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아님) 드래고니아의 만년 훈련생, 폐급 용기사 1 -







드래고니아 용기사단의 연병장.

눈앞엔 배덕감을 풍기는 원숙한 미인이 긴 은발을 찰랑거리며 서 있다.

풍겨오는 덧없는 분위기는 손을 데는 게 죄악처럼 느껴진다. 뭐 실제로 손을 데면 안 되지만. 왜냐하면.


“미안 내 마마야….”


옆에 선 실티아가 심히 미안한 어투로 사과했다. 이제야 꿈이란 걸 알았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내가 용기사란 직업과 은근히 척을 지게 된 계기였으니까.


고맙다 꿈속의 실티아. 다시 한 번 잊고 싶은 기억을 끄집어 내 주는 구나. 하여간 현실이나 꿈이나 똑같이 밉상이네.


눈을 떠 보니 이제는 정까지 들기 시작한 기사단 숙소였다. 옆에는 실티아가 알몸으로 날 끌어안고 자고 있다. 2주 만에 온 발정기 탓에 이성을 잃고 덮치러 온 실티아에 의해 반항할 새도 없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짜였다.


마력이 어쩌고 하는 현상 때문에 그렇게 피로가 남은 건 아니지만 역시 꺼림칙하다. 박으면 박아댈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다. 용기사를 관둘 수 없게 될 것 같다고 할까.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티아는 만족한 얼굴로 새근새근 자고 있다. 참 세상 편한 와이번이다. 목이 칼칼해 침대에서 나오려 했으나 실티아의 끌어안는 힘이 너무 강해 당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짝짝

가볍게 실티아의 뺨을 쳤다. 우웅 우웅 모기 우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리기만 하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아오… 좀! 일어나라고!”


하도 부아가 치밀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기사단 숙소 벽이 두껍다지만 이 정도면 옆방에도 들렸을지도. 자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으응….”


마침내 실티아가 눈을 떴다.


“일어났냐? 네 팔이 하도 무거워서 악몽 꿨잖아.”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실티아는 날 잠이 덜 깬 멍한 얼굴로 날 한 번 보더니 바보같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히히.”

“그만 웃고 손이나 치워. 침대에서 못 나가잖아.”

“싫어.”


짧게 거절하곤 날 끌어안은 둔탁한 팔에 더 힘을 실었다. 폐에 공기가 빠지는 느낌과 함께 또 다시 임사체험을 할지 모른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난 곧장 실티아의 등을 두드려 그만하라는 의도를 담아 탭을 쳤다.


“응? 좀 더 세게 안아달라고? 하여간… 응석꾸러기라니까.”

“아오…! 이 도마뱀 흐읍! 대가리가!”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욕을 내뱉었다. 실티아는 들은 채 만 채 내 얼굴을 자기 가슴골에 파묻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내 호흡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행복해~ 섹스 후 아침이란 거 줄곧 꿈꿔 왔어.”

“넌 하고 난 다음날엔 맨날 그 말 하더라.”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가까스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후유증으로 뼈마디 마디가 아려왔다.


“저기… 오늘 밤도 어때?”

“아 꺼져.”


진짜 정도껏이란 걸 모르는 도마뱀이다.

토라진 실티아를 무시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냉장고란 음식이나 식재료를 차갑게 보관하는 편리한 물건이다. 원리는 마법. 마법이란 참 편리한 단어다.


“근데 무슨 악몽 꾼 거야?”


실티아가 팔다리로 이불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실티아를 깨우려고 비난조로 대충 말해 본 건데 듣고 있었나 보다.


“니 ‘마마’ 나온 꿈.”

“마마? 이상한 짓 한 건 아니지?”

“이상한 짓이 뭔데….”


사람을 유부녀나 노리는 몹쓸 놈으로 만드네. 내 취향의 무르익은 미녀지만, 유부녀는 안 건드린다고.


“그냥 용기사단 입단 했을 때 일 말이야. 그게 꿈에 나왔을 뿐이야.”

“아….”


실티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죄스런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딱히 죄책감을 부추기려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저 물어보기에 답했을 뿐. 단장도 그렇고 실티아도 그렇고 죄책감 같은 걸 두고두고 쌓아두는 타입인가 보다. 그러다가 병날라.


완전히 잊으면 그건 그것대로 화나지만 너무 지나친 것도 피곤하다.

진짜 왜 아침 댓바람부터 갑자기 분위기 초상집임.


“조울증이라도 있냐?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나만 해라.”


만화경 같은 도마뱀이다.


“용기사 된 것도 이젠 별로 신경 안 써. 급여도 나쁘지 않고. 1년 정도 단기로 일하기엔 나쁘진 않더라.”


진짜 생각해 보니까 나쁘진 않네. 페이도 세, 숙소랑 식사도 줘. 술집도 많아, 온천도 있고….

아니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군대는 아니지. 암 군대는 아니야…. 거기다 드래고니아 쓸데없이 높고.


“진짜?”

“진짜. 그러니까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바보같이 배시시 웃는 실티아. 이 녀석도 성격이 많이 둥글어졌다. 처음 드래고니아의 가이드로 만났을 때만 해도 좀 더, ‘흥흥’ 거리고 말도 거칠게 내뱉는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더 살갑고 솔직해졌다고 할까.

단장에게 들은 바론 인간에 익숙해진 용들은 태도가 더 온화해진다던데 실티아가 그런 경우인가 보다.


“근데 마마 하니까 생각난 건데.”

“허?”

“가게 쉬는 날에 비고 데리고 놀러오라고 마마가 그랬거든.”

“오늘 주말이잖아. 러브 라이드 월요일에 쉬지 않나?”


러브 라이드, 실티아의 부모가 경영하는 레스토랑 체인점의 이름이다. 커플 전용 메뉴가 많아 혼자 가면 눈치 보이는 가게다. 은퇴한 전 용기사단장인 실티아의 마마가 오너라, 인맥을 이용한 경영으로 결국 드래고니아 내에서도 손꼽히는 지접 수를 자랑하는 가게로 성장했다.


용기사단 본부 근방엔 구름 위 지구라는 용들의 거주지역이 있는데 그곳에 실티아의 부모가 경영하는 본점이 있다.


“가게는 정상영업 부모님만 매달 두 번째 주 일요일엔 쉬어. 마마랑 파파가 데이트하는 날이니까. 가게는 그 날만 수 셰프에게 맡기고.”

“허.”


금술도 참 좋으시네.

솔직히 가기 싫다. 실비아 씨, 그러니까 실티아의 마마는 몰라도 파파인 겜지 씨에겐 내가 좀… 아니 많이 평가가 안 좋다.


“그냥 데이트하게 놔둬. 기껏 얻은 휴일인데 데이트 방해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고.”

“…흐응.”


지긋이 쳐다보는 실티아. 뭐라도 묻었나?


“왜?”

“혹시 가기 싫어?”

“왜 그리 생각하는데?”

“그야 비고가 남의 사정 같은 걸 생각할 리가 없잖아.”


날 대체 뭘로 보고… 아니 가기 싫으니까 적당히 둘러댄 건 맞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실티아는 품고 있던 이불을 풀고 침대에서 나섰다.


“나도 물.”

“네가 가져가.”


물병을 던지자 가볍게 낚아채고는 그대로 털어 마셨다. 입가를 쓱 닦은 실티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점심은 파파한테서 먹자.”




가기 싫다는 내 의사를 귓등으로 흘렸는지 무대포로 부모에게 연락해서 기어코 약속을 잡아버렸다. 결국 실티아와 함께 러브 라이드를 향해 가게 되었다.


“으아아아….”


와이번으로 변한 실티아의 등에서 내린 난 지면과 극적인 해후를 맞았다. 반년 동안 비행엔 나름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괴로운 건 괴로운 법이다.

안 그래도 빠른 비행속도를 자랑하는 와이번인데, 실티아는 용기사단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속도를 가졌다. 자기 딴에는 적당히 조절했다는 속도도 내가 느끼기엔 터무니없는 속도다.


“어머, 빨리 왔네.”

“마마!”


오늘 꿈에 나온 긴 은발의 와이번이 반갑게 맞이했다. 실티아의 마마, 실비아 씨다. 실티아는 어느새 인간형으로 변해 실비아 씨에게 달려가 끌어안았다.


“비고도 어서 와.”


달라붙는 실티아를 쓰다듬으며 날 반기는 실비아 씨.


“간만이네요. 실비아 씨.”

“어휴 장모님이라고 부르래도.”

“싫습니다.”


실비아 씨는 날 딸의 남자친구, 혹은 사윗감으로 보고 있는지 날 퍽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을 장모님이라 부르도록 날 종용했지만 난 사귈 생각도 결혼할 생각도 없었기에 줄곧 거절했다.


“파파는?”

“요리 중, 실티아가 온다고 연락받았을 때부터 계속 주방에 박혀 있어.”

“이거야 원, 뭔가 죄송하네요. 모처럼의 휴일에 까지 일하게 해 버리고.”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사과했다.


“괜찮아. 어차피 점심은 남편이 전부 해주는데다가, 자식이 온다는데 이 정도도 안 해줄 부모가 어디 있겠어. 거기다 사위도 함께 오는데”

“그러니까 그런 관계 아니라고요.”

“후후.”


적당히 대화가 오가며 걷기를 수 분, 러브 라이드 본점에 도착했다. 일요일 점심이라 가게 안은 미어터졌다.


“여긴 언제 봐도 만석이네.”

“흐흥~ 무려 ‘본점’이니까.”


실티아가 가슴을 피며 의기양양해 했다. 가게 안은 직장 동료인 용기사들부터 타지에서 온 관광객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습은 달라도 전부 커플이었다.


“아! 오너 오셨어요!”


주방에서 실비아 씨를 발견한 어린 와이번 종업원이 달려왔다.


“요리는 끝났니?”

“네, 지금 테이블로 가져가는 중이에요. 오랜만이야 실티아 언니!”

“오랜만!”


아는 사이인지 실티아는 종업원과 손을 마주잡고 재잘재잘 웃음꽃을 피웠다.


“자자, 그만 떠들고 일에 집중하렴.”

“아, 네 오너! 그럼 언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실비아 씨의 제지에 종업원은 떠드는 걸 멈추고 손님 사이로 사라졌다. 우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러브 라이드에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별채가 하나 우뚝 자리 잡고 있다. 주방에서 뒷문을 열고 나가면 보이는 곳인데, 이곳이 실비아 씨와 겜지 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왜 집이 본채가 아닌가 하면, 건설할 때 러브 라이드를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집을 지었기에 순서상 가게 쪽이 본채다.


”실티아!“

”파파~“


셰프복 특유의 하얀 옷에 젖은 손을 닦고 있던 겜지 씨가 실티아를 보자 반갑게 팔을 벌렸다. 실티아가 오랜만에 주인 만난 개처럼 달려 나가 겜지 씨를 꽉 안았다.


”가게는 어때?“


겜지 씨과 실비아 씨에게 물었다.


”잘하고 있어.“

”다행이네. 그리고….“


겜지 씨의 시선이 날 향했다.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비고, 간만이군. 잘 지냈나?“

말투가 엄청… 딱딱해졌다.


”저야 뭐, 잘 지내죠. 겜지 씨도 별 탈 없으시죠?“


서로 인사치례를 나눴다.

상쾌한 분위기의 미남, 멋들어지게 정돈한 갈색 수염과 짧은 머리, 제법 체력을 쓰는 직업인 요리사답게 몸도 좋다. 마물인 실비와 씨와 결혼했기에 인큐버스가 된지 오래라 나와 나이 차도 없어 보인다.

거기다 드래고니아에선 손꼽히는 체인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라…. 나완 정 반대다. 인생에 승패가 확실하다면 저 사람은 틀림없이 승리조겠지.


”들어와. 요리가 방금 끝났으니까.“


집 안으로 우릴 이끄는 겜지 씨.

저런 사람 곁에 있으면 괴롭다. 내가 너무 초라해지니까.

난 시기 질투를 품을 정도로 주제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기계발이나 개발을 위한 자극으로 삼기엔 향상심도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어째 오늘 점심은 길게 느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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