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산 나머지 용이라고 불리게 된 사람이 있었다.


검 한 자루를 들고 해변 가득히 몰려드는 수만의 적을 막아내고, 바다를 피와 불길로 붉게 물들인 전설의 주인이자


요새의 주인이며, 왕국의 수호자였던,


민중은 경의를 담아서, 적들은 공포를 담아서,




그 자를 용이라는 뜻의 드라코라고 불렀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 동경과 공포는 서로 닮은 감정이었다.


나라를 침공하려던 이방인들이 바다 너머로 물러나자, 민중은 드라코를 겁내기 시작했다.



'드라코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먹고 영생을 손에 얻었다.'



불길한 소문이 드라코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였고,


가신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그를 제거하고자 한 주군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영웅은 반역자와 같이 모질게 매를 맞고, 민중들 사이에서 짐승처럼 끌려다니며, 종국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믿지 않던 이들도 많았다.


공포는 동경과 닮은 감정이었다.


드라코와 전장에서 마주했던 자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언젠가 드라코는 돌아올 것이라고.







그런 오래된 전설이 있었던 것조차 잊혀지고,


드라코를 마주했던 이들조차 대부분 죽어버린 시대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을 오르는 여행자가 있었다.





팔과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든 두꺼운 가죽 옷은 겉이 얼어붙으며 흩날리는 눈송이가 매달려 계속해서 무거워졌고, 허벅지까지 푹푹 잠기는 눈밭을 헤치고 지나오며 푹 젖은 다리에는 더이상 감각이 없었다.


짐을 가득 싣은 썰매와 연결된 허리띠와, 그 옆에는 불꽃과 같이 미려한 장식이 손잡이를 감싼 검이 한 자루 꽂혀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나아가던 여행자는 결국 뼈 속까지 얼어붙는 추위 앞에 굴복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쓰러진 여행자의 몸을 천천히 덮어갔고, 여행자는 그것을 뿌리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여행자는 설산의 한 자락에서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여행자는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어두운 실내를 불의 온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벽과 천장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방 한구석에 크기가 다른 돌들을 어거지로 쌓아 만든 작은 벽난로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여행자는 자신의 사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며 몸을 돌렸다.


몸을 따라 유려하게 재봉된 모직 코트는 드레스 같았고, 읽고 있던 책을 덮는 손길은 섬세하였다.



"출발할 때 누가 말리지 않던가요? 이 계절에는 새들도 산을 넘지 않아요."



오래된 책을 작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녀는 어딘가 유약해보이면서도, 고고한 귀족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행자는 그 모습에 직감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꼈지만, 자신을 구해준게 눈앞의 여성이라고 생각하고는 우선 감사를 표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는 됐어요. 당신은 누구죠? 이 날씨에 무슨 일로 산을 오르고 있었던 거고요?"



오두막의 주인은 노골적으로 여행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막말로, 이런 계절에 사람 없는 설산에 오를 사람은 도망치는 범죄자나, 살인자 같은 사람들 외엔 생각하기 어려웠다.


여행자도 그 심정을 이해하고는,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두손을 보이는 곳에 두고 천천히 말했다.



"저는 유레타, 전령입니다."


"전령의 증표는 없었는데요?"


"그게, 어딘가에 속한 몸은 아니라서….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김에, 다른 사람들이 전해야하는 편지 같은 걸 같이 옮겨다주면서 돈을 받아서 살고 있어요. 아, 그 김에 여쭙어볼게 있는데요…."



유레타는 조심스러워하면서, 이 오두막의 주인에게 물었다.



"혹시 드라코라고 불린 사람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건 없나요? 이 산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일순이었지만, 주인의 눈에서 흔들리는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주인은 대답하기 어렵다는듯 손을 기도하듯 꽉 쥐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요?!"


"예. 알고 있고 할 것 없이,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걸요."



유레타의 얼굴에 기쁨의 화색이 도는 것과는 대비적으로, 주인의 얼굴은 마치 지금의 날씨처럼 차갑게 얼어붙어있었다.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만나는 것이 기대되어 주체할 수 없다는 티를 팍팍내는 유레타와 달리, 주인은 어두운 낯빛으로 두꺼운 커튼을 살짝 들어 아직도 새하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해가 지고, 눈보라가 사그라들면."


"그러면 돌아오시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유레타는 꼬리나 귀가 달려있었다면 지금쯤 붕붕 흔들고 쫑긋거릴 것 같은 기색으로 기뻐했다.


주인은 그런 유레타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에카테리나에요.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우선 좀 쉬도록 하세요."



유레타가 벽난로 앞 앉아서 동상으로 빨갛게 부운 손과 발을 녹이는 동안, 에카테리나는 먼지 쌓인 식기를 닦고는, 벽에 접혀서 올라가있던 식탁의 상판을 펼쳤다.


상판이 완전히 내려온 순간, 녹슨 못이 벽에서 빠지면서 상판이 떨어져버렸다.


큰 소음은 벽난로 앞에 앉아있던 유레타마저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에카테리나는 순식간에 망가져버린 식탁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 뒤로 담요를 망토처럼 감싼 유레타가 다가왔다.



"제가 고쳐볼까요?"


"고칠 수 있나요?"


"썰매가 망가질 걸 대비해서 예비용 공구를 몇 개 들고 다녔거든요. 짐 안에 있을 거예요."



유레타는 문 옆에 자신의 검과 함께 놓여있던 짐꾸러미 안에서 나무로 된 공구통을 꺼냈다.


가늘고 긴 못과 작은 망치를 꺼낸 유레타는 식탁의 다리 역할을 하는 기둥으로 상판을 세워두고, 벽에 난 못자국 옆에다가 경첩을 대고 못을 박았다.



망치랑 못을 들고 열심히 끙끙거리는 유레타의 뒤에 선 에카테리나는, 자신이 꺼내놓은 식기 사이에 있던 예리한 나이프 하나를 조용히 집어들었다.



"에카테리나 씨,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달면 헐거울 것 같아서 살짝 옆으로 옮겨서 고정했는데 괜찮죠?"



그 순간, 유레타가 돌연 물어온 말에 에카테리나는 빠르게 나이프를 자신의 소매 속으로 숨겼다.



"자주 사용하지는 않으니까 괜찮아요. 손님이 올 때 정도에나 쓰는데, 손님이 잘 안 오니까요."


"하긴, 놀러오려고 해도 오기가 어렵겠네요. 사람들이 찾아오기 쉬운 곳으로 이사하시는 편이 살기에는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런 걸 염두했다면 애초에 여기에서 살려고 하질 않았겠죠."



에카테리나의 어딘가 냉담한 말투에도, 유레타는 "생각해보니 그러네요~"라면서, 순진한 아이처럼 웃어보이기만 했다.



식탁이 다시 수리되자, 에카테리나는 벽난로 앞에다가 요리를 하기 위한 철망을 올려두고, 창가에 걸어둔 자루에서는 햄과 계란을 꺼내왔다.



"제가 뭐 도울 건 있을까요?"


"괜찮아요."



무거운 주철 프라이팬을 불 위에 올린 에카테리나는 기름진 햄을 먼저 프라이팬 위에 올렸다.


열기가 프라이팬으로 올라오며 굳어있던 기름이 녹아나오자, 그 사이에 잘라뒀던 햄을 펼치듯 프라이팬에 까는 에카테리나의 모습은 뭔가 이런 일은 안 할 법한 고상한 외모와는 달리 가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뒤에 물러나있던 유레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어색해서 꼼지락거리다가, 자신의 짐꾸러미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뭘 찾으시나요?"


유레타가 짐꾸러기를 뒤지는 소리에 에카테리나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마침 올해 가을에 막 말린 과일들을 좀 싸들고 왔으니까 같이 먹어요."



유레타가 꺼내든 자루에는 말린 포도와 딸기, 살구가 잔뜩 들어있었다.



"과일인가요."



하지만 에카테리나의 대답은 어딘가 맥이 빠진다는 느낌이었다.



"아, 혹시 과일은 별로 안 좋아하세요? 그러면 말린 청어가 좀 있는데……."


"아니요. 좋아합니다. 이 주변은 여름이 되어도 과일이 안 열리고, 상인들도 그다지 들고 오진 않아서 오랜만에 봤다 싶었어요."


"그러면 다행이네요."



유레타는 웃으면서 자루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접시에 옮겨담기 시작했다.


에카테리나는 던지기 쉽게 날 쪽으로 잡았던 식칼을 손 안에서 돌려, 다시 햄을 썰어서 프라이팬 위에 올려두었다.



에카테리나는 철망에 식었던 빵을 따뜻하게 데우고, 방금 갓 구운 햄과 계란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두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호화롭다고 할 수도, 아니면 부실하다고도 할 수 있는 식사였지만, 건과일이 같이 올라가있으니 상당히 그럴듯해보였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유레타는 기쁘게 기도하고는 망설임 없이 에카테리나가 갖다준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에카테리나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남이 주는 건 보통 먹기 전에 의심하지 않나 싶어서요."


"엥? 왜요?"



이미 입 안에 한가득 햄을 집어넣고 우물거리는 유레타의 모습을 보고, 에카테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맛있게 드세요."


유레타는 왜 에카테리나가 저렇게 침울해보이는지 추리해보려고 했지만, 유레타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눈을 퍼온 양동이의 물을 녹여서 설거지 거리를 담가둔 뒤에도,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아직도 안 그치네요."


유레타가 몇 분에 한 번씩 커튼을 들춰보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한 것도 몇 시간쯤 되었다.


에카테리나는 불 앞에 앉아서 불이 약해질 때마다 장작을 하나씩 던져넣으면서 유레타의 혼잣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에카테리나 씨, 뭐 하나만 여쭙어봐도 될까요?"


유레타는 따분해져서 탁자 앞에 앉아있다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에카테리나를 향해 말했다.


"일단은 물어보세요. 대답은 질문에 따라서 못 할 수도 있지만요."



에카테리나가 허락하자, 유레타는 조심스럽게 에카테리나를 향해 물었다.



"드라코는, 어떤 분이세요?"


"어떻냐고 해도, 드라코는 드라코죠. 전설대로의 사람이냐고 물어보시는 건가요?"


"아니요, 아니요! 물론 전설이 진짜인지도 궁금하긴 하지만, 그냥 어떤 분이신지도 궁금해서요. 에카테리나 씨가 보시기에라던가, 전설에서 과장된 면이 있다거나, 아니면 안 알려진 면이 있다거나……."



우물쭈물거리면서도 물어보고 싶은 건 다 물어보는 유레타의 모습에 에카테리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른 다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진짜요?"


"순진했거든요. 사람을 잘 믿고, 약속에 얽메이고, 그렇게 순진했던 탓에 남들에게 속고, 이용당하다가 모든 걸 잃었죠."



드라코가 가진 전설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난다.


자신들이 구한 사람들에게서 의심받고, 자신이 지켜낸 나라에서 버림받아, 종국에는 죄인으로써 죽게 된다.



"전설은 대부분 맞아요.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요."


에카테리나는 기억을 되새기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예를 들자면, 드라코에게도 가족이 있었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죠."





동경은 공포와 닮았으며, 이해에서 가장 먼 감정이다.


수백 년을 젊은 모습으로 살아왔으며, 인간으로써는 대적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드라코는 숭배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 곁에는 자연스럽게도 이해자나 동반자가 아닌, 숭배자와 피지배자만이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접근한 이들조차 드라코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면 결코 여태까지와 같은 눈으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드라코와 비슷한 자가 있었다.


전염병으로 몰락한 부족의 전사장의 아들이자, 젊은 나이에 부족장이 된 청년이었다.


전염병을 이겨낼 수 있게 신에게 바쳐졌다는 그는, 제물이 뛰어드는 절벽에서 살아돌아와 신의 선택을 받은 대리자라고 불리었다.


자신의 부족 안에서는 물론, 부족이 거대한 제국의 일부로 흡수된 뒤에도 그의 무예를 꺾을 자가 없어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다.



해협을 사이에 둔 거대한 전쟁에서 그들은 만났다.


수많은 병사와 전사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살아있는 것이라곤 남지 않은 언덕 위에서 둘은 맞서 싸웠다.


검이 부러지면 근처에 널부러진 것을 뽑아 휘둘렀고, 더 이상 휘두를 것이 남지 않자 부러진 화살과 검날을 손에 쥐고 찍어대며 싸웠다.


밤에 시작되어 해가 뜨기 전까지 이어진 그들의 싸움은 더 이상 무기로 쓸 것이 남지 않자 멈추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여태까지 마주하지 못한 경지의 상대와 마주하면서 무인으로써의 심장이 뛰었고,


평생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그들을 이해해줄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밤이 되면 목을 졸라오는 듯한 고독을 끊어내주길 바랬기에, 그들은 첫눈에 반하고 말핬다.



하지만 전쟁은 둘이 함께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셀 수 없을 만큼 상륙이 반복되었고, 셀 수 없는 접전이 이어졌다.


쓰러진 자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나 마지막까지 서있는 서로의 모습은 잊을 수 없었다.



결국 청년은 자신의 부족을 배신하였다.


어차피 부족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고, 제국은 그의 조국이 아니었다.


청년은 자신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적진에 숨어들어 드라코를 찾아갔다.



그들은 그 날 사랑을 나눴다.


내일 세상이 끝날 것처럼, 꺼지기 전에 가장 밝게 타오르는 빛처럼, 지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사랑했다.


가장 뛰어난 전사를 잃은 탓은 아니었지만, 전쟁을 이어갈 힘이 떨어진 제국은 물러갔고, 전쟁은 누구도 얻어간 것 없이 끝나게 되었다.



청년과 드라코는 전장에서 벗어나 가족을 이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전장에서 서로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검을 맞대기도 하였다.


비록 전장처럼 더러운 환경이 아니라, 결투와 같이 일대일로 기량만을 다루는 환경에서 청년이 드라코를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청년과 함께 아이를 기르고,


아이가 자라나면 둘이 함께 아이에게도 무예를 가르치기도 하고,


해가 떠오르면 빛나는 바다를 매일 아침 보고, 밤이 되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 땅에서 언제까지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은 제국의 척후병이 청년을 찾아왔다.


제국의 반역자요, 부족의 배신자를 처치하러 왔다는 외침과 함께, 척후병이 청년을 습격했다.


싸움은 누구도 죽지 않고 끝났지만, 그 싸움을 계기로 청년의 정체를 모두가 알게 되고 말았다.




드라코가 수호하기로 한 왕국의 국왕은 드라코가 가족의 정 때문에 적국으로 전향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드라코는 맹약을 깰 생각이 없었지만, 자신의 가신임에도 자신보다 오래 살아왔으며, 인간으로써 대적할 바가 없는 드라코에게는 국왕마저도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며칠의 고민 끝에, 국왕은 드라코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가족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 음모를 눈치 챈 드라코와 청년이 국외로 도망치려 하자, 국왕의 명을 받은 정예군단이 드라코의 성을 포위하였다.


외적을 막아내던 요새는 가장 약한 등 뒤에서부터 습격받아 불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드라코와 청년은 군단과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성을 지켜야 할 병사들은 자신들의 영주를 배신하고 도망쳤고, 아무리 청년과 드라코가 강하더라도, 단단한 바위 하나가 해변에 몰아치는 파도를 모두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두 사람에게는 챙겨야 할 아이도 있었다.



두 사람은 불타는 성에서 무수히 밀려드는 적들을 베며 자신의 아이를 찾아헤맸다.


드라코는 자신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돌아보았지만 아이를 찾을 수 없었고, 청년마저도 보이지 않았기에, 결국 홀로 성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드라코는 도망치는 길에 기도했다. 청년과 아이 모두 제발 도망쳤기를, 이곳에서 도망쳐 만나기로 한 그 장소에 둘이 모두 무사히 도착해있기를.


청년과 만나기로 하였던, 청년이 어린시절을 보냈다던 설산에 드라코는 단걸음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드라코는 그곳에서 기다렸다. 몇 번의 눈보라를, 몇 번의 밤을, 몇 번의 낮을, 그저 청년과 자신의 아이가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계속해서 기다렸다.




결국 몇 개월인지, 몇 년인지도 모를 세월을 기다리다 못한 드라코는 가장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 그들의 소식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드라코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인간을 먹고 영생을 얻던 괴물인 드라코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누가 죽었는지 분명했다.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면서,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반드시 만나겠다던 청년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드라코는 약속만을 믿고 도망친 끝에, 자신의 가족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



너무나 강력한 탓에 이해받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사람의 약속을 너무나 쉽게 믿었으며


검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던 아둔한 괴물은, 그 날 모든 걸 잃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드라코는 혹한의 겨울이 1년 내내 이어져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설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은거를 이어가고 있지요."


에카테리나가 말을 끝내자, 난로에서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가 오두막 안에서 크게 울렸다.


유레타는 충격에 빠졌다.


영웅이거나, 괴물로만 알려져있던 드라코의 전설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진실은 유레타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무 말도 못하는 유레타를 내버려두고, 에카테리나는 커튼을 살짝 걷어 밖을 내다보았다.



"눈보라가 그쳤군요."



어느새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은 그쳤고,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빛나던 하늘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에카테리나는 벽난로에서 작게 타오르고 있던 장작을 재로 덮어서 불씨를 끄더니, 갑자기 오두막의 문을 열고 나갔다.



"에카테리나 씨?"



유레타는 돌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에카테리나를 혼란스럽게 눈으로만 뒤쫓았다.



"어디 가세요?"



유레타는 뒤늦게 일어서서 문가까지 다가갔다. 따뜻한 오두막 안으로 스멀스멀 밀려오는 차가운 공기가 마치 칼에 베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두막 앞의 설원에 선 에카테리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았다.


별이 쏟아질듯한 밤하늘 아래, 밝은 달빛을 받으며 새하얀 설원은 거니는 모습은 마치 겨울의 여신이 걸어나온듯했다.



오두막을 등지고 걸어가던 에카테리나는 돌연 설원 한복판에 멈추었다.



"드라코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죠?"



모직으로 만들어진 코트의 소매를 살짝 흩날리며, 에카테리나는 오두막의 문가를 잡고 있던 유레타를 돌아봤다. 




"에카테리나 드라코는 여기 있으니, 할 말이 있다면 해보시지요."




유레타를 향해 몸을 돌린 에카테리나의 손에는 아름다운 검이 쥐어져있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가늘고 긴 도신과, 기교없이 단순한 가드와 손잡이는 특별히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은빛으로 빛나는 외형이 마치 전설 속의 검과 같은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유레타는 놀라서 숨을 멈춘 채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가녀린 여인 같던 에카테리나는 손에 검을 쥔 것만으로도 마치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 같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너무나 고고하고, 아름다우며,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


전설의 주인이자, 유레타가 찾아헤메이던 바로 그 사람.



"에카테리나 씨가, 드라코였군요…."


"네, 보시는대로."



어딘가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에카트리나의 냉담한 대답에, 유레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내 유레타는 눈을 뜨더니, 문 옆에 놓여있던 자신의 짐 옆에 놓여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에카테리나의 검과는 다르게 한 쪽에만 선 날이 미려한 곡선을 그린 도신과, 타오르는 불꽃처럼 화려한 장식이 손을 보호하는 가드를 이룬 기병도는, 검이면서도 예술품 같은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병도를 손에 쥔 유레타는 에카테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짓궃으시네요. 처음부터 절 가지고 노신 건가요?"


"안에서 싸우면 오두막이 버티질 못하거든요."



에카테리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응수하고는,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고, 롱소드의 끝을 유레타를 향해 겨눴다.


적당한 거리만큼 다가간 유레타도 기병도를 들어올려 에카테리나를 향해 겨눴다.


달빛이 비춰지는 새하얀 설원 위에서, 두 명의 검객은 서로를 마주했다.



차가운 공기와 만나 새하얀 증기가 되던 유레타의 숨이 갑자기 끊겼다.



발을 내딛으며 손목의 힘으로 휘두른 기병도의 칼날이 에카테리나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에카테리나가 롱소드를 살짝 움직여 기병도를 막고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유레타를 향해 그대로 검을 찔렀다.


유레타는 몸을 살짝 틀어 그것을 피하고, 롱소드를 밀어내 기병도를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뒤, 바로 에카테리나의 허벅지를 노리고 칼날을 휘둘렀다.


에카테리나의 손 안에서 롱소드가 크게 회전하여 기병도를 쳐내고, 원을 그리는 궤도 그대로 머리 위로 올라가 유레타를 내리쳤다.


유레타는 머리 위로 기병도를 들어 자신의 머리로 떨어지려던 검격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던 손을 아래로 내리치며 기병도를 휘둘렀다.


빠르게 돌아온 롱소드가 기병도의 검격을 쳐내면서, 둘은 서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하아……!"


유레타가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커다란 입김이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반면에, 에카테리나에게서는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호흡에서는 입김조차 생기지 않았다.



유레타가 다가오지 않자, 에카테리나가 롱소드를 쥔 손을 가볍게 휘두르더니 돌연 돌진했다.


"큿!"


내려가 있던 롱소드가 올라오며 뒷날로 유레타의 옷자락을 가볍게 베었다


유레타의 몸높이까지 올라온 날끝이 가슴을 찌르려던 찰나, 유레타가 기병도의 안쪽 날로 롱소드를 옆으로 밀어냈다.


이를 악문 유레타는 그대로 앞으로 뛰어들어, 기병도의 폼멜로 에카테리나를 가격하려 했다.



그 순간, 에카테리나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아니, 무언가가 유레타의 눈앞을 가렸다.


그것은 유레타가 달려든 순간 롱소드를 놓은 에카테리나의 왼손이었다. 에카테리나의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은 유레타는 기병도를 휘둘러 거리를 벌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코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선혈이 새하얀 눈 위에 떨어지며 눈을 녹였다가, 금새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무감각하게 보던 에카테리나는, 그 순간 불어온 바람에 느껴지는 감각에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모직으로 만들어진 코트의 팔뚝 부분에 생긴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며, 검붉은 핏줄기가 하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레타는 입 안으로 들어간 피를 뱉어내고, 손등으로 입가를 슥 닦더니, 기병도를 다시 앞으로 겨눴다.


에카테리나는 자신의 상처를 신기한듯 내려다보다가, 유레타가 호흡을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유레타를 바라보았다.



직후, 에카테리나가 어떤 전조도 없이 달려들었다.


발로 박찬 눈이 공중으로 흩어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든 에카테리나가 롱소드를 휘둘렀다.


유레타는 급하게 기병도를 휘둘러 칼날을 칼날로 부딪쳐 튕겨냈다. 하지만, 공격이 빗나가면 빗나가는대로 그대로 한 바퀴 돌아 다른 방향에서 연달아 이어지는 검격에 유레타는 칼날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끝없이 뒤로 밀려나던 유레타의 발이 높게 쌓인 눈덩이에 닿으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지자, 유레타는 다음 검격이 날아드는 순간에 몸을 옆으로 날렸다.


에카테리나의 힘을 실은 수평베기가 비탈 능선의 아래에 쌓여있던 눈더미를 날려버리면서 공기중에 새하얀 장막을 만들었다.


기병도를 끌어안은채 옆으로 구른 유레타가 급히 자세를 다잡고 일어서려던 순간, 눈의 장막을 뚫고 에카테리나가 달려들었다.



"크윽!"


다급히 기병도를 들어서 내리꽂히는 검격을 막아낸 유레타가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갖췄다.


보통 검객끼리의 싸움에서는 대책없이 달려들면 죽기 십상이라 검의 끝과 끝이 만나는 거리에서 거리를 두고 싸우기 마련인데, 에카테리나는 검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은 공포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아…… 하아…… 후우……."


하지만 유레타는 호흡을 다잡고는, 다시 에카테리나의 앞에 일어섰다.


유레타에게는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으니까.



"재능이 있군요. 좋은 스승을 만나서 몇 년 정도 더 수련했다면 상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얼굴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눈밭에서 뒹굴면서 엉망이 된 유레타를 보며, 에카테리나가 여유롭게 말했다.


그러자 유레타는 피가 묻은 입가를 씩 웃어보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칭찬이 아니에요."



에카테리나는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지만, 유레타는 그럼에도 실실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금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대치하였다.


에카테리나는 이번에도 검을 살짝 낮추고, 유레타를 향해 돌진했다.


그와 함께, 숨을 삼킨 유레타도 같이 돌진했다.



두 사람이 검격의 거리에 들어온 순간, 동시에 휘두른 칼날이 공중에서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고, 공격이 방어가 되며, 방어가 공격이 되는 난타전이 이어졌다.


유레타의 손을 노리고 날아든 검격이 기병도의 장식을 겸한 가드를 타고 흘러 팔뚝을 얕게 베고, 에카테리나가 막아냈다고 생각한 검격이 휘어진 도신을 타고 찔러들어오며 에카테리나의 뺨을 스쳤다.


새하얗던 설원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무수한 발자국과 핏자국에 더럽혀졌으며, 검격이 부딪치는 소리가 산을 타고 흘렀다.



"큭, 하아……!"



숨을 참고 검을 휘둘렀던 유레타는 어느새 신음과 같이 호흡을 흘리며 서있었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고고했던 에카테리나의 몸 곳곳에도 베인 흔적과 잔상처가 생겨났다.


망신창이가 되어간 건 검도 마찬가지였다. 은은하고 미려했던 에카테리나의 롱소드에는 흠집과 이빨이 나간 부분이 생겨났고, 화려했던 유레타의 기병도 역시 가드 역할을 하던 장식의 일부가 부러지고, 날에도 이빨이 크게 나간 곳이 생겨났다.



"하아!"



유레타가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듯이 수평으로 벤 기병도가 공중에서 가로막혔다.


아차하는 순간에 롱소드의 가드와 검날 사이에 가로막힌 기병도를 밀어내며, 에카테리나가 전진했다.



"끝입니다."



서늘한 칼날이 유레타의 목에 닿았다. 군데군데 이가 나갔음에도,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며 핏방울이 칼날 위로 고였다.


조금만 더 힘을 실어서 밀거나 당기면 목을 베이는 위치에서, 유레타는 롱소드에 얽혀있던 자신의 기병도를 내렸다.



"……역시 저의 말을 전하기에는 아직 일렀나봐요."



유레타는 포기한듯 말하더니, 기병도를 손에서 놓았다.


눈밭 위로 기병도가 떨어지자, 에카테리나는 롱소드에 들어간 힘을 살짝 풀며 말했다.



"이걸로 끝이라면, 시시했다고 답해야겠군요."


"아직 끝이 아니에요."



유레타는 에카테리나의 말에 바로 답하고는, 자신의 외투 등 뒤로 손을 넣었다.


유레타가 숨겨두고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이 칼집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것은 언뜻 평범한 외날단검처럼 보였으나, 손잡이의 끝이 왕관처럼 넓고 각져있었다. 칼등은 직선이었으나, 칼날은 휘어있는 형태를 하고 있었고, 나뭇잎과 같이 넓은 칼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에카테리나는 동요하는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검을 쥔 손은 힘이 들어가 미세하게 떨렸으며, 경악하여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유레타는 양팔을 벌린 채로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목에 겨눠져있던 칼날에서 멀어졌다.



"당신이, 어떻게 그 칼을……?"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떨리는 말투로 물어오는 에카테리나를 향해, 유레타는 단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답했다.



"그 대답은 검으로 해야겠지요. 제가 전해야 하는 말은 아직 남아있어요."



유레타는 숨을 고르고, 투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에카테리나의 앞에 섰다.


동요하며 물러나던 에카테리나 역시, 투지를 느끼자 눈에 띄던 동요를 억누르고, 다시금 냉정한 모습으로 검을 쥐었다.




고요한 달빛이 비추는 설원 위에서, 두 검객이 마주하였다.



"하아아아아!!"



유레타가 기합과 함께 설원 위를 내달리며 돌진했다.


에카테리나의 기민한 검격이 즉각 달려드는 유레타를 찌르려고 했지만, 유레타는 몸을 옆으로 틀면서 그것을 피하고, 에카테리나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바닥을 강하게 딛으며, 마치 권법과 같은 요령으로 유레타가 단검을 올려베자, 에카테리나의 옷자락이 크게 찢어지며, 살갗 사이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러나, 에카테리나의 움직임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에카테리나가 힘을 담아 휘두른 검격이 유레타의 몸에 부딪친 순간, 유레타는 단검을 몸 앞에 가드처럼 붙여서 검격을 막아내고, 그대로 검격을 타고서 뒤로 굴러서 거리를 벌렸다.


뒤로 구르면서 일어나 자세를 다잡자마자, 유레타는 다시금 에카테리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모습이, 에카테리나의 눈에는 마치…….



"아니야…… 아니야아아……! 아아아아아아!!"



에카테리나는 이성을 잃기라도 한듯 괴성을 지르더니, 돌연히 검을 바닥을 향해 휘둘렀다.


눈발이 휘날리며 달려들던 유레타의 시야를 가리고, 유레타가 주춤한 순간, 유레타의 몸을 롱소드가 옆에서부터 후려쳤다.


유레타는 롱소드에 맞기 전 단검을 들어 온몸이 베이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단검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윗팔뚝이 쩍 하고 갈라지더니, 선혈이 주르륵 바닥으로 흘렀다.



"그럴 리 없어! 그 칼은, 그럴 리가 없어! 당신은 대체……!"


에카테리나는 마치 분노한듯, 슬퍼하는듯, 혼란스러워하며 검을 쥔 채 소리치고 있었다.


유레타는 그 앞에서 늘 하듯이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참은 다음, 다시 달려들었다.



에카테리나가 달려드는 유레타를 향해서 롱소드를 내리친 순간, 유레타는 두 팔을 들어 롱소드를 막아내었다. 교차한 단검 사이에 끼인 롱소드의 칼날이 끼긱 거리며 내려왔다.


에카테리나는 검객이라면 당연히 그러하듯 검을 빼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여 롱소드를 아래로 내리치려고 했다.



"흡!"


유레타는 갑작스레 교차했던 단검 중 하나를 빼버리더니, 그대로 롱소드를 옆으로 흘려보냈다.



"하아아아아!!"



그리고 그렇게 생긴 틈에 먼저 뺀 단검으로 에카테리나의 팔목을 베고, 다른 쪽으로 목을 베려 했다.


자신의 목 아래로 올라오던 단검을 에카테리나는 이빨로 물어 막았다. 송곳니가 박히며 유레타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큭!"


다음 순간, 에카테리나가 시선 아래로 휘두른 롱소드에 유레타의 허벅지가 베였다. 미리 눈치채고 피하려 한 탓에 깊게 베이진 않았으나, 순간 유레타의 자세가 틀어지기엔 충분했다.


에카테리나는 있는 힘껏 유레타를 밀쳤다. 밀치기보다는 거의 걷어차인 충격에 유레타는 한 손에서는 단검을 놓친 채 몇 걸음 떨어진 곳까지 나뒹굴었다.



에카테리나가 쓰러진 유레타를 향해 뛰쳐가 베려 한 순간, 아까 유레타에게 베인 쪽의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롱소드를 놓쳤다.


설원을 구른 유레타는 바로 바닥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에카테리나에게 베인 쪽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두 사람의 눈에는 투지의 감정이 번뜩였다.



"아아아아아아아!!!"

"하아아아아아아!!!"



에카테리나가 롱소드를 한 손으로 쥐고 바닥에 쓰러진 유레타를 향해 돌진했다.


유레타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내버려둔 채, 한 쪽 다리의 힘만으로 바닥에서 박차며 뛰어올랐다.




피투성이가 된 두 자루의 검이 설원에서 교차하며, 두 검객이 뒤엉키고, 정지했다.




에카테리나의 롱소드는, 한 손으로 휘두른 탓에 힘이 약해져 맨손의 유레타가 쳐낸 것만으로 크게 빗겨나가 설원을 찌르고 있었다.



"하, 하하…… 하아…… 하……."



그러나, 유레타의 단검은 에카테리나의 어깨를 깊숙히 찌르고 있었다. 아까 쓸 수 없게 된 팔과는 반대편으로, 에카테리나는 곧이어 롱소드를 손에서 놓치게 되었다.



그대로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진 에카테리나의 위로 유레타가 같이 쓰러졌다.


이 결과를 믿을 수 없는듯, 에카테리나는 힘이 빠진 채 놀란 눈으로 유레타를 바라보았다.


유레타는 에카테리나의 어깨에 박힌 단검에서 손을 떼더니, 에카테리나의 위에서 몸을 세웠다.



"아버지가 전해달라고 했던 말은……"



그리고, 에카테리나를 향해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겼다, 에요."








여신과도 같은 이를 전장에서 만나, 사랑을 한 전사가 있었다.


여신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으니, 그녀와 같이 강한 존재가 세상에 없어 언제나 고독감을 느끼던 것이었다.


전사도 전장에서는 여신과 비등할 정도로 싸우기도 하였지만, 결투를 해보면 승자는 언제나 여신이었다.


그럼에도 여신은 전사를 보며 기뻐했다. 자신에게 이만큼이나 비등한 자는 처음으로 보았다며, 고작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하였다.


그것이 전사를 슬프게 하였다.



전사는 자신의 부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여신의 곁에 머물기를 선택하였고, 여신은 그런 전사를 받아들였다.


매일같이 사랑을 나누던 둘은 금방 아이를 가졌다. 건강한 딸이었는데, 다행히도 우락부락한 전사보다는 아름다운 여신을 닮아있었다.



그러나, 여신은 아이를 낳은 뒤에도 고독을 두려워했다.


타고난 강함이 어머니로써 아이에게 두려움을 주지는 않을까, 반대로 혹여나 아이가 자신과 비슷하다면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전사는 여신을 안심시키려 말했다.


우리가 있어줄테니 우리들의 아이는 결코 혼자가 아닐 거라고.


그리고, 당신도 결코 다시 혼자가 되진 않을 거라고.



하지만, 여신은 자신의 강함을 혐오하면서도, 자신보다 약하고 짧은 삶을 사는 전사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해서, 전사는 여신에게 자신의 검을 걸고 약속하였다.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이 아이는 우리보다 강하게 자라고, 우리가 걸었던 고독한 길을 걷지 않을 거야. 당신이 못 믿어도 내가 그렇게 키우겠어. 이 아이가 크면 당신은 다시는 쓸쓸할 일이 없을 거야. 믿지 못한다면, 내기를 걸어도 좋아.'



하지만, 전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전사가 버린 부족은 본보기로써 멸족당해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복수를 위해 찾아온 부족의 척후병이 전사와 여신 사이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었다.


적국의 전사를 사랑한 여신은 자신이 지키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였고, 여신의 요새는 공격받기 시작했다.



전사는 불타는 요새에서 아이를 구해냈지만, 그 과정에서 다리에 독화살을 맞고 말았다.


아이와 함께 붙잡힌 전사는 여신을 조종할 인질로써 사용되기 위해 지하 깊숙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전사는 그 감옥에서 자신의 피를 먹여가면서까지 아이를 키웠다. 아이는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감옥에서 걸음마를 익히고, 말을 익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성장하여, 감옥 밖의 세상이 어떤지를 궁금해할 나이가 되었다.


전사는 아이에게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전사의 언어와 여신의 언어, 검을 쓰는 법과 별자리를 보는 법,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법, 친구를 사귀는 법, 지켜야 할 이치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을 아이에게 가르쳤다.


아이는 감옥에서도 총명하고 건강하게 자랐으나, 전사의 몸에 퍼진 독은 점점 전사의 몸을 갉아먹었다. 강대하던 기골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숨을 쉬려면 온몸의 힘을 쥐어짜야만 했다.



몇 년이 지나도 여신이 돌아오지 않자, 감옥에 가둬둔 전사와 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돌기 시작했다.


여신이 분노를 풀게 인질을 풀어줘야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여신이 구출을 위해 다시 돌아올 이유를 없애기 위해 죽이자는 말까지도 나왔다.


전사는 여신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챙길 테니 먼저 도망치라고, 도망쳐있으면 찾아가겠다고 했던 자신의 약속을, 여신은 믿고서 지키고 있을 것이다.



전사가 결심을 굳힌 어느날 밤, 전사는 아이를 깨워서 채비를 시켰다.


옷을 단단히 입히고, 숨겨두었던 단검을 전해주고, 가르친 것을 잊지는 않았나 확인시켰다.


아이가 준비된 것을 안 전사는 아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유레타. 너는 강하다. 하지만, 세상은 강한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법이야. 아무리 강한 전사더라도 자신의 뒤를 봐줄 전우가 있어야 하듯이, 너는 다른 사람을 지켜라. 그러면 다른 사람도 너를 지켜줄 것이다. 힘들면 언제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대도 괜찮아. 그래야 진짜로 강한 전사란다.


너의 어머니는 정말 강하고 아름다웠지만,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만 생각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남에게 의지하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어. 강하면서도 어리숙했지. 내가 가르친 걸 잊지 말고, 알려준 길을 따라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부모와 자식은 태어나기 전부터 서로 함께하기로 약속을 한 사이니까.


어머니랑 마주하게 된다면, 부디 네가 가진 강함으로 어머니를 옥죄고 있는 고독을 끊어다오. 이 아버지가 너를 네 어머니보다 강하게 키웠다고, 아버지가 내기에서 이겼다고 전해주렴.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이란다.


슬퍼하지 말거라. 나는 언제나 너의 삶이 행복하기를 빌면서, 높은 산의 봉우리 너머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그날 밤, 전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감옥의 문을 부수고, 무수히 많은 간수들과 맞서 싸웠다.


그 사이에 감옥의 배수로를 통해 아이는 탈출할 수 있었다.




아이가 사라지고, 전사는 독에 중독되어 죽기 직전임을 알자, 여신을 배반한 자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전사를 본색을 드러낸 여신이라고 속이고 처형하기로 하였다.



걸을 수 없게 된 전사는 짐승처럼 끌려다니며 모욕과 발길질을 받았고, 마침내는 처형대에 올라갔다.


머리가 베이기 전, 전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사의 아버지는 죽은 자의 육신은 땅과 바다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 높이 부는 바람에 실려서 날아간다고 하였다. 먼저 간 이들이 기다리는 가장 높은 산의 봉우리로.


한 때, 신의 축복을 받았다며 떠받들어지던 전사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며, 자신에게 축복을 내렸던 신과, 자신이 사랑한 여신을 향해 기도하였다.



부디 내가 죽은 뒤에도 그들을 지켜볼 수 있도록.



전사는 자신의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렇게 빌었다.










너무나 강력하여 용이라고 불리었던 뱀파이어가 있었다.


수천 년간 이어져내려온 고독은 너무나도 단단하여 인간 중에서 가장 강했던 전사조차 끊을 수 없었으나,


전사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고독을 끊어내는 법을 배운 담피르가 그 고독을 끊어내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고독을 끊어낼 수 없고, 타인의 강요로도 끊어낼 수 없다.


스스로가 자신의 목을 옥죄는 고독을 끊으려 내밀고, 옆에서 그것을 끊어줄 사람이 있어야만 고독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끊긴 고독은 어떻게 되는가?


고독은 더 이상 목줄이 아닌 울타리가 되어, 고독에게서 벗어난 이와, 고독을 끊은 이를 단단히 묶어주는 매개가 된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누군가가 필요로 한다면 고독을 끊을 수 있을만큼 강하고, 자애로운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라.




그것이 전사의 고독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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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포인트:

상성상 뱀파이어랑 담피르를 같은 방에 두면 담피르가 뱀파이어를 잡아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