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내글아님)드래고니아 갔다가 사기 먹고 용기사단 입단한 이야기 1









투기장에 나오니까 공기가 참 맑게 느껴지더라. 크게 심호흡 한 번 함. 뒤따라 나온 S가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렇게 빨리 나오냐고 묻는데. 진짜 그걸 모르겠냐고 내가 물었더니 고개만 갸우뚱 함.


마물이 인간처럼 생겼어도 사고방식이나 그런 게 참 다르다는 걸 느꼈음. 일 크게 만들기 싫어서 걍 경기 전부 끝났으니까 나왔다고 둘러댔다.


S가 열병식까지 시간 많이 남았는데 따로 정해놓은 게 없다면 던전에 가보자고 권했음. 그래서 내가 던전이라니 무슨 생각이냐. 내 목숨을 시궁창에 버릴 생각이냐고 따졌음. 그러더니 S가 당황하면서 말만 던전이지 자기랑 함께하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굉장한 비경을 볼 수 있다며 계속 권유했는데. 됐다고 거절함.


S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얘가 뭐 하자고 권유하며 권유하는 족족 거절해왔으니까 가이드로서 자신감이 없어질 법도 하는 생각이 들었음. 해고당해서 백수 짓으로 자존감 바닥인 나랑 겹쳐 보인 것도 있었다.


그래서 던전같이 위험한 것만 아니면 네가 가자는 곳으로 가겠다. 라고 말함. S가 화색이 돼선 그럼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니까 등에 타라고 함. 꼭 타야하냐. 도마뱀으론 갈 수 없냐고 물으니까. 높은 곳에 있어서 땅에 붙어서 가는 생물들은 힘들 거라고 하더라. 결국 마지못해 타기로 함.


그러더니 갑자기 S의 몸이 발광하기 시작하는 거임. 실루엣이 갑자기 커지더라. 빛이 점차 약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질 쯤에 진짜 책에서나 봤던 와이번으로 변해 있었음. 인간의 모습은 1도 안 보임. 마물은 마물이구나 싶었다.


등에 타라고 몸을 낮춰주는데. 목소리는 좀 울리는 거 빼면 인간형일 때 목소리랑 똑같더라. 모습은 괴물인데 목소리가 앙칼진 여자 목소리라는 게 아이러니했음. 조심해서 등 밟고 올라탐. 순간 하앙 하고 교성을 내지르는데 내가 뭐 잘못 밟았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라면서 제대로 타라고 말하더라.


등에 올라타는데 생각 외로 부드럽고 편했음. 호텔에 있던 소파보다 훨씬 편안해서 내 집같은 편안함이었다. 근데 본드라도 몸에 바른 것처럼 다리가 S의 등에 쫙 붙어서 안 떨어지더라. 나중에 용기사 되고 안 건데. 탑승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마력을 이용해 점착성을 부과한 거임. 일종의 안전장치임.


내가 준비된 걸 안 S가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떠올랐음. 난 제발 이대로 천천히 가라고 당부했는데. S가 깔깔 웃더니 순식간에 위로 치솟더라. 아래를 보니까 땅바닥이 저 멀리 있는 거임ㅋㅋㅋ 정신이 혼미해졌음. 바람을 가르는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릴까봐 존나 크게 야 이 시발년아 천천히 가라고 소리 지름.


근데 오히려 더 속도를 내더라. 떨어질까 무서워서 S의 등을 매달리 듯이 안아버림. S의 입에서 교성이 나오더니 순간적으로 속도가 늦춰지더라. 그제야 좀 여유가 생겨서 흥분하지 말고 좀 천천히 가라고 타일렀음. S가 알았다고 말하곤 속도를 적당히 늦췄음.


무슨 산 정상으로 향하는 것 같던데. 궁금해서 어디로 가는지 물었음. S가 구름 위 지구에 간다고 함. 구름 위 지구란 건 드래고니아 정상에 있는 거주 지역인데 말 그대로 구름을 뚫고 우뚝 서 있는 산의 산맥에 지어진 생활 구역임.


거기에 뭐 볼 거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 부모님 가게에 간다고 하더라. 날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하던데 대체 가이드가 며칠 보고 말 고객을 부모에게 소개시키려 하는지 진짜 이해도 안 가고 부담만 됐음.


가게에 도착. S의 익명성 보장을 위해 가게 이름은 말할 생각 없다. 전에 초콜레혼 언급한 것 때문에 무슨 가게인지 아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언급 자제 Pls.


가게가 존나 으리으리하더라. 2층 건물이었는데. 핑크색이라 들어가기 꺼려짐ㅋㅋ 어색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멀뚱히 서 있는데 S가 팔짱을 낌. S에게 이끌리며 들어감.


내부도 외관 못지않더라. 관엽 식물이 곳곳에 배치돼 있고 아기자기한 소품도 많았음. 딱 여자가 좋아할 만한 인테리어였음. 하트 모양은 또 왜 저리 많은지 레알 혼자 왔으면 10분 못 버티고 나갔을 듯.


1층은 꽉 차서 자리가 없더라. 미소를 띤 와이번 웨이트리스가 와서 자리 안내해주는데 2층 창가 쪽에 자리 하나 비어서 거기 앉음. 사장 딸이라서 그런가 S와 종업원은 꽤 친근해보였음. S가 적당히 주문하고 종업원이 받아 적고 내려감.


갑자기 뒷 자석에 앉은 커플이 S한테 말을 걸었음. 날 보더니 남친이냐고 묻더라. S가 당황해서 하와와 이 지랄하는데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아니라고 정색 한번 빨아줌. S가 자기 같은 미소녀하고 그런 착각을 당하는 건데 왜 그러냐며 화내더라. 그냥 무시해줌.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쟁반에 담아 갖고 옴. 커다란 컵에 흡입구가 두 개 있는 하트 모양 빨대가 꽂아진 음료수였음. 종업원이 설명하는데. 부부의 열매로 만든 믹스 주스라는 불길한 이름이었음.


내가 이름 듣고 이거 먹으면 발정하거나 그런 거 있냐. 나 그런 거 안 좋아한고 말함. 종업원이 능숙한 대응으로 그런 걸 감수하고도 먹어야 할 맛이라며 웃으며 말함. 종업원 수준 ㅋㅋㅋ


이 주스는 안에 부부의 열매로 만든 셔벗이 들어 있어서 이게 천천히 주스에 녹아드는데 그 때 맛이 변하기 때문에 녹기 전과 후 두 가지 맛의 차이를 즐기는 음료라고 함.


반드시 빨대로 마시라고 하는데 서로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마실 수 없는 구조로 된 빨대라고 함ㅋㅋㅋ 기술력 낭비 수듄ㅋㅋ


내가 존나 싫은 티를 내며 안 마시려고 하니까 S가 여긴 커플 전용 가게라면서 우리도 커플처럼 행동하지 않겠냐며 개소리를 하길래 그냥 빨대 떼고 컵 채로 마심. 주위에서 두근두근 빠담빠담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과 종업원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게 볼만했음.


한 반쯤 마셨을 때 남은 거 다 마시라고 S한테 건네줌. 맛은 뭐 시고 달고 그저 그렇더라. 종업원 말마따나 녹으면 맛이 달라질 것 같긴 한데 요 이틀 사이에 마물 요리의 특징을 대충 눈치 챈지라 시도해볼 용기가 없었다.


S가 매너과 꽝이라고. 타국의 음식은 현지인이 설명하는 대로 먹으라며 성질부림. 맞는 말 맞는 말 처 맞는 말을 하길래. 짜증나니까 남 먹는 거에 이러쿵저러쿵 터치하지 말라고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함.


그러더니 주변에서 날 보는 시선이 점차 차가워짐. 난 눈치 좀 보다가 한숨 한 번 쉬고 빨대를 입에 뭄. 존나 멍 때리고 있는 S한테 뭐 하냐 빨리 마시라고 재촉하니까 S가 얼굴을 붉히고 반대쪽 끝을 물었음.


공기압으로 빨려 들어오는 주스를 음미하는데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라. 상쾌한 맛이었음. 청량감이 입안에서 퍼지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대로 한 순간에 다 마셔버림. 아마 내가 거의 다 마셨을 듯.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었음. 종업원이 혼잣말로 정해진 방법으로 마셔야 하는데 라고 이마 부여잡던 게 기억나네. S가 바보 같이 헤실헤실 웃고 있었음. 뭐 소원 하나 이뤘다 이런 소리하는데 소원 한번 소박하다고 비웃어줌. 그래도 마냥 좋다고 웃더라.


내가 다 마셨으니까 이제 슬슬 나가자고 하니까 안 된다고 부모한테 소개하고 가야한다 이런 말 하면서 떠날 생각을 안 함.


그래 이렇게 널 키운 부모 얼굴이나 한 번 보고 가자. 이런 생각으로 S 따라서 1층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감.


젊은 남자 한 명이 마물과 인간 셰프 몇 명을 지휘하고 있었음. S가 잘생긴 젊은 남자를 부르더니 아버지라며 날 소개하더라. 인큐버스라 젊음을 유지한다는 걸 모르던 난 저 남자가 몇 살에 애를 가진 건지 추측하고 있었음.


S의 아버지와 잠깐 짬을 내서 대화를 가짐. S 아버지가 나만 따로 불러서 둘이서 대화를 나눴음.


언제 알았냐. 어제. 

S와 무슨 관계냐. 고객이랑 가이드.

S를 어떻게 생각하냐. 버릇이 없다.


대충 이런 흐름이었던 걸로 기억함. 내 쿨 가이 화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S 아버진 날 탐탁지 않게 보던데.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 생각하고 신경 안 씀.


대화가 끝나고 다시 S한테 갔는데. S가 마마 어딨냐고 묻더라ㅋㅋㅋ 나이가 몇인데 마마 파파 거리고 있음 ㅋㅋㅋ 하여튼 파팤ㅋㅋ가 마맠ㅋㅋ는 곧 있을 열병식 대비해서 연습중이라고, 만나고 싶으면 용기사단 연병장 가보라고 함.


그렇게 대화도 전부 끝나고 밖으로 나갔는데 S가 이번엔 마마(ㅋㅋ)를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용기사단으로 가자는 거임. 안 가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누가 고객이고 가이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주객전도 발언을 해버림.


우리 S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런 느낌으로 체념하고 다시 한 번 S의 등에 탐. 구름 위 지구에서 가까운 유대의 계곡이라는 곳으로 갔음. 거기에 건물이 즐비한 구역이 있었는데. 완전한 마물의 모습을 한 용들이 등에 용기사를 태우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음.


넓다 못해 광대한 연병장의 한 구석에 내렸는데 누군가 인간 폼으로 돌아온 S에게 말을 걸었음.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금발의 드래곤이었는데. S가 거수경례를 하더니 날 소개하더라. 저 드래곤이 갑자기 충격 받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또 부하한테 추월이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음.


서로 소개 시간을 가짐. 용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함. 유명하니까 신상 공개함. 알트이리스다. 자기 이름 딴 술을 만들 정도로 결혼 활동에 필사적인 분임. 노처녀 발언한 부하에게 상관 모독죄를 적용할 정도로 히스테리가 심하니까 누가 좀 데려가주라.


S와 단장이 수다 떠느라 정신 팔려 있는데 멀리서 와이번 한 마리가 연병장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음. 다른 와이번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커다란 날개가 인상적인 와이번이었는데. 존나 빠르더라.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을 정도였음. 그런데 그런 속도를 순식간에 감속하더니 아주 능숙하게 연병장 한 가운데에 착지하더라. 내가 감탄의 의미로 휘파람을 불려했는데 순간 멈칫했음.


그 와이번인 인간 폼으로 변하더니 긴 은발을 가진 한껏 무르익은 원숙한 미인으로 변했음. 내 취향에 딱 맞더라. 진짜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음. 마물이어도 전혀 상관없다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S에게 물었음. 저 사람 누구냐고.


대답은 S 대신 단장이 했는데. 커다란 날개라는 이명을 가진 와이번인데 용기사단 최속을 자랑하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연병식의 기수를 담당한다고 함. 이름은 익명성 보장을 위해 말 못하고 C라고 하겠음. 이니셜을 따면 S긴 한데 중복이라서 C로 함.


난 단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C에게 눈을 못 떼겠더라. S가 불만 섞인 투로 뭐라 말하려는데 내가 먼저 말을 가로챘음. 내가 용기사가 되면 C라는 마물이 내 기룡이 될 수 있냐. 이렇게 물었는데 S랑 단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라.


S가 심각한 얼굴로 상념에 잠겨 있다가 곧 가능하다고 답함. 단장이 놀라서 뭐라 말하려는데 S가 어디론가 끌고 가더니 서로 언성 높이며 싸우더라. 멀리 있어서 내용도 안 들리고 C에게 정신이 팔려서 솔직히 관심도 없었음.


곧 S와 단장이 오더니 그럼 지금 입단 지원서를 작성하겠냐고 묻더라. 나는 당근빳다죠쉬바! 라고 즉답하고 막사로 향하는 S와 단장을 뒤따라갔음.


S가 종이를 받고 펜으로 뭔갈 적기 시작하더니 그 후 나에게 건네면서 싸인 할 곳을 짚어주더라. 여기다 싸인 하고 단장한테 제출하면 된다고 했음. 내가 왜 기룡이라고 적혀 있는 란에 네 이름이 적혀 있는 거냐고 물으니까 S가 추천인 항목에 자기 이름을 적은 것뿐이라고 말함. 나는 그 말에 아무 의심 없이 이름을 적고 바로 제출했음.


C와 함께할 미래를 상상하느라 서류는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망각한 거임. 20년 인생에서 통틀어서 제일 후회되는 일이었음.


단장이 지원서를 받고 고급스런 디자인의 서류철에 꽂아 넣더니 이젠 넌 자랑스러운 용기사단의 일원이라며 앞으로의 활약을 바란다는 말을 했음. 그리고 내일 오전 10시까지 연병장으로 집합하라는 둥 내일 할 일을 설명하더라.


난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급한 마음으로 막사를 뛰쳐나와 연병장으로 향했음. 멀리서 C가 보이길래 거기까지 달려감. C가 멀리서 달려오는 날 보곤 눈을 멀뚱멀뚱 날 쳐다보더니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음. 목소리 살살 녹는다.


나는 내일부터 용기사가 되는 누구누구다. 혹시 괜찮다면 내 기룡이 되어줄 수 있겠냐 이렇게 전했음. C는 당혹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미안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음.


자기는 이미 은퇴해서 민간인이고. 이번 열병식에만 특별히 나온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긴 이미 애까지 딸린 유부녀라더라.


뒤따라 나온 S를 향해 몸을 돌려서 설명을 요구함. S가 얼굴을 못 마주치고 짧게 한마디 하더라. 진짜 지금도 악몽으로 자주 나와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함.


미안 내 마마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몸에 힘이 쫙 빠지더라. S가 머뭇거리면서 손가락만 꼼지락대고 있는데 C가 S를 부르더니 좀 떨어진 곳에서 얘기를 나눴음. 아마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설명을 들은 듯. 대화가 끝난 후에 C가 S를 데리고 나한테 오더니 고개를 숙이더라.


딸이 내가 용기사가 돼서 자기를 기룡으로 삼았으면 해서 이런 짓을 했다. 미안하다고. 자기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부디 용서해달라며 싹싹 비는데. 방금까지 반했던 사람에게 이런 짓을 시키는 것도 뭣해서 손이나 휘휘 젓고 일단 알았다고 했음.


그 다음에 단장한테 가서 이렇게 됐으니까 용기사 못 하겠다. 지원서 파기해달라고 부탁함. 그랬더니 단장이 사정은 이해하지만 지원서를 제출한 순간 이미 용기사가 된 거라고. 한 번 용기사가 되면 1년 이상은 복무해야 제대 신청이 가능하다고 말하더라.


난 하도 어이없어서 난 사기 당한 거다. 너도 C가 S랑 모녀 관계인 거 알면서 합심해서 나 속인 거 아니냐. 단장이란 사람이 뭐 이러냐. 용기사는 개뿔 사기꾼 집단이라고 따져댔음.


단장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더라. 이번 일은 달게 징계를 받겠다. 하지만 입단 취소는 규율상 어렵다. 1년만 버텨달라고 사정하더라.


내가 뭐라 또 따지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연병장에 있는 용기사랑 기룡들이 우릴 쳐다보고 있는 거임. 나에 대한 시선이 곱질 못해서 큰 일 한 번 날 것 같은 분위기였음.


이대론 안 될 것 같아서 S한테 내일 얘기하자. 오늘은 피곤하니까 이만 들어가겠다. 이렇게 전하고 단장한테 호텔까지 태워줄 기룡 한 마리 부탁했는데 단장이 자기가 하겠다고 함. S도 태워주겠다고 나섰는데. 하도 짜증나서 제발 좀 닥치라고 말함.


그러더니 S가 눈물을 터뜨리더라. C가 나무라는 얼굴로 날 쏘아보는데 내 얼굴 보고 표정 굳더니 S만 다독였음. 난 무시하고 드래곤으로 변한 단장 등에 탔다.


호텔로 돌아와서 바로 침대에 누움. 열불이 나서 베개 집어 던지고 머리 박박 긁고 벽 치고 소리 꽥꽥 지르다가 지쳐서 잠들었다.




일어나니까 새벽이더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얼굴을 부여잡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해봤지만 답이 안 나오더라.


일단 씻기로 함. 적당히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깜짝 놀랐다.


S가 방문 앞에 서 있었음. 표정 존나 어둡고. 밤새 울었는지 눈도 부어 있더라.


걔가 날 보더니 내 이름을 부르며 나한테 다가오더라. 너무 무서워서 방문을 세게 닫아버림. 열어달라고 문을 계속 두드리는데 당장 침대에 박혀서 베개로 귀 막고 다 도망치고 싶었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빗장이 걸린 문을 살짝 열어봤다. 열린 문 사이로 S의 얼굴이 보이더라. 너무 가까워서 놀라 당황함. 잠깐 떨어지라고 하니 S가 문에서 몇 발짝 물러났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 있는 거냐. 언제부터 있던 거냐. 이렇게 물었음. 그랬더니 S가 사과하고 싶어서 어제 내 뒤를 따라서 몰래 왔다고 함. 결국 밤을 새가며 아침까지 서 있었다는 말임.


난 그런 S가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었고.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음.


빨리 좀 꺼져줬으면 하는 마음에 사과를 받아주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용기사가 될 생각도 없다. 오늘 중으로 여길 뜰 거니까 그냥 꺼지라고 했음.


그랬더니 그냥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나빴다. 이 말만 반복하더라. 기분 나쁘고 무서워서 그냥 문을 닫으려는데. 순간 S가 팔을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 문을 못 닫게 막아버리더라.


놀라서 뒤로 빠지다가 자빠졌다. S가 문을 열려고 빗장을 건드는데 빗장을 푸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힘으로 끊어버리더라.


이제 S와 나 사이엔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었음. S가 자빠진 내게 다가오더니 그대로 덮치듯이 안아버렸다. 갑작스럽게 눌려온 무게에 완전히 뒤로 누워버렸음.


인간한테 없는 꼬리나 날개 때문인지 몰라도 보이는 거에 비해 무게가 있었음. 애초에 여자하고 이렇게까지 밀착한 건 처음이라 사람에 비해 얼마나 무거운지는 모르겠더라. 좋은 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목덜미에 S의 숨결이 닿았음.


점차 숨결이 위로 올라오더니 내 왼쪽 귀를 파고들음. 미안하다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데. 고개를 S 쪽으로 돌리니까. 말과는 다르게 황홀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음. 좀 뻔한 표현인데.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의 얼굴이었다.


내가 왜 웃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웃었냐고 되묻더라.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발버둥 치니까 기뻐서 웃는 걸 거라고 말함. 계속 자길 피했던 당신이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하는 건 처음이라 기쁜 거다. 이렇게 말하더니 얼굴을 좀 더 가까이 함.


츄 할까? 그렇게 내뱉고 입술을 갖다 대더라. 난 더 세게 발버둥을 쳤지만 완전히 내 위로 올라탄 S가 내 팔목을 잡고 좌우로 벌려서 바닥에 고정시킴. 심지어 발톱을 바닥에 못 박 듯이 박아버리더라.


난 아무 반항도 못 하고 S에게 입안을 농락당했는데. 입안이 강간당하는 느낌에 S를 노려보던 눈이 자연스레 풀려버렸음. 그렇게 한참을 키스를 하다가 S가 만족스런 얼굴로 입을 열더니 첫 키스 줘버렸다♥ 이딴 소리나 지껄이더라.


내가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소리치며 물었음. S가 취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너라고 말하곤 날 포박하던 손을 풀고 내 얼굴을 어루만짐. 네가 좋다. 첫눈에 반했다. 무뚝뚝한 점도, 입이 더러운 점도, 남자답지 못한 점도, 드물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도 전부 좋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마 더 말했던 걸로 기억나는데 4개밖에 기억이 안 나네.


씨발 그딴 것 때문에 나한테 사기까지 치냐고 화냈더니 그딴 게 아니라고 자기한텐 그게 전부라고. 이젠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데. 부담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무슨 불가해의 공포라도 마주한 느낌이었음.


S가 미안한 얼굴로 속인 건 미안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내 용기사가 돼 준다면 난 내 모든 걸 바치겠다. 이런 식으로 말함. S에게 힘으로 밀리니까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진 건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어차피 돌아 가봤자 백수 짓이나 하다가 결국 박봉에 중노동이나 할 텐데. 언제 내가 이런 미소녀한테 고백을 받아보겠냐. 애초에 결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더라. 내 선택이라곤 하나 속아서 용기사가 돼도 좋은 건가? 미소녀건 뭐건 날 속이려드는 년이랑 같이 지내서 행복할까?


오만 생각이 다 들더라. 결국 고민 끝에 내가 입을 열었음.


좀 더 혼자서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 로비에서 기다려 달라. 내가 보인 긍정적인 반응에 S가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임. 내 구속을 푼 S가 먼지를 털고 일어섰음.


나는 여전히 자빠져 있는 채로 손을 휘휘 저으며 로비로 꺼지라는 의사를 S에게 보냄. S는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멍청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선 몸을 숙이고 가볍게 입맞춤함. 그리곤 빨리 와야 돼. 라며 가버리더라. 로비로 향하는 계단을 사뿐거리며 내려가는 S를 보며 생각했다.


멍청한 년. 그게 날 보는 마지막일 거다.


난 당장 돌아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음. 원래 들고 온 것도 얼마 안 되는 지라 채비는 빠르게 끝났음. 옷가지 몇 개, 쓸모없겠지만 가지고 나온 호신용 나이프.


나는 문을 빼꼼 열고 문밖을 훔쳐봤음.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S가 내려간 계단에서 반대쪽에 있는 맞은편 계단으로 내려감.


층계참에서 고개를 빼고 로비를 훔쳐봄. S가 소파에 앉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흔들 대더라. 들키지 않게 종종걸음으로 조용히 계단을 내려옴. 바로 달려서 데스크에 열쇠 반납하고 무색 목걸이 보여주며 체크아웃이라고 전하고 호텔에서 나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거리는 인파로 혼잡하더라. 조용한 것 보단 낫다고 생각하고 거리의 인파 속에 뒤섞임. 호텔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뒤 마계 도마뱀 택시를 잡음. 내 앞을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세웠는데.


놀랍게도 동일한 고블린 운전사였음. 이쯤 되면 진짜 뭐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었지만, 당장 도망가는 게 급했으므로 일단 목걸이를 보여주고 도마뱀 등 위로 배치된 시트에 앉음.


입국 심사소로 가 달라고 했더니 고블린이 잠깐 볼일 좀 보고 온다고 기다려 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볼일이 뭔지 모르겠지만 손님 받는 것보다 중요하냐고 물으니까. 불만 있으면 딴 거 타라더라.


짜증이 일었지만 다른 택시 잡는 게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빨리 끝내달라고 하고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댐.


그리고 한 1, 2분 정도 후에 오더니 운전석에 앉아서 고삐를 잡고 출발함. 이제 좀 안심이 되니까 긴장이 놓이더라. 로비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허송세월 날 기다리고 있을 S를 생각하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개뿔 통쾌하기만 했음. 동정심을 가지기엔 S가 너무 막나갔음. 어디까지나 가정의 이야기지만. 만약 S가 사기를 치지 않고 내가 용기사가 되길 권유했다면 진심으로 고민했을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용기사로서의 삶이 고향에서의 삶보다 더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사기를 치는 걸로 모자라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강간 미수까지 저지르는 모습에 정나미가 다 떨어졌음.


날 인격체로 보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투기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마물들은 감정을 중시해서 남이 싫어하는 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어물쩍 넘어가는 경향이 있더라. S도 그랬고 함께 지낼 수 없다고 깨달음.


출발한 지 30분이 넘었는데 아직 도착할 기미가 안 보이더라. 분명 입국 심사소는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았거든. 하도 답답해서 내가 입국 심사소로 가는 거 맞냐고 물어봄.


그랬더니 고블린이 날 잠깐 뒤돌아보더니 다시 앞을 보며 아니라고. 용기사단에 간다고 그러더라.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 한 번 물어보니까. 도마뱀을 멈추고 내게 몸을 돌림. 그리고 나한테 설명을 해주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음.


몇몇 택시 운전사들은 드래고니아를 방문한 독신 남성을 감시하는 일을 한다. 난 네 담당이다. 네가 용기사가 된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가이드도 없이 혼자 택시를 탄 널 보고 의심이 들어 모종의 방법으로 입국 심사소에 연락함. 목적지를 듣고 탈영으로 판단. 용기사단으로 이송을 부탁 받음.


정신적으로 엄청 몰려서 그런지 호신용으로 가져온 나이프를 꺼내서 당장 입국 심사소로 방향 돌리라고 위협함. 고블린이 엄청 태연한 얼굴로 어차피 가도 결과는 똑같이 용기사단으로 갈 거라고 하더라.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도마뱀에서 내림. 그러더니 고블린이 자기 종족은 마물 중에는 약한 편에 속해도 평범한 인간보다는 훨씬 세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얌전히 타라고 경고함.


나는 열심히 짱구를 굴려봄. 뭔가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고 방법이 하나 떠오름. 그다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음. 난 도마뱀의 꼬리를 잠시 쓰다듬어주다가 그대로 손에 쥔 나이프로 꼬리를 찔렀다.


도마뱀이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승객이 탈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앞으로 달려가더라. 고블린이 날뛰는 도마뱀을 제어하려고 용을 썼지만 이미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음.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일단 걷자고 생각하며 왔던 도로를 거슬러 감. 머리 위로 드래곤이나 와이번들이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떨려오더라.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갈림길이 보였음. 세워진 표지판을 보니 드래고니아에 오기 전 들렀던 마을이 보여서 그곳으로 향했다.


도중에 드래고니아와 그 마을을 오가는 장사꾼을 만나서 약간의 돈을 주고 마차를 탐. 2시간 후에 도착했고 거기서도 마차로 경유하는 식으로 일주일이 걸려 고향으로 내려옴.


평소 아무 감흥도 없던 곳이었는데 일주일이 넘게 못 본 고향이 너무 정겹게 보이더라. 여행과 도망 생활의 피로가 터진 듯이 확 몰려오더라. 지친 몸을 이끌며 집으로 향했음.


저 왔어요. 라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아무 대답도 없이 조용했음. 아무도 없냐고 크게 외치니까 그제야 어서 오라고 여자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리더라. 어머닌 줄 알고 부엌으로 갔는데 아무도 없었음.


공포가 몸을 죄여 오는 느낌이었음. 날은 밝았고 창문 사이 햇살이 들어왔지만 고요라는 게 이렇게까지 무서운 줄은 몰랐다.


그리고 누군가 날 보고 있는 느낌이 나는 거야. 몸이 땅에 박힌 것처럼 못 움직이겠더라. 그리고 그 순간이었음.


누가 뒤에서 날 확 안아버리더라. 몸에 닿은 약간 딱딱한 느낌에서 S라고 바로 알아차림.


S가 이제 놓치지 않겠다며 귓가에 속삭였음. 발아래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율이 흘렀고 난 그대로 주저앉았음. 순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고 부모님은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레스카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이 집엔 우리 둘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내 하반신으로 손을 뻗더라.


나는 기겁해서 있는 힘을 다 써 S를 뿌리치고 주저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는데. S가 웃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음. 내가 한 행동이 S의 마물로서의 본능을 자극한 건지 모르겠지만 마구 흥분하면서 이러니까 당신이 좋다고. 그렇게 말하곤 날....


그래 했다 했어.


난 그날 결국 드래고니아로 다시 떠나게 됨. S의 등에 타서 가진 않았고 레스카티에서 빌려준 휘황찬란한 마계마차를 타고 감.


마차 안에선 하루 종일 섹스만 했음. 정확히는 부엌에서의 거사로 의식이 혼미한 날 마차에 태운 S가 또 발정이 나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날 다시 한 번 덮치고. 이런 걸 반복함.


가면서 이 일의 전말을 들었는데. 용기사 지원서에 사인한 지원자들은 자동적으로 추적 마법이 붙는다더라. 임무 중 행방불명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부과하는 마법이고, 이 부분은 계약서에도 적혀 있다고 함. 그래 안 읽은 내가 병신이지.


S는 이 추적 마법으로 드래고니아에서 탈영한 날 바로 잡으려 했는데, S의 마마인 C가 차라리 목적지에 먼저 가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게 몰아넣자며 S를 설득함. 결국 날 계속 따라가면서 내 목적지를 파악하고, 용기사단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S의 비행속도로 먼저 도착한 거임.


이미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걸 깨달아 절망했지만 결국 체념하고 드래고니아의 용기사가 됐다.


탈영으로 군법 재판을 받게 되고 여왕인 데오노라까지 대면하는 일이 되긴 했지만, 사기를 당했다는 점.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다는 점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며 가벼운 자원 봉사 처분을 받음.


예상했던 대로 용기사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훈련은 빡세지만 급여도 셌고, 여전히 마물들의 사고방식이나 광기마저 느껴지는 성욕은 꺼려지지만, 드래고니아 자체는 꽤 마음에 들었다.


밥도 맛있고 온천도 있고. 기룡의 등에 타는 것도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익숙해지면 기분이 좋아지더라. 요즘은 훈련 끝내고 명월에서 보드카나 한 병 따는 게 낙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날 속인 건 여전히 용서가 안 되더라. 반년 후 신청 가능한 제대 신청은 아직 체념하지 않았고. 주변에도 공공연하게 제대할 거라고 떠벌리고 있음.


S도 S 나름대로 날 어떻게든 붙들어 매려고 갖은 노력을 쏟고 있고 간혹 혹할 때도 있지만.


기필코 제대할 테다.


....할 수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