좋아했었던 아이는 이런 아이였구나. 얀붕이가 잠시 옛 추억을 반추하는 사이 얀순이가 먼저 걸음을 내디뎠음. 얀붕이는 그 옆에서 따라 걷다 이내 입 안에 묶여 있었던 말을 꺼냈음.


역시 넌 웃는 게 ... 낫다.

낫다?


얀순이가 입술을 빼쭉 내밀었음.


사람 얼굴에다 그런 표현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장난기가 베어 있었음.


자, 제대로 말해봐요. 지금이라면 봐줄게요. 


얀붕이는 말재주가 없을 뿐 병신은 아니어서 얀순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았음.


... 예쁘다고. 

알면 됐어요.


얀순이는 킥킥 웃었음. 


지금은 어디에 살아요?

마일동. 가깝지? 동네에서 한성고 학생들 많이 봤으니까, 어쩌면 오다가다 봤을지도 모르겠다.

아뇨. 만난 적 없어요.

그래...?


칼 같이 단언하는 얀순이의 목소리는 톤이 미세하게 낮았음. 만약 만났더라면, 잠깐 스쳐지나가기라도 했다면 자신이 못 알아 봤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그녀에겐 있었기 때문임. 그리고 얀붕이에게는 그런 확신이 없는 거 같아서, 자신처럼 나를 찾지 않은 거 같아서 얀순이는 조금 우울해졌음. 


미세하게 낮아진 목소리의 톤만큼 분위기가 어색해졌음. 얀순이는 자신의 말을 수습하고자 노력했음.


그... 동네에는 잘 안 갔으니까요. 아마, 못 봤을 거에요.

아... 그렇지. 가끔 남자애들만 봤지 여자애들은 잘 안보이더라.


마일동은 주변에서 알아주는 빈촌이었음. 빈부격차의 상징이라는 짤로 얀순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마일동이 함께 찍히기도 했음. 그게 생각나서, 얀붕이는 자조했음. 분명 어릴 적에는 같은 선 상에 서 있었던 거 같은데 언제 이렇게 멀어졌는지 그 현실이 서글퍼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


볼 게 없는 동네니까.


얀붕이의 자조섞인 말에 얀순이는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대뜸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었음.


볼 게 왜 없어요.

있...나?

... 뭐든 있겠죠...?


차마 부끄러워 내뱉고자 한 말을 어물쩡 삼켜버린 얀순이의 눈에 편의점이 들어왔음. 분명 이대로 아무 말 않고 걸으면 얀붕이는 편의점은 물론이거와 거기서 집까지 데려다 줄 거임.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얀순이의 머릿속으로 피곤해보이는 얀붕이의 얼굴이 스쳐지나감.


다왔네요. 

가깝네.

... 그러게요.


얀순이는 걸음을 멈췄음.


이제 됐어요. 그만 돌아가요.

아냐, 집까지-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여기 단지 안이거든요. 차도 안 다니구요.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셔도 되요.


그렇게 말한 얀순이는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음. 그 명백한 축객령에 얀붕이는 더 할 말이 없었음.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그렇게 말한 얀붕이는 이제껏 걸어왔던 것과 정 반대 방향을 향해 걸어갔음.


얼마나 걸었을까.


오빠. 


얀순이의 목소리가 들렸음.


얀붕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얀순이는 멀찍이 가로등 아래에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음.


자주 봐요. 우리.


여운이 가득 묻어 있는 고혹적인 목소리에 얀붕이는 멋쩍게 대답했음.


그래, 자주 보자.


그렇게 얀순이는 얀붕이가 아파트 어귀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만을 눈으로 쫓았음. 혹시나 다시 돌아 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무너졌지만, 피곤했으니까 그런 거겠지. 얀순이는 샐쭉 미소짓곤 편의점으로 걸어갔음.


아.


그러다 문득 깨달았음.


번호 안 물어봤다.


얀순이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음. 초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썼으니, 사실상 박물관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엄청나게 오래된 기종이었음.


얀순이는 언제나 그랬듯 카톡을 열어 가장 하단에 위치한 얀붕이와의 카톡방을 열었음. 그곳에는 얀순이가 쌓아둔 말들이 무수히 많았고 지금 이 순간 거기에 한 줄이 더 추가됐음.


오빠, 다음 주에 봐요.


1이 사라지지 않는, 사라지지 않을 카톡을 보며 얀순이는 킥킥 웃었음. 멍청하게 번호를 묻지않아 이 말을 직접 전해줄 수 없는 건 슬펐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이 끝난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음. 


그리고 그 행복에 반비례해서 주말이 느릿하게 지나가고 얀붕이가 오는 날이 됐음.


하루종일 멍하니 눈만 껌벅이던 얀순이는 아파트 정문에서 온 호출 소리에 눈이 반짝였음.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음.


안녕하세요. 얀붕이입니다.


얀붕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의 모습이 화면 너머로 보였음. 단지 그뿐인데, 주말을 긴 설렘으로 보낸 얀순이는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눈만 껌벅임. 그녀가 정줄을 놓은 게 짧은 시간은 아니어서 화면 너머의 얀붕이가 멋쩍게 다시 입을 열었음.


얀붕이입니다.

... 들어오세요.


정문을 여는 버튼을 누르자 화면 너머에 있던 얀붕이가 사라졌음.


얀붕이 왔니?

응.


안방에서 들린 엄마의 목소리에 넋 놓은 얀순이는 반사적으로 대꾸했음. 들릴 일 없건만, 얀붕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 했음. 6년의 시간을 지나 얀붕이가 오고 있는 거임. 긴장에, 기쁨에 입가가 파르르 떨렸음. 그것도 잠시.


얀순이는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 화장대 앞에 섬. 얀붕이와 헤어진 이후엔 꾸미는 것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잡티만 가리는 기본 화장이 얀순이의 최선이었음. 그래도 예쁘다고 했으니까. 얀순이는 그 날 밤에 있었던 얀붕이의 말을 떠올리면서 옷매무새를 마저 정리함.


초인종 소리가 들림.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려고 했는데, 안방에서 언제 움직였는지 엄마가 먼저 문을 열어버림. 얀순이는 엄마의 뒤편에서 얀붕이를 볼 수 밖에 없었음.


안녕하세요.

잘 왔어.

...


분명 뭔가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얀붕이의 얼굴을 보고 나니 긴장과 수줍음에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게 얀순이의 최선이었음.


엄마는 주방에 들어가 차를 준비하는데, 얀붕이가 주방으로 따라 들어감. 뭐지? 도와 줄려고 하나? 얀순이가 눈을 껌벅이는 사이 얀붕이는 주방의 식탁에 가방을 내려놓고 교재와 자료를 꺼냄.


앉자.


사전에 예정되어 있지 않은 행동인듯 차와 다과를 담은 쟁반을 들고 있던 얀순이의 엄마도 잠시 얼타다가 입을 열었음.


여기서 하려고?

네. 안될까요?

아니. 괜찮지.


그 말에 도장처럼 쟁반이 식탁에 올려짐. 쾅! 과외는 이곳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됨.


얀순이는 자신의 방에서 과외를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어젯밤엔 청소도 했음. 근데 그 보람도 없이 주방에서 과외를 받게 됨.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갔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곳을 시야에 담을 수 있음. 첫 단추가 잘못 꿰인 거 같았음.


그런 얀순이의 마음도 모르고 얀붕이는 지금 목표하고 있는 곳에 가려면 어쩌구저쩌구 뭐가 필요하고 어쩌구저쩌구. 학원에서 컨설팅을 받는 것처럼 준비해온 얀붕이의 일장연설에 얀순이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음. 상상했던 과외랑은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임.


이윽고 얀붕이가 준비한 문제들을 한참 풀다 다 풀어서 쉬는 시간 각이 잡힘. 얀붕이는 얀순이가 푼 문제들을 막힘 없이 채점하기 시작했음. 이따금 빗금이 그이거나 따로 체크하는 부분에서 얀순이는 부끄러웠지만, 사담을 나눌 기회는 지금 밖에 없어 보였음.


준비 엄청 많이 해 오셨네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라고 하고 싶은데 사실 고생 좀 했어.


얀붕이는 문제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음. 손도 멈추지 않았음. 그것은 얀순이가 보기에 좋게 말하면 프로의식이 넘쳤고 나쁘게 말하면 넌씨눈이었음.


주말엔 뭐 했어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지금 번호는 뭐에요? 연락해도 되요? 쉴 때 뭐해요? 나랑 같이 놀래요? 저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오빠랑 같이.


얀순이가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절반도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대화의 내용이 절반은 커녕 하나도 못 꺼내게 생겼음. 결국 얀순이는 말을 종이처럼 접었음. 첫 날이니까. 그렇게 애써 자신을 위로하면서 그녀는 폰을 꺼내고 패턴을 풀었음.


오빠. 번호 줄래요? 


긴장에 내뱉은 말이라 그런지 얀순이의 목소리 톤은 조금 높았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부연설명을 붙이기 시작했음.


그...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야 


하니까요. 라는 말은 이어지지 않았음. 얀붕이가 얀순이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받았기 때문임.


번호 찍어주면 될까?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얀붕이의 태도에 얀순이는 기쁨 반 긴장 반으로 고개를 끄덕였음. 이내 가방속에서 전화 벨이 울림. 얀붕이의 휴대폰이었음.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좀 늦게 답장할 수도 있는데, 왠만하면 바로바로 답장해줄게.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휴대폰을 받아든 얀순이는 고개를 끄덕임. 그리고 얀붕이는 다시금 프로페셔널 하게 채점을 하기 시작함. 그 앞에서 얀순이는 마치 비밀 작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카톡에 들어갔음. 오래된 휴대폰이라 잔렉이 걸렸지만, 카톡은 돌아갔음. 그리고 이내 친추 목록에 얀붕이가 뜬 걸 봤음.


...?


프로필 사진이었음. 누가 봐도 봄에 벚꽃 축제에 가서 찍은 사진이었음.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고 착 달라 붙어 미소짓는 사진이었음. 누가봐도 행복한 연인끼리의 사진이었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얀붕이의 프로필 사진이고 남자는 얀붕이였다는 점임.


아니. 그러니까. 어쩌지? 이게 말이 되나? ... 왜? 짧은 시간동안 얀순이는 길게 되물었음. 답해주는 이가 없기에 해답이 없는 되물음이었음. 외부에서 답을 구해야 했기에 얀순이는 입을 열었음.


여자 친구에요?

어, 응. 맞아.

예쁘시네요.


얀순이의 말에는 가시가 뾰족하게 서 있었음. 그를 눈치채지 못한 얀붕이는 그냥 멋쩍게 웃었음. 그 모습은 누가봐도 여자 친구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부끄러워하는 남자의 자세 같아서, 얀순이는 그 앞에서 미소지었음.


좋겠다.


그 짤막한 말에 얀붕이의 머릿속으로 많은 대꾸가 스쳐 지나감. 남자 친구 없니? 대학에 들어가면 다 생긴다니까 공부 열심히 해. 예전에 사귄 그 애는? 부모님이 본다는 전제 하에는 하나 같이 부적절한 대답이어서 얀붕이는 채점이 끝난 문제를 얀순이에게 넘겼음.


자, 대체적으로 문제 없는 거 같은데 .


이런 부분이 약하고 저런 부분에서는 주의해야하고. 얀붕이는 실력 평가를 위해 냈던 문제들에 대한 해설을 시작했음. 그 과정에서 그녀가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체크했음. 결과는 나쁘지 않았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얀순이의 어머니가 말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 같았음. 그리고 베란다의 창 너머로 슬슬 해가 넘어가는 게 보였음.


오늘은 여기서 그만 끝내자.


꽤 빡세게 수업을 진행해서 그런지 얀순이는 조금 지쳐보였음. 그 모습에 얀붕이는 본래 내기로 했던 숙제를 반 덜었음.


다음 시간까지 이것만 풀어오자. 풀이식은 다 적고. 

네.


그 때 타이밍을 보고 있던 건지 얀순이의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왔음. 얀붕이는 곧장 신입 사원 모드로 들어가서 얀순이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무슨 부분에서 약간 문제가 있지만 어려운 부분이 아니라느니 어머니에게서 점수를 따기 시작했음. 예의상 말했을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을 예의상 받아들여 약속이 있단 말로 거절하고 난 뒤에 얀붕이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음.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봐요.


얀순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을 끝으로 얀붕이는 문을 열고 나갔음. 엄마의 기분은 꽤 좋아보였음. 얀순이는 생각보다 괜찮았다느니, 준비가 철저했다느니 하는 얀붕이에 대한 칭찬과 함께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는 엄마의 상투적인 말을 하염없이 들었음.


엄마.

응?

저 편의점 갔다 올게요.


약속은 당연히 없었기에 얀붕이는 어디 들리는 곳 없이 집으로 돌아갔음.


얀붕이가 살고 있는 원룸은 동네에서도 좀 많이 후미진 곳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2층인 집 바로 옆으로 지하철이 지나감. 우스갯소리로 지상철이라하는 것임. 그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소음으로 창문이 두두둑 떨릴 정도였음. 반대급부로 월세가 싸단 건 장점이었지만, 아무튼 그 널찍한 집안에 있다가 이 꼬락서니의 자기 집에 들어오니 조금 우울해졌음.


옷을 갈아 입은 얀붕이는 카톡을 켰음. 그리고 얀순이가 보았을 프로필 사진을 바라봤음. 세상 행복하다는 듯 두 사람은 웃고 있었음. 바로 작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하니 조금 까마득했음. 분명 컬러 사진인데 어쩐지 색감이 옅어진 것만 같았음. 


얀붕이는 카톡방을 열어 그녀의 마지막 카톡을 봤음.


참 너답다.


이 사진을 꼭 프로필 사진으로 써야한다는 구질구질한 사정을 설명하고 들은 말이니, 결코 좋은 뜻은 아닐 거임.


쿠웅. 쿠웅. 지하철이 지나갔음.


얀붕이는 늘 그래왔듯 이어 플러그를 꼽고 책을 펼침. 과외와 자격증을 동시에 준비하니 할 게 참 많았음. 저녁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는 것으로 해결했음. 예의상 했던 말을 뻔뻔하게 먹겠다고 했었으면 좋았을까. 막상 되돌아 간다고 해도 거절하겠지만, 얀붕이는 맛없는 염가의 컵라면 맛에 철면피를 깔지 못했음을 짧게 후회하곤 하루를 끝냈음.


과외, 집, 도서관, 과외, 단기알바 그리고 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나 줄이고 과외를 넣었음에도 얀붕이의 한 주는 여전히 피곤하고 쏜살처럼 흘러갔음. 그래도 받을 급여를 생각하니까 이전보다 쫓기는 기분은 덜 들었음. 씻고 알바갈 준비를 하는데 휴대폰이 징징 울렸음. 얀순이었음.


휴대폰 번호를 찍어주고 한 주 동안 얀순이는 카톡을 딱 네 번 했는데, 네 번 다 고난이도 문제들에 대한 물음이었음. 얀붕이는 내일 과외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문제의 풀이를 정리해서 보내줌. 그에 얀순이가 짤막한 인사말을 보내는 걸로 카톡은 끝났음.


얀붕이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짐. 얀순이의 어머니는 3월 모평을 보고 연장할지 말지 결정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100% 연장각이 섰기 때문임.


그렇게 다음 날이 되고 근처 문방구에서 문제를 출력해서 얀순이 집으로 가는데 누가 가방을 붙잡았음. 놀란 얀붕이가 반사적으로 뒤도니 얀순이가 거기에 있었음. 검정색 마이에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치마, 교복을 입고 씩 웃는 얀순이의 모습에 얀붕이는 놀래다 말고 눈을 껌벅였음. 얀붕이는 잠시 넋을 놓은 이유가 여고생이라고 듣기만 했지 실제로 여고생의 모습인 얀순이를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변명이고 그냥 예뻐서 놀랬음.


봤으면 말을 하지.

그럼 안 놀라잖아요.


얀순이는 무어가 그리도 즐거운지 킥킥 웃었음.


어디 가요?

너네 집.

와 우연이네요. 저도 우리 집 가는데 같이 가면 되겠다.


그렇게 말한 얀순이가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딛음. 어차피 목적지가 같고 따로 갈 이유도 없어서 얀붕이는 그 옆을 따라 걸었음. 


여긴 왜 왔어?

학교에 갈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겸사겸사 얼마나 볼 게 없는 동네인가 싶어서 왔죠.


그 말에 얀붕이는 귓볼이 조금 붉게 변했음. 깔끔한 마을에 사는 얀순이가 봤을 때, 소주병과 담배꽁초가 심심찮게 굴러다니는 이 동네가 그리고 그 동네에 사는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지 그것이 부끄러웠음.


그런데 있더라구요. 볼만한 게.

... 뭔데?

오빠 동넨데, 그걸 오빠가 저한테 물으면 어떻게해요. 


여고생은 낙엽만 떨어져도 웃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얀순이는 연신 싱글벙글했음.


그렇게 쳐다봐도 안 가르쳐줄 거에요. 오빠가 찾아봐요. 전 찾았으니까.


얀붕이에게 마일동의 볼만한 곳따윈 아무래도 좋을 일이어서 그는 말을 돌렸음. 숙제라든지, 어려운 부분의 해석이라든지, 무슨 책은 한번쯤 읽어두라든지. 얀순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즈음엔 아파트의 단지 안이었음.


아, 맞다.


마치 불현듯 깨달은 것처럼. 얀붕이의 잔소리를 끊은 얀순이는 휴대폰을 꺼냄. 그리고 캘린더 앱을 열더니 2월의 어느 날짜를 가리킴. 


이 날이요. 저 안되는데, 이 날로 바꿀 수 있어요?

저녁이어도 괜찮나? 그럼 될 거 같은데.

그럼 된 걸로 알고 있을게요.

그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을게.


얀순이가 아파트 정문의 비밀번호를 열어 들어갔음. 조금 어두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얀붕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해야할 말을 꺼냈음.


그 있잖아.

이제와서 안된다고 하는 거 아니죠?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처럼 우리 동네에 안 왔으면 좋겠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 얀순이는 안쪽으로 들어가 층수를 누르곤 짤막하게 물었음. 왜요. 하고.


좀 안 좋은 동네잖아? 낮이어도 여자애 혼자 다닐만한 곳은 아니야. 오늘은 다행이 나랑 같이 왔지만, 좀 질 나쁜 사람들도 있으니까.


내가 걱정되서 그래요?

아무래도 그렇지?


띵. 하고 문이 열림. 


그래요. 그럼. 안 갈게요.


얀순이가 그 말을 지켰기 때문인지 그 날 이후로 얀붕이가 동네에서 우연찮게 그녀를 만나는 일은 없었음. 이따금 혼자 걸을 때 대화의 상대가 있었던 그 날이 떠오르긴 했지만, 얀붕이는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음.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는 우연찮게 한 번 본 거 가지고 다시 오지 말라느니 주접을 오지게 떨었다고 생각해 밤중에 이불을 뻥뻥 차기도 했음.


그렇게 시간이 지나 2월의 중순, 얀순이가 약속 때문에 안된다고해서 다음 날 저녁으로 바꾼 날이었음. 약간의 피곤함을 느끼며 얀붕이는 정문에서 얀순이네 집을 호출했음. 예전엔 자기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이젠 별 말을 안해도 정문이 열렸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얀순이네 집 문이 열려 있었음. 얀순이의 어머니가 현관까지 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얀붕이는 이게 격세지감인가 싶었음.


얀붕이는 마중 나온 이가 없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입을 열었음.


안녕하세요.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음. 그저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음. 저녁이니까 아버지를 봐야하나 긴장했었는데, 조금 아리송했음. 어쩐지 체감 온도가 낮은 거 같기도 했음. 


얀순아?


평소라면 부엌과 거실의 경계에 놓인 책상에 앉아 있던 앤데 오늘은 무슨 생각인지 TV를 보고 있었음. 자신의 방보다 몇 배는 넓은 거실의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에 얀붕이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음. 


아, 오빠 왔어요? 저 이것 조금 있음 끝나는데 이것만 볼게요.


그래도 되죠? 라고 묻는 얀순이에게 얀붕이는 안된다고 할 수 없었음. 왜냐하면 평소에 이런 투정을 부리는 애가 아니어서 준비해둔 말이 없었기 때문임. TV에서는 예전에 유행했던 영화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고 있었음.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를 남녀가 만나서 과거의 추억을 반추하다 이내 헤어지는 영화임. 얀붕이의 기억이 맞다면 끝나기까진 체 5분도 남지 않았음. 고작 그 시간 동안 소파에 앉아있기도 뭐해서 얀붕이는 가만 서서 TV를 바라봤음. 키스씬이 나왔음. 얀붕이는 싱숭생숭한 기분에 살짝 고개를 돌렸는데, 얀순이는 굉장히 몰입해서 영화를 보고 있었음. 이내 영화가 OST가 흐르면서 영화가 끝났음. 


여운을 즐길 세도 없이 보험 광고가 나왔음. TV가 꺼졌음. 검은 화면안에 얀순이와 얀붕이가 담김.


아으으, 재밌었다.


얀순이가 기지개를 펴다 말곤 얀붕이를 보며 눈을 껌벅였음.


이 영화 알아요?

어.

처음보는데, 재밌네요. 근데 조금 슬펐어요. 이게 여운인가 싶기도 하고. 아, 공부하기 싫어라.


얀순이는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음. 얀붕이는 꾹 참고 있었던 물음을 던졌음.


부모님은?

결혼기념일이라. 어디 가셨어요.

언제 오시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어떤 사람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한다면 그건 평소와 다른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임. 그리고 얀순이 집에는 평소와 다르게 부모님이 없었음. 이래서야 과외를 거실의 식탁에서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음.


얀순이가 식탁의 의자를 당겨 앉았음. 식탁의 한 켠엔 숙제가 놓여 있었음. 그리고 침묵. 얀붕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얀순이의 시선을 느꼈음. 어떻게 해야 하지? 해도 되나? 해야 하나? 얀붕이는 머릿속이 복잡했음. 그런 얀붕이에게 얀순이가 말을 툭 던짐.


공부 해야죠.


자의식 과잉이란 말이 있음. 얀붕이는 지금의 자신이 그 꼴이라고 생각했음. 공부만 하면 되는 거임. 떳떳하게. 식탁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불안감이 준비해온 활자들을 보니 싹 날라감. 숙제를 체크하고 어려운 부분을 되짚고 과외를 한참하다 얀순이가 잠시만요. 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음.


뭐 마실래요?

... 물만 줘.

넹.


컵을 씻는 소리가 들림. 평소라면 얀순이의 어머니가 해주셨을 일인데, 얀붕이는 얀순이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감이 다시 되살아 나는 걸 느낌. 아무래도 오늘 수업은 일찍 끝내야할 거 같았음. 그렇게 생각했을 때 였음.


오빠.

어?

저한테 거짓말 한 거 있죠.


컵은 충분히 씻고, 물을 따르는 소리 까지 들렸는데 얀순이는 여전히 뒷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음.


아니, 없는데.


애초에 무언가를 속일 만큼 친해진 사이가 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직한 얀순이의 어조는 얀붕이를 긴장하게 만들었음. 어쩐지 입이 바짝바짝 말랐음. 


여자친구요.


얀붕이는 물이 마시고 싶었음.


없잖아요.


사실이었음. 사귄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헤어진지 오래였음. 카톡의 프로필은 여자친구과 있다는 걸 과시해서 여고생을 자식으로 둔 부모에게 안전하다는 인증을 받고자 했던, 얀붕이 나름의 발악이었음.


그, 얀순아?

네.

그건 그러니까... 

이해해요.


얀붕이의 말을 툭 자르고 뒤돌은 얀순이는 샐쭉 미소 짓고 있었음.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지마세요. 오해하잖아요. 


얀붕이는 뭘? 이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이미 다 안다는 묘한 분위기에 알았어라고 대답했음. 얀순이는 나긋하게 걸어와선 식탁에 쟁반을 내려놓음. 얀붕이는 맑은 물 한잔을 들이켰음.


죄송해요. 실례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거짓말은 싫어서.

아냐, 내가 미안하지.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구요. 공부 계속 할까요?

어, 응. 그래.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과외는 탈 없이 끝났음. 얀붕이는 시간도 늦었고 더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준비를 빨리 마치고 집에서 나가려는데 점퍼를 걸친 얀순이가 그 뒤를 따랐음.


어디...가?

편의점이요.

춥진, 않겠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얀순이는 얀붕이 옆에 섰음. 거리감이 미묘하게 좁혀진 거 같았음.


오빠.

... 왜?

거짓말 너무 못하는 거 같아요.

좋은 거 아닐까. 

그치만 걱정되잖아요. 요즘 같은 세상에.


네가 왜? 그런 물음을 생각만한 얀붕이는 입을 꾹 다물곤 그저 멋쩍게 웃었음.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음. 이 어색한 분위기에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얀붕이가 먼저 걸음을 내딛었는데 얀순이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음. 


얀순아?


이름을 불렀음에도 얀순이는 옷자락을 꽉 쥐곤 놓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힘. 숨소리가 나직했음.


오빠.

... 어.


얀순이는 점퍼에 손을 넣더니 이내 작은 상자를 꺼냈음.


이거 받아요. 초콜릿이에요.


오늘은 2월의 중순, 발렌타인 데이였음. 얀붕이는 그때서야 이래서 들켰구나 싶었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람이 이런 날에 시간이 빌 리가 없으니까. 의문이 풀렸음. 그러나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음.


이 초콜릿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그런 의문.


... 고마워.

저는 후회하기 싫어요.


의문은 곧장 해소됐음. 얀순이의 이해 못할 말이 끝나자 마자 입술이 맞닿았기 때문임. 서로의 숨이 두어번 정도 얽히고 떨어졌음. 고개를 내리깐 얀순이는 얀붕이가 넋을 놓은 사이 재빨리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얀붕이를 밀어냈음.


문이 닫히는 사이, 얀순이는 고개를 들었음.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킥킥 웃고 있었음.


보답, 기대, 할게요.


END


TMI) 발렌타인 데이에 과외가 잡힌 것 정도로 여자친구가 없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