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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김없이 책을 수리하던 내 눈에 딱 봐도 상태가 나빠 보이는 책이 들어온다. 표지에 '대지'라 적혀 있는 책을 펼쳐 보니, 가운데 부분이 심하게 찢어져 있고 몇십 장에 달하는 부분이 사라져 있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폐기하는 책들을 쌓아두는 곳에 '대지'를 가져다 놓는다.


현대의학이 발달해도 죽는 사람이 나오듯이, 나라고 해서 모든 책들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에 젖었을 때 올바른 방법으로 제때 말려지지 못한 책, 주스 같은 끈적이는 액체가 많이 묻어 잘 펼쳐지지도 않는 책, 그리고 이번 경우처럼 페이지가 소실된 책 등은 나도 어쩔 방법이 없다. 페이지를 새로 만들어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이런 소생이 불가능한 책을 '죽었다'고 일컫는다. 누군가는 살아 숨쉬는 것도 아닌 책이 어떻게 죽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태어나서 점차 늙어가고,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만 결국에는 수명이 다해 죽는 사람과,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히면서 차츰 낡고 해져가며, 때로는 고쳐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버려지는 도서관의 책들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일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잠시 도서관을 떠나 집으로 걸어가던 중, 문득 우체국에 있을 에일린 생각이 난다. 내가 싸 준 도시락은 잘 먹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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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돌아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버스를 타고 우체국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닥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전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일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들이 신경쓰인다. 안쪽으로 들어가던 중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에일린 씨? 다행이다. 무사하셨군요.. 몸은 괜찮으세요?"


미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젊은 여자는, 1년 반 가까이 내게 멸시받으면서도 출근할 때, 그리고 퇴근할 때마다 인사를 건낸다. 평소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시해 버렸겠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세상과 담을 쌓기로 했었다. 먹고살기 위해 일은 하지만,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았고, 타인을 배려해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들 아닌가. 그렇게 적당히 살다가 죽는 게 내 소망이었다. 아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 없을 뿐 삶 자체에 미련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집에 불이 나서 밖으로 도망쳤을 때, 처음으로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그토록 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게, 신경을 써 줄 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한편 내가 그토록 괴롭혀 온 아이작은 나를 구해 주고 돌봐 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주위의 모두와 척을 지면 안 되겠다는 것.


"네, 아이작 씨 덕분에..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미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최대한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지나쳐 내 일터로 향한다. 

내가 하는 일은 우체국으로 들어온 소포를 점검하고 우편날짜도장을 찍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다.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있고, 나는 아이작이 준비한 도시락 가방의 지퍼를 연다.


원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왔지만, 그의 집은 여기서 좀 거리가 있는 탓에, 젊은 악마는 나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다. 양철로 된 통 안에는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잘린 채 종이에 싸여 있는 샌드위치 세 조각이 있다. 한 입 베어물어 보니 맛이 참 좋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예전에 혼자 살았을 때는 그저 생존을 위해, 배를 채우기 위해 맛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먹었는데.. 참 신기하다. 그 악마와 동거한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 안에 무언가 큰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바쁘게 일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어 있다. 나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 미나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대문 앞에 도착하자 로키가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불과 하루 전에 만났는데도 이토록 살갑게 군다는 게 놀랍다. 아이작이 말한 대로 아직 어린 탓에 뭘 몰라서 그런 걸까? 


냉장고 안에는 그가 준비해 둔 저녁 식사가 있다. 식사를 하고 샤워까지 마친 뒤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작이 집에 돌아온다. 나도 모르게 현관으로 달려가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다녀왔어?"


"어. 넌 잘 있었어? 밥은 챙겨 먹었고?"


말만 들으면 꼭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얘기 같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맞다. 네가 해 준 음식 참 맛있었어. 고.. 고마워."


아직은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어색하기만 하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이작이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다행이네. 천사 입맛에는 안 맞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음부턴 내가 알아서 도시락 쌀게. 너한테 미안해서 그래."


"괜찮아. 나 악마잖아. 그 정도는 하나도 안 힘들어."


항상 느끼지만 참 배려심 깊은 악마다. 이렇게 착한 줄도 모르고 성가시게 굴었던 내 자신이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