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역할이든 맡겨만 주세요.

대행 아르바이트.


말 그대로 대행 아르바이트다. 장례식, 결혼식, 돌잔치, 남자친구, 여자친구, 그냥 몇 년 지기 불알친구, 졸업식 때 같이 사진 찍어줄 사람 등등

친구 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필요한 아르바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그런 거 있지 않냐, 결혼식 때 하객이 없어서 곤란하다든지 뭐 장례식을 했는데 조문객이 없는다든지 하는 불상사를 없애주는게 주로 하는 일이다.

어떻게 대한민국 5천만 인구가 전부 다 자기 신변에 중요한 이벤트가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와 줄 친구가 하나씩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는 법이니까.


근데 시발 참 더럽게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는 겨우 친구 한 명, 두 명 없다고 오지고 지리게 눈치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뭐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맞춤 서비스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직업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장 가서 아무 말 없이 뷔페나 육개장이나 먹으면서 하루에 7만 원, 8만 원 챙겨가는 그런 아르바이트는 찾기 힘드니까.

물론 매번 그렇게 꿀 아르바이트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가을이나 봄철만 되면 열리는 운동회, 그때는 아버지 역할을 아기들 공이나 던지는 걸 보면서 김밥이나 먹으면 되는데, 솔직히 뭐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해.

요즘 같은 세상에 뭐 아빠가 없으면 어떻고, 엄마가 없으면 어떤지, 자기네들 집구석 돌아가는 거나 제대로 신경 쓸 것이지

꼭 다른 사람들이 뭘 어떻게 하는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문제.

분명 그 새끼들은 자기네 쏘나타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는 것보다 옆 반 애의 부모가 홀수인 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 게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새끼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 사람들에게 뭐라 일갈을 날릴 수는 없는 게

그런 새끼들이 씹어대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면피용으로 나 같은 사람을 고용하는 거니까.

어떻게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는 호사가들이 이 나라 고용 창출에 도움을 주니, 뭐…. 마냥 나쁘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 오늘의 임무.


아빠가 되어주세요.


이 일을 한 지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고객이 보내는 문자 메시지를 보면 내용을 읽지 않더라도 앞으로의 임무가 어떤 것인지 대충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 대충 뭐 학부모 참관수업이나 그런 건가…?


운동회 시즌은 끝났으니까. 아마 이번에는 참관수업이 분명했다. 

나잇대는 유치원생을 둔 부…. 는 아니겠고, 모겠지 


요즘 애들은 영악하기가 그지없어서 먼저 말을 걸지 않더라도 아버지, 어머니 둘 중에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은 금방 눈치채니까.


옛날처럼 뭐 돈을 벌러 갔다더니,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더니 하는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었다.


솔직히 이런 일을 맡을 때마다 어차피 초등학생이 되면 애들도 다 알 걸 아는데,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긴 하지만…. 뭐 애비 없다고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어린 애들의 순수함에는 아무런 필터링도 없었다. 왜냐고? 지금까지 내가 엄마,아빠 없다고 놀림 존나게 받았거든


씁쓸하다. 약속장소로 가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냥 그러지 않았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서비스직인데, 굳이 소비자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린애들은 솔직해서 담배 냄새를 맡으면 대번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뭐…. 암만 한번 보고 말 사이지만.. 그래도 애들인데 

비즈니스적인 심리로 대하려고 해도 그건 좀 그래 그냥.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얀챈동. 서울에 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낮고 정원이 딸린 주택들이 많은 곳이었다.


하기야, 원래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니까, 뭐 어떻게 보면 돈 많은 사람이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주소에 적힌 주택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띠로리라 디로리라-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딱히 누가 열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문이 활짝 열린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녹색 잔디가 바닥에 깔린 정원이 인상 깊다. 정원 구석에는 애들이 타고 놀 수 있는 그네도 있었고, 어른들이 쉴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도 있었다.


심지어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버드나무? 느티나무?? 뭐 하여튼 엄청나게 커다랗고 굵다란 나무도 있었다.

좀 잘사는 집인 것 같다. 

이제 보니까 사람이 사는 집도 무슨…. 백악관처럼 하얀색 페인트로 도배가 되어있는 게 한국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저택 같았다.


... 좀 부담스러운데…….


뭐 나름대로 아빠 역할에 맡게 정장과 구두를 신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어나 더 클래스의 집에 찾아가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지….


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굽는 법이라고, 아무것도 아닌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내가 상류층의 멋있는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현관문 앞에 선 나는 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러야 하나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그러기도 전에 활짝 열린 문, 그리고 나는 이 집에 사는 집 주인을 보자마자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선배님…?"


안예리, 내 전 여자 친구…. 이렇게 만난 건 정말 몇 년 만이다. 

...... 학창 시절 때 집이 잘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저택에서 사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조금 씁쓸하다. 입에서 비릿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뭔가 이 느낌은 뭐라…. 설명하기 좀 그런데 굳이 비유하자면 치킨을 시켰는데 학창시절 때 완전 날아다녔던 일짱이 배달을 온 느낌?


물론, 이 상황에서는 내가 일짱이었다.


"엄마, 누구야?"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예리의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생긴 건 예리를 닮아서 예쁘장하게 생겼다. 아마 예리가 5살이었을 때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잖아, 유정아"


아니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리의 말에 눈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아 침착하자, 침착하자. 여기 돈 벌러 온 건데 이런 식으로 임무를 씹창내버리면 안된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오랜만이야"


"그동안 타지에서 고생하셨어요 여보, 보고 싶었어요."


예리가 내 품에 안겼다. 원래가 연인 사이여서 안기는 서식이 자연스럽다.

학교 다녔을 때 맨날 이렇게 예리를 안아줬는데,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나는 애매하게 비어있는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것도 맨날 예리에 해줬었는데, 머릿결이 비단결처럼 부드럽다.

얼마간 이렇게 있었을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예리의 뒤에 있던 유정…. 이었나?


자기 엄마의 낯선 모습에 그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는 게 귀엽다. 이 상황이 낯선 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치아가 빠진 입을 활짝 벌리며 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도도 내게 달려와서 내 무릎에 와락 안기는 게 아닌가?


"아빠, 보고 싶었어요, 어서 와요."


"... 아직 식사 준비가 덜 끝나서 그런데, 일단 유정이랑 잠시 놀아주실 수 있죠…?"


".. 어 그러지 뭐"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집 안에 들어왔다.


아이를 키우는 집답게 넘어질 때 다치지 말라고 가구의 모서리에 스펀지를 붙이고,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패드를 잔뜩 깔아놓은 게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게다가 거실 구석에는 아기가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많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 일단 뭐 어떻게 해야 하지?


경황이 없어서 집 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진짜 실제 아버지 역할이라니…. 그것도 전 여자친구의 아버지 역할은 좀…. 게다가 어린 애랑 놀아주라고? 


아니, 뭐 지금까지 젊은 아버지 역할을 안 해본 거는 아니다. 


그래도 그건 기껏해야 학부모 참관식대 옆에 서 있거나, 아니면 운동회 때 자리 구석에서 김밥이나 먹고 있는 그런 바지사장 같은 거지.

이건 진짜 아빠가 해야 할 일이잖아.


"아직 밥이 되려면 멀었는데……. 어쩌지…. 아 유정아! 유정이 유치원에서 배워온 춤 같은 거 아빠에게 보여주면 되겠다. 자 하나, 두울,새에엣"


"부끄러운데…."


"그래도 하나,두울,새에옛"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앞다리가 쏙, 뒷다리가 쏙..."


내 앞에서 귀여운 율동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유정이, 그리고 그런 유정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라고 하듯 예리는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이 잘한다, 우리 유정이. 또 유치원에서 뭐 배웠어?"


"나는 오이 될 거야! 나는 수박 될 거야 아니 아니 나는 멋쟁이 토마토 될 거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어느새 내 옆에 앉은 예리가 유정이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예리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지금 이렇게 유정이가 하는 율동에 맞춰서 박수를 치는 게 제일 중요한 과업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고구마 1,000개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턱하고 막혔다.


"예리야, 나 좀 보자"


"..선배?"


나는 예리의 손을 붙잡고 아무 방에 들어간 뒤에 유정이가 들어올 수 없게 문을 잠갔다.


대학교 시절 때부터 예리는 늘 그랬다. 애는 착한데 조금 사리분별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온통 꽃밭이었다.

인간은 본디 착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위험감각이 없었다.


"아니 예리야, 너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야 너 뭐야, 너 대책 없이 이렇게 마구잡이로 일을 저지르면 어떻게 하냐

아니 나라서 다행이지, 뭘 믿고 여자 둘이 사는 집에 다 큰 남자 한 명을 들여보내냐, 너 정신머리는 대체 어디로 두고 사냐

그리고 너 진짜 딸한테 나보고 아빠인 척 연기하라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너 나중에 쟤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할 건데? 너 그때 되면 너 감당할 수 있냐?"


"...선배인 거 알고…. 이렇게 부른 거에요"


"..아니 너 지금 그게 말이라고"


대행아르바이트를 하면 그런 게 있었다. 일단 내가 어떤 사람을 고용했는지 알아야 하니까, 고객에게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간단한 신상 등을 미리 보여주고는 했는데,

아마 예리는 그걸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 뭐 이미 면식이 있는 사람이면 괜찮다…. 그런 심리인가…??


"..그리고 유정이 선배……. 애잖아요…."


예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와 내 가슴에 꽂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모든 뇌의 기능이 정지되고 눈앞이 캄캄하게 변한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차곡차곡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내 애라고…?"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예리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랑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거의 5년 전이었다……. 이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관계를 맺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 예리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인제 와서…? 아니….


"선배…. 군대 가신 이후로 아무런 소식도 없었잖아요…. 전역하고 나서도 바로 자퇴하시고……. 전화번호도 바꾸셨더라고요…….

정말 솔직히 그때는 선배에게 굉장히 섭섭했지만…. 이제와서는 괜찮아요…. 저기 유정이한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죠……. 네 선배?

말씀해주세요. 선배?"


처음에 예리를 기세 좋게 방 안에 끌고 갔던 나는 어디로 가고 예리가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뒷걸음질을 치는 나였다.


내 등에 문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예리는 나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오고 있었다.

위험하다. 궁지에 몰린 쥐가 이런 느낌일까?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는 건…. 지금의 나에게는 위험했다.


"...내 애라는 보장도 없잖아."


내 말에 예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게 방에 들어와서 예리에 뭐라 잔소리를 할 때부터 그 웃음기 많던 예리의 얼굴에 미소가 조금씩 사라지더니,

이번에 내가 뱉은 말이 예리에게 치명적이었나 보다. 


싸늘하다. 


예리가 저렇게 차갑게 굳어진 얼굴을 한 건…. 내가 헤어지자고 말을 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 조금 그녀의 표정에 내 양심이 찔리긴 하지만…. 이대로 이렇게 코를 꿰일 수는 없었다.


"네가 다른 남자랑 놀아나서 생긴 애는 아니고? 네가 헤어진 동안 몸을 얼마나 굴러왔을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냥 건수 잡았다 셈 치고 지금 나한테 짬 때리는 걸로 밖에 안 보이는데, 뭐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지…. 니 마음은 이해하는데….

.. 예리야 이건…."


"...선배님…?"


새벽의 저주에 나오는 좀비처럼 그녀가 비틀거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기보다는 내 품에 쓰러졌다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그녀는 힘없이 내 품에 안겨들었고, 나는 더는 그녀를 품어 줄 수가 없었다.

뭔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눈동자, 그녀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예리야 이건 아니야, 예리야…. 나는 아버지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직격타가 된 것일까? 바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하지 않아서 눈물을 흘리는 예리.


인간쓰레기가 된 것 같은…. 아니 이미 나는 인간쓰레기였다. 


정말 사실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아버지가 없이 홀로 딸을 키우는 여자에게 내가 뱉은 말은 극독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나에게는 이미 지켜야 할 가정이 있는데….


방문을 여니, 유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예리와 내 모습을 한번 번갈아 보는 유정이, 나는 그런 유정을 뒤로 한 체 다시 집 밖을 나섰다.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이 짤 보고 갑자기 급영감 떠올라서 글 써봄

주갤문학도 참조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