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마도카는 신발장을 열어보고 한숨을 쉬었다.


 "올해도 있네."


 안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보낸 이는 물론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초콜릿을 들고, 곤란한 표정으로 재빨리 가방 속으로 욱여넣었다.


 2월 14일 세간에서 '발렌타인 데이'라 부르는 날이었다.





 "하아."


 마도카는 오늘로 벌써 열 하고도 네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오늘 아침에 받은 초콜릿 때문만은 아니었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계속해서 한숨을 내뱉던 마도카는 저도 모르는 새, 어느 장소 앞에 도착해버렸다. 2-C 반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의 목적은 모두 동일한 듯 어느 한 소녀의 주위에서 초콜릿을 건네고 있었다. 소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들이 건넨 초콜릿을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받았다.


 마도카는 매년 보는 광경임에도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역시, 호무라 쨩은 인기가 많구나."


 초라한 자신의 초콜릿을 누군가 볼세라 얼른 등 뒤로 숨겼다. 호무라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호무라와 일순 눈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으나 자신의 착각이렷다.


 그 후로 마도카는 초콜릿을 가방에 처박아두고 외면했다. 반 아이들의 대화 속에 초콜릿이 나올 때마다 움찔하곤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오늘 저녁 메뉴는 뭐로 할까? 크림스튜가 좋겠어.' 따위의 아무래도 좋은 생각만 하다 보니 금방 하교 시간이 되어 버렸다.


 "아아, 발렌타인 데이 같은 거 누가 만든 거야. 없어졌으면 좋겠어. 사야카 쨩도 쿄코 쨩도 오늘은 약속이 있다며 먼저 가버리고, 히토미 쨩도 카미조 군과 데이트고…"


 애꿎은 돌멩이를 팽 차면서 화풀이를 했다. 그런데도 화가 덜 풀렸는지 전봇대를 가방으로 팡팡 쳤다가 생각보다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가방을 떨어트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하아. 뭐 하는 걸까, 나."


 머쓱하게 긁적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방부터 내팽개친 것도 잠시 '아!'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 문을 열었다.


 "매년 질리지도 않고 보내네."


 손에 든 초콜릿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한다.


 "작년이랑 똑같은 포장지. 대체 누굴까?"


 중학생 때 전학 온 이래로 돌아오는 발렌타인 데이마다 같은 포장지에 싼 초콜릿을 매년 받았다. 그 흔한 메시지 카드도 없이 오로지 초콜릿만. 같은 중학교를 거쳐 같은 고등학교에 온 인물이라 추정되지만 짚이는 사람이 없다.


 "히토미 쨩이나 사야카 쨩, 쿄코 쨩이 준 건 아침에 먹었고, 마미 선배의 쿠키는 점심시간에 나눠 먹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고민해봐야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도카는 초콜릿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방에 남은 또 하나의 초콜릿을 보았다. 조금 찌그러져 있는 초콜릿. 아까 호무라의 교실 앞에서 구겨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전해주지 못했어."


 또,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로써 앞으로 호무라와 대화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도카는 울적한 기분에 천장을 바라보았다. 뜨끈한 눈물이 코를 울리고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아케미 호무라, 전학 온 마도카에게 쏟아진 관심을 자연스럽게 돌리고 학교를 안내해준 상냥한 아이. 무심하고 쿨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여리고 상냥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마도카를 사야카와 더불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모두 신기한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호무라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미인이자 뭐든지 잘하고 특별한 아이가 평범한 자신을 특별취급해 준다. 한창 사춘기를 겪을 소녀인 마도카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날로 커져 마침내 깨달았을 땐 커다란 사랑이 되었다.


 마도카는 사랑을 접으려 했다. 하지만 접으려 하면 할수록 더 커다랗고, 애절한 감정이 샘솟았다. 나날이 커지는 감정을 들킬까 무서웠다. 그래서 멀어졌다.


 "호무라 쨩."


 두 번째 서랍에서 빨간 리본을 소중하다는 듯 꺼내든 마도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불렀다.


 들뜬 가슴은 더욱 거칠게 날뛰었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넘쳐흘렀다.


 어째서 더 빨리 깨닫지 못했을까.


 멈출 수 없는 사랑임을 알았다면,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만들지 않았을 텐데.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을 텐데.


 너무 늦어버렸다.



 열심히 초콜릿을 만들었다. 다시 시작할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호무라의 주변엔 사람이 넘쳐났다. 그곳에 마도카의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호무라는 마도카를 특별하게 취급해줬지만, 자신은 호무라를 배신했다. 호무라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졌다. 전해주지 못한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퍼진다.


 '미안해, 호무라 쨩. 오늘 사야카 쨩이랑 약속이 있어.'


 '그래, 알았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알고 있다. 혼자 걸어가는 호무라의 쓸쓸한 뒷모습을.


 '미안, 나 집에 급한 일이 생겼어.'


 '아냐. 급한 일이 생겼다니, 영화는 다음에 보면 돼. 마음 쓰지 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알고 있다. 처음 본 원피스와 옅은 화장, 호무라가 얼마나 고대했는지를.


 '마도카,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


 '그렇지만 우리 이제 다른 반이고, 호무라 쨩이랑 같이 점심 먹고 싶어 하는 친구들 많잖아.'


 '하지만 나는 마도카와…'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호무라 쨩도 어서 반으로 돌아가. 이러다간 점심시간이 다 지나겠어.'


 '알았어. 점심 맛있게 먹어.'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알고 있다. 꼭 쥔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마도카, 이번 일요일에 시간 돼? 괜찮으면 저번에 못 봤던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앗! 미안해. 나 그 영화 얼마 전에 마미 선배랑 봤어.]


 [그렇구나.]


 거짓말이다.


 [마도카, 요즘 무슨 일 있어? 학교에서도 언제나 기분 안 좋아 보여.]


 [아니, 아무 일도.]


 [그럼 혹시 고민거리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이야기 들려줘.]


 [응.]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 공원에 산책하러 가면 좋겠다.]


 [주말에도 계속 날씨가 좋을 거래.]


 [이번에 새로 개봉한 영화 되게 재밌대.]


 [역 앞에 괜찮은 디저트 카페가 있대.]


 그래, 그렇구나. 마도카의 성의 없는 답변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톡을 보내고 말을 걸어왔지만,


 마도카는 호무라를 보지 못했다.


 이 감정을 숨겨야 한다. 티를 내선 안 된다. 그 무렵 마도카의 머릿속엔 그것만이 존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나, 할 말이 있다며 호무라가 찾아왔다.


 "할 이야기란 게 뭐야?"


 마도카가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자신의 앞에 놓인 샌드위치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호무라가 고개를 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니."


 마도카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새까만 커피는 보기에도 무척 써 보였다.


 "그래"


 호무라는 힘없이 피식 웃으며 샌드위치를 쳐다보았다. 아니, 시선은 분명 샌드위치를 향했으나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눈빛이었다.


 "시간을 낭비하게 했네."


 호무라가 쟁반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러놓고 이게 끝인가 싶어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으나, 호무라는 전에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서 한 입도 먹지 않은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 가게를 나섰다.


 "어? 호무라 쨩, 잠깐!"


 이후로 호무라가 마도카에게 말을 걸거나 인사를 건네오는 일은 없었다.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쌩한 표정에 기가 죽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고등학생이 되었다.


 마도카는 마지막 남은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가득 담긴 초콜릿은 그때 마신 커피만큼이나 썼다.


 두려웠다. 호무라와 자신을 두고 수군대는 말들이. 언제라도 손가락질받을 이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우정,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호무라의 표정이.


 애석하게도 사랑은 밀어내고 외면해도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붙은 장작처럼 더욱 활활 타올랐지만, 그럴수록 죄책감이 마도카를 짓눌렀다.













 오늘 밤은 쉽사리 잠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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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아케미 호무라는 조심스럽게 '카나메 마도카'라고 쓰인 신발장 앞에 섰다.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며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검은색 포장지에 보라색 리본을 두른 고급스러운 초콜릿이었다.


 "사랑해, 마도카."


 호무라가 살며시 입을 맞춘다.


 "당신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사랑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살며시 신발장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