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식 경기관총은 일본군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사용하던 경기관총이다. 이게 망작이 된 이유는 1차 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차대전 직전 강대국들이 너나할것 없이 기관총을 만들어 내자, 일본도 기관총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프랑스제 M1897 호치키스 기관총을 카피해 38식 기관총을 만들었고, 이를 다시 개조해 3년식 기관총을 만들었다. 3년식 기관총은 태평양전쟁 종료시까지도 사용된 나름 좋은 기관총이었다.



[3년식 기관총을 사격하는 일본군 병사]

3년식은 일반적인 탄창 대신, 30연발 보탄판(클립)을 사용하는 구조이다. 아래 사진과 같이 탄 30발이 묶여 있는 보탄판을 총에 넣고 쏘는 것이다.


[프랑스 M1914 호치키스 기관총의 클립(보탄판)]

다만 이 경우, 탄창과는 달리 탄이 외부에 노출되어 오염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3년식의 설계자 난부 키치로(난부권총을 만든 그 난부)는 탄이 총에 잘 들어가게 하기 위한 기름통을 달았다. 이렇게 일본군은 중기관총을 완성했는데, 문제가 터진다.



[루이스 경기관총]
보병이 들고 다닐수 있는 기관총, 즉 경기관총이 개발된 것이다. 일본도 이에 질세라 경기관총 개발에 나서는데 경기관총은 일본이 설계를 해본적이 없다보니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이에 난부 키치로는 3년식을 경량화한다는 보수적인 관점으로 설계에 들어간다. 이때가 1915년이었다.

3년식 기관총이 꽤 잘 뽑혀나왔기에, 난부의 설계대로라면 꽤 괜찮은 총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보탄판이 달린 3년식은 기본적으로 오염에 취약했고, 이에 난부는 보탄판 대신 탄창을 쓰려고 했다.
근데 일본은 당시 돈이 없었다. 일본 군부는 돈이 없다며 탄창을 쓰지 말라고 했고, 대신에 삽탄자(클립)을 사용하라고 했다. 
결국 난부는 38식 소총의 클립을 그대로 활용하는 구조로 총기를 설계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소총수와 기관총 사수의 보급을 통일해서 돈을 줄일 수 있단 장점이 있긴 했다.

[38식 소총의 6.5mmX55 탄 5연발 클립]

1922년, 일본 연호로는 다이쇼 11년에 11년식 경기관총은 완성된다. 

우측 상부에 있는 저 통에는 5연발 클립 6개가 들어간다. 그리고 맨 위엔 오염을 막기 위한 덮개가 달려 있었다. 총을 쏘면 맨 아래 클립부터 탄이뽑혀 나오고, 다 쓴 클립은 배출되며 그 다음 클립이 내려와 탄이 공급되는 구조였다. 이 구조 자체는 아주 나쁜 건 아니었는데, 문제는 일본이 저 구조를 제대로 구현할 기술이 없다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6.5mm 탄이 11년식에 들어가면 탄이 찢어진단 거였다. 결국 11년식 기관총용으로 탄의 화약을 조금 뺀 감장탄을 따로 보급해 줘야 했고 보급소요는 더 늘어난 꼴이 됬다. 

중일전쟁 때 11년식은 온갖 문제가 다 터져나온다. 설계 미스로 총을 쏘다보면 총이 왼쪽으로 기운다거나.... 안전장치를 걸고 총에 충격을 주면 총이 터진다거나....총이 안나간다거나........
급탄 기구가 복잡하다 보니 주변 환경이 꽤 중요해졌는데, 중국은 황사의 나라다. 이 흙먼지가 11년식의 기름통에 달라붙어 탄에 기름이 아닌 모래를 칠해주는 격이 되어 버렸다. 이걸 막기 위해서 총과 탄약에 기름을 더더욱 떡칠을 해봤지만 그래도 총이 안나갔다 .결구 일본군은 중국이 쓰던 체코제 Vz.26 기관총을 사용하려 했다. 근데, 이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일본 군법에 따르면 노획무기 사용은 처형감이었다. 일왕이 하사한 무기를 버리고 적의 무기를 쓴단 건 일왕의 무기, 곧 일왕을 욕하는 꼴이기 때문이라나

결국 일본군은 1936년, Vz.26을 카피해서 96식 경기관총을 내놓는다. 이때부턴 탄창이 달려 있었다. 드디어 일본군 기관총 사수들은 목숨을 걸고 무고장 기관총 Vz.26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한마디로, 11년식은 돈을 아껴야 할 상황에서 엉뚱한 곳에서 돈을 빼다 보니 생긴 참사라고 할 수 있겠다.